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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Corfe, Charles John(1843-1921, ANG)
 작성자 : 김정광  2018-12-06 00:25:25   조회: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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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기본사항

1. 이름: Charles John Corfe / 코르프 / 한국명: 고요한(高要翰)
2. 생몰년도: 1843 – 1921.7.4
3. 출신 및 소속: 영국 솔즈베리(Salisbury) 출생, 영국성공회
4. 가족사항: 독신
5. 학력: 영국 옥스포드 올 소울 컬리지(All Souls College, Oxford) 졸업
6. 한국선교기간: 1889.09.29. - 1904.7
7. 연표:

1865. 옥스퍼드 올 소울 컬리지 졸업
1867. 사제 임명 후, 성미카엘학교(St. Michael College) 교사, 및 영국 종군 신부로 활약
1881. 중국 산동성 지푸 소재 스코트(Scott) 주교 비서로 활약
1883. 다시 영국 해군 종군 신부로 활약
1889.11.1.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벤슨(Edward White Benson) 대주교에 의해 한국 초대
주교로 서품
1890.7.1. 한국 선교를 알리기 위한 영문 잡지 출간
1890.9.29. 6명의 동행자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입항. 은퇴 내과의사 와일즈(Julius Wiles)와 외과의사 랜디스(Eli Barr Landis,) 두 의사;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 조마가) 와너(L. O. Warner) 두 신부; 파우널(J. H. Pownall), 데이비스(M. W. Davies) 6명
1890.9.30. 코프르 일행 서울 도착
1890.10. 제물포에 성누가병원 개원
1891.3.6. 낙동에 선교본부 개설하여 본격적인 선교활동
낙동성당, 정동성당 설립, 동만주지역 순회
1891. 정도에 성베드로병원과 낙동에 성마태병원을 개원
1892. 성베드로수녀회 초빙하여 정동에서 병원사업 추진
1898. 공도문을 한글로 번역, 출판. 성가집 교리서 전도문서 발간. 서울과 제설립된 3개의 병원을 위해 헌신. 선교사업의 재정문제 위해 1901년과 1903년 재차 귀국했다 귀환
1904.7. 주교직 사임하고 15년간의 한국선교사업 정리.
중국선교사로 북경, 만주, 대련 등지에서 활동
1921.7.4. 영국 런던에서 소천






II.선교사 소개

1.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준비시킨 선교사
영국성공회는 북장로교와 북감리교 선교회에 이서 세 번째로 한국선교를 시작한 교단이다. 1890년 영국성공회 선교기관인 “해외복음전파회”(The Society for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가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코프(C. J. Corfe) 선교사에 의해 영국성공회가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이 본격적으로 착수된다. 하지만 그가 한국 제물포항에 발을 딛기 전까지는 한국의 역사적 정황변화와 수많은 사람들의 기여가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흥선대원군과 프랑스와 있었던 병인양요로 인해 조선은 쇄국정책과 천주교탄압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1874년에 흥성대원군이 하야한 후 정부의 태도는 훨씬 완화되었다. 그리고 1876년 조선이 개항을 하자, 1880년경부터 영국은 조선과 통상 조약 체결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 조선과 영국 사이의 조영수호통상조약이 1882년부터 지속적으로 논의되다 1884년 5월 1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한편, 일본선교 창시자 선교개척가인 쇼(A. C. Shaw) 신부는 한국선교 사업에 대해 1880년부터 구상하기 시작한다. 조영수호통상조약이 발효되자 영국선교사들은 한국 정부가 병원설립에 필요한 의사와 영어와 기타과목을 가르칠 교사들을 환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7년에 북중국의 스코트 주교와 일본의 빅커스테드(Bickersteth)는 한국을 방문하고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에게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호소했고, 이 안건이 복음 전도회에서 다시 논의된다. 1888년에 북중국 주재 주교에게 2,500파운드를 보내 한국선교사업 개시에 사용하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일찍이 영국해군 종군사제로서 고위층의 신임을 받고 있던 코르프 사제가 1889년 11월 1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주한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처럼 코르프가 제물포항에 한국선교사로 오게 된 것은 단순한 “파송”이라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련의 과정들이 있었다. 한국의 봉건적인 정책에서 개방 정책으로의 정세변화가 있었고, 이러한 바람을 타 영국 성공회의 많은 인사들이 한국선교에 대한 필요성을 호소하며 물질과 인적자원을 투자하였다. 이러한 수많은 과정들이 코르프의 인천 상륙을 낳은 것이다.

2. 한국선교에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바친 열정파 선교사
코르프 선교사는 사실 한국선교사이기 전에 1881년에 중국 산동성 지푸 소재 스코트 주교의 비서로 활약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비서로 활약하던 중, 중국을 왕래하던 한국인들을 만나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는 2년간의 중국 사역을 마무리하고 영국으로 돌아가 한동안 다시금 해군종군 신부로 활약한다. 그러던 중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한국선교사로서의 소명을 깨닫고 한국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준비를 한다.
우선 그는 1889년 주한주교로 서품 받은 후 6개월 동안 한국선교사업의 대표자격으로 미국 내 9개 도시와 캐나다의 8개 도시, 일본의 3개 도시를 방문하여 동역자들을 구하고 후원 동정을 얻었다. 그리고 한국 선교에 대해서 알리기 위해서 영문잡지 모닝캄(Morning Calm)을 낸다. 이 잡지는 한국과 관련하여 외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잡지이며, 현재도 연간 2회 발행되고 있다. 모닝캄은 외국 독자들에게 한국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동시에 재정 지원을 끌어내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코르프는 한국선교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발로 뛰며 동역자들을 구하고 후원을 호소하였다. 또한, 모닝캄이라는 잡지를 통해 영국과 전 세계 신자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알렸다.
두 번째로, 그는 경제적인 지원이 좋지 않았음에도 사명을 따랐다. 영국의 복음전도회에서는 당시(1889-90) 1년에 1,500파운드의 지원을 보장했지만, 한국 선교사업은 처음부터 “사도의 내핍생활 성약 하”에 출발하였다. 그렇기에 당시 주교와 동료들은 봉급을 받지 않았으며, 소액의 공유재산으로 공동생활 했다고 한다. 코르프는 분명 영국에서 안정적인 종군 신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지위를 포기하고 낯설고 지원이 열악한 한국을 택하였다.

3.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한국성공회 선구자
그는 개척전도에 있어 돈이나 건물보다도 오히려 기도와 인물양성에 역점을 두고 출범했으나, 그래도 우선 선교의 근거지로 제물포와 서울에 토지를 매입하고 강화도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인천에서 세를 내서 방 하나는 성당으로, 다른 방 하나는 진료소로 썼다. 한국 선교의 첫 사업은 의료 봉사였다. 그와 그의 동역자들은 한국인을 위한 선교에 주력할 것과 서울, 인천, 강화로 선교의 터전을 개척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코르프의 선교의 시작은 땅을 밟는 것부터 시작이 되었고, 한국 땅을 향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하나씩 이루어가고 있었다. 영국 성공회 선교부의 지원이 있었지만, 두 명의 선교사는 한국에 복음을 전하고 그것을 통해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시작하게 된다. 그 이후에 많은 동역자들이 그들의 선교를 돕기 위해 모여들게 되면서 선교의 초석을 놓게 되었다. 그를 통해 한국에 성공회가 첫 발을 내딛었고, 영혼과 사회에 관심을 두었다.

4. 병원개원과 시작된 선교, 복지 사업과 문서선교의 활발
1890년 10월 제물포에 성 누가병원 1891년 정도에 성 베드로 병원과 낙동에 성 마태 병원을 개원했다. 경기도 여주와 충북 진천에도 병원을 설립하여 의료 선교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제물포와 서울에서 의료선교와 고아원 복지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선교지역도 점차 확대되어 서울 시내 낙동과 정동 이외 창동과 광나무, 마포 등지와 경기도의 수원, 백천, 강화도 등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그동안 12교회를 설립하고 5개의 병원과 성 베드로 수녀원을 유치하여 후에 성가수녀원의 기초를 놓았으며, 복지사업으로 고아원 1개소, 학교 1개소를 설치했다. 또한 신앙서적도 자체 출판소를 두고 11종의 서적을 출판하여 문서선교에도 박차를 가했다. 성공회는 낙동에 인쇄 시설을 갖추고 셩교이증, 성회송가 등을 발간하여 문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오기 전 한국인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가 선교를 떠나기 전 자신의 후원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한국에 한국인들을 위한 병원을 세워 치료하는 것이 가장 큰 비전이었고 자신이 해야 할 소명이라고 여겼다. 이후에 의료 활동을 하면서 사회의 열악한 상황을 보게 되면서 단순히 고치는 활동에 끝나지 않고 복지 사업과 문서 선교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들의 이런 활동들은 성공회의 선교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선교의 장을 활발하게 넓혀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5. 한국건축 문화에 기여
코프가 한국사에 기여한 한 가지 중요한 분야는 바로 한국의 교회건축 에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코프가 직접 설계하고 건축에 참여한 건축물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강화온수리성공회사제관,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성미카엘성당(인천내동성공회 성당),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등이다.
이들 영국성공회 건축물들은 모두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다. 서울성공회성당은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 제35호, 강화온수리성공회사제관은 인천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41호, 강화성당은 사적 제424호,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있다.
이 건축물들이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 갖는 의의는, 코르프 주교가 단순히 서양의 건축 기술과 형식을 그대로 한국 땅에 이식시킨 것이 아니라, 한국 토종 목재와, 한국의 기와지붕, 한국의 건축형식을 어떻게서든 서양 건축과 융합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당시 한국인들에게 조금이라도 친숙한 영향을 주고자 했을 것이다. 즉 코르프는 선교사로서 선교지의 인문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6. 14년의 한국 선교를 마무리한 위대한 소명자
1894년 동학혁명, 뒤이어 벌어진 청일, 러일전쟁으로 한국이 입은 피해는 막심했으나 선교를 위해서는 오히려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시기에 코르프는 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성직자의 충원이 여의치 않았고, 이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가던 한국에서의 선교 전망이 불투명했다. “나는 최근에 와서 내가 한국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 자명하게 나의 꿈을 깨뜨린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새로운 일에 적합한 새 주교가 절실히 요청됩니다”라는 것이 그의 이임사였다. 그는 의료선교에 역점을 두었으나 랜디스(Landis)박사가 1898년 4월 16일 타계(他界)하고 1904년 서울에 세브란스병원이 문을 열게 되는 것이 그가 생각한 여러 가지가 한계점에 도달한 것을 느꼈으며 1901년 조마가 신부의 귀국과 인쇄소를 계속할 수 없었던 것도 그의 사임 결정에 국제정세의 변화와 함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코르프가 헌신한 14년의 한국에서의 선교는 단순히 시간을 들인 것 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노력, 물적 자원을 다 들인 선교였다. 여러 가지 여건과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좋지 못한 상황에 있었지만, 그는 한국 성공회의 선구자로서 그의 역할에 충실했고, 영혼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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