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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Campbell, Archibald(1890-1977, NP) / Campbell, Helen Ott
 작성자 : 신진혁  2017-07-12 07:42:50   조회: 3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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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Campbell, Archibald (캠벨 / 감부열(甘富悅) / 미국 / NP)

1) 기본사항
성 명: (영문) Campbell, Archibald, (한글) 감부열(甘富悅)
생몰연도: 1890. 9. 28.(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 1977
국 적: 미국
출 생: 필라델피아시
소 속: PCUSA
선 교 지: 강계/대구
내한연도: 1916
이한연도: 1958.8
가족사항
- 1916년 9월 Campbell, Helen Maxwell Ott(부인)와 결혼
- 슬하에 3녀를 두었음.
저서
The Christ of the Korea Heart, 1954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Church in the U.S.A Vol. Ⅱ(공저) 등.


2) 학력
1913.6 워싱턴대학교 졸업(B.A)
1916.6 프린스턴신학교 졸업, 신학사(B.Th) / 10.24 목사 안수
1923 펜실베니아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
1952 비버대학, 휘튼대학에서 각각 신학박사 학위(D.D)

3) 경력 및 선교 사역
1916.12.9.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
1917.2 평북 강계선교부에 배속되어 선교활동
1925 강계 양실중학교 교장에 취임
1938 신사참배 거부로 양실중학교 폐교
1940 강제 귀국
1942-46 미국에서 목회활동
1947.4.4. 재(再)내한, 경북 대구에서 선교활동 재개
1951.9 대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초대교장 취임
1953 대구 신학교 교장직 사면, 일반 선교활동
1954.4.19. 대구 계명기독대학 초대 학장에 취임, 부인도 계명기독대학 교수로 학생 지도
1958.8 안식년으로 귀국
1960 선교사직에서 은퇴
1977 플로리다주에서 전도 활동하다가 소천


II. 요약
미 북장로회 선교사. 한국명 감부열(甘富悅). 1890년 9월 28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시 조지타운에서 출생했다. 1913년 6월 워싱턴주 시애틀에 소재한 워싱턴대학교를 졸업하여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916년 6월에는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9월에는 오트(Helen Maxwell Ott;安惠理)와 결혼하였으며, 10월 24일 북장로회 시애틀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음과 동시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9일 부인과 함께 한국에 도착하였고, 1917년 2월부터 평북 강계선교부에 배속되어 선교활동에 임했다. 1923년에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였고 그 이듬해 6월에는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펜실베니아대학교에서 교육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25년 다시 임지인 강계로 돌아와 선교활동에 매진하는 한편, 특히 강계 소재 양실중학교 교장에 취임, 시무하였다.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다 양실중학교를 폐교하였고 1940년 한국을 떠났다. 1942년부터 1946년까지 미국 펜실베니아주와 뉴저지주의 몇몇 지역에서 목회하다가 1947년 4월 4일 북장로회 선교사의 일원으로 해방된 한국에 재 내한하였다. 이후 경북 대구에 주재하면서 선교활동을 재개했고, 1951년 9월에는 대구에 신설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2년 6월에는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펜실베니아주 젠킨스타운의 비버대학과 일리노이주 휘트시의 휘튼대학에서 각각 신학박사학위(D.D.)를 받았다. 1953년 대구로 돌아와 신학교 교장직을 사면하고 일반선교에 임하다가 1954년 대구에 설립된 계명기독대학(현 계명대학교)의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그 후 1958년 8월, 안식년으로 귀국하였고 1960년에는 정년으로 선교사직에서 은퇴하였다.
캠벨은 은퇴 후에도 미국 플로리다주에 거주하면서 계속 전도활동을 하다가 1977년 별세하였다. 유족으로는 부인과의 사이에 3자매를 두었다. 한편 그는 예술 여러 방면에 깊은 조예가 있었고 특히 미술에 큰 재질을 보여 본국에서는 화가로도 널리 알려졌다. 그의 작품은 유화⦁수채화 등 2천 여점이 있고 작품 중에는 한국인의 삶과 풍물을 표현한 것도 많다.
[주요 저서] The Christ of the Korean Heart, 1954;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Ⅱ(공저) 등.

Campbell, Helen Maxwell Ott (캠벨 / 안혜리 / 미국 / NP)
그의 선교생활에 절대적 조력을 아끼지 않은 부인은 독자적으로도 한국선교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말년에는 남편이 학장으로 있던 계명기독대학의 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Ⅲ. 선교사역 소개
1.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 한국 선교의 시작
그는 1890년 9월 28일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시 조지타운에서 출생하였다. 그 후 워싱턴주 시애틀로 이사를 한 후 성장하다가 1913년 6월, 워싱턴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뉴저지주 프린스턴을 여행하던 중 선교사가 될 것을 꿈으로 가지게 되어서 그 후 프린스턴신학교로 진학하여 공부를 하다가 1916년 6월에 졸업을 하게 된다.

그 해 9월에 헬런 오트와 결혼을 한 후, 한국 선교사의 삶을 선택해 10월 24일 시애틀의 유니버시티장로교회에서 성직서임을 받고, 유니버시티장로교회의 후원을 얻어 1916년 12월 9일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2. 첫 번째 사역 : 평안북도 강계에서
1917년 2월부터 평안북도 강계선교부에 배속되어 당시 26세의 나이로 강계에서 1940년까지 24년간 선교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강계읍 교회의 설립과 역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1923년에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였고 그 이듬해 6월에는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펜실베니아대학교에서 교육학(수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25년 다시 임지인 강계로 돌아와 선교활동에 매진하는 한편, 특히 강계 소재 양실중학교 교장에 취임, 시무하였다. 특별히 그는 교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 사업에 힘썼다.

그러던 1938년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다가 스스로 학교를 폐교(쇄)하게 된다. 그때 당시 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신사참배를 찬성하고, 순응하며 나갈 때, 감부열 선교사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양심과 말씀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3. 강제 귀국,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그렇게 캠벨 선교사는 1940년에 강제로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24년의 시간을 강계에서 보낸 후 원치 않는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강계를 떠나 본국으로 돌아간 그는 1942년부터 1946년까지 미국 펜실베니아주와 뉴저지주의 몇몇 지역에서 목회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해방을 맞게 되고, 1947년에 다시 한국에 내한하여 경상북도 대구에서 전쟁 고아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게 된다.

4. 두 번째 사역 : 경상북도 대구에서
1947년 4월 4일 북장로회 선교사의 일원으로 해방된 한국에 재내한하였다. 이후 경상북도 대구에 주재하면서 전쟁 고아들을 돌보는 등 선교활동을 재개했고, 1951년 9월에는 마포삼열(마펫) 선교사의 주도하에 대구에 신설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2년 6월에는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펜실베니아주 젠킨스타운의 비버대학과 일리노이주 휘트시의 휘튼대학에서 각각 명예 신학박사 학위(D.D.)를 받았다.

1953년 대구로 돌아와 신학교 교장직을 사면하고 일반선교에 임하다가 1954년 대구에 설립된 계명기독대학(현 계명대학교)의 이사 겸 초대 학장에 취임하여 학교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학장으로서 그의 사역에 대해 알려진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부족했던 대학설립 자금을 모금하는 것이다.
1953년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서 계명기독대학 설립을 허락받은 후, 3만 5천 달러는 평양대학(숭실대학교)에서 요구하면 주고, 나머지 비용 9만 달러를 계명기독대학 설립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받았지만, 지원금은 학교 건축에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래서는 그는 주어진 적은 대학 설립자금을 짧은 신발끈에 비유하여, 일명, ‘신발끈 늘이기 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신발끈 늘이기 작전’ :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제안으로 창설된 미 육군 대한지원단의 도움을 받아서 건축을 진행하는 것으로 사실 지원 신청 기한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휘관 맥고우 장군의 도움으로 지원을 받게 된다. 그래서 목재, 시멘트, 유리, 기와 등 6만 달러의 후원을 받아서 1955년 2월 드디어 대명캠퍼스 본관을 착공 공사하게 된다. 이때 건축자재를 제공해 준 맥고우 장군도 참석하여 활기찬 연설을 하기도 하였지만(=본관 건축이 시작됐지만) 여전히 ‘신발끈 늘이기 작전’은 계속해야 하였다. 여전히 학칙 제정, 교복 선정, 본관 강단 의자 제작과 구입, 강의실용 의자 디자인, 도색, 캠퍼스 조성을 위한 나무 심기 등 학교 운영과 관련하여 수 많은 일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학장의 많은 역할을 멋지게 감당하였다.

그런 감부열 선교사의 수고를 기념하여,
감부열관(=캠벨 기념음악관) :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유니버시티장로교회는 감부열 선교사를 한국에 피송하고, 그를 지원한 교회였다. 계명기독대학이 음악관(현 대명동 캠퍼스)을 신축하자 유니버시티장로교회는 2만 5천 달러를 모금해 지원하였다. 이에 후원에 힘써준 감부열 선교사의 아버지였던 조셉 캠벨과 감부열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을 감부열관, 일명 캠벨 기념음악관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현재 감부열관은 지역사회를 위한 평생교육원 건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5. 정년 퇴임 후 귀국하다.
1958년 8월 20일 정년으로 계명대학교 학장직 이임한 후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었다. 그 후 1958년 8월, 안식년으로 귀국하였고 1960년에는 정년으로 선교사직에서 은퇴하였다.
은퇴한 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성 앤두루스 장로교회에서 3년 동안 목사로 봉직. 아프리카 자메이카 임시교회에서 1년 반 동안 봉사. 미국 플로리다 레이크 랜드의 선교사 사택에서 여생을 보내면서도 계속 전도활동을 하다가 1977년에 별세하였다.

6. 한국 군목 제도의 시작 : 감부열 선교사
조사를 하다 발견한 재미있는 자료는 감부열 선교사와 군목제도의 연관성이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복음 선교에 크게 공헌한 일 중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군목제도의 창설이다. 해방 후 미 군사 고문단들의 지도하에 훈련을 받던 병사들에게 장로교회의 차태화 목사와 감부열 선교사를 보내 신앙지도를 하게 한 것이 한국 군목제도의 효시이다. 그 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감부열 선교사가 일본에 갔을 때 미군 사령부 군종 참모로 있던 벤넷(I.H.Bennett) 대령을 만나 한국군의 군목 제도를 역설하였고, 벤넷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고하여 긍정적 답을 받아냈다. 이후 한국교회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여러 교파가 연합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군목제도 설치를 요청하여 재가를 얻어냈다. 1951년 9월 감리교 선교사 쇼(W.E.Show)와 천주교 신부 캐럴(G.Caroll)이 대구에 군목학교를 설치하고 그 다음 해 2월, 제 1회 군목학교 졸업생 39명을 배출하였다. 처음에는 계급도 없이 민간인으로 활동했으나 군부대 안에서 계급 없이 활동하는 것이 너무 제한이 많아 결국 장교로 임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0년대에 전군신자화운동이 일어나 3,000명 이상의 장교, 사병들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는 등 많은 젊은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위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모두, 군목제도가 시행됨으로써 이룩된 업적이라고, 김인수 장신대 교수(역사신학)는 이야기하고 있다.


7. 예술가로서의 캠벨
한편 그는 예술 여러 방면에 깊은 조예가 있었고 특히 미술에 큰 재질을 보여 본국에서는 화가로도 널리 알려졌다. 그의 작품은 유화⦁수채화 등 2천 여점이 있고 작품 중에는 한국인의 삶과 풍물을 표현한 것도 많다. 그의 작품은 본국에서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던 실력있는 화가였다.

8. 감부열이 만난 사람들 : 故 서정환 목사(신사참배 거부자, 前 대구 중앙교회 담임목사)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면 보상동에서 태어난 서정환은 공립보통학교를 19세에 졸업한 후 27세까지 고향에서 대서업자로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직업이 바뀌게 된 것은 감부열 선교 선교사를 만난 후 부터였다. 청년 서정환은 감부열 선교사를 만남으로 장로교 신자가 되었고, 그의 삶이 바뀌게 되었다. 고산진교회의 집사와 영수로 약 3년간 봉사한 후 감부열의 서기가 되었고, 남교회의 장로가 되었을 때 신사참배의 열풍에 감부열 선교사와 함께 휘말리게 된다. 그후 1938년 9월부터 전천교회의 전도사로 봉사하기 시작하면서, 신사참배를 온몸으로 도전하며, 거센 태풍을 막아보려고 하였다. 그는 교인들에게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이며 십게명의 제 1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가르쳤고, 또한 감부열 선교사 집에서 함께 모여 성경연구 모임을 가지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일제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7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고, 1945년 8월 18일 사형 선도를 받게 된다. 하지만, 21명의 성도들과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이하여 생명을 구원 받게 된다. 그 후 다시 감부열 선교사를 만나 교회를 소개받고, 사역을 하다가 1949년 7월 20일 대구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서정환 목사와의 만남에 대한 기록들이 바로, ‘The Christ of the Korean Heart'라는 책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무엇이 서정환이라는 사람의 삶을 바꾸었을까?! 감부열 선교사 안에 자리잡고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복음에 대한 열정이 그의 삶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런 만남을 통해 감부열 선교사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겠다.

9. 그의 삶과 사역에 대하여
사실 그와 그의 아내였던 안혜리 선교사의 삶에 관한 기록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음을 보게 된다.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많은 곳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는 있었지만, 그의 기록들은 그가 교회를 세우고, 관리하고, 질서를 가르치고, 유지하며, 교육과 관련된 많은 부분에서 역할을 감당하였음을 보여주는 정도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제한된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간단하게 그의 이름과 그가 많은 역할 정도만이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적어도 강계와 대구, 그리고 계명대학교 설립과 관련하여 큰 역할을 감당하였던 그였지만, 그의 삶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작업으로 남아있다.

그의 삶과 사역을 정리해보면, 그는 크게 교육 사역에 힘을 썼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그는 특별히 한국교회 선교 초기, 북장로교선교회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가로서 활동하였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북장로교선교회는 1934년과 1964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북장로교 한국선교회의 역사(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를 정리했다. 이 책의 저자는 북장로교의 현장 선교사들이었던 로즈(Harry A. Rhodes; 노해리)와 캠벨(Archibald Campbell; 감부열)이었다.

그런 그의 삶을 생각하면서 들어지는 것은 바로, ‘잊혀지기 위해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많은 젊은 선교사들이 조선을 찾아 왔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조선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체 조선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감부열 선교사와 그의 아내 안혜리 선교사 역시, 많은 흔적들 속에서 감부열 선교사의 이름은 발견할 수 있지만, 그의 삶과 사역의 구체적인 흔적들은 발견하기가 쉽지 않음을 보게 된다.
하지만, 감춰진 기록들과 흔적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이름이 들어나거나 높아지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이 들어나고, 높아지기를 원하면서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성실하게 살아갔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높아지고 싶어한다. 인정 받고 싶어한다. 드러나고 싶어한다. 그것이 사람의 본성일 것이다. 하지만,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세례 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리니”(요한복음 3:30) 라고 고백할 것이다. 교육 선교사로서 이 땅을 덮고 있던 어둠과 무지를 벗겨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모든 조선의 백성들에게 흘러가기를 소망했던 감부열 선교사처럼 말이다.

나는 어떤 삶을 꿈꾸고 있는가?! 한국교회사를 배우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자신은 잊혀지는 삶을 살았던 많은 조용한 선교사들처럼 나도, 그렇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사람, 일꾼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 다르지 않는 같은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2017-07-12 07: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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