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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Reynolds, John Bolling(1894-1970, SP) / Reynolds, Constance M. Couper
 작성자 : 김윤정  2017-06-27 13:44:51   조회: 1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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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기본사항

1. 이름: Reynolds, John Bolling / 레이놀즈 / 한국명: 보린(保璘)
2. 생몰연도: 1894.8.20.-1970.3.20.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18.-1930. (12년)
5. 연표
1894.8.20. 대한민국 서울 출생
1912 – 1915 햄프턴 시드니 대학(미국 버지니아) 학사 (classical scientific)
1918. 군산(영명학교) 수학 선생
1920. 미국 남장로회 교육 선교사 임명
1922.3. Constance Maywell Couper와 결혼
1922.6. 콜롬비아 대학교 석사(M.A.)
1922.9. – 1925.3. 순천(매산 남학교) 책임, 공동책임, 책방책임, 3대 교장
1925.7. – 1927.6. 광주(숭일학교) 제 10대 교장 역임
1927. 전주(신흥학교) 공업과 주임 및 교장 역임
1927. – 1930. 전주 성경학원 영어교사 활동
1930.6. 미국 귀국
귀국 후 뉴욕시립대 교수 (수학과)로 제직
1956. 뉴욕시립대 교수 은퇴
1970.3.20. 미국 테네시 네쉬빌에서 천국 소천 (향년 75세)
1970. 대한민국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묻힘

6. 가족사항
부인 : Mrs. J. B. Reynolds (nee Constance M. Couper)
1897년 8월 12일 생, 1917-1918 메리 발드윈(Mary Baldwin) 대학 학사,
Biblical Seminary. N.Y.City, 1922년 결혼,
아버지 : William Davis Reynolds
어머니 : Patsy Bolling Reynolds
자녀 : 없음


II. 선교사 소개: 존 볼링 선교사 부부 / John Bolling Reynolds (1894-1970)

1. 한국 선교의 거물 이눌서(William Davis Reynolds)의 아들로 살아가기
존 볼링(John Bolling Reynolds, 이하 이보린)은 1894년 8월 20일 조선 땅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남장로교에서 첫 번째로 파송한 이눌서(Wiliam Davis Reynolds)선교사이다. 조선 땅에서 나고 자라면서 외국인으로서 겪은 이보린의 삶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 이눌서는 어떤 사람인가. 한국 선교에서 너무도 귀한 사역을 한 인물임에 틀림 없다, 내한 직후 한국 선교부 초대회장을 역임하였고, 이듬해에는 남북 장로교 선교부가 만든 장로교공의회 초대의장이 되어 초기 장로교 선교의 구심점 역할을 맡았다. 또한 그는 언어에 있어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서 한국에 온지 6개월 말에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이에 구약 성경번역을 1910년에 완성한 자 아닌가.
이보린은 아버지가 평양에서 조직신학 교수직(1912-37)을 맡아서 가르쳤기에 이사도 많이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고 가는 남장로교의 선교사들 안내로 인해 이보린의 집은 북적거렸고, 자연스레 20세기 초 한국의 선교 상황을 그 누구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자다. 그런데 교육다운 교육을 받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그의 어머니는 집에서 아침마다 아이들을 가르쳤고, 심지어 피아노와 같은 악기도 직접 가르쳤던 것이다. 나중에 이눌서가 교수로 봉직할 시점에 평양에 외국인 학교가 생겼고, 아마도 이보린을 포함한 이눌서의 자녀들은 거기에서 학교를 다닌 것으로 추측 해볼 수 있다.
이보린의 아버지인 이눌서는 한국에서 4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첫 째인 윌리엄은 낳자마자 10일 만에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둘 째 이보린은 1894년 서울에서, 셋 째 딸 케리는 1899년 전주 생으로, 막내 엘라가 1902년 서울에서 태어나게 된다.
이보린은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한국에서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대학은 아버지가 나온 버지니아에 위치한 햄든 시드니 대학(Hampten Syndey College)을 나오게 된다. 존경하는 아버지가 나온 학교를 그도 따라서 다닌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버지 이눌서는 햄프턴 시드니에서 4개 언어(라틴, 그리스, 프랑스, 독일어)와 문학 학위를 동시에 딴 입지 전적의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스포츠에서도 만능으로 통했던 자다. 그런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같은 대학에서 classical scientific을 전공한 것으로 봤을 적에, 오히려 아버지의 위대함이 그에게 있어서는 ‘작은’ 이보린을 만들었고, 그것이 아버지의 그늘을 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처럼 이보린은 너무도 뛰어난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면서 주눅들 수밖에 없었지만, 어머니의 바른 교육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바르게 성장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에게 수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의 현장에서 벌어난 일들을 알리러 왔기에 이보린은 자연스럽게 시대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범위적으로 목격한 증인이자, 그로 인해 큰 도전을 받았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2. 교육 선교사의 길과 삼일 운동 그리고 결혼
이보린은 대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주일학교 교사 역할과 군산 영명학교에서 보조 교사로 수학을 가르치게 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사실적 내용은 1918년 인돈과 함께 기숙생활을 한 기록이 나와 있다. 이보린은 “인돈과 나는 1년 동안 군산의 영명학교에서, 그는 교장으로, 나는 보잘 것 없는 수학 선생으로 일했다. 인돈과 나는 매주 사냥을 나갔다. 가벼운 16구경 엽총을 잘 쏘는 인돈은 나의 훌륭한 동반자였다.”라고 적었다.
당시 사냥을 즐겨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버지 이눌서처럼 여러 레저활동도 즐겨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일 년간의 군산 영명학교에서의 가르침을 마치게 되었는데, 그 사유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가 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반일 시위가 확산되었던 것이다.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朴淵世)ㆍ이두열(李斗悅)ㆍ송정헌(宋正憲)ㆍ고석주(高錫柱)ㆍ김수영(金洙榮) 등과 학생일동이 호남지방에서는 최초로 3ㆍ1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이 일로 인해 영명학교는 특별과(8회)와 고등과(6회)가 폐지되고 이후에는 보통과만 운영되었다. 게다가 나중에 이 학교는 1940년 10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호남지방 예수교 장로회 소속 학교들과 함께 폐교되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압박은 표면적으로는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정책을 바꿨다고는 하나 교육부분에 있어서 통제는 더 강해졌을 수밖에 없다. 이보린은 아마도 이 즈음에 미국으로 건너가 콜롬비아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게 된다. 그리고 1922년 3월에 그의 인생의 반려자인 Constance M. Couper(이하 레이놀즈 여사)와 결혼을 하고, 그 해 6월에는 콜롬비아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는 진정한 교육선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아내도 이보린을 도와서 선교사적 사명을 품고 미국 남장로교 공식 선교사로서 역할을 부여받아 한국에서 전도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3. 본격적인 교육 선교사의 삶
약간은 그의 연표와는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종합해 보면 그는 1920년에 미국 남장로교에서 공식 파송한 교육선교사가 되었다. 그런 사이에 대학원 공부를 하기 위해 도미 한 뒤에 결혼 후에 다시 선교지인 한국으로 복귀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순천에 위치한 매산 남학교에서 책임, 공동책임, 책방책임 및 3대 교장을 역임할 정도로 그 위치를 다져갔다. 1922년 9월에서 1925년 3월까지 보낸 매산 남학교에서의 삶은 어떠 했을까? 이 때는 게다가 1919년 3.1 운동 이후의 대한민국 아닌가. 선교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이 태어난 한국 땅에서 그것도 한 손에는 복음을, 한 속에는 스스로 노동을 통하여 벌어먹을 수 있는 실천적 지식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기에 개인적으로 감개무량함이 있었을 것이다.
무사히 첫 번째 교장직을 매산 남학교에서 보낸 뒤에 이보린은 광주 숭일학교에서 1925년 7월에서 1927년 6월까지 제 10대 교장직을 맡게 된다.
그 후로 이보린은 전주 신흥학교에서 공업과 주임을 맡아서 공업과 학생 25명을 모집하여 목공을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학생들이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왜냐 하면,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 중도해 학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신흥학교는 1927년에 공업과를 신설하고 이 해 4월 공업과 학생 25명을 모집하여 목공을 가르쳤다. 또한 같은 자리에 철공소도 함께 있었다 하니 공업과는 목공과 철공을 아울러 가르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인문학교의 성격을 띤 신흥학교가 교내에서 별도로 실업교육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업과에 입학한 학생과는 별도로 재학생이 이곳에 가서 방과 후에 일하는 경우는 역시 수공생이라 불렀고, 그들이 여기서 번 돈으로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전북 노회에서는 공과실 확장을 위한 기금 마련에 대한 요청을 매번 하였지만 실제로 1931년 6월 2일 제 25회 노회까지 거의 4년 반이 되는 기간 동안 모아진 돈은 겨우 475원 70전으로 공과실 건축의 꿈은 사라지고, 1931년에 들어서서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선교학교의 경비가 축소되게 되자 신흥학교도 부득이 공업과를 폐지하고 말았다. 
따라서 이보린의 연표에서 보여지듯 그는 1930년에 급하게 교육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이 문제로 인해서 많은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인문계보다 실업계 쪽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사회에 이익을 줄 수 있었음에도, 여러 여건들이 허락지 못하여 공업과가 폐지된 것이 그를 미국으로 돌아가게 한 원인이 아닌가 라고 추측해보게 된다.

4. 제 1의 고향 한국에 묻힌 교육 선교사 ‘이보린’
그러나 존 볼링은 결국 그의 삶의 시작도 한국에서 시작하였던 것처럼 그의 인생의 마무리도 한국에서 묻히길 원했다. 그는 1930년에 한국에서 약 12년간의 공식적인 교육 선교사 사역을 마친 뒤에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시립대 교수로 봉직하다가 1956년 은퇴 후 네쉬빌에 살다가 1970년 3월 20일에 소천하게 되었다. 그의 유언대로 한국에 위치한 양화진 선교사 묘에 안장되게 된다. 그의 부인 레이놀즈 여사는 연로하므로 직접 올 수 없어 화장한 재를 소포로 보냈던 것이다. 유해를 소포로 보내왔기에 우체국 검열 과정에서 유해가 ‘화공약품’으로 오해받아 함부로 취급되고, 유골이 흩어지는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외모는 누가 봐도 서양인이었지만, 아버지 이눌서처럼 한국을 너무도 사랑하고, 한국이 그의 제1의 고향이나 다름없던 자다.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보낸 탓도 있겠지만, 그 안에 심겨진 조선 땅을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통해 심겨 주셨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 된다. 그는 안타깝게도 교육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품고 한국 땅에서 사역을 했지만,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 볼 적에 그가 기대하고 꿈 꾼 부분에서는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작은 자의 섬김을 통하여, 오늘날 한국 땅 방방곡곡에 복음이 흘러 넘치게 하셨고,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부분에서 큰 위치를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평안과 위로를 주셨을 줄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으로 그가 죽기 2년 전 1968년에 The Korea Times에 기고한 글을 보면 뛰어난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믿음을 고수하는 것의 어려움이 잘 묘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런 짐을 다 내어 놓고 편히 하나님 편에서 쉬고 있을 그가 그리워진다.
2017-06-27 13:4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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