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6.23 화 09:15
 
 내한선교사 / Rothweiler, Louisa C.(1853-1921, M)
 작성자 : 김태웅  2018-11-20 08:59:32   조회: 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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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기본사항

1. 이름 : Rothweiler, Louisa C. (로드와일러)
2. 생몰연도 : 1853.03.09. - 1921.
3. 출신 및 소속 : 미국(독일계), 미감리회
4. 한국선교기간 : 1887.10.31. - 1899.
5. 연표
1853.03.09.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출생
미국 오하이오주 브리아의 왈레스대학 졸업
고아원 보모와 공립학교 교사로 재직
1887.10.31. 미감리회 교육선교사로 여의사 메타 하워드와 함께 내한. 이화학당에서 지리, 대수 강의.
1890.05.23. 제2대 학당장으로 취임, 학교 질서확립
1892.06 – 1893 안식년으로 귀국하였다가 내한
존스선교사와 공동으로 찬미가집 편찬.
1892 1집 (27곡)
1892.6.25. 학당장직을 페인(J.Q. Paine)에게 넘기고 전도에 치중
1895 2집 (81곡)
1897 3집 (90곡)
1899 4집 (176곡)
1899 영구 귀국
6. 가족사항
부 : Jacob Rothweiler (1824–1898)
모 : Louise Grau Rothweiler (1825–1921)
형제 : (1) Catherine Rothweiler Frank (1858–1932)
(2) Samuel Rothweiler (1865–1948)


Ⅱ. 선교사 소개: 로드와일러 (Louisa C. Rothweiler, 1853-1921)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 이화학당의 제 2대 학당장, 이렇게 소개하면 사람들은 이것이 그녀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화학당의 학당장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로드와일러 선교사는 그 외에도 한국 선교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비록 13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의 선교 생활을 보냈지만 그녀는 ‘최초’라는 타이틀을 두 개나 가지고 있다. 첫 번째, 그녀는 한국에 온 최초의 전문인 교육 선교사이다. 그녀는 한국 땅을 밟기전 고아원과 공립학교 등에서 가르쳤던 경력이 있었다. 둘째, 그녀는 한국의 최초 찬송가인 찬미가의 공동 편집가이다. 1892년에 발간된 이 찬송가는 가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최초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주로 외국 찬송가의 가사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고 알려져 있다.

1. 한국에 온 최초의 전문인 교육 선교사 로드와일러
로드와일러는 철저하게 준비된 전문인 선교사였다. 그녀는 디트로이트에서 출생한 독일계 미국인으로 독일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오하이오주 베레아에서 왈레스대학을 졸업한 뒤 수 년간 고아원에서 보모, 공립학교 교사 등을 지낸 경험이 있었다.

그녀는 1887년 10월 31일 미감리회 여선교부 신시내티 지부에서 한국의 교육선교사로 선임되어 여의사 하워드와 함께 내한했다. 그녀는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전문인 교육 선교사로 당시 이화학당의 학당장인 스크랜톤 부인을 도와 초기 이화학당의 기초를 세웠다. 그녀는 성경, 초등지리, 대수 등을 가르쳤고 학교행정에 일체에 대한 사무를 관장했다. 그리고 스크랜톤 부인을 이어 1890년 5월 23일 제 2대 학당장으로 취임했다. 취임 후 하워드사의 협조를 얻어 위생 교육을 강화하고 기숙사의 생활 규칙을 제정하는 등 학교의 질서를 확립했다. 1892년 6월부터 1893년 까지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였다가 다시 내한했다. 곧 학당장 직을 페인에게 인계하고 전도에만 치중했다. 그녀는 한국 기독교의 초기 여선교사로 몇몇 동지들과 함께 고난을 함께 겪고 이화 학당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남긴 뒤 1899년에 영구 귀국하였다.

2. 이화학당 2대 학장 로드와일러, “ 우리는 한국을 축복하는 여성들을 만들기 원합니다.”
이화학당의 초대 학당장인 스크랜톤 부인은 한국에 도착해서 여성 교육을 시작하기 전부터 교육선교사와 여자의사 파견을 요청하는데 마침내 1887년 10월 31일 로드와일러 선생과 메타 하워드 의사가 내한했다. 로드와일러는 내한하기 전부터 이미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교육이 필요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기록을 보면 그녀가 한국을 얼마나 치밀하게 파악했는지 알 수 있다. 그녀는 선교지인 한국의 유교문화에 직면했고 그 속에서 여성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파악했다.

“1885 년 5 월 20 일, 여성 선교사 협회의 첫 번째 대표인 M. F. 스크랜톤 여사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대우받았다. 그들이 교육 및 의료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왔다고 발표한 것으로 외적 승인에 의해 충족되었지만 숨겨진 이유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어느 누구라도 바다를 건너고 이상한 사람들에게 갈 수 있는 그 순수한 자선은 이교도 정신에 알려지지 않은 사고였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다. "네, 아주 좋습니다. 우리는 미국인들이 가난한 소년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게 되어 기쁩니다. 소녀를 위한 학교요? 아니,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여자 아이들에게 글자가 가르쳐질 수 없으며, 심지어 글자를 배운다 해도 무슨 소용입니까? 유교는 여자가 옳고 그름의 차이조차도 알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아버지, 형제, 남편, 아들은 그것을 판단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단지 순종해야합니다. 기독교라고요? 예. 우리는 각 나라마다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 조상을 만족시키고 우리에게도 충분히 좋은 우리의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여기서 기독교를 가르치려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녀는 이화학당의 학당장으로 있으면서 "소녀들을 가난과 악습과 무지로 부터 보호하고, 외국인이 아닌 보다 나은 한국인을 만드는데" 교육의 목적이 있다고 했다. 또한 "책 속에 있는 지식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유용한 삶을 살 수 있게 가르치려 애쓰고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서양의 학문을 그대로 들고 와서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인의 눈높이에 맞춰서 가르쳤다.

2-1. 가정적 교육을 강조
그녀가 한국 땅에서 실행했던 교육 과정에는 ‘가정’적인 교육들이 많았다. 어떤 이들은 여성의 인권이 발전된 서양 교육을 퇴보시켜 한국 땅에서 가르친 것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선교사’로 왔다는 사실에 유념해야한다. 그녀의 내한 목적은 서양의 진보된 교육을 한국 여성들에게 가르쳐 신여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 방식이 교육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가정성의 강조는 선교사 교육의 초기 단계에서 한국인의 신뢰를 얻는 전략적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당시 선교사들이 가장 신경 쓴 것은 한국 땅에서 쫓겨나지 않고 정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 사회와 문화에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로드와일러는 한국의 방식을 존중하고 현지 문화와 충돌을 피하려했다. 그녀는 ‘이상적인 여성은 가정적인 영역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문화충돌을 피할 수 있게 한다고 확신했다. 1887년부터 이화여자 학교에서 가르쳐온 로드와일러는 여성 교육의 광대한 가능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동료 선교사들에게 한국 사회에 호소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가정생활에 초점을 맞출 것을 권고했다. 그녀는 한국 소녀들이 다른 환경에 살았고 따라서 그들의 교육은 그들의 지역 환경에 맞춰야한다는 것을 관찰했다. 이를 위해 가정적인 기술의 교육은 종교훈련에 이어 두 번째가 되어야했다.

로드와일러의 교육은 제국주의시대 식민지에서 이루어지던 복종 교육과는 다르다. 그녀는 선교사들이 없을 때에도 자신들이 가르친 여성들이 한국사회에 수용되지길 바랐다. 그녀는 한국에 수용되지 않는 교육 내용은 과감하게 현지화 했고 한국에 수용되는 교육 내용은 최대한 소녀들에게 가르치려 했다. 다음은 그녀가 The 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논설 “What Shall We Teach In Our Girls’ Schools?”이다.
“우리는 토대를 좁고 얕게 두어서 그 위에 더 지을 기회가 없지 않도록, 넓고 깊게 두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들에게 지금까지는 한 가지 목적으로서는 꽤 잘 맞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의 의무, 현재 상태와 현재 삶의 양식에 부적합한 것이라면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여성의 영역과 적절한 직업에 관한 개개인의 의견이 무엇이든 간에, 현재 우리는 적어도 조선 내의 삶이 그녀의 영역이고 운명이라는 가정 아래에서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여자아이들이 하길 원하거나, 되길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첫 번째 부름에 종속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옷을 다듬고 만들고 수선하며, 자기 자신과 그들의 방을 단정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온전한 조선의 방법으로 배워야한다.
여자아이들이 그들의 사람들로부터 젖을 먹지 않고, 아이들이 그들의 환경에 불만족하도록 만들지 않으며, 우리가 그들을 떠났을 때 충족될 수 없는 요구를 만들지 않으면서, 우리가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을 때는 온전한 조선의 방법이 아니어도 된다.“

그녀는 여성들을 서양인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한국 여성들을 더 나은 한국 여성들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 했다. 서양의 것들을 가르칠 수 있다면 가르쳤고 그것이 한국 사회에 맞지 않다면 기꺼이 한국 사회에 맞춰 가르쳤다. 비록 소수 페미니스트들이 로드와일러가 여전히 가부장적 여성관을 한국의 소녀들에게 가르쳤다 비난할지라도, 그녀와 그녀의 뜻을 공유했던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 땅의 여권 향상에 기여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2-2. 여성 학생에게도 외국어 배울 기회를 달라
로드와일러의 교육이 식민주의적 교육이 아니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 소녀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친 것이다. 이화학당에서는 영어교육이 이루어졌고 잠시나마 중국어가 가르쳐진 사실이 있다.

당시는 청년이 중국어 교육을 받지 못하면 전혀 교육을 받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중국어는 소년 학교 학생을 모집하는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몇몇의 선교사들은 여자학교에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불필요한 일로 여겼다. 그러나 로드와일러 같은 이들은 서구의 라틴어와 그리스어 교육과 동등한 것으로 보이는 중국 교육의 가치에 대해 말하곤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화의 스크랜톤과 로드와일러였다. 1888년 스크랜톤 부인은 영어와 성경 과목만 있던 이화 여자 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쳤고 이는 2대 학장인 로스와일러에게 이어졌다. 그녀는 지적 교육의 중요한 부분으로 중국어 교육을 주창했다. 실제로 1892년 로드와일러는 그녀의 학생들 중 몇이 중국어에 대한 실제적인 증진이 있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1893년 이화에서 중국어 교육은 중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여성 선교사를 구하는 것이 어려워 종료되었다.

이화 학당에서 영어 교육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 로드와일러를 포함해 이화학당의 선교사들 모두는 한국의 소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화 여자 학교의 로드와일러는 영어가 기독교 사상을 전할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서구 문명에 노출시킴으로써 학생들의 마음을 닦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로드와일러는 영어의 매체를 통한 다른 사회의 지식이 학생들의 생각과 학습 능력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영어가 동양과 서양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할 것이라 보았다.

2-3. 여자매일학교: 더 많은 소녀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달라
감리교 선교사들은 더 많은 소녀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기 위해 각처의 교회를 중심으로 여학교를 개설했다. 이 학교들은 이화학당이 기숙사제였던 것에 비해 매일 통학하는 학교였기 때문에 매일학교라고 했다. 로드와일러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매일학교를 개설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곧 현실적인 벽에 가로막혔다. 1892년 6월 로드와일러는 "기숙사제 학교에 들어갈 기회가 없는 더 많은 소녀들에게 배움을 기회를 주기 위해 매일 학교를 계획 했으나 여학생을 구하는 문제와 교사확보의 어려움 등으로 아직 실현 시키지 못하고 있다" 고 했다. 그녀를 포함한 많은 선교사들의 노력의 결실이 1895년 10월에 나타났다. 마침내 여자매일학교가 달성에 생겼다.

3. 최초의 찬송가 “찬미가”의 공동 편집가
감리교에서 먼저 최초의 찬송가인 찬미가를 발간(1892)했다. 찬미가가 한국 찬송가 역사상 최초의 출간이라는 점은 두 가지 근거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1895년 존스와 로드와일러에 의해 편찬된 찬미가의 PREFACE에서 “1892년에 출간된 찬미가가 한국 최초의 찬송가”라고 서술하고 있고 당시 선교사로 활동했던 밀러가 기독교 월간지 The Korea Mission Field(1930)에 “Early Korean Hymnology”에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찬송가는 북감리회에서 출간한 찬미가”라고 기술하고 있다. 미감리회 한국 선교사로 인천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던 존스(G.H. Jones)와 이화학당에서 활동했던 로드와일러가 번역 찬송가 27편을 공동으로 편집했다. 이는 미감리교회선교부(The Methodist Episcopal Mission)의 후원과 뉴욕주 로체스터, 아스버리 교회의 소녀한국선교단이 지원한 출판금으로 출간된 것이다. 찬미가는 악보가 없는 가사만의 찬송집이었는데, 감리교 전용 찬송가로 제작되었기에 한국 교회 전체에 보급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 교회 최초의 찬송가라는 의미만으로도 역사적 의의가 있다. 찬미가의 편집 목적은 주로 복음의 주제를 종합적으로 표현하고, 성탄과 부활 등의 절기에 쓰일 노래들을 정리하는 데 있었다. 로드와일러의 한국어 찬송가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드와일러가 귀국(1899)을 하고나서도 1901년 까지 찬미가의 공동편집자로 그 이름이 실려 있다.

3-1. “찬미가”: 한국인의 언어와 가락으로 이루어진 찬송가의 필요성을 역설
찬미가를 발간하면서 로드와일러와 존스는 한국인의 언어와 가락으로 만들어진 찬송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대다수가 번역된 것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말은 한국의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한 한국교회의 현실을 아프게 찌른다. 찬미가는 여섯 차례 개정증보판을 내면서 처음의 부족함을 보완해갔다. 1895년 발간된 찬미가의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번역으로 적절하고도 가납될 만한 찬송가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한 찬송가의 번역을 가지고 줄곧 며칠씩 골치를 앓으며 애쓰고, 겨우 한 줄 정도 해 놓고 불완전에 그친 경험들을 다하고 나서, 우리는 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곧 이 한국 사람들 틈에서 그들 마음 그대로 솟구치는 가락으로 노래할, 그들 자신의 찬송가 작곡, 작사자들이 나와야 하겠다는, 그런 다짐이었다. (Preface, Chan-mi-ka, seoul, Methodist Publishing House, 1895, p.1)”

선교사들은 서양의 찬송가를 한국 교회 찬송가로 사용하기 위하여 번역을 하면서 1895년에 이미 번역 찬송가의 한계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한국인의 신앙고백을 한국적 가락에 따라 부르는 한국 찬송가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1895년 발간된 찬미가에는 한국인의 노래(무명 한국 여인 53장)가 한곡에 불과했다가, 1897년에 2판을 내면서 한국인의 노래가 두 곡(배제학당 학생/제87장 이화학당 여학도/제89장) 추가 되었고, 1900년 개정판에 이화학당 여학도가 지은 ‘성탄일 찬미가’가 추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찬송가인 찬미가는 그 출발선에서부터 우리 가락과 장단으로 이루어진 한국 민족의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찬송가의 필요성을 천명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3-2. “찬미가”, 여성도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를 수 있다. 여성들은 교회의 성가대를 통해 무대에 처음 섰다. 과거 유교적인 전통에서 예악은 높은 가치로 숭상하면서도 여성이 여려 사람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은 비천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화학당 학생들은 1898년 12월 24일 밤 성탄절 전야 예배에서 찬송가를 불렀다. ‘암닭이 울면 집이 망한다’는 속담이 짐작케 하듯 여염짐 여성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은 ‘금기’였다. 여성이 교회 성가대에 서면서 금기는 자연스럽게 깨졌다. 로드와일러가 ‘찬미가’를 만들며 이같은 사회적 변화를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긍정적인 변화의 시작이었다.

3-3. “찬미가”가 장로교의 “찬양가”와는 별개로 만들어져야 했던 이유
마지막으로 장로교의 찬양가와 감리교의 찬미가에 얽힌 이야기를 간략히 소개하고자한다. 감리교는 언더우드가 독자적으로 제작한 찬양가의 사용을 거절하고 1895년에 찬미가를 다시 편찬했다. 감리교가 찬양가의 사용을 거절한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칭호의 문제였다. 한국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하나님’을 마땅한 칭호로 주장하고 있었는데, 언더우드는 찬양가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당시 중국의 개신교나 한국의 가톨릭 및 성공회에서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재래종교의 것이라고 하며 여호와 또는 천주라고 부르는 통상적인 흐름에 찬동하면서 찬양가에서의 호칭을 여호와나 아버지로 표기했던 것이다. 이런 행보에 감리교는 동의할 수 없었다.


“한국인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 “한국인의 가락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로드와일러가 말한 선교, 교육이념은 다른 선교사들과도 공유가 되었고, 한국에 기독교가 뿌리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도 이 말은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향해서 도전한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것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실을 말이다.



Ⅲ.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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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춘병. 『한국 감리교회 외국인 선교사』. 서울: 한국감리교사학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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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연구회. 『The Korea Mission Field, 1909』.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회, 1986.
한영제. 『기독교대백과사전; 4권』. 서울: 기독교문사, 1981.
Hyaeweol Choi. Gender and Mission Encounters in Korea: New Women, Old Ways: Seoul-California Series in Korean Studies. California: Univ of California Press, 2009.
Rothweiler, Louisa C. 1892. “What Shall We Teach In Our Girls’ Schools?” The Korean Repository vol.1 march: 89-93.
나진규. “최초의 한국찬송자집들의 번역자, 작사자들에 대한 연구2.” 「음악과 민족」 51권 (2016년): 123-155.
문옥배. “한국 근대 교회음악 수용사연구.” 예술전문사,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음악원, 2000.
[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한국교회와 근대음악. <국민일보>. 2013.11.13.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7748559 (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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