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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Rice, Robert Franklin(1921- , NP) / Rice, Alice Venable
 작성자 : Aaron  2018-12-04 17:30:44   조회: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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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기본 사항

1. 이름 : Rice, Robert Franklin
2. 생몰연도 : 1921.3.18. - 미국 아이오와주 수 (Sioux) 출생
3. 학력 : 1942 켄터키주 센트르트대학 졸업
1946 프린스턴신학교 졸업, 동교 신학원 수료
4. 경력 : 1946-49 미국에서 목회활동
1950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대구에서 선교활동, 전쟁 중 선교 활동
기독교 부흥협회 (CRF) 창설
1957 초교파적 재단 구성
1965 재단 분규로 인해 선교사업 포기하고 귀국
1967 세계문맹전도협회 창설하여 문맹자에게 글을 보급
한국선교에 계속적인 관심으로 대전에서 서태진과 <승리의 생활> 복간
5. 가족 사항 : Rice, Alice Venable (부인)
6. 논저 :
7. 참고문헌 : <<기백>>4권; HKMP Ⅱ; 인명 3; 승리의 생활 (합본 제4집, 1976.7,8호)


Ⅱ. 선교사 소개 : 라이스 (Rice, Robert Franklin 1921-)

미국 북장로교회 한국 선교사. 나의 이름은 “나의수 (羅義守)”

라이스 선교사는 1921년 3월 18일 미국 아이오아주 수(Sioux)에서 출생했다. 1942년 켄터키주에 있는 센트르대학을 마치고 1946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했으며 1946년 동교 신학원을 수료했다.

그동안 1943년부터 미국 해군의 견습 군목을 거쳐 1946년 오자크스학교 성경교사로 근무하는 한편 호리스터 장로교회 목사로도 시무하였다. 1974년 웨스트 노팅검의 대학예비학교의 교목 및 성경교수를 거쳐 1948년부터는 뉴저지주의 페리네빌 장로교회와 마나라폰 장로교회의 목사로 시무하였다. 1950년 미북장로교 한국선교사로 파송되어 부인(Alice Venable)과 함께 내한하였고 대구지방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내한한 지 6주후에 6.25사변이 일어나자 일단 일본으로 피난했다가 곧 다시 내한하여 전쟁 중에 한국선교사업을 재개하였다. 그는 한국교회의 재래적인 구전적 전도방법을 지양하고 효과적인 전도방법을 연구, 실천하기 위하여 기독교부흥협회(CRF)를 창설하였다.
1957년 초교파적인 재단을 구성했으나 이것이 불씨가 되어 재단에 심각한 분규가 일어나자 라이스 선교사는 모든 선교 사업을 포기하고 1965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1967년 그는 새로운 세계적 선교사업을 주도하여 세계문맹전도협회를 창설하였다. 이는 세계의 무지한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며 많은 문맹자에게는 성경을 통하여 글을 깨우치게 하고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선교사업을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는 세계를 순회하며 여러 나라의 기독교단체와 협력하여 이미 38개국어로 성서의 원본을 제작하고 있다. 한편 계속적으로 한국교회의 선교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오랜 한국 친구인 서태진과 협력하여 대전에서 <승리의 생활>을 복간하였다.

2. 기독교부흥협회(基督敎復興協會)를 창설하다.
: Christian Revival Fellowship 약칭 CRF. 기독교 선교기관.

1950년 미국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입국한 라이스(Robert F. Rice) 목사가 대구시 남일동 33번지에 설립하였다. 입국한지 얼마 안 되어 6.25사변이 발발, 라이스 선교사는 일본으로 잠시 피신하였다가 그해 7월 다시 대구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재래의 구전적 전도방법을 지양하고 좀 더 효과적인 전도방법을 연구 실천하기 위하여 문서 선교를 주요사업으로 한 기관을 설립하였는데 초기에는 ‘대한 부흥관’이라고 불렀다.

1953년 7월부터 문서출판운동을 시작, 처음 출판한 문서는 <승지라 예수>(Jesus Victor)라는 작은 팜프렛으로 이를 무료로 배부하였다. 그러나 후에 이것을 <승리의 생활>(Victorious Living)이라고 개제하여 월간으로 발행하였다. 이 월간지는 그 내용을 외국의 전도 및 설교문서를 국내 신학자들이 번역, 출판하였다. 또한 문서전도에 제공될 만한 <부흥문고> 출판을 비롯하여 복음주의 서적 등을 번역 출판하였고 각종 전도지를 발행하여 무료로 배부하였다. 성경·찬송 기타 기독교 서적 반포를 위하여 대구에 서점 「부흥서관」을 설립·운영하였고 시청 각 순회전도반을 조직하여 농촌교회를 방문 전도하는 한편 천막 순회집회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1961년에는 세계적인 부흥사 브라운(Rorand Brown)을 초청, 전국 부흥집회를 개최하였다. 「엠마오 영어 성경통신과」를 설치하여 고등학생을 중심으로 영어 성경공부를 실시하였다.

6.25사변 후 고아와 불량소년들을 선도하기 위하여 「중생소년건설단」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대구와 김천에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1963년에는 미국의 「무디문서선교회」의 후원으로 대구에 「기독교 문화관」을 개설하여, 종교서적 도서관으로 운영하기도 하였다.

라이스 목사와 함께 일한 한국인 목사로서는 <승리의 생활> 편집책임을 맡은 김희보 목사를 비롯하여 김대업·양치관·이충중·김윤근·한제호·김사관·김원석·이운형·신상길·신재봉·남기찬·최원일·임은희·박명석 등이 있었다. 1955년 3월부터는 대구에 거주하고 있는 장로교·감리교·성결교·구세군 4개 교파에서 이사를 선정하여 초교파 사업기구로 확장하였으며 1957년 2월 21일 문교부로부터 재단 법인으로 인가를 받았다. 초대 이사장엔 김만성 목사(장로교)가 선출되었고 1964년 당시엔 임석길 사관(구세군)이었다. 그러나 초교파적으로 이사를 구성한 것이 오히려 재단분규의 씨앗이 되어 마침내 라이스선교사는 선교사업을 포기하고 1965년 귀국하면서 대구에서의 「기독교부흥협회」는 종말을 고하였다.

1967년 미국에서 「세계문명전도협회」(Literacy and Evangelism Inc.)를 설립한 라이스 선교사는 서태진과 협력하여 대전에서 <승리의 생활>을 복간 발행하였으나 대구의 「기독교부흥협회」 시절과 같은 대규모 종합적인 문서선교운동은 전개하지 못하고 있다.


3. 대구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대구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개신교 선교사는, 1888년 8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던 중 대구에 들린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존스(G. H. Jones)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889년 11월 30일 북장로교 선교사 게일(J. S. Gale)과 이듬해 봄에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선교사 데이비스(J. H. Davies)가 각각 대구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방문은 대구선교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다.

이후 미국 북장로회 소속인 베어드(W. M. Baird)는 부인(Annie L. Adams)을 동반하여 1890년말 부산에 상륙한 뒤, 1893년 4월 22일 선편으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대구에 모습을 나타냈다. 모색이 다른 양국 사람이 기독교를 전도하자 대구 사람들은 이교를 전한다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열심히 전도하여 도착한지 1년 만에 정완식과 서자명 외 여러명의 개심자를 얻었으며 계속하여 신자가 늘어나자 1895년 12월 대구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896년 1월 남성로 소재 정씨의 가옥 5동 20여간을 1천냥으로 구입하여 예배처로 정하고 예배드리게 되었다.

베어드 선교사 부부는 대구선교 개척의 터전을 닦은 후에 관서의 평양으로 선교지를 옮기게 되었으며 뒤를 이어 처남인 아담스 선교사가 1897년 봄에 부임하였다.

3.1운동의 대구만세시위는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계획되고 추진되었는데, 3월 8일과 10일 시위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 이상의 징역을 받은 53명 중 47명이 개신교계통의 계성·신명·숭실·대구 성경학교 출신 혹은 재학생들이며, 1년 6개월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은 주모급 12명은 모두 개신교교인들이었다. 비밀문서 <경북고등경찰요사>에 의하면 당시 대구를 비롯한 경북도내만세시위사건에는 개신교 목사와 조사와 신자들이 가담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이처럼 항일구국운동의 모체가 된 교회의 대한 일제의 탄압은 193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화되었고 1938년 신사참배문제로 교회가 큰 시련을 겪게 되었을 때 대구 교회들도 수난을 겪게 되었다. 1940년 외국인 선교사들이 국외로 추방되었고 일제에 반대한 교회인사들은 체포되거나 교회 밖으로 추방되었다. 신사참배 강요외에도 지금까지 교회를 이끌어 온 유력한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갖은 수단을 써서 일제에 의해 조직된 어용단체에 끌어들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농우회사건이다. 즉 옥고를 치른 적이 있는 유재기 목사를 국민총력경북장로회연맹 이사장으로 내세웠고 독립공체운동(1920년대 이후 상해임시정부를 돕기 위한 모금운동) 등으로 구속된 적이 있는 김봉도, 사상불온의 죄목으로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적이 있는 신후식 등을 일제에 협력하는 형태로 변절시켰다. 1940년 12월 11일 소위 국민총력 경북장로회연맹이 경성되었고 1941년 6월 24일에는 신정교회에서 국민총력 경북장로회 여자부를 강제로 결성하면서 신사참배·애국주일·국민의례·궁성요배·유기 헌납 등을 강요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1943년 5월 일본기독교단 경북교구를 결성하였고, 1944년 5월 대구 기독교 전시보국회를 결성하였다. 주일학교는 수련회로, 부흥회는 연성회로 고쳐서 불러야 했으며, 동산성경학교는 폐쇄되어 청년훈련소로, 계성중학교와 신명여학교는 공산중학교와 남산여학교로, 동산병원은 경찰병원으로 바뀌었다. 1945년 2월 서문교회가 일제의 육군병원으로 징발되었고 그해 7월 25일 제일교회 마저 육군에 징발되어 남산교회와 합동하게 되었다.

8.15 해방과 함께 교회재건운동은 활발히 진행되었다. 1940년 추방되던 당시 일하던 북장로회 선교부 소속 선교사 버그만(G. O. Bergman)양, 헨더슨(H. Henderson) 부인, 아담스(E. Adams) 부부, 라이언(W. B. Lyon) 부부가 귀환하였고 이어 강계에서 일하던 캠벨(A. Camp-bell) 가족과 로스(L. Ross)양, 정주에서 일하던 로우(D.S. Lowe), 서울에서 일하던 로렌스(E. Lawrence), 마펫(H. Moffett), 그리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우드베리(E. J. Woodberry)와 라이스(R. F. Rice) 등이 속속 대구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대구선교는 전처럼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6.25사변으로 대구교회는 다시 시련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부산과 함께 공산군의 수중에 들지 않는 대구는 북쪽에서 피난해 온 피난민의 집결지로 새로운 도시성격을 형성하게 되었다. 캠벨을 제외한 선교사들은 전쟁이 나자 일본으로 피신하였으며, 마펫은 공군 대령으로 다시 한국으로 왔고, 특히 중국에서 일한바 있는 우드베리는 중공포로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종사하여 1954년 중국인 반공 포로들을 인솔하여 대만으로 갔다. 1953년 전쟁의 열기가 식자 피신하였던 선교사들이 속속 귀환하여 교회와 병원, 각 사회기관에서 한국교회 및 사회선교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특히 프로보스트(R. C. Provost), 클로슨(D. Clawson), 스콧트(K. M. Scott) 부인, 그럽(W. A. Grubb), 우카르트(R. C. Urquhart), 코웬(K. Cowan)양, 워드(G. Worth), 체리(A. V. Cherry), 래드클리프(W. W. Radcliffe) 등의 활동은 매우 컸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는 해방후 신학적 신앙적 갈등으로 분열을 면치 못했는데 교회재건운동의 여파로 고려파가, 신학적 문제로 기독교장로회가, 에큐메니칼운동의 해석 문제로 합동과 통합측이 각각 분열되자 그에 따라 대구교회도 분열의 역사를 겪었다.

대구지방은 해방 전까지 미국 북장로회의 선교구역으로 일찍부터 남부지역 장로교의 선교기지가 되었고,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면서 경상대리(위원)뢰에 속하였으며, 1911년 총회가 조직되면서 경상노회로, 1916년 다시 경북노회에 속하였다.

3-1. 복지 활동을 하다.

한국 전쟁은 소아과 이동 병실 서비스가 필요한 상황을 초래했다. 특히 대구는 전쟁의 결과로 그 수위가 최정점에 다다랐다. 대구에는 무수히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 들였다. 전쟁 방어선과 가까워질수록 음식과 옷들을 많이 분배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
MCC (Mennonite Central Committee)는 음식과 옷을 나눠주는 작업을 위해 젊은 사람들을 많이 보냈다.

70명이 넘는 고아원이 대구에 있었다. 고아원을 만든 사람들은 대부분은 한국 기독교인들이었다. 특히 여성들은 그 아이들을 잘 양육했으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주기위해 노력했다. Mr. Robert F. Rice는 특별히 거리에 사는 거지소년들을 고아원에 보내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사실 그 아이들은 집이 있었지만 집에 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 집에는 감옥에서 풀려난 젊은 여성들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원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954년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1951년 6월부터 거주를 시작했다. 그는 대구에서 여행을 하던 Rovert Rice목사를 데려 왔다. 1954년 겨울 대구의 Rebert F. Rice 목사는 한국에 144,000명의 고아들과 거지들, 그리고 부랑자들이 있다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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