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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Byram, Roy Mack(1893-1974, NP) / Byram, Bertha Stanley
 작성자 : 2016210285김태웅  2018-11-23 19:12:44   조회: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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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기말보고서 / 042 / Byram.Roy M, Byram.Bertha Stanley

1. 기본사항
Roy Mack Byram (바이램/미국/NP(미국 북장로교회))
1. 생물연도: 1893.3.6.~1974.10.3.(Westminster, Orange County, California, USA)
2. 학력: 텍사스주 휴스턴 의과대학
3. 경력: 1921.9.6. 북 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
강계의 계레지병원에서 15년간 부부가 함께 활동
1936 북 장로교 분열하자 사임, 독립 장로회 선교부에 소속
만주 하얼빈에서 병원 개설, 만주의 한국인에게 의료선교,복음전도
1938 이후 만주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배후에서 지원
1940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본국에 송환
1959 이후 켈리포니아 미드위이시에 거주
1974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사망
4. 가족: Byram, Bertha Stanley(부인)

Dr Bertha Stanely Byram (바이램/미국/NP(미국 북장로교회))
1. 생물연도: 1888.6.14.(Barclay, Osage County, Kansas, USA)
~ 1964.2.2. (Westminster, Orange County, California, USA)
2. 학력: 텍사스주 휴스턴 의과대학
3. 경력: 위와 동일

2. 선교사 소개
- 내한전
로이 바이럼 선교사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출신이다. 부친 O. B. 바이럼(O. B. Byram)과 모친 스텔라 맥(Stella Mack) 사이에 태어난 그는 81세에 로스앤젤레스에서 그의 정열적인 삶의 여정을 마쳤다. 부인 베르다 스텐리(Dr. Bertha Elvira, 혹 Stanley Byram, 1888-Kansas)는 1888년 캔자스(Kansas)에서 G. T. 스텐리(Geo T. Stanley)와 메리트 마일스(Merite Miles)의 딸로 태어났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에 해외선교 학생자원봉사 활동을 통하여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대학 졸업 후 두 사람은 1915년 9월1일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혼인했다. 바이럼의 나이 22세, 스텐리는 바이럼 보다 다섯 해 연상인 27세 때였다. 두 사람은 텍사스 주

휴스톤에 있는 의과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첫 딸 메리트(Merite, 현 Mrs. Ernie Heimbach) 출산과 인턴십을 위해 캘리포니아 버클리로 옮겼다.

- 의료선교의 시작
1921년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 독립위원회(IBPFM, The Independent Board for Presbyterian Foreign Missions) 소속 의료 선교사로서 강계(江界, 현재 북한 자강도 행정구역, 6.25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임시수도)에 파송되었다. 장로교 해외선교 독립위원회는
1937년 정통장로교(OPC, the Othordox Presbyterian Church)에서 분리, 칼 메킨타이어(Carl McIntire, 1906-2002) 등에 의하여 조직된 성경장로교(the Bible Presbyterian Church) 교단이다. 원래는 1933년에 조직된 선교단체로서 20세기 초 중국 산둥성(山東省)과 상하이(上海)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했다. 이 선교 단체의 중국 선교에 디딤돌 역할을 한 선교사 중에는 알버트 볼드윈 도드(Albert Baldwin Dodd, 1877-1972)가 있다. 그는 1903년부터 시작하여 32년간 선교 현지에서 활동했으며, 1935-1942년과 1946-1948년 어간에는 상하이, 그리고 1955-1960년까지는 타이완(臺灣)에서 각각 활동했다.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북한 강계에서 병원을 개설하여 의료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9~20세기 초 한국은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의료 지원이 절실한 시기였다.《朝鮮末과 日帝 强占期 동안 來韓한 西洋 宣敎 醫療人의 活動分析》(황상익·기창덕의)에 의하면 1885년 조선에는 3명의 의료 선교사가 있었다. 그로부터 40년 후인 1925년에 이르면서 123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당시 내한한 서양 의료 선교사의 최대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분석했다. 논문은 1884-1941 어간 내한하여 활동한 서양 의료 선교사 명단에 바이럼 선교사의 이름과 함께 그의 활동기간을 1921-1935년과 활동 장소를 북한 강계(江界)라고 했으며, 바이럼의 부인 베르다 스텐리는 1911-1935년 북한 강계(江界)에서 활동한 것으로 되어있다. 논문에서 이들 두 부부는 다 같이 미국 북장로교 소속으로 되어있다(9,10줄) 이는 아마도 독립선교 위원회가 바이럼 선교사 부부가 파송된 16년 후 교단 분리가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북한에서의 환경 적응은 육체적 고통이었지만 선교사들은 조선인을 도우는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더욱 감동적이었던 것은 바이럼 선교사 부부에게 치료받은 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것이었고, 베르다 스텐리는 그들을 상대로 두 달 과정의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 하얼빈 에서의 선교
강계(江界)에서 활동하던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1935년 일제가 식민지배하고 있던 중국 만주(滿洲)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哈爾濱)으로 선교지를 옮겼다. 당시 한국 교회는 두 가지 역사적인 중대 사안에 봉착해 있었다. 그 하나는 자유주의 신학(Modernism)의 파장, 다른 하나는 일제(日帝)의 신사 참배 강요 문제였다. 이 두 가지 사안은 당시 한국 교회가 공히 강력한 투쟁으로 극복해야 했던 문제였다. 당시 미국 교회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한국 교회는 태평양 건너편의 미국 북장로교가 자유주의 신학 용인과 신앙 전통을 헌신짝처럼 져버린 비극적인 상황에서 헤어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미국 북장로교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약15년(1915-1929) 간 신약학 교수로 봉직한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 박사를 제명하므로써 프린스톤신학의 정통성에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 이에 메이첸은 프린스톤의 현대신학 수용에 맞서 ‘보수적 혁명’과 정통신학의 이상적 보루가 될 웨스트민스터신학 설립을 주도했다. 이로써 북장로교가 분열되었고, 정통장로교(OPC, Orthodox Presbyterian Church)가 새롭게 출범하므로써 선교사

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이와 관련, 그동안 북 장로교 소속으로 한국에서 16년 간 의료 활동을 한 황호리(H. C. Whiting, 1865-1945), 배의남(Roy M. Byram, 혹은 ‘바이람’), 한부선(Bruce F. Hunt) 선교사를 비롯한 열한 명의 저명한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바이럼의 북한 강계에서 중국 하얼빈으로의 선교지 변경 역시 북장로교의 자유주의신학 용인 배경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바이럼 선교사 부부의 하얼빈 행은 스스로 고난을 자원한 행보였다. 바이럼은 미국에서 파송된 성경장로교 선교부(the Bible Presbyterian Mission Board) 관할에서, 병원과 교회당이 없는 곳에서 진료소를 개설해서 의료 활동을 하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만주 일대에는 중국인 3,000만 명이 살고 있었으며, 중국인 기독교 인구는 1,000명 중 한 명이 꼴이었으니 척박한 기독교 선교 환경이었다. 그런가 하면 조선족은 약100만 명, 동만(東滿洲)노회(1925), 북만노회(1932), 남만노회(1921), 그리고 봉천노회가 이미 조직된 상태였다(선지자문서선교회 중국선교공회, ‘한부선 선교사 평전-만주에서 태양신과 싸우는 한부선’) 봉천에는 1935년 10월22일 남만주 일대를 관할 구역으로 한 ‘펑톈’(奉天)노회가 조직되었다(기독신문2010.10.17/고병철, ‘일제강점기 간도지역의 한인 종교와 민족주의’ 29쪽) ‘펑톈’은 1634년(淸天總8年) ‘청징’(盛京), ‘펑톈’(1657) 만주어음 ‘모커둔’(謨克敦), 영어음 ‘무크던’(Mukden), 1928년 펑톈(奉天)은 다시 ‘선양’(瀋陽)으로 개명, 오늘에 이르렀다. 바이럼 선교사 부부가 파송될 때는 제2차 세계대전(1939. 9.1-1945.8.14)이 유럽 일대를 휩쓸고 있었고, 태평양 한 가운데 떠 있는 하와이 진주만이 일본의 기습 공격을 받기 직전(1941.12.7)이었다. 당시 미국의 국력은 유럽 전선에 집중돼 있었고, 태평양은 유럽 전선과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취약 상태였다. 게다가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가 중·일(中日)전쟁을 비롯한 동남아에로의 세력 확장 억제를 위해 일본에 경제 제재 조치를 단행했고, 이에 대한 일본의 반발이 진주만 습격으로 폭발했다. 태평양전쟁(1941.12.7-1945.92)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브루스 헌트 선교사와의 만남
바이럼 선교사는 브루스 헌트(Rev. Bruce Hunt, 1903-1992) 선교사보다 열 살 연상이었다. 브루스 헌트는 조선 땅 평양에서 태어나 자란 자칭 ‘한국인’으로서 48년 간 조선과 만주를 넘나들면서 선교 활동을 폈다. 그의 부친 윌리엄 B. 헌트(William B. Hunt, 1869-1953)는 1897년부터 42년 간 조선 땅에서 선교했다. 브루스 헌트의 부인 캐서린 블래어(Katharine Blair, 1904-1994) 역시 조선 땅에서 선교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캐서린 블레어가 영문학 강의 시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 ‘맥베스’(Macbeth)를 소개하면서 눈물을 보인 그 기억이 아직도 새롭게 느껴진다. 브루스 헌트 선교사 부부는 두 해 차이로 차례로 세상을 떠나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힐사이드 공원묘지(Hillside Cemetry)에 안장되었다. 묘지 비석에는 한글로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그 아래 영어 ‘NOTHING BUT THE BLOOD O JESUS’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브루스 헌트는 미국장로교(PCUSA) 교단에서 탈퇴, 정통장로교(OPC)에 합류, 그레샴 메이첸(J.Gresham Machen,)의 지지하에 장로교독립선교부(PIMB, Presbyterian Independent Mission Board) 소속 선교사로서 1936-1942년까지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바이럼 선교사 부부와 함께 활동했다. 만주는 ‘만주국’(滿洲國, 1932-1934), ‘만주제국’(1934-1945)으로 호칭되었다. 만주는 1931년 9월18일 일본 군국주의 관동군(關東軍)이 만주(滿洲)를 범아시아 장악에 전략적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9.18사변’을 일으키면서 관동군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그로

부터 일본 군국주의는 1945년까지 만주 일대를 강점, 사실상 식민지화 한 것이다.

로이 M. 바이럼(일본 발음은 ‘로오이 에무 비라무’, Bartha Stanley Byram은 ‘바사 스단누리 비라무’)과 브루스 헌트 선교사 등은 당연히 일본의 반(反) 황민화(anti-Shinto Shrine Worship Activities) 입장, 그래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다. 일본은 미국 선교사들에게 두 가지 압력을 가했다. 하나는 일본과의 타협을 통하여 종교 정책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다른 하나는 추방이었다. 미국 국무부는 일본과의 협상을 벌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OPC의〔The Prsbyterian Guardian, 1942〕291쪽에는 브루스 헌트가 쓴 체포 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게재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Prisoners of Christ Jesus) 라는 주제 서두에는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엡3:1), 그리고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히10:33)라는 구절이 소개되었다.
1941년 10월22일, 브루스 헌트는 하얼빈에 있는 그의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 집안 일을 돕는 러시아인 소녀가 현관문 쪽의 인기척을 확인하고 경찰관이라는 말과 동시에 일본 경찰관이 들이닥쳤고, 선교사들은 체포되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같은 시간에 옆집에 사는 로이 M. 바이럼 선교사 역시 함께 체포되었다. 미국 시민권이 선교사들을 지켜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선교사들은 체포될 때 소지품과 소소한 일용품들까지 압수당했다. 경찰서에는 한국인 30~40명이 이미 먼저 끌려와 있었다. 그날 밤 선교사들은 트럭에 실려 집에서 두 블록 거리에 있는 감옥에 투옥되었다(24쪽)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로이 맥 바이럼과 베르다 스텐리 선교사는 가을이 깊어가는 1941년 10월22일 브루스 헌트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42년 2월6일까지 일본 감옥에 있었다. 1941년 10월26일 그날은 주일이었다. 선교사들은 하얼빈에서 검속된 후 다시 열차편으로 약80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한·만(韓滿) 국경지대의 안뚱(현 遼寧省, 현재 丹東) 감옥으로 이감되었다(TIME, 1941.11.17) 무려 이틀이 걸렸다.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한·만(韓滿) 국경지대의 감옥에서 혹독한 겨울을 지내야 했다. 흰 눈이 내리는 날은 작은 창틀 사이로 바람에 날아든 눈발이 감방에 떨어졌지만 쉽게 녹지 않을 만큼 매서운 추위였다. 일본 수사관들은 수사 기법에 의하여 선교사들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물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는가?’, 수사관들은 죄증(罪證)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따금씩 성경에 관한 호기심도 보였다고 한다. ‘당신이 온 세상을 다스릴 오실 왕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108일 간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그 감옥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신앙의 학교가 되었다고 했다. 감옥에는 성경이 없었지만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그곳에서 기도를 배웠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잊지 않고 계신다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감옥에서 기도는 바이럼 선교사 부부에게 하늘의 위로가 되었고, 일본 제국주의 법정에 서서 참되신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좁은 감방은 12명이 몸을 부비적거리면서 지내야 했다. 브루스 헌트는 신장이 커서 밤에 감방에 ‘누우면 머리가 벽에 닿았다.’고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그런 정도의 어려움은 견딜 수 있었다.
법정에서 판사는 ‘여호와가 아닌, 일본의 태양신이 만주의 하나님이다.’라고 공언할 때마다 바이럼 선교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외쳤다. 선교는 이 세상에 대한 복음적 도전이다. 그러나 세상 역시 기독교 선교 도전에 만만한 상대만은 아니다. 선교사들은 세상의 도전에

맞서야 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끝까지 일본의 종교정책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재판부는 바이럼 선교사에게 결심판결을 2년 연기 했다.

연기 이유는 뚜렷하지 않지만 아마도 처벌 증거 부족 때문이었을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결국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1942년 8월7일 동료 선교사 그립숄(M.D.M.S. Gripshol)과 함께 만주에서 추방되었다. 사실은 미 국무부의 철수 경고에 따른 것이었다. 만주에서 30년 이상 한국 기독교인들과 복음적 유대관계를 가진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일본의 종교 정책과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일본의 만행을 한국인들 보다 더 뜨거운 열정으로 반대하면서 감옥의 길을 택했다.

훗날 바이럼 선교사는 미국으로 추방된 후 그의 감옥 생활을 회고 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당한 것처럼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다. 감옥에서 우리의 발이 착고나 수갑에 채워지지도 않았다. 우리는 구타를 당하지 않았으며, 물리적인 육체의 고통은 견딜 수 있었다. 우리는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당했던 것처럼 추방당했다.’

- 부인 베르다 스탠리의 저서 활동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했다. 그 사랑의 열정이 조선인을 위해 선교 헌신을 결심하게 했고, 조선인이 흩어져 사는 하얼빈을 마지막 선교지로 선택하게 했다. 그리고 바이럼 선교사 부부에게 주어진 대가는 감옥이었다. 그러나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한반도와 중국 땅에서 만행을 저지른 일제(日帝)를 만천하에 고발했다. 바이럼 선교사의 부인 베르다 스텐리(Dr. Bertha Stanley Byram, 1889-Kansas)는 ‘하나님의 일본 감옥에 임재’『God's Presence Japanese Prison』라는 소책자를 처음 썼다.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이 책을 출판하여 미국 전국에 배포했다. 책의 내용은 당시 일본의 만행을 미국 교회에 알리는 내용이었다.
베르다 스텐리가 두 번째 쓴 소책자는 ‘관원앞에 끌려간 증거’『Brought Before Governors for a Testimony』, 이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 내용이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마10:18) 그리고 베르다 스텐리 선교사는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에 있던 안이숙(安利淑, 1908-1997) 씨의 곧은 신앙절개와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 세 번째의 책 ‘죽으면 죽으리라’(1968)『If I Perish, I Perish 』는 책을 써서 미국 교회에 보급했다. 이 책 역시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세 번이나 거듭 출판했다. 이 책은 조지아 주 아덴(Adens)의 부호가 로랜드(C.A. Rowland)가 자신의 사비로 수십만 권을 출판해서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뿌려 일본의 만행을 알렸다. 이 책을 초록(抄錄) 삼아 1968년 안이숙 씨가 한국에서 출판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베스트셀런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옥중 노래’《Prison Songs》는 1941년 10월22일~1942년 2월6일 사이, 바이럼 선교사 부부와 브루스 헌트가 지은 노래 모음집이다. 당시는 선교사들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 힘든 시기에 선교사들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 노래를 만들어 함께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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