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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Anderson, George(1893-1976, AP) / Anderson, G.
 작성자 : 유정석  2018-12-06 16:35:16   조회: 1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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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앤더슨 생애

1983년 호주 빅토리아주 멜버른에서 출생 & 성장
1916년 멜버른 오몬드신학대학 졸업
남 호주 포트 어거스타 교구 목회(6년)
1922년 9월 한국 선교 시작
양산, 밀양, 김해, 언양, 울산, 동래 지역 순회 목회
함안, 창녕, 창원, 진주 교회 목회
1934년 호주 귀국
1939년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 총회 해외선교부 총무
1939년 호주대표단 한국 방문 인도
1946년 호주대표단 한국 방문 인도
1952년 1월 한국 선교사로 다시 한국 입국
1954년 7월 호주 귀국
1954-1955년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 총회장
1976년 사망

선교사
조지 앤더슨 (Rev George Anderson. MA, 1886-1976. 6.12), 한국명: 안다손 본 글은 크리스천 라이프 & 에듀 라이프 AUSTRALIA에 수록된 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58) 조지 앤더슨 목사 에 대한 글이다.


조지 앤더슨은 멜번에서 자라났다. 그는 정신적인 면에서 고상했고 학업에서 탁월했다. 그는 또한 훌륭한 스포츠맨이었다. 그는 1906-8년까지 3년 동안 사우스 멜번 풋볼클럽에서 센터하프백을 맡았고 풋볼과 크리켓에서 유니버시티 블루(University Blues)상을 받았다. 그는 오몬드 칼리지를 졸업한 후에 목사 안수를 받고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포트 오거스타(Port Augusta) 교구에서 목회를 했다. 그는 1948년 바이올렛 이사벨 코스텔로와 결혼했다. 그는 1922년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고 사우스오드트레일리아 장로교회의 후원을 받고 아내와 딸 진(Jean)과 함께 1922년 9월 16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 후 12년동안 조지 앤더슨은 안수 받은 선교사들에게 아주 전통적인 역할이 되어왔던 활동에 종사했다. 그는 선교회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빠르게 확보했는데, 그의 진실성과 철저함, 통찰력이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주오 양산, 밀양, 김해, 언약, 울산, 동례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순회활동을 했다 그는 맥켄지가 휴가를 떠나 있는 동안 나환자요양소를 돌보는 책임을 맡았다. 1932-2년 한 해 동안 그는 마신지역-함안, 창녕, 창원의 교회들을 보살폈고, 1933-4년 한 해는 진주지역의 교회들을 보살폈다. 그는 또한 사경회들과 성경학원에서 가르쳤다.

그는 심각한 건강악화로 인해 1935년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나 회복된 이후 1937년 멜번에 있는 해외선교위원회 총무를 돕는 행정 부총무로 임명되었고 1937년에는 총무가 되었다. 그는 1939년 총무의 자격으로 한국에 와서 4개월 동안 선교회의 많은 기관들이 당국에 의해 폐쇄되고 있는 현안을 선교사들과 논의했다. 1946년에 그는 태평양 전쟁 이후 상황에 대해 평가하기 위해 한국에 다시 와서 선교회 재건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지역교회 지도자들과 다른 선교회들의 대표자들과 논의했다. 그리고 그는 선교부의 위원들이 그 상황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방대한 양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두 번째 방문을 위해 1949년 4월 17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광범위하게 협의를 가졌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본국 선교부는 그가 한국에서 더 선교사역을 하도록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조지 앤더슨은 모든 선교활동을 한국인이 통제해야 한다는 강한 의식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기관이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외국인 재단을 세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관습이나 방법들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었고, 다르다는 이유로 관용하지 못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신학적으로는 개방적이고 포괄적이었고, 신학적 엄격성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친절하고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교회의 재정에 대해 극도로 신중했다.

앤더슨은 1952년 1월에 다시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고 3월에 도착했다. 앤더슨 부인은 멜번에 남았다. 그는 1952-4년까지 선교회의 중심역할을 했다. 그는 유일한 선배 남자 선교사였고 많은 교회지도자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국인 지도자는 물론 선교부와 호주 교회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선교회를 감독했고 노회원이며 총회원이었다. 그는 한국장로교회가 분열되는 시기에 광범위하게 순회를 했고 많은 한국교회와 교회지도자들과 상담을 했고, 지역교회들 안에서 정기적으로 설교했다.
조지 앤더슨은 1954년 7월에 최종적으로 한국을 떠났다. 그 해에 그는 1954-5년 임기의 빅토리아장로교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호주장로교회 총회는 1954년 10월에 그를 호주장로교선교부(APBM)의 위원장으로 선출했고 1958년까지 그 임무를 수행했다. 그 해를 시작으로 앤더슨은 18개월 동안 선교부의 상임총무로서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어려운 시기에 직면한 한국의 선교회에 지도력을 보강하기 위해 짐 스터키 목사를 다시 한국으로 보낼 수 있었다.

조지 앤더슨 목사의 선교 동기 정병준, 『호주장로회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189.

앤더슨은 멜버른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 했고 1911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회계사로서 그의 직업을 포기하고 1914-16년에 오몬드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빅토리아 해외 선교위원회가 한국에 보낼 선교사를 찾고 있다는 호소를 듣고 자원했다. 그는 새로운 선교정책이 수립된 이후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선교사였다. 1922년 8월 1일 한국을 향해 출발했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참여 정병준, 『호주장로회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256.

한편, 해외선교위원회가 한국으로 갈 선교사를 열심히 찾고 있을 때, 조지 앤더슨 목사는 한국선교사로 자원했다. 1922년 8월 1일 그는 딕슨 양과 함께 한국으로 출발했다. 앤더슨의 한국선교사 파송은 결과적으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의 참여를 가져왔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는 연간 600파운드의 선교비와 앤더슨의 주택비 1,000파운드를 지원했다. 또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여선교연합회도 한국의 전도부인들을 지원했다.

해외선교위원회의 총무 정병준, 『호주장로회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289-290.

1939년 빅토리아 장로교총회는 조지 앤더슨을 새로운 해외 선교위원회 총무로 임명했다. 앤더슨의 임기는 공식적으로 7월부터 시작했다. 총회는 그해 한국선교 50주년을 기념하면서 한국에 보낼 대표단을 임명하면서, 한국에서 강요되고 있는 신사 참배와 반대운동의 진상을 신중하게 조사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 대표단은 앤더슨 총무, 해외선교위원장 제임스 존스 목사 부부, 장로교여성청년회의 회장 필리스 마틴, 여선교연합회 해외선교총무 엘리자베스 켐블과 그녀의 여동생 애니 켐블로 총 5명이었다. 대표단은 8월 12일에 멜버른을 출발하여 10월에 한국에 도착했다. 대표단은 1940년 2월 14일 총회 본부에서 자신들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한국을 방문한 대표단 전원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선교협의회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들은 한국교회가 국가의 통제 아래 있는 교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에 있는 선교회가 11‘교육과 일상적인 교회 사역과는 다른 전도“의 영역에서 선교사역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교협의회의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
선교협의회의 초기 입장은 다음과 같다. 에디스 커, 조지 앤더슨, 양명득 역, 『호주장로교 한국선교역사 1889-1941』 (서울: 동연 2017), 152.
“신사참배에 대한 호주 선교회의 입장은 기독교 증언이 타협되지 않는 선에서 정부의 요구를 가능한 받아 주기를 원했다. 호주장로교선교회에서는 황제와 일본을 위하여 신사 앞에서 하나님께 묵상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솔직한 타협을 추구하였고, 그 조건으로 신사 참배와 헌신의 의식은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후의 선교협의회의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에디스 커, 조지 앤더슨, 양명득 역, 『호주장로교 한국선교역사 1889-1941』 (서울: 동연 2017), 96.
1936년 2월 선교협의회는 회의를 하고 이렇게 밝힌다. “호주 건교부는 황제폐하를 향한 존경과 충성을 느끼며...모든 국가적 행사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복종과 충성의 덕목을 진흥하기 위한 의미를 인식하며... 그러나 우리는 유일한 하나님만 예배하므로... 신사나 다른 영령들이여 참배하라는 요구는 종종 예배 의식을 포함하고 있고,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위반되므로,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신사참배 할 수 없고, 혹은 참배를 하라고 우리 학교를 지도할 수 없다” 이런 결정을 내렸다.
선교협의회는 1939년 1월 또다시 모여서 정책을 결정한다. “1936년의 선교정책 발전에 의하여 우리는 이제 재 결의하시는 신사참배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신념으로 기독교인으로서 증인 되라는 우리의 우선적 의무와 배치되는 것이고, 신사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는 교육을 통하여 우리의 기독교 증거를 계속하기는 원하며, 일본과의 호의와 도움을 노력으로 학교를 계속하기는 원한다.”

바이올렛 이사벨 앤더슨 부인(본명: 코스텔로) (1885. 8.25-) 블로그 물길손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bjoon63&logNo=30102158296

바이올렛 코스텔로는 스킵톤(Skipton)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그녀는 1918년 5월 2일 조지 앤더슨과 결혼했다. 1919년 11월 28일 딸 진(Jean)이 태어났던 포트 오거스타에서 4년을 보낸 후에 온 가족은 한국으로 갔고 부산에서 살게 되었다. 아들 로이(Roy)는 1924년 9월 30일 그곳에서 태어났다. 앤더슨 부인은 부산에 유아복지, 어린이 급식센터를 세웠고, 1931-32년에 나환자 부모의 미감염 아이들을 위한 숙소를 돌보는 책임을 맡았다. 조지 앤더슨 목사가 1952-54년 한국에 있는 동안 앤더슨 부인은 멜번의 집에서 가족들을 건사했다. 앤더슨 부인은 부산(1922-32), 마산(1932-33), 진주(1933-34)에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앤더슨 목사는 부산진(992-32), 마산(1932-33), 진주(1933-34), 부산(1946-47), 1952-54년 까지 한국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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