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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McLaren, Charles I.(1882-1957, AP) / McLaren. C. I. (Mrs.)
 작성자 : 이의성  2017-06-30 07:48:13   조회: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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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기본사항

McLaren, C. I. (맥라렌 / 馬最秀, 馬羅連 / 호주 / 호주장로회)
1. 생몰연도: 1882-1957
2. 학력:
3. 경력: 1911.11 호주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
진주선교부에서 커렐과 함께 의료사업
1914 세브란스의전에서 신경학 교수
1917-20 1차대전시 군의관으로 참전
진주에서 3년간 봉사후 서울로 이주
세브란스에서 15년간 신경정신과 담당 강의, 진료활동
1935 이화여전에서 영어 강의
1939 일제의 심한 간섭으로 세브란스 사임
진주에서 데이비스(E.J. Davies)와 의료사업
1941 2차대전 발발하자 일경에 체포, 구속되어 부산 압송
1942 본국으로 송환
1957 호주 멜버른에서 사망
4. 가족사항: McLaren, C. I.(부인;?-1968). + 무남독녀 레이첼(Rachel)
5. 논저
6. 참고문헌: 기독교대백과사전, 기독교문사, 1980, 5권.
The Canadian Missions Year Book.
연세대학교사, 1971.
이화 80년사, 1968.


II. 선교사 소개


맥라렌 McLaren, C. I.

1882-1957.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한국 선교사, 의사, 교육가. 한국명 마최수(馬最秀). 보통 마의사(馬醫師)로 불린다. 1911년 11월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커렐(巨烈)이 개척한 진주 선교부에 머물면서 함께 의료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그의 본래 목적은 서울에 설립된 세브란스 병원이었다. 그러나 커렐이 가정적인 문제로 곤경에 빠져 선교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던 관계로 맥라렌은 서울행을 포기하고 진주에 머물러 커렐 대신 시약소와 선교업무를 관장할 수 밖에 없었다. 1년 중 7천 명 가량의 환자를 돌보아야 하는 막중한 업무였으며 설상가상으로 거의 완공되어 가던 병원 건물이 화재를 입게 되었다.

세계대전의 발발과 태평양 횡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1910-1914년의 몇 해 동안에 8명의 남자와 9명의 여자가 참모진의 증강을 위해 파견되었다. 이들 중에는 교육자인 데이비스(Davies) 양, 순회설교가인 알렉산더(Alexander) 양, 나병원장 맥켄지(J. N. Mackenzie) 목사, 그리고 맥레(F. J. I. Macrae) 목사, 라이트(A. C. Wright) 목사, 컨닝햄(F. W. Cunningham) 목사, 맥라렌(McLaren) 박사 부부가 있었는데, 이들은 한국에서 30년 혹은 그 이상을 보내게 되었다.

이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본국 선교부의 협조를 얻어 1913년에 병원문을 열 수 있었다. 1914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그에게 강의를 맡아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당시 세브란스 의전 교수 중에는 신경학(神經學)을 전공한 이가 없었는데 마침 맥라렌은 그 방면이 전공이었다. 진주병원 사정으로 그는 완전히 서울로 옮기지 못하고 대신 커렐과 교대로 서울로 가서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커렐이 개인 사정으로 1915년 선교사직을 사임하면서 세브란스 강의도 맥라렌이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군의관으로 프랑스에서 출정하였다(1917-20). 세브란스 의전에서는 그가 귀국하는대로 그에게 신경과 및 정신과를 전담시키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선교부 사정으로 귀환한 그를 완전히 세브란스로 보낼 수 없었다. 다시 진주에서 3년간 봉사한 다음 테일러(Taylor)가 후임자로 진주에 오게 되자 그는 서울로 이주할 수 있었다. 그는 15년 동안 세브란스에 머물면서 강의와 진료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주로 신경・정신과를 담당하였다. 그는 한국인 의사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학생들을 성심성의껏 가르치고 해외유학을 주선하였고 간호원 중에서도 유망한 학생은 오스트레일리아 본국까지 유학보냈다.

1916년 맥라렌 박사는 선교위원회에 선교회의 중요한 활동으로 각 지부에 의료실 설치를 고려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 목적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위원회가 열렸다. 또한 이 목적의 추진을 위한 헌금을 모으기 위해 매년 한 주일을 따로 정하고, 그들 국민들의 관심과 기도의 필요를 역설하도록 한국장로회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선교사들의 부인들로 구성된 선교사 부인회(women of the Mission)가 “아동복지 건강센터”(Baby Welfare and Health Centers)를 설립하기로 한 것을 제외하고는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맥라렌 박사의 귀환으로, 그가 가능한 한 빨리 세브란스 연합의과대학에 대한 선교회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통영에서 의료활동을 계획하고 있던 테일러(Taylor) 박사가 진주에 배속되고, 1923년 맥라렌 박사는 세브란스 병원에 전속하기로 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진주 의사들의 휴가동안 맥라렌 박사가 도움을 주기로 합의하였다.

1918년 테일러 박사는 전쟁으로 맥라렌 박사가 부재중인 진주병원의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후 1923년 맥라렌 박사가 서울의 영구적인 요원으로 임명되었을 때 테일러 박사는 진주의 감독자가 되기 위해 불가피하게 통영을 떠나야 했다.

1914년 세브란스 의과대학은 맥라렌이 세브란스에서 매년 3개월 동안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호주장로선교회에 요청하였다. 그들은 교수진에 신경학자가 없었고 맥라렌 박사는 신경학을 전공하였다. 선교회는 맥라렌 박사와 커렐 박사가 세브란스에 가는 것에 동의하였다. 다음 해 커렐 박사는 사임하기로 결정하였고, 맥라렌 박사는 적극적으로 봉사하였다. 그러다가 1915년 연합 의과대학은 신경과와 정신의학과를 설치하기 위해 맥라렌 박사를 전임으로 임명할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였다. 선교회는 진주병원에 적절한 의료요원이 나타날 때까지 이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20년 데이비스 박사가 진주에 임명되고 테일러 박사가 진주병원 감독자가 된 후, 1923년 4월부터 세브란스 연합의과 대학에 전문의로 있던 맥라렌 박사를 그곳의 의료활동에 전념하도록 할 수 있었다.

1935년경부터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영어도 강의하였는데, 당시 학생들과 함께 교정에 은행나무・벚나무 등을 심어 가꾸어 그것이 오늘날 이화대학 교정의 우거진 수목을 이루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장로교 총회나 선교부에 의료선교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이를 실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일제 말기에 들어서면서 총독부의 학교 교육에 대한 간섭이 점차 노골화되었다. 학교 내에서 기독교교육의 자유가 더 이상 보장될 수 없다고 느낀 그는 1939년 세브란스를 사임하였다. 오랜 기간의 격무로 이미 건강을 해친 그였지만 테일러가 1938년 갑자기 별세하여 곤경에 빠진 진주병원을 버려 둘 수 없어 다시 진주로 내려갔다. 댱시 병원장 데이비스(E. J. Davies)와 함께 의료사업을 추진했으나 1941년에 접어들자 일제는 외국인이 병원장을 할 수 없도록 압력은 넣고 외국 선교사들을 강제 추방하기 시작했다.

또 맥라렌 박사는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선발된 두 명의 간호사를 대학원공부를 위해 호주로 보내기로 하였다. 1939년 맥라렌 박사는 대학의 기독교 자유에 대한 당국의 규제가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나 어긋나 따를 수 없다고 여겼고, 세브란스에서 사임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는 건강이 심히 악화되었으나, 진주병원에서의 요청으로 그곳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테일러 박사는 1938년 8월 요코하마에서 갑작스레 사망하였고, 데이비스 박사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감독자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철수될 때까지 진주에 정주하였다.

1940년말 미국 선교사들의 철수에 따라 한국 기독교인들의 일망타진이 있었다.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혹독한 처벌의 위협 하에서 외국 선교사와의 접촉을 단절시키기 위해 한국인에 대한 압력은 증가되어 갔다. 많은 한국인들이 심문을 받고, 체포되고, 심지어 투옥되기까지 하였다. 4월 어느 날, 많은 선교사들은 가택 수색을 당했으며, 그들의 활동에 관해서 심문을 받기 위해 경찰서에 끌려갔다. 태트(Tait) 양이라는 한 여성은 3일동안 지서에 있었다. 한국 곳곳에 남아있던 다른 선교회의 회원들에게도 비슷한 조처가 취해졌다. 그 달 말 본국에서는 모든 독신 여성 봉사자들의 철수를 지시하는 전보가 왔다. 오직 맥라렌 박사, 라이트 목사 부부, 래인 목사만 남았다.

사회봉사활동의 확대, 산업활동과 직업활동의 강조, 아동보건센터운영 등은 당국에 의해 지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1940년 12월 한국의 장로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모임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그것은 모든 서구적인 요소가 일수되고 순수하게 일본화 돼야한다는 것이었다. 선교회는 권위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야 했고, 외국의 경제적인 원조는 이젠 더 이상 받지 않아야 했다. 10월에 영국정부와 미국정부는 자국민들에게 한국을 떠나도록 경고했고, 미국인과 캐나다인들 대부분이 다음달 자국의 지시를 따랐다. 호주 교회로터는 돌아오라는 명은 없었으나, 개개인들로 하여금 각자의 결정에 따르도록 했다. 1940년에는 이례적인 수의 선교사와 참모진들이 휴가를 갔고, 혹은 다른 이유로 호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현장 참모진들은 극소수였다.

1941년 4월 1일, 호주선교회 소속 트루딘거(Trudinger), 알렉산더(Alexander) 양, 태트(Tait) 양, 커어(Kerr) 양, 에드가(Edgar) 양을 포함하여 한국도처에 남아있던 많은 수의 선교사가 체포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 체포 구실은 전세계 기도의 날(World day of Prayer) 프로그램 배분과 관련되었다는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것이었다. 1941년 4월 16일 해외선교위원회와 장로교여자선교회가 모든 여성선교사들을 소환하기 위해 전보를 보냈다. 알렉산더양과 태트양만 불법감금되어 남았다. 그들은 두서너달 후에 이곳을 떠나도록 지시받았다. 12월 전쟁이 선언되었을 때 기간 참모진만 남았다. 즉 진주에는 맥라렌(McLaren) 박사, 통영에는 레인(Lane) 목사 부부, 그리고 부산에는 라이트(Wright) 목사 부부가 남았다. 맥라렌 박사는 진주에서 11주 동안 감옥에 투옥되었고, 그후 래인, 라이트와 함께 부산에 억류되었다. 그들은 1942년 6월에 일본으로 철수되었고, 그 뒤 11월 다른 지역을 경유하여 호주로 돌아갔다.

그해 3월 동료선교사들이 모두 추방된 후에도 그는 혼자 진주에 남아 선교부 사무와 사정이 허락되는 한에서 의료 업무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1941년 말 제 2 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11주 동안 구속되었다가 부산으로 압송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본국에 돌아간 뒤에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다가 1957년 벨버른에서 별세하였다. 그가 한국 의학계에 남긴 업적은 지대한 것이며 이보다 그의 모범적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를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의 말처럼 “진실로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한편 남편보다 1년 일찍 본국으로 귀환한 그의 부인은 1968년에 별세하였다.

맥라렌 선교사는 30세 이후 타인 중심적으로 희생의 삶을 살았다. 동시에 대단한 의료학자로서 엄청난 기량을 발휘했다. 그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끊임없이 계발하는 삶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30여 년의 삶을 살면서 보람이 있고 의미있는 선교가 가능하기나 하였을까? 심지어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호주의 백호주의에 저항하는 기독교적 인류애를 실천하는 신앙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로 인해 일본 감옥에 투옥되었고 결국 호주로 강제 추방되었다. 한국 선교의 역사 가운데 이렇게 장기적으로 한국에 거하면서 한국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선교사는 손에 꼽는다. 맥라렌이 한국에 보여준 모습들은 오늘의 한국 교회를 바라볼 때에 귀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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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강의 감사합니다!
2017-06-30 07:4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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