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6.23 화 09:15
 
 내한선교사 / Hoyt, H. Spencer(미상, NP) / Hoyt, Nell Henderson
 작성자 : 신웅식  2018-12-05 17:44:59   조회: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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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yt, H. Spencer (호이트 / 許益斗 / 미국 / NP)
1. 생몰연도:
2. 학력 :
3. 경력 : 1922.9.1.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
대구선교부에 배속되어 대구동산기독병원 의사로 부임
원장 플레처(A.G. Fletcher)를 도와 의료선교활동
1927 휴가차 귀국, 건강문제로 귀환 못함
1930 선교사직 사임
4. 가족사항 : Hoyt, Nell Henderson(부인)
5. 논저 :
6. 참고문헌 : <<기백>>16권; 구미인조사록; HKMP, Ⅰ,Ⅱ; KMYB; CMYB.
* Hoyt, Nell Henderson

위에 있는 자료가 호이트를 찾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지표였다. 호이트는 출생연도를 포함한 기본적 자료가 없었고, 논저가 딱히 없었다. 의료선교를 했다는 것과 가족사항에서 나타나는 부인의 이름만 나타났다. 필자는 먼저 부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전무하였다.
호이트는 의사로서 한국이라는 낯선 땅에 들어왔고, 대구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는 자료가 전부였다. 그리고 5년 후, 휴가차 돌아갔던 미국에서 건강의 문제로 인해 귀환하지 못하고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참고문헌에서 ‘구미인조사록’을 찾아보려 하였지만 자료가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가 사역하였던 대구에 있는 병원에 대한 기록과 그가 남겼던 짧은 아티클을 살핌으로써 그가 어떠한 선교사였고,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역추적하였다.

본론
1. 선교사 소개 : 호이트는 누구인가?

* 호이트 Hoyt, H. Spencer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의사, 한국명 허익두(許益斗). 1922년 9월 1일 부인(Nell Henderson)과 함께 내한하여 대구 선교부에 배속되었다. 스미드(R.K. Smith)의 뒤를 이어 대구동산기독병원 의사로 부임하여 원장인 플레처(A.G. Fletcher)를 도와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다. 1927년 휴가를 얻어 본국에 돌아갔는데 건강 문제로 다시 귀환하지 못하고 1930년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호이트 선교사는 1922년에 내한하여 의료선교를 감당하였다. 그의 자료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저서가 있거나, 다른 어떠한 행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자료도 희박하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아내의 기록에 대해선 전무후무 하였고, 이름만이 올라와 있었다. 그래도 호이트가 1922년에 처음 한국에 방한하여 글을 논거한 것이 있었다. 그 저서는 『First Impressions』이다. 그의 한국에 대한 “첫인상”에 대한 짧막한 글을 살펴보겠다.

2. 호이트 선교사의 아티클
* First Impression(Hoyt, H.S. First Impressions .../ KMF 18-22, 272 / 1922.12)

약 6주전 한국에 도착한 이래로 나는 많은 놀라움을 느껴왔다. 아마도 나의 한국과 이곳에서의 선교사역에 대한 첫 인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은 내가 여기 오는 것을 기대하고 있을 당시 겪게 될 거라고 예상해왔던 것과 그 첫 인상을 비교하는 것일 것이다. 나는 이곳의 환경 조건에 관한 모든 가능한 정보를 모아왔지만, 내가 많은 거짓된 인상을 받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선교사들이 먹도록 강요받았던 끔찍한 많은 음식에 대해 들어왔었다. 그리고 통조림 버터에 대한 생각은 가지지도 않았고, 나는 그것이 보통 상했다고 들어왔다. 나는 어떤 먹을 수 있는 신선한 소고기에 대한 생각도 포기했으며, 단지 매우 강하며 동의할 수 없는 맛이라고 들어온 한국의 돼지고기만 오직 먹을 수 있다고 예상했었다. 당신은 내가 대구에 도착했을 때 경험한 놀라움과 안도감을 잘 알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진 여기에서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예상했던 많은 것들을 포함한 맛있게 준비되어진 저녁식사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다. 내가 주택가를 오후에 산책했을 때, 미국의 소들, 그리고 과일 나무들과 함께 좋은 채소밭이 잘 길러지고 있는 다양한 것들을 보면서 매우 기뻤다.
(중략)
나는 복음을 듣고자하는 엄청난 열정을 가진 한국 사람들은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그렸었고 오히려 평화로운 경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생각했었다. 한 선교사의 편지로부터 한국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자하는 열정이 너무 커서 복음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이지 않고는 결코 거리로 나갈 수 없었다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존재했지만, 나는 현실적인 사역을 보면서 발견한 것은 여기뿐 아니라 또 다른 곳에서도 역시 복음의 확장에 대한 어려움과 반대도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대구에서 병원을 방문했을 때, 능숙한 조수들과 이용할 수 있는 좋은 약국과 약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매우 기뻤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의사들이 현대의학의 도움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돌볼 것이라 기대해왔던 것만큼, 그 정도로 나라에 스며들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실망이었다. 물론 선교 병원은 복음사역에 대한 보조기구로써 계속 존재했는데 결국은 우리 모든 노력들의 끝이었다. 최근 몇 십년 안에 한국에서의 놀라운 기독교의 발전은 전율인 동시에 이 일에 조금이나마 참여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위대한 책임을 인식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겸손하게 된다.
그것은 여기에 있는 즐거움이며 특권이다. 그리고 나의 소망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위대한 승리를 향해 우리를 재촉하는 모든 새로운 소망과 용기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호이트는 한국에 대한 첫인상이 들어왔던 정보와 자신의 선입견에 있어서 많이 깨졌음을 발견한다.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곳에 대한 문화와 환경, 사람들의 대해 빨리 파악하는 것이다. 호이트가 파악 해 둔 정보와 오히려 달랐을 때, 그는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섬길 수 있는 의술로 대구에서 사역할 수 있었다. 오히려 신신 의료기술이 들어오지 못하고, 약이 없었을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음을 자신의 글 속에서 실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국에서 사역하는 현실에 대한 고찰이 글을 통해서 잘 느껴졌다. 그가 들어왔던 증언에 의하면, 한국에는 복음을 듣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고, 걸어가는 길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복음을 들려달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다. 들어왔던 것처럼 복음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보고 질문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이 항상 녹록치만은 않던 그의 경험이 글에서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가 사역했던 “대구 동산기독병원”은 어떠한 곳이었을까? 사전을 찾아보니 병원에 대한 자료가 나타나 있었다.

3. 호이트 선교사의 의료사역과 복음전도 사역지(대구 동산기독병원)
* 대구 동산기독병원, 大邱東山基督病阮 [영] Taegu Presbyterian Medical Center
기독교 의료기관. 이 병원은 1899년 가을에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브루엔(H. M. Bruen)은 의사인 존슨(W. O. Johnson) 부부와 함께 1899년 10월 26일 대구에 도착하였다. 11월초에 존슨의 집에 의약소(醫藥所; dispensary)를 설치하여 그해 성탄절전에 문을 열었는데, 이것이 동산기독병원의 전신인 제중원(濟衆阮)의 시작이었다. 존슨은 한국 사람에게 보다 효율적이고 신속한 선교사업을 행하기 위해 팔공산 파계사(把戒寺)에 들어가 한국어를 배웠으며 헌신적인 진료봉사로 이듬해 여름까지 1천 7백명을 진료하여 그중 8백명을 치료하였다. 이때 병치료를 복음전도의 기회로 삼고 전도문서도 병원에서 판매하였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던 주민들은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찾아왔으나, 정성어린 치료에 감동하여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어 수용할 시설이 부족하였다. 1902년의 존슨의 보고에 의하면 몰려드는 구경꾼들을 막기 위해 집 주위에 철조망을 칠 정도였다고 한다. 부족한 시설확충을 위해 노력하던 중 1903년 필라델피아 제 2장로교회 교회인 라이트(M. H. Wright)양이 거액의 기금을 헌금하여 고든(H. B. Gordon)의 설계로 새 건물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1905년 태풍으로 무너졌으며 이듬해에야 완전 복구가 가능하였다. 이 병원의 설립과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존슨은 건강이 악화되어 1903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였고 대신 눌(M. M. Null) 의사 부부가 와서 일하였으나 역시 건강이 나빠져 1905년 사임하였다. 1906년 존슨이 다시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발병하여 고생하다가 1910년에 의료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복음선교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그 후임으로 플레처(A. G. Fletcher; 별리추)가 병원사업을 주관하였다.
한편 1905년 9월 대구병원의 최초 간호원으로 온 캐매기(E. Magee), 베킨스(E. Bekins), 레이너(E. M. Reiner)등이 간호원으로 봉사하였다. 특히, 1923년에 부임한 헤드버그(C. Hedberg) 양은 이듬해 병원 내에 간호원양성소 간호교육을 실시하였다. 한편 부산에 이어 1915년 대구에서도 나병치료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영국 구라선교회의 1920년 스미드(R. K. Smith) 의사 부부가 동산병원에 부임하여 일을 돕기 시작했고 2년 후에는 호이트(H. S. Hoyt) 의사 부부가, 1929년에는 독일인 칼터플라이터(W. Kalterfleiter) 박사가 부임하여 3년동안 일하였다. 그동안 병원사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시설확충도 서둘러 1927년에 1만 달러를 들여 건물을 증축하였으며 다시 1931년 3만 5천 달러를 들여 800여평에 80개의 병상을 갖춘 벽돌 건물을 신축하여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1930년부터 37년까지 8년동안 총진료자 수는 10만 이상이 되었고 20만명 이상의 외래환자를 치료하였다. 1934년에 이르러 한국인 의사 8명을 비롯해 간호원 14명, 한국인 직원 86명이 선교사들과 함께 일하였다. 선교를 대상으로 복음전도에 저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특히 존스 선교사와 함께 일한 서장명(徐子明) 전도사의 공이 컸으며 1910년경에는 병원 내에 6명의 전도인이 매주일 환자를 대상으로 예배를 드렸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들은 퇴원후 고향에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1922년 보고에 의하면 한 해 동안 개종자가 3백명 이상이 되었고 대구 지역에 7개의 교회가 이들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선교활동은 1921년 플레처 원장이 병원 임직원을 중심으로 전도회를 조직하고 박덕일(朴德一) 목사를 초빙하면서 보다 활발하게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1932년 당시 이 전도회에서 설립 보조한 교회는 42개 교회에 달했다.

위와 같이 호이트가 1922년에 대구 동산기독병원에 부임하였을 땐, 선교사 부부가 의사로서 부산에서부터 시작된 나병환자 치료에 대한 인원확충으로 보여진다. 이를 통하여 부인(Nell Henderson) 또한 의료선교에 힘썼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자료를 통하여 대구 땅에 어떻게 병원이 서게 되었으며, 병원이 태풍으로 파손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의 채우심을 통해 시간이 다소 걸리긴 하였지만 다시 재정비 되어가는 모습과, 더 나아가 그 지역에 30만명이나 되는 병자들을 진료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전념했던 기관이 대구 동산기독병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18-12-05 17:4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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