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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Ashe, Adaline S.(1888-1933, NP)
 작성자 : 서요한  2018-12-05 21:15:26   조회: 1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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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쉬 선교사 / Ashe Adaline Schumacher (1888-1933)

Ⅰ. 기본사항

1. 이름: Ashe, Adaline Schumacher / 애쉬

2. 생몰연대: 1888.9.27.-1933.12.13.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22.8-1933

5. 연표
1888.9.21. 펜실베이니아주 비버 카운티 뉴브라이튼에서 출생
1912.5.25. Henry Tobias Ashe와 결혼
1918.10.14. 남편(Henry Tobias Ashe) 스페인독감으로 사망
1922.8.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선교부에 부임
평양시 신양리의 외국인학교 교사로 재직
1933 귀국
1933.12.13. 향년 45세로 펜실베이니아주 비버 카운티 뉴브라이튼에서 사망
6. 가족사항
아버지: Schumacher, Matilda S Binzley(1864-1950)
어머니: Schumacher, Philip H.
남편: Ashe, Henry Tobias(1888-1918)

Ⅱ. 선교사 소개: 애쉬(Ashe Adaline Schumacher, 1888-1933)

1. 선교사를 하기 전의 애쉬

애쉬의 기록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애쉬는 아버지 Schumacher가 24살 되던 해에 아이를 낳은 딸이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대신 같은 무덤에 뭍혔다는 기록을 보아 하니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듯 보인다. 그렇게 애쉬는 평범하게 자랐다.
그녀가 24살 되던 해에 결혼을 한다. 남편은 Henry Tobias Ashe이다. 남편은 애쉬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둘은 동갑이었다. 생일은 남편이 조금 더 앞선다. 그는 Andrew Jackson Ashe와 Martha Anne Plotner Ashe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편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셨다. 슬하 6남매였다. 제일 큰 딸은 Mary Ashe Alter이며 둘째는 아들로 William Francis ashe였다. 셋째는 아들이었고 Stanly Plotner Ashe였고, 넷째는 Bowman Foster Ashe였다. 다섯째가 바로 Henry Tobias Ashe였다. 바로 애쉬 선교사의 남편이다. 여섯째는 아들로 Andrew Dick Ashe였다.
남편과 애쉬는 같은 주에서 자랐고 만났고 결혼했다. 애쉬는 집안에서 독녀였다. 그래서 아마 외롭게 자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같은 동갑의 나이에다가 형제가 많은 집안의 남편은 아마도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는 그런 호감을 느꼈지 않았을까? 또, 목회자의 자녀로 자란 그의 신앙이 그녀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다. 아마도 그 신앙심이으로 남편이 죽고 난 뒤 선교사로 나가게 된 배경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그와 그녀의 나이 24살에 그들은 결혼을 했다.
하지만 이 행복한 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이 독감에 걸린 것이다. 스페인독감이다. 스페인독감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 시작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학자들은 1918년 여름 유럽에서 발견된 악성 독감이 동시 다발적으로 유행하고, 첫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18년 초여름에 발견된 이 독감은 같은 해 8월 첫 사망자가 나오고 이때부터 급속하게 번지면서 치명적인 독감으로 발전하였다. 유럽에서 시작된 이 스페인독감이 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을까? 바로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했던 미군들이 귀환하면서 그 해 9월에 미국에까지 확산된 것이다. 첫 환자가 발생한 지 한 달 만에 2만 4000명의 미군이 독감으로 죽고, 총 50만 명의 미국인이 죽었다. 2년 동안 2500만~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독감이고 14세기 중기 페스트가 유럽 전역을 휩쓸었을 때보다도 훨씬 많은 사망자가 발생해 지금까지도 인류 최대의 재앙으로 불린다. 이 독감의 화살은 애쉬의 남편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도 1918년 10월 14일 사망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의 동생인 Andrew Dick Ashe 역시도 그 다음 해에 사망해 버린다.
애쉬로서는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혼을 한 뒤 6년 만에 미망인이 된 것이다. 그녀의 나이 30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은 그녀의 마음을 누가 알아줄 수 있을까? 기록에는 없지만 그녀는 힘든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세계 대전과 남편의 비보 속에서 그녀는 어떤 일들을 해나가야 했을까? 아마도 그녀는 이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했음이 틀림없다. 그 이유는 그녀가 아픔을 당한 후 4년 뒤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2. 북장로회 선교사 애쉬

애쉬는 1922년 북장로회 소속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럼 미국 북장로회는 어떤 곳이었을까? 한 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는 그 시작 기점에 대해 약간의 논란은 있으나 언더우드가 미 감리회 선교사인 아펜젤러 등과 함께 인천의 제물포항에 들어온 1885년 4월을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물론,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언더우드, 선교본부에서 한국 파송 선교사로 첫 공식 임명을 받은 헤론, 가장 먼저 한국에 입국하 알렌이 이러한 이견의 중심에 있다. 북장로회는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이전 1884년 9월 한국에 입국하여 미국 공사관의 무급 의사로 근무하고 있던 알렌이 1884년 12월에 있었던 갑신정변으로 부상을 당한 민영익을 치료한 일을 계기로 한국 선교를 위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이 후 1885년 7월 공식적인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부가 만들어졌으며 의료, 교육 사업과 순회 전도 활동 등을 통해 선교지역을 확장해 나갔다.
북장로회의 성장은 1907년 평양에서 있었던 ‘대부흥운동’이 계기가 되었다. 대부흥운동으로 교인들이 일시에 크게 증가하였고, 이 때문에 한국 선교부와 선교본부에서는 더 많은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마침 안식년을 맞은 언더우드를 비롯한 5명의 선교사에게 선교본부는 한국 선교 지지와 지원을 위한 미국에서의 ‘한국선전운동’을 지시하고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북장로회의 시작과 성장은 바로 이러한 영향들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어떤 능력을 가장 요구 받았을까? 당연한 것이겠지만 바로 언어였다. 북장로회에서 1882년에 간행한 선교사의 파송과 관련한 다양한 기준을 체계화하기 위한 선교사 지침서인 『A Manual Prepared for Use of Missionary Candidates and Missionaries in Connection with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4th ed.』에는 ‘선교사의 임명’부분에서 지원자가 선교본부에 제출하여야 하는 개인정보 중 ‘어학 능력’에 관한 내용이 있으며, 선교지에 도착한 후에 해야 하는 일을 규정한 부분에서는 첫해 말과 이듬해 말에 상임위원회가 선교본부에 선교사들의 현지 어학 능력에 대해 보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어학 능력이 선교사의 파송을 결정하고, 파송된 선교사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애쉬 역시도 이러한 단계를 거쳤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녀는 언어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1922년 북장로회 선교사로 파송되었는데 이때 선교사들의 한국어 공부를 위한 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다. 그 배경은 이렇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으로 인한 북장로회의 성장과 ‘한국선전운동’의 실효로 1908년부터는 이전에 비해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새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선교부에서는 늘어난 선교사들의 한국어교육을 위한 새로운 방안이 필요하였고 그 결과 1908년에는 북장로회 선교부 어학 위원회가 선교부 안에 어학교를 세우는 방안을 보고하고, 1909년에는 공식적인 승인을 받는다. 어학교가 세워지기 전인 1909년에서 1911년까지는 한 달 기한의 어학반(Language Class)이 평양에서 베어드 부인(A.L. Baird)의 주도로 열렸으며, 1912년과 1913년은 ‘연합선교공의회’의 후원으로 평양에서, 1914년에는 서울에서 ‘연합어학교’의 한 달 기한의 한국어 집중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정으로 인해 지속되지 않았던 ‘연합어학교’는 1919년부터 재건하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되어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 기관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애쉬는 1922년에 파송되어 왔기에 이 학교의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절묘한 기간에 왔다. 언어의 능력이 탁월했으며 거기에 한국어 교육까지 전문적으로 받을 수 있는 연합어 학교를 거쳤기에 아주 좋은 혜택을 받으며 선교사로 사역할 수 있었다. 아마 애쉬는 그런 능력을 인정 받아 평양 외국인학교의 교사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평양 외국인학교를 논하기 전에 북장로회 소속 평양선교부를 살펴 본 뒤 일제 사립학교의 분위기를 보겠다.

3. 북장로회 평양 선교부

서울 선교지부가 설립된 이후 타 지역 선교지부 개설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을 때 가장 관심을 집중한 곳은 평양이었다. 이미 1887년 3월 언더우드는 평양에 선교지부를 개설해야 한다는 의견을 해외선교본부에 호소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는 서울에 집중되는 오류를 피한다는 일종의 분산정책을 명분으로 타 지역 선교지부 개설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후 타 지역 선교지부 설립을 위해 부산과 원산에 선교지부 설립절차가 진행되었고 이어 평양 선교지부의 개설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도 시작되었다. 1892년 마펫(S. A. Moffett, 1864~1939)은 조사 한석진을 미리 보내 선교지부 개설을 준비하였고, 이듬해 마펫과 리(G. Lee, 1861~1916)가 평양에 도착하여 장대현교회를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평양 선교지부를 개설하였다. 평양 선교부는 서울 선교지부와는 달리 교회의 설립을 통한 복음전도 사업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발발함으로서 평양 선교부는 잠시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일전쟁 직후 마펫과 리는 즉시 돌아와 평양 선교지부를 재건하였다.
이후 평양 선교부는 놀라울 정도의 급격한 성장을 하였다. 1898년 평양 선교부는 완전 자립 교회 121개, 세례교인 1,050명, 출석교인 5,950명, 헌금액 2,753.80엔을 보고 했다. 그 다음 해에는 완전 자립 교회 153개, 세례교인 1,512명, 출석 교인 6,433명, 헌금액 18,909.62엔으로 증가하였다. 이후에 1907년에 헌금액을 비교해보면 평양선교부가 얼마나 규모가 큰지 알 수 있다. 아래를 보라.

한국인 신자 수(명)
한국인 신자 헌금(엔)
서울 / 7,435/ 9,774,30
부산 / 2,017/ 1,213.54
평양 / 20,414/ 28,745.64
대구 / 6,145 / 3,802.12
선천 / 15,348 / 27,914.38
재령 / 7,428 / 8,706.96

이렇게 성장하는 평양 선교부의 영향 가운데 애쉬 선교사가 1922년 북장로회 평양선교부 소속으로 사역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평양시 신양리의 외국인학교 교사로 재직한다. 먼저 평양 외국인학교를 말하기 전에 당시 사립 학교의 분위기를 살펴 보자.

4. 일제시대 사립학교의 분위기

19세기 말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 국가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고종으로부터 선교가 아니라 교육과 의료사업의 명분으로 허락을 받았으므로 그들의 주된 활동은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는 일이었다.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부 가운데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소속 선교사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이들은 전도-의료-교육의 세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다.
초등-중등-고등 교육으로 이루어지는 학제 가운데 초등학교는 중등학교 준비과정의 성격을 가진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는 거의 예외없이 초등학교를 만들었고 이 초등학교들은 한국교회가 설립하고 유지하며 한국인 교사들이 가르친 자급·자치 기관이었다. 이와 달리 중등학교는 선교부의 재정, 선교사와 미국 후원자의 기부금으로 유지하고 선교사들이 직접 운영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의 체계 속에서 중등학교는 전체의 중심이 되는 기관이다. 일제는 한국에서 되도록 고등교육을 억제하고 일제에 순응하는 충량한신민을 만들기 위해 보통교육 정도의 교육을 추구했다. 이러한 정책 하에서 중등학교는 실질적으로 고등교육기관의 역할을 수행하며 지도층·지식층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일제는 한국 강점 이전부터 사립학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는데 선교부들이 세운 중등학교 역시 통제의 대상이었다. 강점 이후에도 학교교육 문제는 조선총독부와 선교부, 한국인들의 삼각 구도 안에서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갈등하고 대립하였다. 특히 1915년 「개정사립학교규칙」의 발포로 기독교학교에서 예배와 성경 교육을 차단함으로써 총독부와 선교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1920년대에는 신교육령을 통해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은 가르칠 수 있게 되었지만 상급학교 진학에 불이익을 받게 되어 기독교계 중등학교 학생들은 학교 승격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 총독부와 선교부 갈등의 최고점은 바로 신사참배 문제였다. 기독교계 학교에서 신사참배문제는 후에 선교사들의 교육사업 철수로 이어졌고 1937년부터 1939년 사이에 많은 기독교계 학교들이 폐교되거나 관공립학교로 전환되어갔다 일제의 종교 정책에 감리교 학교들은 순응하였지만 장로교 학교들은 폐교되거나 한국인에게 인계되었다.
북장로회 선교부는 타 교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하였으며 학교 역시 가장 많이 설립하였다. 북장로회 선교부는 일제강점기 내내 총독부의 종교교육 정책과 끊임없이 대립하고 갈등하였다. 북장로회 선교부와 총독부의 충돌과 대립의 결과로서 일제의 종교교육 정책이 변화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애쉬는 한국에 왔다. 애쉬가 있던 학교는 그나마 외국인학교여서 그렇게 큰 저항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일제와 가장 큰 저항을 하던 북장로회 소속이었기에 외국인학교였지만 어느 정도의 저항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5. 평양시 신양리의 외국인학교 교사 애쉬
먼저 평양 외국인학교가 어떻게 설립하고 발전과정이 있었는지 보자. 『HKMP』, 곧 미국장로교회의 한국선교사에서 외국인학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을 한 번 번역하여 옮겨 보았다.

“평양 외국인학교는 Baird 여사의 제안으로, Baird내외의 집에서 부모들 모임이 조직된 1899년 2월에 그 시작을 가졌다. 1990년 6월 15일에 이 학교는 6명의 학생으로, Moffett의 집 마당의 작은 건물에서, Louise 양을 교사로 삼았다. Louise 양의 교통비는 Miss Harriette가 지불하였고, 수업료는 학생들의 부모들이 지불하였다. 1900년 가을에 들어서는 이 학교가 Graham Lee선교사 부부의 집 근처에 있는 타일로 만든 지붕이 있는 건물로 이동하였다. 두 번째 선생님은 Mary Armstrong(1902-07)이였으며, 세 번째는 Luise Strang(1907-1910)이었다. 1908년, 역 근처에 거주하고 있는 부모들의 장려로 인해 학교가 더 크게 확장하게 되었으며 이를 위해 재정 마련을 하기로 했다. 1909년 조사로는 124명의 선교사 자녀들이 한국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등학교는 1903년에 시작되었다. Alice Moffett의 리더십 아래, 1912년 9월부터 Lee의 집에서 기숙사가 제공되었다. 9명의 아이들은 Dora MoselyCyril Ross 의 감독(matron)과 함께 하였으며, 뒤를 이어 Miss Dora Mosely와 뒤를 이어 Bell Lucket여사가 감독을 이었다.
1914년에는 첫 기숙사 건물이 세워졌다(21년에 확장됨). 이 학교의 영어 교사(18-21)이자 이후에 M.E. Mission의 멤버가 되는 Marguerite 는 확장된 기숙사에 필요한 기구들을 위해 2천 달러를 기부하였다. 현재 주소에 위치하고 있는 "구 강의 건물"은 1915년에 500달러의 비용으로 리모델링했다. 이 건물은 1925년에 1만7천 달러에 달하는 비용으로 세워졌는데, 이 비용의 1만 달러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거주하는 Livingstone Taylor여사의 선물이기도 하다.
1928년 12월 1일, 보건소가 자리잡았다. 그 다음 해에 두 번째 기숙사가 남장로 선교회의 약 9천달러의 기부로 인해 세워졌다. 마지막으로 세워진 건물은 McMurtrie 실내체육관으로써, 1931년에 세워졌는데 이는 학교에 대한 Robert Mcmurtrie의 섬김에 감사하여 진행된 명망있는 기부로 세워졌다. 중국의 C. E. Scott 목사는 도서관과 체육관에 필요한 중요한 기구들을 선물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숙사를 짓는데 필요한 1만 달러 또한 기부하였다.
학교에 대한 다른 선물들도 있었다. 그것은 피츠버그에 사는 Mrs. George W. Mckee이 기부한 1500 달러와, 칸사스에 사는 Mr.A.A.Hyde의 1만 달러였다.
보건소의 건축을 위해, M.E.Mission은 500 달러, Mrs.Calvin Purdee는 600달러를 기부하였다.
1928년 이래로, 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등록하였는데 이들은 한국에 있는 복음주의 선교사 자녀들과 비지니스를 하기 위해 온 서양인들의 자녀들이다. 전체 숫자 중 20명은 만주와 중국 본토로부터 온 숫자다. 첫 고등학교 졸업생은 1925년, Sarah Timmomns이었다. 1925-1933년까지 69명의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있었고, 학년을 진급한 이들의 숫자는 117명이었다. 41명의 교사와 감독들은 30년간 정규적으로 고용되었다. 2명(Jean Foote그리고 Anna Ashe)이 정규 선교사였고, 4명(Mrs. Luckett, Miss Cleland, Mrs. Thomas, and Mrs. Malsbury)은 한국 선교와 관련된 멤버였다. 다른 9명은 한국의 선교 봉사활동에 참여하였고, 그들 중 3명은 우리의 선교 자체 멤버이기도 했다. 9명의 교사들은 세 선교사들(Miss Adams, Miss Lois Blair, and Mrs. Bruce Hunt) 의 자녀였으며, "한국 선교"의 자녀들이다. 평양에 있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많은 멤버들이 학교를 통한 많은 혜택을 누렸다. Mrs. Rose F. Baird는 미술에, Dr Parker 는 수학에, Mrs. Davind Soltau, Mrs Lutz 그리고 Mrs. Malsbury는 음악에서, Mr. Shaw는 학생 활동을 담당했다.
1921-26년까지 Soltau가 학교의 교장이었다. C.F. Bernheisel D.D 목사가 교장이었던 1930-31을 제외하고는 Mr.R.O. Reiner가 쭉 교장직을 맡았다. 학교는 매년 기숙사비를 포함해서 약 25000 달러의 예산을 운용한다. 모든 협력 선교단체들은 이 예산에 매산 추가금을 더하는데, 자체적인 이사회와 선교를 위한 예산이 교사 한 명의 월급과 맞먹는다. 학교는 기숙사를 9명의 매니저들로 운영하는데, 이 매니저들은 5개의 협력 선교단체들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교장과 다른 세 명의 매니저들이 우리 선교 자체의 멤버들이다. 서울 외국인학교는1901년에 Hulbert 여사가 현재 조선호텔이 있는 위치 근처에 있던 본인의 집에서 15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시작되었다.
1902년에 학교는 거의 동일한 수의 학생들과 Hulbert여사를 교사로 유지한 채 옛날 벨기에 영사관으로 이사했다. 세 번째 해에 학교는 현재 조선은행이 있는 위치에 근접한 곳에 있던 ‘old moore house’라는 곳에서 중국에서 온 Miss Grace Corbett를 선생님으로 한 강좌들를 열었다. 그 다음 해에는 Miss Augusta Scranton이 선생님이었다. 현재 학교를 위한 25명의 헌장 멤버로 구성된 학부모 연합은 1912년 4월에 결성됐다. 학교는 9월에 한 배재 학교 건물에서 Miss Ethel Van Wagoner (Mrs. H. H. Under wood) 를 교사로 개교했다. 1914년에 성곽 안에 위치한 ‘작은 빨간 학교 집 little red school house’가 1000달러로 지어졌다.
두 번째 방은 1916년에 추가됐다. 그리고 다시 1918년에는 건물이 3개의 방으로 나눠졌다. 1912-16년까지 출석 인원이 평균 28명이었는데 Miss Van Wagoner만이 유일한 교사였다. 그 다음 해에는 두명의 교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Misses Gertrude Hardie 와 Sue Hopkins로 36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7-22년까지 5년동안 평균 학생 수는 50명이었고 세 명의 교사가 있었다. 고등학교는 Miss Florence Boyce 를 교사로 1919년에 시작했다.
1920년 여름에 한국을 방문한 Mrs. William 여사의 도움으로, Russell 여사의 유산 중 15000달러라는 선물을 1922년에 받았다. Lefevre 땅이라고 알고 있는 7/6 에이커에 해당하는 토지위에 세운 선물들은 30000 달러로 샀다. 서울 외국인 공동체의 멤버들은 학교를 위해 어떤 한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기구를 사기 위한 10000달러를 모았다. 다른 어떤 건물은 거주 건물로 사용되거나 세를 내줬다. 현재 학교 건물은 1923년에 지어졌다. 하지만 1924년에 2층이 세워졌는데, 이는 Mr. Morris가 7000달러를 들였기 때문이다. Mr. Morris가 학교를 위해 행한 헌신을 기리는 마음으로 이름을 지었다. 그의 사업처는 이 건물 바로 앞에 위치한다. 이 강당은 주일학교와 서울 유니온 교회등과 같은 모든 예배를 위해 정기적으로 사용되었다.
1923년에 새 건물이 지어진 이래로, 평균 출석 인원은 80명이었고 1933년에는 100을 넘는 기록을 세웠다. 이들중 약 20명 정도가 고등학교에 재학했다. 학교 역사상 여러 차례 기숙사를 지어야 한다는 의견이 진지하게 제시되었다. 하지만 평양의 현 기숙사 운영 사정과, 서울의 기숙사를 위한 특별한 기부금의 부족, 그리고 학교의 10000 달러의 빚 때문에 추가적인 건축은 현명한 선택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학교 역사에서 정기적으로 채용된 40명의 교사들 중 한명인 Miss Henderson 은 5년간 미국장로교의 해외 선교 위원회로부터 선교사로 부양받았다.
중국 산둥성 선교를 하던 Lautenschlager 목사도 같은 위원회로부터 1928년에 지원을 받았는데, 이 해는 중국에서 국내 갈등이 있던 시기여서 많은 선교사들이 일을 할 수 없었다. 6명의 옛 교사들은 선교사 자녀들이었다. 40명의 정기 교사와 더불어, 서울에 있는 많은 다른 선교사들은 교육, 도서관 봉사, 놀이(entertainments)에 오랫동안 봉사했다. 수년 간 학교는 영국 선교회 출신 C.hunt 신부의 유능한 훈련을 통해 아주 선망 높은 셰익스피어 연극을 선보였다. 1919년 이래로, 교장들은 차례대로 나열대는 인물들과 같았다. (이름 순서대로 교장 연혁)Mrs. Jack, Miss Florence Boyce, Miss Lucy Norton, Dr. A. L. Becker, Miss E. B> Orr, Miss Bertha Slye, Miss Lilian Arnold, Mrs. H. H> Underwood, Dr. A. L. Becker, and Mrs. W. M. Clark.
학교는 학교 협회(association)에서 선출된 9명의 집행위원을 운영한다. 이와 더불어, 교장은 직권을 가진 멤버다. 연간 예산인 10000달러를 위해, 1500달러가 6개의 협력 선교단체로부터 기부 받는다. 최근까지 이 기부액의 3분의 1 정도를 선교와 기숙사를 위해 한 교사의 절반 월급으로 받았다. 현재는 학교가 100000달러의 기부금을 기다리고 구하고 있다. 학교 과정은 뉴욕의 과정과 동일한 36주 과정을 따른다. 첫 고등학교 졸업생은 1919년에 Miss Minnie Frehen 이었다. 1919-1933년까지 22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여기까지가 바로 평양 외국인학교에 대한 자세한 소개글이다. 여기 글에서 나오는 Ashe가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정식 교사였다. 외국인학교는 주로 외국인들의 자녀들을 가르친 학교였다. 아마 이로 추정해 보건데 그녀는 영어와 한국어 능력이 탁월했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한국에 대해서 가르쳐야 했기에 한국어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는 걸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북장로회에서는 언어능력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애쉬의 언어 능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팀이 자료를 찾는 중에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공부를 했던 선교사 자녀들의 기사를 찾게 되었다. 기사 내용은 이렇다.
“그들은 1900년대 초반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된 의사 로버트 윌슨 부부의 자녀들인 7남매였다. 전라도 순천에서 자랐고, 모두 평양 외국인학교를 졸업하였다. 윌슨가에서 조선을 빼놓으면 가족의 역사를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평양 외국인학교 남학생들은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숭실학교,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조선 크리스천컬리지 등 평양 시내의 다른 조선인 학교 학생들과 자주 운동경기를 가졌다고 한다. 윌슨 박사는 축구에선 조선인 학생들이 거의 이겼고 농구와 아이스하키는 자신들이 더 잘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지금은 그 모든 순간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93살의 라바트와 91살의 존 윌슨 박사 형제가 있다. 이 정도 고령이면 잊을 만도 한데 평양 외국인학교의 교가를 또렷이 기억한다. 1928년 졸업생인 누나 엘리자베스 씨도 기억을 더듬으며 노 형제들의 장단에 끼어들었다.
평양 외국인학교는 1900년에 개교해 40년 간 지도자를 육성하다 1940년 11월 미국과 전쟁 중이던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 폐교됐다. 이 학교는 1914년 학생 기숙사가 세워지고 미국에서 유능한 교사들이 건너오며 급성장했다. 평양이 동양 기독교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조선 전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선교사, 외국인 상인들이 자녀들을 평양 외국인학교로 보냈다. 존 윌슨 박사는 40년 동안 5백84명이 이 학교에 등록해 수학했고, 그 가운데 1백88명이 졸업했다. 중간에 학제가 개편됐지만 중등학교 과정 7년제로 운영된 이 학교에는 세계적인 기독교 부흥사 빌리 그래엄 목사의 부인인 고 루스 그래엄 씨를 비롯해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배출됐다. 졸업생들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그 중 다수가 한국에 남아 이화여전 등 수많은 대학과 병원을 설립하며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이런 내용이었다. 1899년에 시작된 학교가 1940년에 문을 닫은 것이다. 또, 놀라운 사실은 빌리 그래엄 목사의 아내인 고 루스 그래엄이 평양 외국인학교의 학생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이 학교를 거쳐 갔고 조선의 근대화를 기여한 사람들도 많았다. 분명, 애쉬는 학교에 있던 11년의 기간 동안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들이 이토록 대한민국에 영향을 끼친 데에는 애쉬라는 학교 선생님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귀중한 가르침이 한국과 미국에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이다.

6. 지금의 평양 외국인학교의 정체는?

우리 팀은 조사하던 중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양 외국인학교가 지금도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의 장소는 유엔 및 외교관을 포함한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로 문수동에 위치한다. 애쉬가 활동 하던 때는 신양리에 위치해 있었기에 지금의 신양리 위치를 알아내어 확인해 보면 쉽게 확인될 줄로 보였다. 그렇게 찾아보니 지금의 신양리는 문수동이 아니라 창광거리였다. 그렇다면 다른 학교일까? 계속 조사해 보니 같은 학교였다. 한국기독교생활사료관이 전시된 곳을 갔다 온 분의 블로그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과거에도 명칭을 평양 외국인학교라고 쓴 것이다. 폐교가 되었다가 이후 다시 열린 것으로 확인된다. 평양 외국인학교를 언급한 글을 찾게 되었는데 그곳의 기록을 보니 학교를 폐교시켰다가 후에 러시아 대사관이 있는 자리에서 다시 연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다시 열린 평양 외국인학교는 예전처럼 기독교 학교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후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로 통일이 된다면 평양 외국인학교를 다시 기독교 학교로 바꾸길 소망한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애쉬 선교사가 사역했던 열매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리라. 애쉬 선교사는 많은 역경을 보냈고 젊은 나이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렇지만 그녀의 신실한 사역은 아직까지 끝나진 않았다. 외관은 그대로인 평양 외국인학교가 있고, 통일이 되어 다시금 그분이 사역이 이어진다면 더더욱 바랄 일이 없을 것이다. 세계 1차 대전, 스페인독감, 남편의 죽음, 북장로회 선교사, 평양 외국인학교 교사를 거치고 귀국후 바로 돌아가셨다. 짧지만 세상의 힘든 일들을 짊어지셨고 잘 감당해 나가셨다.
2018-12-05 21: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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