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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Ohlinger, Franklin(1845-1919, M) / Ohlinger, Bertha Schweinfurth
 작성자 : 봉군  2018-12-06 02:36:04   조회: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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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기본사항

1. 이름 : Ohlinger Franklin, 올링거 프랭클린, 茂林吉(무림길)
2. 생물연도 : 1845-1919
3. 출신 및 소속 : 미국 오하이오주 출생
4. 한국선교기간 : 1887.12-1893.9 (5년 9개월간)
5. 연표
1865-66 저먼왈레스칼리지에서 공부
1870 중국 복주지방 선교사로 전도, 교육사업에 매진
1876 안식년으로 귀국해서 슈바인푸르트와 결혼
중국선교지에 귀임해서 중서대학 창립, 발전에 공헌
1887.12 아펜젤러의 요청으로 미감리회 선교사로 내한
1888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 창설, 초대 사장에 취임
1888 노병일 권사와 인천내리교회 개척 설립
1889 한국예수교문서회(->대한기독교서회) 초대 회장에 피선되어 기독교 서적 출간, 성교촬요, 미이미교리문답, 라병론 등 출판
1890-93 정동교회 담임
1892 최초의 영문월간지 창간
1892 관서지방 순방후
1893 선교부 설치하기 시작
1893 사임하고 귀국
1895-1911 독립선교사로 중국에서 저술, 교육사업
1919 소천

6. 가족사항
부인 : Ohlinger Bertha Schweinfurth (올링거 / 독일 / M )


II. 선교사 소개 : 외링거 프랭클린
프랭클린 올링거는 1888년 1월부터 1893년 9월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한 미국 북감리교 출신의 선교사다. 올링거 선교사는 한국으로 파송되기 전 중국에서 16년간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올링거가 한국에서 첫 사역을 시작할 당시 그의 나이는 42살이었다. 때문에 20대 청년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언더우드나 아펜젤러에게는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한 그의 합류로 많은 조언과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사역은 한국 기독교는 물론 인쇄와 출판 및 교육 사업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는 한국 선교 첫 해에 우리나라 최초의 인쇄소인 삼문활판소를 배제학당에 설립하였고, 현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성교서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잡지인 역시 그에 의해 창간되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Yanghwajin Foreign Missionary Cemetery)



1. 올링거의 생애와 활동 초기 한국 북감리교의 선교 신학과 정책, 옥성득 교수(UCLA 한국학 연구소)


올링거는 1845년 11월 29일 미국 오하이오주 샌드스키 카운티 프레몬트 근처에서 태어났다. 초기 식민지 시대에 이주한 그의 독일계 조상들은 독립전쟁에 참가한 미합중국의 애국자들이었다. 그들은 인디언들의 생활 풍속과 문화에도 친숙하였다. 올링거는 남북전쟁 때문에 정규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으므로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어 이를 보완하려고 하였다. 그는 부친과 형 조지가 전쟁에서 돌아온 1865년에 오하이오 베리어 소재 저먼 왈라스 대학에 입학했다.

저먼 왈라스 대학이 위치한 베리어는 원래 1836년 일체의 술ㆍ커피ㆍ차ㆍ담배를 금지하는 마을헌법을 바탕으로 완전한 성화와 천년왕국론에 입각한 실험적인 ‘성경적 공동체’로 출발한 역사를 가진 교육도시였다. 초대 교장 나스트를 초빙하여 1864년 4명의 학생으로 개교했는데, 그 목적은 “미국 내 독일인에게 과학적 교육과 성경적 기독교를 진작하는 것”이었다. 올링거는 이곳에서 2년간 사회개혁적이며 복음적인 독일 감리교 교육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설교자로서 출발하였다. 미시간의 사기노와 베이시티 독일 감리교회에서 1년, 펜실베니아 피츠버그의 독일 감리교회에서 2년간의 목회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이 때 그는 선교사로 나갈 것인가 도시 중산층 목사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찾아온 감리사가 선교사로 갈 것을 권한 것을 계기로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다.

올링거는 1870년 가을 북감리교 중국 선교의 중심지였던 복건성의 수도 복주에 파송되었다. 그곳에는 나중에 일본과 한국 감리교 선교를 개척한 매클레이(Robert S. Maclay 1824~1907)가 1848년 이후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올링거는 선배 선교사인 매클레이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당시 선교 이론은 앤더스(Rufus Anderson)의 ‘삼자’ 이론이 지배하였으므로, 선교는 토착교회 설립을 목표로, 본토인 목회자를 양성하되, 영어 대신 중국어로 교육하는 노선을 따르고 있었다. 올링거는 1871년 첫 성경학교-후에 볼드윈신학교, 유니언신학교로 발전-를 조직하였고, 1874~5년에는 최초의 한문 신문인 순산사자(Zion’s Herald)-1903년에 화미교보(Christian Advocate)로 발전-를 발간하였다. 1876년 귀국하여 오하이오 데이턴의 독일 감리교회 목사 존 슈바인푸르트의 딸인 베르타와 혼인하였다. 이 때 독일 감리교회의 설립자인 나스트 박사도 참석하여 이들의 앞날을 축하해주었다.

선교 제2기인 1876년부터 1887년까지는 본격적인 선교 사업 진행기였다. 1876년에는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설립한 성경학교에서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성공적인 성경학교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교인들의 요청과 일본에 있던 매클레이의 제의에 따라, 올링거는 1881년 최초의 근대 학교인 복주 중서학원을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학생 30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비기독교인의 자녀들이었다. 이 대학의 설립은 특별히 선교사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도와 고등교육 간의 갈등이라는 19세기 선교의 난제가 재현되었다. 논쟁의 핵심은 영어 교육 문제였다. 소수의 고등 교육지지자 가운데 영어교육 지지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올링거는 영어 교육이 외국인 제국주의자들의 종 대신에 중국을 위한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이유를 들어 대학 설립을 관철하려고 하였다. 이는 자신이 독일어를 하는 가정에서 자라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 사회 신분 상승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앤더슨의 ‘삼자 정책’ 노선을 따르던 많은 선교사들이 ‘신교육 운동’을 추진하는 올링거를 반대했고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특히 1883년 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자 논쟁은 가열되었다.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1887년 가을 선교부는 결국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던 올링거 부부를 한국으로 임명하였다.

올링거 부부의 전임은 선교 개척지 한국 감리교 선교회 진영을 크게 보강시켰다. 특히 20대의 젊은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던 당시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회에 동일한 한문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선교 경험을 한 42세의 장년 올링거가 부임해오자, 모두들 그의 조언과 조정을 기대하게 되었다.

2. 문서선교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 (생명의말씀사, 2004), 609-610.

“기독교 문서는 문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희생을 통해 개인, 사회, 그리고 백성의 삶을 고양하고, 정화하고, 그리고 영성화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한국성교서회에 언더우드와 뜻을 같이하는 올링거(F. Ohlinger)가 회장을 맡았고, 헐버트(H. Hulbert)가 부회장에, 연락 간사는 언더우드가, 서기는 스크랜톤(W. B. Scranton)이, 그리고 회계에는 말콤 펜윅(Malcolm Fenwick)이 맡았다. 구성원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성교서회는 처음부터 문서 선교를 통한 한국의 복음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교파를 넘어섰다. 문서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한 이들의 협력으로 날로 번창하였다. 1897년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자 서회 명칭도 “대한성교서회”로 바뀌었고, 1915년 대한성교서회는 다시 조선예수교서회로 명칭을 바꾸고, 그 해 출판위원회를 조직했다. 한국예수성교서회는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두 개의 감리교 선교회의 적극적인 협력과 참여를 통해 한국교회 선교 초기는 물론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하는 기간 동안 문서를 통해 한국교회의 복음의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한국 선교 첫 해에 우리나라 최초의 인쇄소인 삼문활판소를 배제학당에 설립했고, 현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성교서회를 조직해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잡지인 ‘The Korean Recoder’를 창간했고, 한국인 최초로 목사가 된 김창식을 하인으로 데리고 있던 중 전도하여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한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여러 전도 문서의 번역 출판뿐 아니라 그가 쓴 설교학과 목회학 저서들은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신학교 교재로 채택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그의 아내와 함께 초기 한국 감리교회 찬송가 대부분을 번역해 보급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프랭클린 올링거는 후대의 기독교 역사학자들에 의해 미국 북감리회의 초기 선교 신학을 대변한 선교사로 19세기말의 선교 신학의 주요 흐름이었던 ‘기독교 문명론’(Christian civilization)을 한국과 중국, 일본의 선교 현장에서 구현하였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기독교타임즈


3. 전통적인 웨슬리안 복음주의의 신앙생활 가르침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 532.

초기 감리교 선교사들이 전통적인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에 확고하게 서 있었다는 사실은 1892년 제2대 정동감리교 담임 목사 올링거의 보고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는 항상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위스키와 담배 냄새가 풍길 때 나는 그것은 감리교인(Methodist)은 아님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적당한 규범을 가지고 많은 심적 고통과 곤란에 대하여 계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나는 내년에 우리 교회가 절대 금주자들의 교회(a church of total abstrainers)라는 표준에 이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퇴회시킨다는 것을 공문으로 명확하게 공개해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신자의 생활 규율에 있어서는 올링거만 아니라 아펜젤러 역시 매우 엄격했고, 그 외의 초기 감리교 선교사들 모두가 같은 입장이었다. 전통적인 웨슬리안 복음주의 신앙이 이들의 신학과 선교사역과 가르침 속에 그대로 용해되어 나타난 것이다.

4. 원산 선교 사역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 754.
.
원산은 경관이 빼어나고 수려한 항구 도시로 중요성을 인식한 여러 선교회들을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북감리교도 선교를 시작해 올링거와 의료 선교사 윌리엄 맥길을 이곳에 정착시키고 “기독교 서적도 팔고 병자도 치료하고 지방사업을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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