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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Brannan, Lyman Coy(1880-1971, MS) / Barker, Myrthle(1884-1971, MS)
 작성자 : 김다윗, 김도완  2019-07-01 14:47:19   조회: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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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기본사항

1. 이름: Brannon, Lyman Coy / 브래넌 / 한국명: 부라만(夫羅萬)
Barker, Myrtle / 바커 / 한국명: 부박애
2. 생몰연도: 1880.9.18-1971.6.13 미국 앨라바마주 딜카운티 출생
1884.8.29.-1971.1.3. 미국 켄터키주 출생
3. 출신 및 소속: 미국, MS(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남감리회
4. 한국선교기간: 1909.12.30-1948.
5. 연표
Brannon, Lyman Coy
1880 미국 앨라베마주 딜카운티 출생
1909.11 앨라바마주 서던대학교 졸업
1909.12.30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원산에서 활동
1912 한국에서 목사안수
1914.7.7 감리교 선교사인 바커와 결혼
1920 개성, 1922 춘천, 1928 원산에서 선교사업 시무 활동
1920, 1922 두 아들 각각 폐렴으로 사망
1930.9 춘천지방 감리사로 취임, 산간벽지까지 순회전도
1933.6.5 안식년으로 귀국.
1934 홍천지방 감리사, 1935-37 춘천지방 감리사 역임
1937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목을 역임
1940 안식년으로 귀국, 1946 재 내한하여 활동
1948 은퇴하고 귀국, 1965까지 농촌교회 목회에 전념
1971.6.13 버밍검 감리교 은퇴교역자 안식관에서 입주하여 별세

Myrtle Barker
1884 미국 캔터키주 목사의 딸로 출생
1909 웨슬리안대학 대학원 졸업
1911.8 내한
1912년 원산루씨여학교 성경교사 재직
1914년 브래넌 선교사와 결혼
1922 춘천정명여학교 성경교사, 여자관 관장으로 재직
1937 개성의 호수돈여학교 성경교사로 재임
1946 재차 내한
1950년 선교사직 은퇴
1971.1.2 버밍검 감리교 은퇴교역자 안식관에서 입주하여 별세
6. 가족사항
부인: Barker, Myrtle(부박애)
딸: Judy, Margaret Brannan(주진주)
관련인물: 이용도, 배부근 목사(1925년에도 동학교장 부라만선교사에게 신앙사사를 받았다)


Ⅱ. 선교사 소개: 브래넌(Lyman Coy Brannan)


1. 남감리교회 출신의 한국어에 능통했던 선교사
부라만 목사의 본명은 L. C. Brannan으로 ‘부란난’이라고 발음하며, 그의 한국 이름은 ‘부라난’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라만’ 목사로 더 많이 알려져 왔다. 부라만 목사는 키가 작고, 둥그스룸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넘쳐 흘렀으며, 유머를 즐겨 재미 있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웃기기도 잘 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 성경지대(Bible belt)라고 알려질 만큼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감리교회의 뿌리가 깊은 앨리바마 주의 출신으로 그는 베이커와 결혼해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어렸을 때 한국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딸 마가렛 쥬디 장로는 춘천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2. 한국어에 능통했던 선교사
부라만 선교사는 윤치호(1865~1945)의 청원을 받고 시작된 미국 남감리교회의 한국 선교 캠페인에 호응하여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그는 아직 젊은 미혼의 청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수법이나 교본이 전혀 없던 시대라 한국어 공부를 가르치는 교사에게나 배우는 학생에게나 힘든 과업이었으나 부라만 목사는 문자로서의 한글의 놀라운 단순성과 정확한 과학성에 큰 감명을 받았고, 또 그를 가르치는 교사가 한학자들로서 많은 학식을 지닌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한국을 배우고 한국어를 익히는 동안 한국인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민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일생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한국어에 능통했는데, 그의 한국어는 자연스러웠고, 이상한 악센트가 거의 없었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한국어 실력을 더 향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예화로 하나 서울 기차를 탄 부라만 목사가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을 보고 한 중년 신사가 정중하게 그와 말하기 시작하였고, 대화 중에 낯선 단어가 나오자 부라만 선교사는 즉시 수첩을 꺼내 그 단어를 적고 몇 번이고 그 말을 되풀이하여 연습하며 익히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유창한 한국어 능력 뒤에는 한 자라도 더 배우려는 의욕과 열정을 바탕으로 한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초기 감리교 선교사 중에 우리말로 부흥회를 인도할 수 있었던 사람은 부라만 목사와 도마련(Harison Stokes) 목사 두 사람뿐이었는데, 그 예로, 부라만 선교사는 당시 개척교회였던 대전중앙교회의 사역을 협의하고 돕는 일에 적극 참여하여 낮에는 담임 목사와 함께 교인들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열정적으로 집회를 인도했고, 그 과정 중에 처음으로 열린 부흥회를 그가 인도하였다. 미국인 목사가 한국말로 부흥회를 인도하다는 소문에 30평 정도 되는 작은 예배당이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의 유창한 한국말 메시지는 단순하였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으며, 부흥회는 대성공이었다.
또한 그는 대전에 있는 미군 병원교회의 요청으로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강연을 가서 풍부한 한국 생활의 경험,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에서 나오는 강연을 한국어로 진행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는 유교적 전통과 가치관에 젖은 한국 문화를 높이 평가하면서, 유교적 윤리관은 많은 점에서 기독교적 윤리관과 일치하며 한국의 유교적 문화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좋은 토양이라는 강연 내용과 함께 능숙하고 유머에 넘치는 그의 화법과 결합하여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되었고, 약 40명에 가까운 청중들은 손뼉을 치며 웃기도 하고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며 그의 강연을 경청하였다고 한다. 이는 그가 외국인 선교사로서 단순히 복음 전달만 하는 형식적 선교사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가 한국 대중들의 감정적인 공감을 이끌어낼 정도로 한국인들의 문화에 깊이 융화되었고 한국을 사랑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3. 어린이를 사랑하는 선교사
그는 유별나게 어린이를 사랑한 선교사였다. 점잔을 빼는 어른들과 달리 스스로 어린이가 되어 아이들과 놀며 아이들의 친구가 되기를 즐겼다. 그가 지방을 순행을 갔다가 아이들과 담소고 장난도 하며, 놀던 때 그의 옆구리에 차던 커다랗고 값 비싸고 귀중한 회중시계가 손버릇 나쁜 아이 하나에 의해 빼앗긴 바 되었다. 그 시계는 감히 조선인은 소유할 수도 없는 가치가 있는 시계였고, 선교하러 간다는 그에게 친구들이 기념으로 선물한 것이었다. 결국 그가 시계를 잃어버렸다는 소문이 교인들 사이에 퍼지고 저마다 근심하는 중에 그의 표정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아 하나님이 주신 것을 좋다고 나 혼자만 가져서야 되냐며 남도 가져야 한다고 껄껄 웃었다 한다. 장병욱, 『한국교회유사』 (서울: 성광문화사, 1980) 117.


4. 구령의 열정에 사로잡힌 선교사
한국어를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그는 그동안 배운 한국어를 한 번 써 보기로 마음먹고 거리에 나섰다. 한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에 넘쳐 있던 그는 한시라도 빨리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거리에서 그는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오!” 라는 문구를 연습하고 또 연습한 한국말로 선교를 시도할 정도로 구령의 열정을 지녔다.
하루는 강원도 오지의 한 마을을 방문 중이던 부라만 목사를 어떤 사람이 찾아와 돼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돼지를 위해 기도해 살려 달라고 하였다. 부라만 목사는 기가 막혔지만,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기에 이를 전도의 기회로 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붙들고 동네에 의원이 있음을 묻고 의원은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사람과 돼지의 다른 점에 대해 이야기 하며 그 둘의 근본적 차이점은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고 돼지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 후, 예수님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분이며 자기는 그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영혼이 없는 돼지를 위해 기도할 수는 없으나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기도할 수 있으니 같이 기도하자고 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그의 영혼을 구원해 주실 것을 기도하였다. 또한 믿음 없는 이 사람이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 주님이 기쁘게 생각하시면 이 사람의 돼지를 건강하게 하사 주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달라고 기도하였다. 이와 같이 부라만 선교사는 하나의 기회도 놓치지 않고 전도의 기회로 삼아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을 실천했던 구령의 열정이 있는 선교사였다.

5. 한국 사람들을 진정으로 존중했던 선교사
1930년에 한국 감리교회가 독자적 헌법과 자체의 감독을 가진 자치교회가 된 후 선교사들은 모든 공적 지위를 한국인들에게 물려주고 한국인 사역자들을 도우며 협력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부라만 또한 한국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인정하였다. 어느 날 남기철 목사는 교회 건축을 도와 준 미군에게 감사를 표하는 음악회를 열려 하였고, 이를 위한 도움을 청하기 위해 부라만 목사의 사위이자 지방 선교사인 쥬디 목사를 찾아갔다. 이유인즉슨 이웃 교회의 의자를 빌리기 위해 교섭하려다가 거절 당했고, 쥬디 선교사의 영향력을 통해 그 이웃교회 목사의 설득을 부탁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쥬디 선교사는 이에 응하고자 하였으나, 옆에서 자초지종을 듣던 부라만 목사는 사위를 말리며 어떤 이유에 있어서 거절한 것이고 그의 결정에 존중해야 하기에 개입하지 말 것을 권면했고, 남목사를 다른 방법으로 도울 것을 강구하자고 하며, 한국교회의 결정을 선교사가 왈가왈부하는 것을 삼가야 할 것을 천명하였다.

6.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
한 노인이 부라만에게 한국인의 냄새를 어떻게 견디셨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고, 그는 한 가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를 포함한 선교사 몇 사람이 서울 YMCA의 간사인 미스터 김의 초대를 받고 그의 집에 갔었고, 좋은 식사를 대접받고 돌아가는 길에 일행 중 한 사람이 모자를 두고와 찾으러 가서 돌아갔다. 그때 추운데도 불구하고 그 집의 창문이 모두 열린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묻자 집 주인은 당신들도 우리가 당신들 집에 다녀간 후에 창문을 열지 않느냐고 반문을 전해 듣고 부라만은 자신들의 체취가 한국사람들에게 역겹게 느껴지고 자신들은 한 번도 한국 사람들이 다녀간 후 창문을 열 필요는 느끼지 못한 것을 통해 자신들의 체취가 한국 사람 체취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익숙해진 후에 냄새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고 몇해 동안 한국을 떠나 있다 돌아와 김포공항에서 맡은 한국의 냄새는 그가 한국에 돌아왔음을 느끼게 해주는 상쾌한 냄새였음을 고백하였다.
그는 해방전 한국에 와서 춘천, 원산, 개성 등지에서 일했고, 선교 백주년대회장으로도 수고하였었다. 성격이 유순하고 사랑이 많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따랐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어린이들을 사랑하여 한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불쌍한 사람을 많이 도와주었고, 그의 손으로 도움받은 고학생, 신학생도 상당수에 이른다. 개척교회도 많이 세웠다. 대표적으로 춘천서부교회를 들 수 있고, 장병욱, 『한국교회유사』 (서울: 성광문화사, 1980) 116-117.
두남리감리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1,500평 가량의 대지와 밭이 모두 부라만 선교사의 명의로 등기가 되어 있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자료 DB "유관지 박사의 북한의 옛 교회들 이야기"
http://21tv.org/bbs/zboard.php?id=column17&page=6&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subject&desc=asc&no=139
또한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은퇴한 다음에도 한국을 돕기에 힘썼는데, 주안에 원로목사님들을 위한 원로원이 부라만 선교사의 수고를 통해 건축되었다. 위와 같은 사이트
부라만 목사 내외는 은퇴한 뒤, 앨라배마 주의 헤드랜드라는 마을로 돌아가 건강하게 고향의 작은 교회를 맡았다(미국감리교회에서는 은퇴한 목사도 목회를 계속할 수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완전히 은퇴하여 버밍햄 근교에 있는 양로원에서 생활하였으나 고령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고, 그 후 몇 해만에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부라만 목사내외는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위대한 선교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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