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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Appenzeller, Alice Rebecca(1885-1950, M)
 작성자 : 서형원 허혜학  2019-07-01 22:50:12   조회: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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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 선교사 / Alice R. Appenzeller (1885-1950)

Ⅰ. 기본사항

1. 이름 : Appenzeller, Alice Rebecca
2. 생몰연도 : 1885.11.9-1950.2.20
3. 출신 및 소속 : 미국, 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 1915-1950
5. 연표
1885.11.9 서울 정동에서 출생(조선에서 태어난 최초 서양아기)
1889 중국 산동성 지푸(Chefoo) 외국인 학교 입학
1902 아버지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1902.4~1905.2 미국 랭가스터시 미스스타스스쿨 입학, 졸업
1909 메사추세츠주 웨슬리대학 졸업
1910 하버드대학 여름학교에서 독일어 공부
1912.6 제1회 YWCA의 중등학교 여학생회의 성경공부반 지도
1913 YWCA의 중등학교와 대학교 여학생회에서 ‘한국을 공부하는 반’운영
1914 시픈 스쿨에서 6년간(1909~1914) 교사 활동
1915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 땅 밟음, 어머니 사망, 이화학당 교사
1917 이화학당 부당장 위임
1918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부교장 겸임
1919.1~3 일본어 공부
1922 콜롬비아대학교 사범대학원 졸업
1922.10 이화학당 제6대 총장
1925 이화학당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 초대교장에 취임
(캠퍼스 이전계획 세우고, 신촌 15만평 교지 확보)
1932 감리교 목사 안수 받음
1937.6 보스턴대학에서 명예 교육학박사 학위취득
1939.4 이화대학에서 제자 김활란에게 총장직 이양
1940 일제에 의해 선교사들 한국철수 강요, 한국을 떠나 미국 감리교 학교
스카릿 대학에서 4년간 교수로 강의
1943~1945 하와이 호놀룰루제일교회에서 선교사역 종사
1945.8 한국 해방으로 이화로 돌아옴
1946.12 이화의 명예총장, 종합대학 인가 받음
1950.2.20. 대학채플에서 설교 중 뇌일혈로 쓰러져 별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묻힘
6. 가족사항
아버지 : 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1902)
어머니 : Appenzeller, Ella Dodge
동 생 : Appenzeller, Henry Dodge / Appenzeller, Ida Hannah / Appenzeller, Mary Ella



II. 선교사 소개: 앨리스 R. 아펜젤러(Appenzeller, Alice R. 1885~1950)

1. 한국에서 출생한 최초의 여자아기. “아버지의 유업, 한국은 나의 운명”
조선인에게 있어서 앨리스는 탄생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었다. 1800년대 무렵부터 조선은 외국인의 왕래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조선에서 태어난 외국아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푸른색 눈망울을 하고 있는 인형같이 예쁜 외국 아기의 탄생은 조선인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사건과 같은 일이었다. 앨리스의 아버지는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설립한 헨리 아펜젤러이다. 그는 한국 감리회 최초의 선교사였다. 헨리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 조선 선교를 결심하고 아내와 함께 미국을 떠난 지 두 달 만에 조선에 첫 발을 내딛었다. 당시 아펜젤러의 부인은 앨리스를 인신하고 있었다. 앨리스는 헨리 아펜젤러가 조선에 들어온지 7개월이 지난 1885년 11월 9일에 태어났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앨리스를 구경하기 위해 헨리 아펜젤러의 집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조선인들이 닫혀있던 마음 문을 열기 시작하였고, 그것을 통하여 헨리 아펜젤러는 앨리스를 보기 위해 찾아온 이들을 전도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엘리스는 아기였을 때부터 한국선교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앨리스는 아버지로부터 ‘타고난 선교사’라는 각별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 이듬해 앨리스는 세례를 받았고, 그 이듬해 1887년 1월 1일에는 열린 가정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아펜젤러 부부는 앨리스를 하나님께 바쳤다. 그리고 그것은 앨리스가 하나님의 딸로 조선과 그 민족을 위해 헌신하였던 운명 같은 삶의 시작이었다. 앨리스는 조선인과 외국인은 사이에서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했다. 어릴 적, 정동에 살았던 엘리스는 그의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 조선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조선말뿐만 아니라 조선의 문화와 음식에도 익숙하였고, 조선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시간들을 통해서 앨리스는 잠시 교육을 받기 위해 조선을 떠났지만, 추후에 다시 조선에 돌아와,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2. 더 큰 배움을 위해 미국으로 가다
당시 조선의 초기 선교사들은 정식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앨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릴 때는 미국에서 보내주는 통신으로 홈스쿨링을 받으며 공부하다가 11살이 되던 해에 중국 지푸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여 약 5년간 부모와 떨어져 공부하였다. 그 후 16세가 되어서부터는 미국으로 가서 랭카스터에 있는 미스스타스스쿨을 다니며 학업에 매진하다가 졸업 후 웰즐리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한국에 돌아가기 전인 1915년까지 시픈 스쿨에서 6년 동안 교사로 경력을 쌓기도 했다. 특별히 그녀가 시픈 스쿨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가운데 1912년 6월에 펜실베니아 주에서 제1회 YWCA의 중등학교 여학생회의(School girl's Conference)가 열렸다. 그녀는 그곳에서 성경 공부반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3년에는 YWCA의 중등학교와 대학교 여학생회가 개최되었는데 그곳에서도 ‘한국을 공부하는 반’(Study class on Korea)을 맡아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녀의 경험들은 이후 앨리스가 이화학당에서 교사로서 여학생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앨리스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바로 아버지의 사망이었다. 1901년 인천에서 떠난 배가 충돌로 인해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때 그의 아버지인 헨리 아펜젤러는 그 배에 함께 있던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을 구하려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일은, 앨리스는 비록 미국 최고 여자대학인 매사추세츠 주 웰즐리대학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아 미국에서 장래가 보장 되어있었음에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남은 인생을 한국 선교를 위해 기꺼이 바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앨리스 아펜젤러의 교육활동
헨리 아펜젤러가 처음 조선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은 바로 조선 여성의 지위와 생활이었다. 그는 특별히 가정 안에서 드러나는 조선 여성의 지위와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조선 여성에게 젊음이 없는 것이 가엾다. 조선 여성에게는 우리(선교사)가 알고 있는 의미의 소녀 시절이 없다. 조선 소녀들은 8살이나 9살이 될 때까지는 공기와 빛에 노출되어 살아가지만, 그 이후로는 평생 완전히 죄수처럼 갇혀 지낸다. 오직 소년들만이 교육을 받는다. 또 조선 남성들은 결혼하기 직전까지도 아내의 이름조차 몰랐으며, 소녀들에게 붙이는 이름 가운데 어떤 것은 돼지우리에 사는 사람이나 쥐덫 또는 헛간을 연상시키는 단어도 있다. 조선에서 여성들은 오랫동안 한 남성의 딸이나 아내나 어머니였을 뿐, 자기 자신의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당시 가정의 모습에 대하여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조선인들에게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가정은 없다. 남편은 결코 아내와 함께 식사하지 않는다. 아주 가까운 친구들 외에는 아내를 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조선에서 ‘여성’은 모든 혜택에서 소외되어있는 존재였다. 헨리 아펜젤러는 그러한 사회현실을 인식하고 나서 조선 여성의 상황을 무척 가슴 아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마음은 훗날 앨리스의 사명감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앨리스도 훗날 헨리 아펜젤러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녀는 특별히 조선 여성들이 남성의 그늘에서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채 살거나, 사회활동을 하더라도 공장 노동자가 되는 것이 전부인 현실을 가슴아파했다. 당시에 1910년 이후부터는 여성들이 산업부문에 진출하는 일들도 일어났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 주어진 거의 유일한 길은 담배공장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취약한 환경에서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 중 대부분은 초등학생 또래의 어린 노동자들이었음에도 유독한 공기와 끊임없는 노동으로 인하여 노인처럼 허리가 굽었고, 몹쓸 병에 걸린 것처럼 볼이 푹 패여 있었다. 앨리스는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느끼고 여성 노동환경의 개선과 여성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노력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한국교회와 선교사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앨리스는 동료 여선교사들과 함께 책과 잡지, 또는 YWCA와 같은 청년 여성 기독교 조직을 통해 한국 여성 노동자 문제에 접근하는 등, 시대적 변화의 격류 한 가운데 있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을 돕는 일에 힘썼다. 엘리스는 이러한 일들을 하며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The Wome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이하 WFMS)의 여성 선교사로서 35년간 한국에서 여성 고등교육에 큰 영향력을 주었다. 앨리스는 당시 조선의 시대를 해석할 수 있는 선견지명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던 교육자였다. 그녀는 앞으로 여성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여성 스스로도 점점 더 교육을 바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 이화가 사용되기를 원했다.


4. 한국 최초의 여자대학교 건설을 위한 헌신
앨리스 아펜젤러는 이화학당 제6대 당장으로, 지금의 이화여대 신촌 캠퍼스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는 새로운 여성교육의 시대가 선교사의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은 1919년 삼일운동을 분기점으로 하여 여성에 대한 편견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여성들이 교육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교회와 미션스쿨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환경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유학의 길을 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앨리스 아펜젤러는 기독교가 조선 여성들을 보호해야 하고, 그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 ‘여자대학의 설립’이라고 생각했다. 앨리스 아펜젤러는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선교회 본부에서 진행해 왔던 여자대학 설립 운동을 강조하며, 많은 선교사들이 더욱 믿음을 갖고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이후 1922년 10월 앨리스 아펜젤러는 이화학당의 제6대 당장에 취임하며 더욱 ‘여자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이후에도 그는 기독교 연합 여자대학을 세우기 위한 시작으로 서울 신촌에 학교 부지를 마련하고자 애썼다. 신촌은 인근에 위치한 연희전문학교와의 운영상 협력을 꾀하기에 편리한 위치였으며, 부지 환경도 독립적으로 되어있어서 학교설립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는 학교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 모금운동을 하였으며 그 중 필립 헤이위드 그레이 부인(Philip Hayward Gray)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인해 1924년 7월, 드디어 신촌 부지를 살 수 있었다. 이후 1925년 4월 23일 조선총독부의 정식 인가를 받아, 이화학당은 이화여자전문학교로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앨리스 아펜젤러는 당장이 아닌 이화여전의 교장으로 조선총독부의 인가 승인을 받았다. 이로서 이화의 학생들은 남성들과 동등하게 사회가 인정하는 전문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많은 학생들이 사회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신촌 캠퍼스 건설을 위해 모금활동에 매진하였으며, 결국 교파를 초월한 모든 기독교인들의 모금에 힘입어 1933년 6월 10일, 신촌 본관 정초식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3년만인 1935년 3월에 신촌 캠퍼스로 이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이화학당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발전시킨 아펜젤러는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리스 아펜젤러는 이후에도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이화학당에서 헌신했으며, 1932년에는 감리교 목사로 안수 받았다. 그리고 1939년 4월, 25년 동안 이화대학에서 봉사하던 자신의 제자 김활란에게 총장직을 이양하였다. 그녀는 일제의 강압으로 1940년 한국을 잠시 떠나기도 하였으나, 194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이화여자대학의 명예총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1950년 2월 20일, 엘리스 아펜젤러는 이화여대 채플 시간에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져 그날 순직하고 말았다. 그녀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교육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녀의 장례식은 아버지가 설립한 정동제일교회에서 사회장으로 거행됐다. 양화진에 안장된 그녀의 묘비에는 모교 웰즐리대학의 교훈이기도 했던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 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minister”는 성경말씀(마가복음 10:45)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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