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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McMurphy, Ada Marietta(1883-1970, SP)
 작성자 : 3학년 7반 김시철  2017-06-28 23:23:14   조회: 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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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기본사항

1. 이름: Ada Marietta McMurphy / 맥머피 / 한국명: 명애다(明愛多) 1883-1970
2. 생몰연도: 1883. 12.26 –1970.1.18.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12.6. - 1958.
5. 연표
머피(Miss Ada Marietta McMurphy, 명애다, 1883-1970
1883년 12월 26일 미국 중부의 아칸소(Arkansas) 주에서 태어남
1891년 ‘7인의 선발대’로부터 미 남장로교의 호남선교가 시작
1912년 6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로 내한
1912년부터 1958년까지 46년간 목포에서 최장기 사역
1912년 가을에 불신자 부모들의 자녀들을 위한 주일학교 사역시작
1919년 ~ 1922년 까지 맥머피는 정명여학교 6대 교장으로 사역
1922년 12월 26일 서서평의 집에서 광주 부인조력회가 창설, 서서평이 첫 회장을 맡아 우리나라 여전도회 사역이 공식화되었다.
1923년 전주에서 조력회가 설립
1924년 목포지역 조력회 발족
1928년 3월 27일 ~ 4월 6일 목포 양동 구보라 기념각에서 목포 지방 부인사경회 개최
192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전국여전도회가 창립되었다.
1941년 일제의 외국 선교사 강제 추방령에 의해 한국을 떠났다.
1947년 다시 내한
1958년 맥 머피는 다시 내한하여 계속 활동하다가 은퇴
1970년 1월 18일 네브라스카 주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어 미주리 주에 안치
6. 가족사항:

Ⅱ. 맥머피의 성장 배경과 선교사로서의 한국 입국

맥머피(Miss Ada Marietta McMurphy, 명애다, 1883-1970) 선교사는 미국 중부의 아칸소(Arkansas) 주에서 1883년 12월 26일에 태어났다. 그녀의 성장배경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그녀는 시카고 대학과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한 교육 인재였다.

그녀는 1912년 6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녀의 나이 만 28세의 독신 여선교사였다. 결혼을 하고 안정된 생활을 시작할 나이에 그녀는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이 멀고 먼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는 켄턴 파커 목사(Rev. J. Kenton Parker) 가족 등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으며, 곧바로 일본을 방문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를 잠시 미루고, 목포에 도착하였다. 그녀는 목포 선교부(Station) 소속 선교사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며, 한동안 니스벳 선교사(Rev. John Samuel Nisbet)의 집에서 함께 머무르게 되었다. 미국 남장로교 월간 선교지인 ‘The Missionary Survey(1912년 10월호)'에서는 목포에 도착한 그녀가 1912년 6월 21일에 본국인 미국으로 보낸 우편엽서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맥머피가 보낸 6월 21일 발 우편엽서는 그녀의 도착지인 한국 목포를 소개한다. 이곳(목포)은 그녀가 배정되기를 원했던 전주 대신 당분간 그녀의 기지이다. 그녀의 통신원들은 이 정보에 주목할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항상 산들바람과 햇빛을 발견하리라 확신하는 니스벳 집의 동거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

위에 소개된 우편엽서의 내용과 같이 그녀는 파송 당시에는 한국의 전주로 배정되기를 원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목포 선교부로 배정 되었고, 그 배정은 ‘당분간’이 아니라 계속 되었다. 그녀는 1912년부터 1958년까지 46년간 목포에서 최장기 사역을 한 선교사가 되었다.

맥머피가 내한할 당시에 목포 선교부는 시작된 지 약 12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순천 선교부는 시작되기 이 전이었다. 선교사 입국 초기에 미국 남장로교는 선교지 분할 정책에 따라 전라지방 선교를 맡게 되었다. 1891년 이른바 ‘7인의 선발대’로부터 미 남장로교의 호남선교가 시작되었으며, 남장로교 선교부는 호남지방 5곳에 선교 거점(Mission Station)을 세우는데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순으로 세웠다. 그 중, 맥머피가 사역한 목포 선교부는 1897년에 유진벨(Eugene Bell, 배유지)에 의해 시작되었다. 벨은 전라도 남부지방 선교 후보지로 나주에 선교부를 개설하려 했으나 주민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이 후 목포 개항을 계기로 목포 선교를 시작하였으며, 후에 오웬(C. C. Owen, 오기원 혹은 오원)과 스트레퍼(F. E. Straeffer)가 합류했다. 목포 선교부의 대표적인 사역으로는 양동교회, 영흥학교, 정명학교, 프렌치병원 설립 등을 들 수 있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맥머피는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녀는 한국어 공부를 어느 정도 한 후에 목포 여학교(목포정명여학교)를 맡기로 되어 있었고, 그 때까지는 니스벳 여사가 여학교 책임을 계속해서 맡게 되었다. 목포 여학교 사역에 관하여는 이후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Ⅲ. 맥머피의 해방 이전 선교사역 (1912년 내한-1941년 강제 추방)

1. 여성 사역
1) 부인 성경반 지도
이 시기에는 여성 사역이 빠른 성장을 보였다. 초기에는 교인들 대부분이 남자였지만, 1927년에 이르러는 60%의 교인이 여자였다. 이것의 일부는 적어도 맥머피를 비롯한 당시 독신 여자 선교사들의 효과적인 사역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맥머피는 농촌지방 부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와 계몽에 주력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사역 초기부터 부인 성경반 사역에 참여하였다. 그녀는 목포 지방에 개설된 달(月) 성경학교의 부인 성경반을 맡아 지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선교사들과 함께 도서순회사역을 하는 맥컬리 선교사(H. Douglas McCallie, 맹현리)를 도와 도서 지역에 부인 성경반을 열고 복음과 성경을 가르치는 일도 하였다. 남장로교 월간 선교지 ‘The Missionary Survey(1913년 4월호)’의 니스벳 목사가 쓴 선교 소식에 이 사역이 소개되어 있다.

목포에서 온 소식 / 니스벳 목사
복음전도 : 맥컬리 선교사는 증기선과 범선으로 도착하는데 3일이 걸리는 몇몇 지점의 섬들을 순회하는 사역을 한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성장을 위해 그의 모든 교회들을 격려하고, 꾸짖고, 지시해왔다. 이 큰 섬 교회들 중 한 곳에서 니스벳 여사, 그래함 양, 그리고 맥머피 양이 86명의 여성들이 등록한 성경 교실을 열었다. 이 열심인 여성들에게 부요한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큰 선물이었다...

당시 도서 지역에 사는 여성들은 지역적 고립으로 인해 복음을 들을 기회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일을 하다 보니 늘 위험이 가까이 도사리고 있었다. 맥머피는 맥컬리와 함께 도서 순회 사역을 하면서 복음 전파뿐만 아니라, 그들이 만난 기류, 파도, 태풍 등에 대해 기록하여 이를 섬에 사는 자매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아래 사진은 니스벳 여사가 1912년 9월에 쓴 선교 편지에 실린 사진으로, 도서 순회 사역을 한 맥컬리를 비롯하여 남장로교 여선교사들과 함께 찍은 것이다. 이 사진을 통해 우리는 맥머피가 목포에 도착한 후 세 달 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맥머피는 다른 여선교사들과 함께 부인 사경회를 개최하여 목포 지방의 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도 열심을 내었다. 1928년 3월 27일부터 4월 6일까지 목포 양동 구보라 기념각에서 열린 목포 지방 부인사경회를 개최하여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에 참여하였다는 기록이 동아일보에 아래와 같이 기재되어 있다.

지난 이십칠일부터 목포 양동 구보라 기념각에서 목포 지방 부인사경회를 교장 명애다 양의 사회로 개최하였는데, 참가한 목포, 무안, 함평, 해남, 강진, 영암, 장흥, 진도, 완도 각 교회에서 청강생 합 이백이십 명이 출석하고, 반은 오반으로 나누어 강사는 명애다, 유서백, 박연세 목사와 그 외 삼인이 열심히 교수하는데, 오는 육일까지 강습한다더라.(동아일보, 1928.4.2.)

2) 부인 조력회 확장
맥머피는 목포지역의 부인 조력회가 확장되고 활성화되는데 힘썼다. 부인 조력회는 오늘날의 한국여전도회이다. 서서평 선교사(Miss Elizabeth Johanna Shepping)는 교회 여성 모임을 조직화하여 지속성을 지닌 여성 모임을 광주에서 처음 시작하였다. 1922년 12월 26일 서서평의 집에서 광주 부인조력회가 창설되고, 서서평이 첫 회장을 맡아 우리나라 여전도회 사역이 공식화되었다. 1923년에는 전주에서 조력회가 설립되었고, 목포지역 조력회는 1924년에 발족하였는데, 회원 180명으로 시작하여 매월 12불 50전의 회비를 모았다고 한다. 서서평 선교사는 각 지역별 부인 조력회 창설을 이끌었고, 192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전국여전도회가 창립되었다.

맥머피는 부인 조력회를 농촌의 개교회에 확장하는 일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시골의 여성들은 오랫동안 보조적인 계급으로 인식되었다. 그러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단체(모임)을 조직하고 운영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성과였다. 부인 조력회는 주로 한 달에 한 번 모였는데 주로 여성들이 교회를 오갈 때에 잘 볼 수 있는 보름에 모였다. 구역들은 매주 집에서 기도회로 모였다. 이 프로그램은 성경공부, 개인 간증과 봉사에 역점을 두었고, 특히 밥하기 전 쌀을 한 숟갈씩을 넣어 둔 작은 성미 주머니를 교회로 가져와서 헌미 궤에 넣도록 하는 훈련은 자신들의 ‘일용할 양식’의 일부를 주님께 바치는 것을 배우는 매우 특별한 훈련이었다.


2. 주일학교 사역
당시 한국의 주일학교는 어린이들만 대상으로 한 모임이라기보다는, 모든 연령대의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만나는 모임이었다. 목포 선교부에서는 이 주일학교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목포 선교부 선교사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12년 가을에 불신자 부모들의 자녀들을 위한 주일학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 주일학교들은 보통 주일 아침 9시부터 10시까지 열렸고, 주일학교가 마칠 때면 참석한 아이들은 교회 안에 있는 주일학교로 초대되어졌다. 이 사역의 목표는 불신자 가정의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 아이들을 통해 부모들까지 교회로 이끌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 학교들 가운데서 새로운 교회가 개척되는 것이었다. 맥머피는 사역 초기부터 다른 선교사들과 팀을 이루어 이러한 주일학교 사역에 동참하였다.

특별히 맥머피가 시작한 다순구미 마을의 주일학교 사역은 매우 번창하였다. 남장로교 월간 선교지 ‘The Missionary Survey(1915년 1월호)’에 실린 라스롭 선교사(Miss Lily O. Lathrop)의 선교 편지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목포에서 온 편지 / 라스롭 양
...우리의 주일학교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좋은 교사들을 많이 잃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사실에도 굴하지 않고, (목포 내) 다순구미(Tasengoomy) 마을에 있는 맥머피 양의 사역은 번창하고 있다. 백 명이 넘는 참석자들과 많은 여성들과 아이들은 교리문답시험 보기를 기다리고 있다...

다순구미 주일학교 사역은 이 후 교회개척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힐 선교사(Rev. P. B. Hill)가 한국 선교에서 얻은 세 가지 교훈에 관하여 쓴 책에서 그러한 내용을 알 수 있다.

과거 몇 년 동안 주일학교 사역은 놀라운 능률로 발전해왔다. 이 방향의 이른 노력은 전주의 포사이드 의사와 랭킨 양에 의해 이루어졌고, 좋은 결실을 낳았다... 오늘 날, 11,884명이 등록된 628개의 주일학교와 한국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는 불신자 부모들의 자녀를 위한 수천 명이 등록된 수백 개의 주일학교가 우리 선교 기지들과 구역 내에 있다. 이 많은 학교들은 맥머피 양이 시작한 목포 근처의 다순구미의 예처럼 교회들로 성장할 것이다.

3. 학교 사역 : 목포정명여학교 교장
맥머피는 목포 선교부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한국어 공부가 끝나면 니스벳 여사를 이어 목포여학교 사역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목포여학교는 1903년 9월 15일에 개교하였는데, 미 남장로교 소속의 스트래퍼 선교사(Miss F. E. Straeffer)가 초대 교장을 맡아 조긍선 교사와 함께 학생 수 명을 데리고 시작하였다. 1대 교장인 스트래퍼를 포함하여, 4대 마틴(Miss J. A. Martin, 마율리), 6대 맥머피, 9대 하퍼(Miss M. Hopper, 조마구례) 등 4명의 역대 교장들이 독신 여선교사로서 이 학교의 책임을 맡았다. 목포여학교는 목포 최초의 근대식 서양교육기관이었는데, 초기 그 출발과 운영은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다가 마율리가 4대 교장을 하면서 보다 진전 있는 학교 운영이 이뤄지기 시작했고, 5대 교장 니스벳 여사(유애나)는 최초 전문 교육선교사로 학교 운영과 교육에 좀 더 전문성을 더해갔다. 1909년에는 미 남장로교의 예산 900달러로 여학교 교사를 신축하였으며, 맥머피가 내한한 1912년 유애나 교장 때에는 해리슨 목사(Rev. Willian B. Harrion, 하위렴)의 주도로 공사가 시작된 105평의 2층 석조건물을 완성하였다(현재 이 건물은 소멸되었다). 여학교는 2년제 중등과정을 신설하였고, 78명의 여학생들이 등록하여 남학교 중등 과정생 25명보다 훨씬 많았다. 목포여학교는 1914년 3월 중등과정 첫 졸업식을 하였으며, 학교 이름을 정명여학교로 개명하고 학제를 개편, 4년제 보통과와 4년제 고등과로 보다 진전 있는 학교 체계를 갖췄다.

맥머피는 정명여학교 6대 교장으로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사역하였다. 안타까운 것은 일부 인터넷 자료에 6대 교장이 맥머피 양(Miss A. Mcmurphy)이 아닌, 맥컬리 양(Miss A. Mccallie)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인데, 심지어 목포정명여자중학교 홈페이지에도 이와 같이 기재되어있다. 맥머피가 재임하던 해에는 전국적으로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는데, 1919년 4월 8일 목포정명여학교의 교직원과 학생 전원이 이 3·1 독립운동 참가를 주도하였다. 또한 그녀는 재임 중 맥컬리 부인(Mrs. MaCallie)의 도움을 얻어 맥컬리 본가의 후원으로 석조 3층 240평짜리 교사를 신축하여 1923년 1월에 준공하였다.

학교 사역에서 흥미로운 점은 방학이면 학교의 여학생들은 기숙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들은 각자의 고향에서 주일학교를 새롭게 조직하고 운영하였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고향의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학교에 다닐 기회가 전혀 없는 젊은 기혼 여성들을 위한 야간 학교를 조직하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어떤 학생들은 자신의 마을에 있는 주일학교뿐만 아니라, 교사가 없는 다른 마을에까지 가서 주일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방학동안 각자의 마을에서 사역한 학생들은 학기가 시작되면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자신들이 한 사역에 대해 맥머피에게 보고하였다. 이렇듯 여학교 사역은 그 곳에서 배운 여학생들을 통해서 선교 사역이 재생산되는 놀라운 역할을 하였다. 미 남장로교에서 발행한 주간 저널 「Presbyterian Standard(1924년 10월 22일자)」에는 미국에 안식년 차 가있던 맥머피가 쓴 이 같은 내용의 기사가 소개되어 있다.

아티클 2. 한국을 위한 젊은이들의 캠페인 / 한국 목포의 맥머피 양
6월에 나는 방학동안 그들의 고향과 마을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을 제안하기 위해 내 숙소로 여학생들 모두를 함께 불렀다. 이 여학생들의 나이는 11살부터 18살까지 이르지만, 대부분은 14살이나 15살이다... 9월이 되었다. 그들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 내게 온 여학생들은 51명이었다... 그들은 믿지 않는 아이들을 위한 27개의 주일학교를 조직하고 운영하였다. 그들은 이 주일학교들에서 매주일 평균 1,278명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들은 학교에 다닐 기회가 전혀 없는 젊은 기혼 여성들을 위한 6개의 야간 학교를 조직하고 가르쳤다. 몇몇 여학생들은 고향에 있는 한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고 다른 마을로 3마일을 걸어서 매주일 오후 또 다른 주일학교를 운영했다. 몇몇은 집집마다 다니며 나이든 여성들에게 읽기를 가르쳤다. 그들은 주일학교에서 그들은 찬양, 교리문답, 성경 구절, 성경 이야기들을 가르쳤다. 야간 스쿨에서는 산수, 지리, 읽기, 쓰기, 그리고 항상 성경을 가르쳤다.... 수백 명의 어린 소녀들이 달콤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배웠다. 그들 수백 명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

맥머피는 목포정명여학교 뿐만 아니라, 목포 최초의 유아 교육기관인 희성유치원을 창설하는 데에도 공을 세웠다고 알려져있다. 희성유치원은 1923년 4월 10일 미국 남장로교 소속 여선교사 마틴(마율리)이 목포시 남교동 76번지 대지 138평 안에 세워진 지상 단층건물인 희성유치원을 매입하여 설립하였다. 후에 이 유치원은 예배 처소로 제공됨으로써 현재 목포 중앙교회의 전신이 되었다. 맥머피는 목포여학교의 4대 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던 마틴을 도와 희성유치원 설립에 힘을 실어주었다.


4. 병원 사역 : 목포 기독교병원인 프렌치병원 간호원장
맥머피는 목포 프렌치병원의 간호 원장 직책도 맡았었다. 그가 사역했던 프렌치 병원은 1914년 화재 사건으로 리딩햄 선교사(Roy Samuel Leadingham, 노삼열)가 병원장으로 근무하던 목포 진료소 전체가 전소되면서 이 후에 신축된 병원이었다. 당시 미 남장로교 선교부는 해외선교부 정책 상, 의료선교를 위해 의사 파송과 의료장비 지원은 하였지만, 병원 건물을 돈 들여 짓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목포 진료소 화재 사건의 소식을 듣고, 미국의 미주리 주 프렌치(Charles W. French)의 유산과 St. Joseph교회의 성도들이 헌금을 모아서 보내줘 병원을 신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916년에 완공된 병원이 바로 ‘프렌치메모리얼병원(French Memorial Hospital)’이다.

맥머피는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에 진료비가 없는 가난한 환자들에 대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으며, 혈액이 모자라는 이들에게 자신이 직접 헌혈하여 도와주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는 봉사적 선교자세에 힘입어 많은 이들이 기독교에 입교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병원에서 사역하던 리딩햄은 11년간 의료 선교하다 1923년 귀국하였고, 남장로교 선교부는 프렌치병원에 1931년까지 의사를 파송하여 진료하고 치료하게 했다. 그러나 그 이후엔 의사 선교사를 보내지 않았으며 한국인 의사들로 병원을 운영했으나, 일제 치하에서 인력과 재정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40년까지 지속되긴 했는데, 일제치하와 해방을 지나면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병원 건물이 소리 소문 없이 소멸되었다. 미 남장로교 호남 선교부의 기독병원들이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크게 기여하며 온전히 전통과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데, 5개 선교부 가운데 유일하게 목포의 기독교 프렌치병원의 명맥만 끊어져 버린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Ⅳ. 맥머피의 해방 후 선교사역 (1947년 재내한-1958년 은퇴)

1. 강제 추방과 재내한
맥머피는 1941년 일제의 외국 선교사 강제 추방령에 의해 한국을 떠났다. 그 후, 6년만인 1947년에 다시 내한 하였다. 선교사들이 떠난 이후 선교 사역은 한국인들에 의해 운영이나 재정 등의 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이어져오거나, 폐쇄되었다. 맥머피는 다시 목포에서 폐쇄되었던 병원과 학교를 재건함은 물론 농촌선교도 재개하였다. 무엇보다 정명여학교의 재건사업에 있어서 하퍼 교장을 성심껏 도와 재건사업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어려움이 왔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래,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7월 25일에는 북한군이 목포에까지 진입하였다. 남장로교 주 선교 구역이었던 호남 지역은 유엔군에 의해 마을들이 철수가 되었다. 대부분의 남장로교 선교사들 또한 이로 인해 부산이나 일본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맥머피 선교사는 일본에 잠시 피신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도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전쟁으로 인해 피난온 한국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였다. 전쟁도, 피난도 복음전파와 진리의 선포를 가로막지 못했다. 다음은 미국 남장로교 주간 저널인 「The Southern Presbyterian Journal(1950년 9월 6일자)」에 실린 한국 교회 소식의 일부로, 맥머피 선교사를 포함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피난민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광주에 있는 플로렌스 루트,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고 선교사가 말함.”
...한국으로 파송된 남장로교 선교사 플로렌스 루트 양은 유엔군에 의해 마을이 철수된 후에 광주에 남았고, 그녀의 소재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고 일본에 있는 한 선교사가 이번 주에 본 저널에 보고했다. 린턴 부부, 미첼 부부, 코딩턴 부부를 포함한 다른 선교사들은 아직 한국 부산에 남아있다. 보고에 따르면 임시 주둔지의 오사카 종합병원과 연결된 이들은 크래인 부부, 부쉬 부부, 린들러 양이다... 지금 일본에는 많은 한국 난민들이 있으며, 다음의 선교사들은 그들 사이에서 사역하고 있다고 보고되었다. 보이어 부부, 탈매지 부부, 카밍 부부, 맥머피 양, 그리어 양, 밀러 양, 크래인 양, 그리고 폰태인 양이다...


2. 맥머피의 은퇴
한국전쟁 종전 후 맥머피는 다시 내한하여 계속 활동하다가 1958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녀는 46년이라는 긴 세월을 독신 여선교사로서 한국에서 사역하였다. 특히 그녀는 목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역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였다. 미 남장로교 세계 선교 위원회는 주간 선교 저널인 ‘The Southern Presbyterian Journal(1958년 2월 12일호)’에서 그녀의 은퇴를 앞두고 아래와 같이 감사와 존경을 표하였다.

세계선교 위원회 회의 : ...각 35년과 45년 동안 존경스럽게 봉사한 호퍼 양과 맥머피 양은 한국에서의 봉사를 철수 중이다. 위원회는 그들이 오랫동안 신실하게 봉사한 것에 깊은 감사를 표현했다.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이 사역을 어떻게 축복하셨는지를 각별히 주목했다. 1958년 1월 1일은 효율적인 호퍼 양의 은퇴 날짜였으며, 맥머피 양은 현재의 안식년 끝에 은퇴할 것이다...

은퇴 이후 그녀는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특별히 알려진 기록은 없으나, 1970년 1월 18일 네브라스카 주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어 미주리 주에 안치되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다.
2017-06-28 23: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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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회사 3권 13장, 23장 서평 / 3학년 5반 / 2016210279 / 김성현   김성현v     2019-11-29   283
1110
  한국교회사 3권 13,23장 서평/ 3학년4반 / 2017210250 / 임언약   임언약     2019-11-28   292
1109
  한국교회사 3권 13장,23장 서평/ 3학년 6반/ 2017210381 이재선   이재선     2019-11-28   280
1108
  한국교회사 3권 13장 23장 서평 / 3학년 6반/ 2017210398 최재환   3학년6반최재환     2019-11-28   301
1107
  한국교회사 3권 13장 23장 서평 2017210313 3학년 5반 이장원   이장원     2019-11-28   277
1106
  한국교회사 3권 서평(13장 23장) / 3학년 4반 / 2017210220 민유준   민유준     2019-11-28   281
1105
  한국교회사 3권 13, 23장 서평 3학년 6반 2017210394 조재흥   조재흥     2019-11-28   280
1104
  한국교회사 3권(13,23장) / 3학년4반 / 2017210208 김민준   총신신대원3학년4반김     2019-11-28   287
1103
  한국교회사 3권(13장,23장)서평/2017210305/3-5유신혜   dbtlsgp     2019-11-28   293
1102
  한국교회사 3권 13장 23장/3학년 4반/2017210210/김성광   김성광     2019-11-28   278
1101
  한국교회사 3권 13 23장 서평 / 3학년 6반 / 2017210372 오한길   2017210372오한길     2019-11-28   290
1100
  한국기독교회사 3권(13,23장) / 2015210286/3학년5반/김우림)   김우림     2019-11-28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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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회사 3권 13장,23장 요약과제/3학년 5반 2017210310 이수호   3학년 5반 이수호     2019-11-28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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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사 3권 13장 23장 / 3학년 5반 / 2017210281 / 김창석   김창석     2019-11-28   279
1097
  한국기독교회사 3권 13, 23장 서평 / 3학년 5반 / 2017210325 / 조경택   조경택     2019-11-28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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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회사 3권 (13, 23장) 3학년 4반 2017210243 이상희입니다.   3-4 이상희     2019-11-28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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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B156 / Muriel Withers / 3학년 6반 / 2017210389 / 정영광   정엉광     2019-11-28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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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사 3권 13장, 23장 서평 / 3학년 6반 / 2017210389 / 정영광   정엉광     2019-11-28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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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사 3권 13,23장 서평 / 3학년 6반 / 2017210346 김우성   김우성     2019-11-28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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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사3권 13장,23장 서평/ 3학년 5반/ 2017210317/ 임영광   임영광     2019-11-28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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