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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Wolfe, J. R.(1832-1915, ANG)
 작성자 : 구현  2018-12-06 19:27:52   조회: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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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기본 사항

1. 이름: J. R. Wolfe

2. 출신 및 소속: 영국 성공회 선교사로 중국 푸조우에서 교구 부주교(Arch-deacon)으로 사역.

3. 한국선교기간:
1884.10.26. 내한, 한국선교의 필요성 절감하고 영국성공회 선교 요청, 실패
1885.11 두 명의 중국인과 부산에 도착, 선교활동
1887 일본주교, 중국주교와 내한하고 돌아가 호주에 선교 요청, 호주장로교의 한국선교가 시작
이후로는 계속 중국 푸저우에서 사역.

4. 연표
1832년 출생
1862년 중국에서 선교시작
1884~1887 수 차례 한국에 방문하며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영국, 호주, 중국 등에 알림.
1901년 2월 심각한 병에 걸림
1915년 12월 2일 소천

5. 가족사항

딸: Minnie Wolfe, Annie Wolfe


Ⅱ. 선교사 소개: J.R. Wolfe

1. Wolfe와 영국성공회선교협회

알렌선교사가 나가사키에서의 일정중에 Wolfe 선교사가 합류했다. 그는 Church Missionary Society(=CMS=영국성공회선교협회)소속이었고 중국 푸조우에 살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짧은 여행동안 Wolfe는 “가증스럽고 잔인한 관습, 유아 범죄, 우상이나 우상사원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에 감동받았다. 그러나 종교적인 필요가 매우 크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푸조우에 돌아와서, 그는 남중국선교회의 지방 의회 연중 모임에 참석했다. 그는 최근의 방문에서 느꼈던 선교 사역에 대한 커다란 필요성과 기회에 대해서 연설을 했다. 성직자 중 한명과 세 명의 복음전도자 들이 자원해서 가서 선교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Wolfe는 한국에 있는 중국 복음주의자들을 지원해주거나 개인적인 호소로 자금을 모으기 위한 허가를 얻기 위해서  CMS 소속 기관에 두 번 신청했다. CMS는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평범한 선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순수하게 선교 사역을 책임을 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울프의 요청을 무시했다.


2. Wolfe 선교사의 사역

J. R. Wolfe는 영국 성공회 선교사로 중국복주 교구 부주교를 담당했다. 1884년 영국 성공회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에 부임하여 시무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일본에 요양차 건너갔다.
그가 나가사키에 머물렀던 동안,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가 잠시 상해를 거쳐 일본에 잠시 들렀던 북장로회의 알렌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를 통해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1884년 10월 26일에는 직접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영국인으로는 최초로 한국에 온 선교사였다. 그는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한국 사정을 파악하였고 특히 선교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후 그는 개인적으로 영국성공회의 한국 선교 개척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푸저우로 귀임한 후 남중국선교회 푸저우성 연차대회에서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이 증언을 들은 중국인 목사 1인과 평신도 3인이 선교사를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영국성공회 선교회에 한국에 파송할 중국인 선교사들의 사업비를 보조해 주든지 아니면 자체적으로 기금모음운동을 벌이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영국성공회 선교회는 그 어느 쪽도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실망하고 있을 그 때에 푸저우의 교인들과 오스트레일리아 친구들에게서 한국선교를 지원하는 기부금이 도착하게 됨으로써 울프는 1885년 11월, 두 명의 중국인 전도인을 데리고 한국으로 향발, 11월 말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곧 부산을 선교사업의 근거지로 심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1887년 가을 내한할 때 같은 선교회의 비커스테드(Bichersteth) 일본주교 및 스코트(Scott) 중국주교가 동행했으며 이 여행을 마친 다음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에게 한국을 위하여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진심어린 호소문을 띄었다. 이 호소문은 매카트니(H. B. Macartney) 목사의 주선으로 빅토리아주 어떤 조그만 선교신문에 게재되었고 그 결과 데이비스(Henry Davies) 목사가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로 자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의 한국 선교사업이 그를 통해 개시된 것이다. 비록 Wolfe주교가 직접 영국 성공회의 한국선교 개척의 꿈을 직접 실현시키지는 못했으나 그의 중국 동료 버든(Burden), 마울(Moule), 스코트 등이 영국 본부에 한국선교 개척을 요구함으로 1890년에 이르러 코르프(Corfe) 주교의 내한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한국선교는 진착을 이루었다.


2. Wolfe 선교사 당시의 한국 상황

영국 성공회의 중국 선교팀은 1884년 한국이 영국에게 개방했을 때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90년 부산교회가 생기기전, 1884년 말 중국 푸저우에 있는 영국 성공회 선교 협회(Church Missionary Society)의 wolfe 선교사는 그의 건강 때문에 일본을 잠깐 방문한 후 그는 그의 가족을 그곳에 데려온 알렌 박사와 함께 한국의 도시 서울에 왔다.
wolfe 선교사의 보고서는 푸저우에 있는 중국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선교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885년 11월 그는 호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대한 최초의 시위자 임무"를 조직했고 두 명의 중국 복음 전도자와 그들의 아내들을 부산에 보냈다. 그리고 그들의 정착을 도왔다. 그는 1887년 가을에 일본의 비커스테드(bichersteth) 주교와 중국 북부의 주교 스캇(chalres p. scott)과 함께 부산을 방문했다.
1888년 교회 선교사협회의 마틴 박사가 그곳을 방문해서 기독교를 찾는 몇몇 사람들을 찾았지만, 조선 정부의 기독교 금지정책 때문에 그들은 개종하지는 못했다. 선교사들이 질병을 걸려 선교는 지체 하게 되는 일도 잦았다.
wolfe 선교사는 1889년 10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헨리 데이비스와 그의 여동생 마리 데이비스 그리고 호주의 교회들에게 한국을 방문하도록 요청했다.
당시의 한국은 선교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 선교사의 편지를 보면 어떠했을 것인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다.

1884년 1월 12일
친해하는 주교 스캇 - 당신은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한국과 협상한 조약에는 영국의 주교들이 항구와 영국의 상업에 개방될 장소에 있는 주교들이 그들의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허용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고 정확하게 진술했습니다. 겉보기에 간단하게 보이는 이 조건은 조약의 많은 상업적 특권보다 더 많은 분쟁을 불러 일으켰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나는 기독교에 대한 전통적인 적대감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이 알고 있듯이 가장 최근까지 그 나라에서 가장 심한 박해로 나타났다.
나는 그것이 실제로 선교 사업에 제재를 가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외국인들이 그들의 종교를 행사할 수 있는 자유는 하나의 것이고, 한국 과목들 중 그들의 적극적인 산문주의는 다른 것이다. 전 한국 정부는 합리적이고, 보류할 수는 없지만, 그 서신을 방해할 수 있는 그들의 권리는 현재 논쟁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행사되는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그렇게 될것인지 아닌지는 선교사 분야의 첫번째 개척자들의 판단과 재량에 달려 있다. 만약 철저한 장비와 그들의 일에 대한 준비로, 당신은 언어와 정부와 사람들의 감정에 대한 유능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예비적이지만 가장 본질적인 노동과 시간은 한국에서 종교적 적대감을 녹일 수 있는 빠른 매체임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기자들이 준비될 때쯤이면 우리는 점점 더 계몽되는 어리석은 적대감을 보게 될 것이고, 이단으로 현재 두려워하고 있는 새로운 가르침에 대한 더 나은 지리에 의해 불안이 해소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고귀함, 학식, 그리고 지배계급이 중국보다 더 큰 인구의 제안을 형성하고 있고, 종교적인 혁신에 가장 강하게 반대하는 것은 이 계급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의료 사절단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 계급과 군입대의 가장 강력한 수단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증명할 것이다. 사람들의 적극적인 동정심을 얻어서. 선교활동은 항구들에서 자연스럽게 시작될 것이고, 그것을 내부로 확장시키기 위해 안전한지를 다시 한 번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는 국가의 상태에 대해 아주 불완전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한국 정부가 결코 강력하지 않으며, 국민들이 거칠고 다루기 힘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법들은, 그 법들과 같은, 무례하게 관리되는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나는 수도의 가장 대중적인 거리 중 하나에 15구의 머리 없는 시신들을 발견했고, 그들이 비방을 저지른 사람들의 몸이라고 들었다. 이 끔찍한 광경은 어느 누구도 놀라게 하지 않고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또한 1년도 채 전에 수도의 병사가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으로 일어나서, 그 자신의 결함에 손을 얹고, 11명의 장관을 죽였다는 것을 안다. 이 불완전한 상황에서 법과 행정으로, 선교사들이 내부에 있을 때, 네이티브의 공식 보호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대중의 편견을 강하게 자극하기 위해 계산된 어떤 새로운 코스에 들어갈 때는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는 한국정부가 강력히 주장한 그 조약이 또한 그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고 강조해야 한다. 그들은 책이나 그들이 반대하는 인쇄물의 내부로의 운반을 금지할 수도 있다. 나는 이 금지가 주로 종교적 문학에 대한 그들의 마음속에 지시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특정되는 문헌에 대해, 그리고 현 상태로는, 모든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선동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출판물을 다루고 있다. 불행하게도, 현재, 기독교의 책들은 한국적인 평가에 있어서 부도덕하다; 그러나, 우리는, 오래 전 일본에서처럼, 반 기독교적 감정이 지금 한국에서만큼 강했고, 우리의 조약들이 한국에서 내가 확보한 것들보다 더 넓은 종교적 권리를 우리에게 주지 않는 일본에서처럼, 한국 정부는 곧 그것을 고려할 것이다. 기독교 출판물들은 불쾌한 것으로 간주되고, 이 조항은 우리가 승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적용될 것이다.


1800년대 한국 선교에 대한 어려움 및 특징
1) 조선 정부는 서양에서 온 기독교를 배격하였고 기독교 문화를 혐오했으며, 기독교를 개종자들을 탄압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기독교가 낯설기도 했지만 조선인들은 정부의 기독교 금지정책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기독교로 개종 하는 자들은 매우 적었다.
3) 한국과 중국에서의 위생 문제와 날씨문제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선교사들의 질병문제가 있었고 그것은 선교에 많은 차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4) 조선시대의 봉건적 계급사회가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5) 기독교 관련 서적은 조선 정부에서 금기시 했던 것으로 보인다.



3. Wolfe 선교사의 저서 “A Visit To Corea.”

항해사 난킨이 닻을 길가에 내딛자 마자, 나는 즉시, 거칠고 산더미 같은 나라의 제물포에서 동쪽으로 28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국의 수도인 서울을 방문할 준비를 했다.
… 이전에 수도를 방문했던 앨런 박사는 제게 몇 가지 방향을 알려주었고, "해리스 호텔"에서 새로운 필수품을 구입한 후, 그날 밤 가능하면 나를 서울로 데려가기 위해 포니 패드와 말보이와 계약했다.
몰렌도르프 세관위원 겸 국가장관이 코리안 왕에게 준 계좌에 따르면, 서울 인구는 40만 명이다. 천오백만 이상의 인구가 왕국의 인구라고 나는 확신한다. 서울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 매우 친절하다. 한번은 잉크와 연필을 생산하는 한국인 두 사람이 길에 들렀고 내 지갑에 "보아라, 너는 단풍나무의 빨간 단풍잎처럼 일년에 한번 오는 친구를 보는 것과 같다."라는 글을 쓰기도했다. 나는 한국 문학을 중국인들 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의 고전적인 문체를 유창하고 쉽게 쓸 수 있다. 한국인들은 훌륭한 견고하고 강력한 인종이다. 그들의 체격은 다른 중국인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나는 시골이나 서울에 있는 우상이나 절을 보지 못한것에 대해 많은 흥미와 놀라움을 느꼈다. 사람들은 우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고, 그들은 신들에게 신전을 짓지 않는다. 수도 전체에는 절이 없고, 실제로 한국에는 종교 체계가 전혀 없다. 불교의 자취는 왕국의 외딴 지역에도 있지만, 불교는 금지된 종교로, 지난 500년 동안 왕조의 왕조에 의해 격렬하고 성공적으로 억압되어 국민의 마음과 동정심에서 철저히 근절되었다. 유교는 비록 종교 제도는 아니지만, 문학과 관직에 의해 지켜지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들은 매우 미신을 믿고 정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죽은 영웅들과 공공 후원자들의 영혼을 신격화하고 숭배하며, 죽은 조상들에 대한 숭배는 보편적으로 행해진다. 중국 문명에 대한 모든 시도를 마비시킨 풍추의 미신도 한국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에 널리 그리고 치명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집을 지을 수 없고, 벽을 세울 수도 없고, 도로를 열 수도 없으며, 이 신비로운 미신의 주인이나 주인과 상의하지 않고는 어떤 우아함도 파낼 수 없다.

우상숭배는 또한 널리 행해진다. 가장 좋아하는 나무와 돌들이 숭배되고, 길을 따라 길을 따라 가지에 융단을 깔고 있는 몇몇 나무들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인데, 나무들을 거기에 놓아둔것은 신이 나무에게 욕심을 부렸다는 증거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돌멩이를 산꼭대기나 빌의 꼭대기에 가져다가, 그들이 기도를 드리고 나서, 또는 그 안에 있어야 할 정신에 맡긴다. 유령과 영혼에 대한 두려움도 이 어둠이 깔린 불쌍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들은 이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이 영혼들을 겁주기 위해 가장 유치한 방법에 의지하고 있다. 사람들이 거의 여행하지 않는 고독한 집 근처와 산길에는 귀퉁이와 같은 액자가 세워져 있고, 이것들로 인해 종과 낡은 주전자, 등유통이 울리고 있는데, 이것은 윙윙거리는 소리를 낸다. 구슬은 서부로 옮겨지고, 오래된 의복은 새 수지로 교체된다. 옷의 티 그리고 죽은 사람의 친구 네 명이 동시에 그의 손가락을 몸 위에 올려놓고 밖으로 나가 발가락 지붕 위에 서자, 큰 외침으로 떠나가는 정신을 되살린다. 남편이 아내의 죽음을 맞이해서는 안 되고, 아내가 죽으면 안 된다. 중국처럼 사망자의 애도기간은 3년이다.

이 기간 동안 조문객들은 대나무나 고리버들 등으로 만든 반쯤 닫힌 우산 형태의 거대한 방망이를 착용하고, 몸의 얼굴과 지퍼 부분을 구부릴 수 있도록 어깨 위로 손을 뻗어야 한다. 그들은 또한 해외에 나갈 때 베옷을 입거나 베옷을 입거나 면전에 베옷을 입도록 요구 받는다. 그리고 대화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상징을 쓰도록 강요하는 것은 적절하거나 예의 바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몇 년 전 한국에서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끔찍한 박해를 당했을 때, 성직자들은 관찰을 피하기 위해 이 관습을 이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애도 상징들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슬퍼할지도 모른다. - 많은 동포들과 원주민 개종자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잔인하게 살해당했을 때. 이 방법으로 헌신적인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았고,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그들의 박해 받는 개종자들의 안락함을 기릴 수 있었다.

물론 노동계에서 날아오거나, 이단주의에서 얻은 개종자들을 버리고, 그들의 삶을 가장 잔인한 고문과 죽음에 기꺼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노출시킨 이 귀족들의 헌신적이고 자기 희생적이며 자기희생적인 정신을 존경하고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나는 로마교회의 치명적인 오류를 알고 혐오한다. 나는 대중에게만 집중하는 대중주의 제도가 인간의 영혼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고귀한 영웅들의 노력과 아주 작은 수준으로 평가절하하려는 어떠한 비방에도 절대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사막이 아닌 서울 도시에서 목숨을 끊었다. 한국에서 그들의 노력은 가장 숭고한 영웅주의의 기록이며, 또한 그러한 헌신적인 태도가 아주 완전히 잘못된 시스템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로마 가톨릭 선교사 7명이 한국에서 일하며, 전임자들처럼 성직자와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칭 주교가 이끄는 격분한 순간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헌신과 자기 부정은 적절한 보상을 받았다. 왜냐하면 지금은 2만 명이 넘는 로마 가톨릭 교도가 한국에 있고, 그들 중 800명이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신교 선교사들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한국에 있는 로마 교회의 열정과 업적이 이끄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영국 교회의 신도들을 처리함으로써 그녀가 진정한 교회라는 증거로 들었다. 오, 세상을 사랑하고, 자신의 사랑이 한국 교회에 반영되기를 바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아버지, 그리고 그들에게 그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 줄 사람을 보내 주시기를!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한국이 더 이상 선교사 없이 남겨지지 않기를 간청한다. 우리가 한국인들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하여 죄와 지옥으로부터 주께서 구원해 주시길 바란다.


4. Wolfe와 관련된 기록들.

a. “The Month”, CMIR(Jan, 1888): 51-2.

푸첸교회의 원어민 선교에 대해 들은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한국에 대한 뉴스는 이 나라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10월 중국 기록부에서 wolfe가 최근 한국으로 중국 전도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방문했다는 통지를 보게 되어 기쁘다. 일본의 비커스테스 주교와 중국 북부의 스콧 주교는 이제 코레아에서 그 곳의 빈자리를 조사하기 위해 함께 갔다. 중국인 기록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푸저우의 Archdeacon Wolfe는 최근 한국에서 돌아왔는데, 그는 약 2년 전 푸첸의 중국 교회가 한국 선교회를 열기 위해 파견한 푸저우에 있는 중국인들을 방문하러 갔다. 우리는 울프씨로부터 이 두 지역 교인들이 그들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그곳 언어로 공정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다. 그들은 부산과 주변마을들을 방문하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해 자유롭게 말한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으며, 아직까지 아무런 반대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친구로서 얻은 문인들로 이루어진 작은 무리를 모아 놓고, 끊임없이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사람들 중 일부는 기독교의 진리를 인정했지만,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면, 기독교는 그들의 생명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wolfe는 며칠 동안 부산에 남았고, 이 형제들과 함께 있는 많은 마을과 마을들을 방문했으며, 이 중국 복음주의자들이 국민들과 함께 명백히 얻은 영향과 한국 사람들이 어디에서든 접한 우호적인 방식으로 얻은 영향에 대해 매우 만족감을 표했다.
이에 대한 일례로, 이 두 동포의 선배가 병에 걸려 몇 주 동안 그의 방에 갇혀 있었다고 언급되었다. 주변 국가의 상류층 사람들로부터 온 편지들은 그의 건강을 가장 친절하게 묻고 그의 빠른 회복을 바라면서 자주 보내졌다.


b. “The Month,” CMIR(May, 1888): 347-8
1885년, J. R. 울프 목사가 말한 한국을 방문했다. 푸첸에서 나온 두 명의 중국 복음주의자에 의해 천주교가 아직 뿌리내리지도 않은 나라에서 원어민 기독교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반드시 기억될 것이다. 영국 성공회 선교 협회의 Newcombe가 보낸 편지의 기록은 지난 여름 대주교 Wolfe가 새 임무를 위해 방문한 내용이다.
‘한국선교는 우리 푸첸 선교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두 명의 중국 항해사와 그들의 아내들이 코리안 선교사로 그곳에 정착했다. 올 여름, 전도자들은 한국 지역에 거처를 구할 수 없었고, 한국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일본으로 강제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정기적인 연구를 통해 그들은 한국언어를 상당히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을 보러 오는 문의자 수로 볼 때, 복음서의 메시지에 많은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아내들은 잘 지내지 못했다. 그들은 대화를 통해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한국 여성들과 교제를 하기 위해 너무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남편처럼 교사들이 제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진전이 느리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때때로 외롭운 작업이다.
부시넬은 이 두 명의 소중한 여성들이 그녀를 보고, 그들이 스스로의 모든 경험을 쏟아 붇는 것에 대해 감탄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본 것이 휴가 중 가장 좋은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용기를 가지고 있고, 또한 충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이 방문이 그들을 격려해 주었고, 곧 어려움이 극복될 것이고, 복음서 이야기에 의해 사람들이 도달하기를 바라고 있다. wolfe는 그가 훌륭한 일을 할 것이라는 큰 희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나도 믿는다. 집에서도 우리들은 종종 이 외롭게 사역하는 중국인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기억할 것이다.



5. Wolfe 선교사의 사역의 의의

울페선교사는 영국인 최초의 한국 선교사로 1884년 10 26일 알렌과 한국에 도착해서 한국 사역을 했다. 그는 영국성공회선교협회에 파견된 중국 선교사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나 알렌의 소개로 한국의 선교사정을 파악하고 한국선교의 필요성에 대해 깊이있게 깨닫게 되었다. 그는 먼저 선교사들이 정착하기 힘든 한국에서 선교사들의 선교 정착을 도왔고, 선교지의 특성을 낱낱이 파악했고 선교 전략을 세웠다. 그는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꼈고 그리하여서 영국성공회의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지 않고 호주장로교와 호주기독교단체들에 요청을하여 한국선교의 초석을 놓는 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중국현지교회와 현지인들에게도 서신들과 소개글들을 통하여 한국선교에 대해 말하고 독려했다. 이처럼 그는 각 지역에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알렸다.
그의 선교활동을 통하여 우리는 당시 한국 선교상황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사회구조적으로도 기독교를 배타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어렵고 힘든 한국 선교 상황 속에서도 얼마나 한국 선교에 힘썼는지, 또한 한국 선교가 그를 통해 얼마나 진척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선교를 할 때에 어떠한 선교를 해야할 것인지, 어떻게 다른 나라들과 단체들에게 요청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신앙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영원토록 우리의 마음 속에 남을 것이다.
2018-12-06 19: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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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52 / Clark, Allen D.(1908~1990)   이정현     2020-07-01   16
1679
  내한선교사 / 61 / Corbett, Hunter(1835-1920, 미국)   조광원     2020-07-01   6
1678
  내한선교사/53/Linton, Thomas Dwight(1927-2010, SP) / Linton, Marjory Ann Potter   정진성     2020-07-01   6
1677
  내한선교사/52/Levie, James Kellum(1890-1977, SP)   정주영     2020-07-01   12
1676
  내한선교사/30/Boyer, Elmer Timothy(1893-1976, SP) / Boyer, Sarah Gladys Perkins   문학준     2020-07-01   8
1675
  내한 선교사/47 / Chamness, O. Vaughan(1898–1987, NP) / Chamness, Helen Mitchell (1893–1952, NP)   윤한수1     2020-07-01   9
1674
  내한선교사 / 7 / Fisher, James Earnest(1886-1989, MS, 1919-1935)   강호경(3-2)     2020-07-01   11
1673
  내한선교사 / 1 / Dodson, Mary Lucy(1881-1972, SP) 도마리아   김찬양     2020-06-30   12
1672
  내한선교사//37/Roberts Stacy L(1881~1946)   조상호     2020-06-30   11
1671
  내한선교사/24/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   김형률     2020-06-30   17
1670
  내한선교사 / 34 / Emily Irene Haynes(1877-1960)   송주영     2020-06-29   20
1669
  내한선교사 / 6 / George Anderson(1880-1969)   danielpark     2020-06-29   14
1668
  내한선교사/31/Merriman Colbert Harris(1846-1921, M)   배예준     2020-06-27   14
1667
  내한선교사/56/McCaul, James Gorden(1888-1981, CP)   조안상     2020-06-24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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