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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Morris, James Henry(1871-1942, 캐나다)
 작성자 : 유연화  2018-12-04 22:32:04   조회: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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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HENRY MORRIS (1871-1942)
“선교사들의 선교사”

Ⅰ. 기본사항

1. 이름 : Morris, James Henry / 모리스
2. 생년월일 : 1871.6.26-1942.2.16
3. 출신 및 소속 : 캐나다 출생
4. 학력 : 전기학 전공
5. 연표 :
17세에 미국 시민이 됨
1899년 서울에 전차 가설 때 전기회사의 기술자로 내한
수도, 난방시설, 수력발전 등의 분야에서 서양기술 제공
1907년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 건립시 실행이사로 활동
한국인의 상권신장과 기술교육 등에 헌신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사업 간접적인 지원
서울 유니온, 한양구락부, 한국왕립아시아학회 회원
1939년 귀국
1942년 2월 16일 미국에서 소천
6. 가족사항 : 아내 펄
딸 메리언 Marion


∐ 선교사 소개

1895년에 명성황후가 살해되었고, 흥선대원군이 다시 힘을 되찾았고, 1898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왕과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894년 청일전쟁(1894-1895)은 한국이 한국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서재필(Dr.jaishon,p) 산하에 조직 된 독립협회는 국왕 고종의 명령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 기간 동안 미국 엔지니어링 회사에 의해 제물포항과 서울을 연결하는 철도가 건설되었고, 전차 도로, 전등 및 공공 수도시설이 건설되었다.
이 시기에 한 젊은 미국인 모리스가 한국에 와서 국가의 상업 및 기술에 뛰어 들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서 40년 동안 상업, 선교, 외교, 그리고 소위 자유사회를 구성한 모든 민족의 사람들 사이로부터 존경받고, 한국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유명한 저명인사가 되었다.

James Henry Morris는 1871년 6월 26일에 Ontario, Barrie에서 태어났다. 그가 17살 때 샌프란시스코에 갔고, 미국의 시민이 되었다. 그는 Market Street Railway Company에서 지위를 갖게 되었으며, 단기간에 중요하고 책임감을 가진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1899년에 그는 엔지니어 그룹에 의해 서울에 종로와 동대문 간의 첫 번째 전차 시스템을 건설하기로 계약 맺은 한국에 동행하도록 선발되었다. 그 회사는 서울에 첫 번째 공공 수도 시스템을 설치했으며, 모리스 역시 이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었다.
길거리 자동차가 서울의 교통수단으로 잘 자리 잡게 되었고 차도와 발전소를 완성하고 한국인들에게 작동방법을 가르쳐 준 후 그것들을 설치했던 미국 엔지니어와 노동자들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모리스는 그가 2~3년 동안 길거리 철도와 다른 공익사업에 종사하면서 한국에 대해 매우 흥미를 가지게 되어 떠나지 않고 그 나라에 더 남기로 결정했다.

그는 여러 면에서 한국인의 문화와 역사적인 업적에 감탄했으며, 한국인들을 정말 사랑했다. 그러나 모리스는 빠르게 움직이고, 해결하며, 할 일들을 가능한 한 빨리 끝내기를 좋아했기에 한국인들의 느릿느릿하고, 대충 하려하고, 여유롭게 행동하는 것은 그를 짜증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인내심을 보이고 그들과 일을 이어 나갔다.
그의 딸 마리온(Marion)은 한때 모리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가 신속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것이 아일랜드 사람의 성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보통 낙천주의자였고, 운명론자였다.”
그를 한국에 머물게 만들었던 또 다른 이유는 한국에 금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인들은 종종 그에게 어느 곳에서 금을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주곤 했다. 그는 전해들은 장소들 중 한곳이 부자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금을 캐는 것에 큰 관심을 가졌지만 금 때문에 한국에 머물게 만들었다 보기보다는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동안 다른 기회들을 보았다.
이 시기, 한국은 빠르게 현대화 되고 있었고, 서양 장비와 기계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은 난방, 조명, 배관 장비들이 필요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해외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그래서 모리스는 수입 사업에 뛰어 들었고 지난 수년 동안 위에 언급된 것들을 따라 활발하고, 수익성 있는 사업을 했다. 그 후, 서울과 다른 지역에서 영화 상영이 인기를 얻었을 때 그는 유니버설 및 기타 유명한 회사에 영화를 유통했다. 그는 또한 태평양 저편의 기선과 선도의 중개상이었으며, 미국과 캐나다를 왕래하는 선교사들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통행증 중개상이기도 했다. 그는 실용적이고 유용한 새로운 발명품, 기계 및 장치들에 매력을 느꼈다. 20대들과 30대들이 자동차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모리스는 자동차 회사들의 에이전시를 운영하여 한국에 많은 자동차를 들여왔다. 그는 또한 좋은 자동차 정비공들과 함께 수리 차고지를 보유하기도 했다. 모리스는 학자가 아니었고 한국어를 배우는데 시간을 할애하기에는 너무 바빴다. 하지만 그에게는 영어와 일본어를 매우 잘하는 한국인 조력자가 있었기에, 그가 한국인들과 일본인들과 함께 사업을 진행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일본인들이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하기 전 몇 년 동안 한국에서 살아왔던 모리스는 언제나 한국인들 편에 섰고, 일본인들을 침입자라고 생각했다.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로 하여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에 불만을 품고서 한국을 떠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개신교 선교사들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의 간곡한 만류에 의하여 뜻을 굽혔다. 1910년 한국이 완전히 일본에게 뺏기게 되자, 그는 한국에 살고 있는 다른 모든 외국인처럼 상황을 조정했다. 일본인은 많은 종류의 상업과 산업을 했으며, 모리스는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과 함께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더 이점이었기에 종종 그들과 함께 사업을 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모리스가 다루었던 제품들과 동일한 생산 라인을 수입하거나 제조 할 때 모리스는 그들과 경쟁하기도 했다. 그는 자동차, 오토바이, 난방 및 배관 설비, 페인트, 공구, 가솔린 엔진 등을 계속 수입했다. 그는 또한 화물 및 승객 증기선 서비스뿐만 아니라 여러 미국 보험 회사의 에이전트로 계속 일 했다.
한국에서 어느 누군가가 현대식 가정용 장비, 기계류 또는 가전제품 같은 것들이 필요로 할 때, 모두들 모리스에게 물었다. 그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 또는 사람들이 맞이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는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선교사들의 친구였으며 가능한 모든 면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돕기 위해 노력했다. 선교 기관들이 성장하고, 국가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모리스의 조언과 도움이 더욱 더 필요하게 되었고, 그는 모든 특정 프로젝트에 필요한 장비를 제안하고 공급 할 수 있었다. 그는 재주가 있었고, 실제적이었으며, 공학과 기계 분야의 최신식을 따랐다. 사회학적 입장에서 볼 때 모리스는 이상적인 사업가라 할 수 있다.

모리스는 서대문 밖에 미국 스타일인 매력적인 집을 가지고 있었다. 모리스는 사냥하기를 좋아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 그의 집을 만들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중에는 그의 사업으로 인해 시간이 많지 않아서 사냥 여행을 갈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의 집에는 멧돼지와 사슴의 머리가 있었고, 사냥에 대한 트로피가 있었다.
1902년 모리스는 그의 약혼녀와 함께 일본에 갔는데 그녀의 어머니도 함께 갔다. 그는 그들을 일본에서 만났으며, 나가사키에서 결혼했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아내는 모리스와 함께 서울에 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외동딸 Marion을 낳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8개월 뒤 모리스의 아내는 마리온과 함께 한국에 왔고, 그의 딸 Marion은 한국에서 자랐으며,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 가기 전에 서울 외국인 학교에 참여하여 수업을 받았다. 모리스의 부인은 많은 사회 및 자선 활동 등에 종사했으며, 서울 사회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여성 중 한 명이었고, 한국의 영주권자였다.
모리스는 서울 외국 학교를 위해 현대식 시설을 갖춘 건물을 짓는 일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 건물은 Legation(공사관)거리에 있는 그의 사업장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건물의 2층은 강당이었고, 이곳은 외국 개신교 공동체를 위한 영어 종교 서비스를 위해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또한 강의, 콘서트, 연극 및 지역 사회 모임 등과 같은 곳으로도 사용되었다. 관대함과 진취적인 정신이 그 곳을 세우고 유지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던 모리스를 기념하여 모리스 홀(Morris Hall)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셔우드 홀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노블 선교사의 충언을 들을 때 모리스에 관하여 이와 같은 설명을 듣는다. “서울의 서양인 사회는 다행스럽게도 서로가 매우 친밀하게 지내는 소위 ‘외국인’이라 불리는 집단입니다. 여기서는 다른 동양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소속의 구별이 없어요. 선교사들의 집단과 비선교사 집단을 나누는 경계선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리스관은 모리스 씨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인데 모리스(J. H. Morris)씨는 선교사가 아니고 이곳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업가입니다. 당신들도 곧 모리스 씨와 그의 아내인 펄 부인, 딸 메리언을 만나게 될 겁니다.”
“이 독특한 모리스관은 당신들도 알다시피 한국어학교가 있는 건물입니다. 이 건물에는 교회와 어린이 학교도 있습니다. 각 파의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주일이면 언더우드 박사의 박력 넘치는 설교도 듣습니다. 초교파 정신이 이곳 여러 교파의 선교 기구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리스는 20세기 초 한국에서 거주하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인이었다. 그는 학자, 외교관, 종교 지도자, 의사 또는 교육자가 아니었지만 이 모든 분야들의 뛰어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과 연관된 하나 이상의 프로젝트 수행에 그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는 단지 선교사들에게만 선교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사람들의 문제 해결을 돕는 것이 선교라고 한다면 그는 진정으로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선교사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선교사들과 선교 기관들의 필요 공급을 돕는 일에서 매우 적극적이었고, 관대했기에, 심지어 그 나라의 멀리 떨어져 사는 선교사들까지 그를 "선교사"라고 불렸다. 이 문장은 그와 그의 일을 매우 적절히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1907년 서울의 황성기독교청년회가 현대식 회관을 건립할 때 실행이사로 참가하여 크게 활약하였고, 모리스는 ‘Han Yang Masonic Lodge’(한양구락부)의 창립 회원이었으며, 이 조직의 창립자를 도왔으며,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이 조직의 사무실에서 근무를 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서울 조합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는 스포츠(테니스, 볼링)와 사회 센터의 복지에 관심이 있었고 재산과 장비의 유지 관리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그는 ‘Royal Asiatic Society’(한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 지점의 회원이었으며, 항상 행사들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한국과서구문화의 교류, 융합, 촉매의 역할을 했다.
그는 서울 외국인 교회의 일원이었고, 정기적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예산에 아낌없이 기부했다.
자동차를 이용하기 시작한 시기 초기에 그는 서울 거주자 중 최초로 자동차를 소유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장례식과 같은 응급 상황에 처한 친구들을 돕기 위해 자동차를 사용하기도 했고,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자동차로 병원에 데려다 줄 만큼 정말 관대했던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모든 지역 사회의 필요를 도울 수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의 풍부한 자원, 역동적인 리더십과 관대함으로 도움 받았다.
그리고 한국인을 위한 활동에 헌신하고 일본인 상인들에 대항할 수 있는 한국인의 상권신장과 기술교육 등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사업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여 그들이 실시하는 학교와 병원 사업 등에 있어 모든 물자의 조달, 건축자재의 수입과 전기, 수도, 난방시설 등을 맡아 돌보았다. 이로서 선교사들의 선교사로 불기기도 했다.

1939년 모리스는 66세였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빠르게 다가오면서, 미국인의 삶은 날마다 점점 더 어려워지고 불편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모리스와 그의 아내는 그들이 한국을 떠나야 할 때가되었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40년 전에 살았던 곳에 돌아와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있는 밀브레이(Millbrae) 마을에 정착했다, 그러다가 그는 1942년 2월 16일에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다.


Ⅲ 참고문헌

Fisher, J. Earnest. 『Pioneera of modern Korea』 Korea: Sam Sung Printing Co. Ltd., 1977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내한선교사 총람1884-1984』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기독교대백과사전 6권』 서울: 기독교문사, 1984
전택부,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 서울: 홍성사, 2017

인터넷
http://www.kcjlogos.org/news/articleView.html?idxno=9115 크리스찬저널(Sherwood Hall3) 길원필목사
2018-12-04 22: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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