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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Baker, Catherine L.(1879-1972, M)
 작성자 : 안은정, 최정원  2019-07-02 11:07:27   조회: 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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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커 선교사 / Catherine L. Baker (1879 – 1972)

Ⅰ. 기본사항

1. 이름: Baker, Catherine L. / 베이커 / 한국명: 柏佳林(백가림)
2. 생몰연도: 1879. 12. 25. – 1972. 10. 14.
3. 출신 및 소속: 미국 인디애나 주 출생, 미감리여선교회(WFMS)
4. 한국선교기간: 1927. 9. - 1940. 10.
5. 연표
1879년 12월 25일 인디애나 주 출생
1901년 내셔널 트레이닝 스쿨 졸업
- 신시내티 콘서바토리(Cincinnati Conservatory),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수학
1907년 중국 선교사로 처음 파견(26세)
1907-1912년 푸저우(福州)에서 활동
1912-1915년 학업 위해 미국에 체류
1915-1927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난창(南昌)의 볼드윈여학교에서 영어와 음악 가르침
1922년 1-3월 성악, 색소폰, 합창 수강
1927년 워싱턴대학교에서 단기간 몇 개 과목 등록 1차 (이화로 가기 직전)
1927년 9월 입국 이화여자전문학교(이하 이화여전) 부임 (당시 47세)
1930년 남편과 사별(인구조사에 의함)
1935년 워싱턴대학교에서 단기간 몇 개 과목 등록 2차 (한국체류 중)
- 음악 강의가 주를 이루었고 영어 작문과 스칸디나비아어를 한 번씩 들었다.
1940년 10월 이화여전 사임
1940년 11월 16일 미·일 관계 악화로 인한 본국의 소환에 따라 출국
1943년-1964년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강의 수강
패서디나(Pasadena) 시립칼리지 평생교육원에서 강의
1972년 10월 14일 사망
6. 가족사항
남편: 1930년 사별


Ⅱ. 선교사 소개

1. 선교사로써 첫걸음, 중국
1879년 12월 25일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출생한 캐서린 베이커는 1901년 내셔널 트레이닝 스쿨을 졸업하였다. 이 학교는 1880년대에 들어 다른 문화권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는 인력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생긴 세미너리와는 다른 형태의 교육기관이었다. 캐서린 베이커가 졸업한 곳의 소재지가 표기되지 않아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감리여선교회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루시 라이더 마이어가 1885년 문을 연 시카고 트레이닝 스쿨이다. 메리 영이 이화에 오기 전에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지도하였던 롤라 우드(Lola Wood, 1881-?)가 시카고 트레이닝 스쿨 출신이었다. 트레이닝 스쿨은 대부분의 세미너리에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던 여성들에게 성경과 신학을 교육하며 실용적인 훈련도 겸하였다.
베이커는 26세였던 1907년 중국으로 처음 파견되었다. 1907-12년까지 푸저우(福州)에서 활동하였다. 푸저우(福州)는 아편전쟁 직후 체결된 난징조약(1842년)으로 중국이 영국에 개방한 5대 개항장 가운데 하나였다. 이에 따라 영국을 비롯한 거국 기독교 국가들의 중국 선교가 개항장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미감리회선교회에서 푸저우를 중국선교 거점으로 선택한 이유는 상대적으로 푸저우에 진출한 선교사들이 적었던 것도 있지만 푸저우가 중국 남동부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푸저우(福州)에서는 1851년 화이트가 번역한 푸저우 방언의 마태복음이 인쇄되어 반포되기 시작했으며 1870년에 이르러 신약 전체가 미감리회와 해외연합선교회 공동으로 진행되어 신약 전체를 푸저우 방언으로 인쇄할 수 있었다.
베이커는 1912-15년 사이에는 학업을 위해 미국에 체류하였으며,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1915년부터 1927년까지 난창(南昌)의 볼드윈여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다. 이 학교는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 총무였던 볼드윈(L.B. Baldwin) 부인의 기부금으로 세워진 곳이었다. 베이커는 중국의 볼드윈여학교에 재직할 당시인 1922년 1월부터 3월까지 신시내티 콘서바토리에서 성악, 색소폰, 합창을 수강하였다. 이는 초기에 콘서바토리를 다닌 학생들 중에는 정식으로 디플로마 과정을 밟지 않고 교수에게 개인지도를 받은 학생들이 많았는데, 베이커도 같은 경우일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기 직전인 1927년 여름에는 워싱턴 대학교에서 단기간 동안 몇 개의 과목을 등록하였다. 주로 음악 강의가 주를 이루었고, 영어 작문과 스칸디나비어를 한 번씩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커는 1927년 9월 한국에 입국하게 되는데 당시 나이는 47세였다.

2. 한국으로 그리고 이화로
1885년 서울에는 배재학당이 설립된 지 1년 후인 1886년 5월 30일 미국 북 감리교회의 여선교사 스크랜튼에 의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최초의 여자학교인 이화학당이 창설되었다. 당시의 사회사정으로 여자가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때였고 더욱이 서양인에 대해 배타적인 때라 여성교육을 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스크랜튼은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가 학생을 찾아다녔고, 이화학당은 이듬해 1887년 학생이 7명으로 불어나 명성황후 민비는“배꽃과 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또 배 맛같이 시원하고 좋은 열매를 맺으라.”는 뜻으로“이화학당”이란 교명을 하사하였다. 스크랜튼 부인은 이화학당의 교육목적과 방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여아들을 외국인의 생활과 의복 및 환경에 맞도록 변하게 하는데 있지 않다... 우리는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듦으로써 만족한다.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하여 완전무결한 한국을 만들고자 희망하는 바이다.”

이러한 교육방침 아래 설립된 이화학당은 새로 이루어진 개신교 공동체에 뿌리를 내리며 여학교로서의 기반을 확보하여, 배재학당과 쌍벽을 이룬 대표적 개신교 여학교로 발전하였다. 이후 이화는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 1858-1936) 총독의 집권 하인 1925년에 이화학당의‘대학과’와 ‘대학예과’를 통합하여, 일본의 음악전문학교와 동일한 지위를 갖는 이화여자전문학교(이하 이화여전) 음악과(1925-1943)를 출범시켰다. 이를 계기로 이화의 음악교육은 식민지 내 최초이자 유일한 제도권 음악교육기관으로 성장하였으며, 한국 여성에게 일본 유학을 거치지 않고도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미감리교 여선교사로 음악을 사랑하는 베이커가 한국으로 오면서 매리 영에 이어 이화에 합류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음악학교를 졸업하지는 않았지만 안식년 기간 동안 신시내티 콘서바토리에서 성악, 색소폰, 합창 등을 이수한 것으로 보아 음악적 자질을 갖춘 선교사로 판단된다. 1927년 9월에 이화학당에 부임해 음악사와 성악을 가르쳤던 베이커는 음악 감상과 피아노도 담당하였다. 음악 감상 시간에는 레코드를 사용해 음악을 들려주었는데, 교향곡을 비롯하여 드뷔시 등 프랑스 근대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을 다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 당시에는 학생들의 졸업 작품을 베이커가 연주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1930년 제4회 졸업생 중 한 명인 임성의는 졸업 작품으로 이광수의 시 “꿈”의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는데, 이 곡이 1등을 하여 베이커가 졸업 연주회 때 노래를 불러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베이커는 1932년 12월에 열린 이화여전 직원음악회에 소프라노 독창으로 출연한 바 있으며, 1933년 9월에는 이화여전 음악부가 주최하는 학술강연에서‘베에토벤 이란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The Korea Mission Field』는 베이커가 이화에서 음악의 뛰어난 독창자이자, 교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의 이러한 재능과 열정은 이화학당의 제2대 음악과장을 맡을 정도였다. 베이커는 1940년까지 음악과에서 그의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며 교사로서 음악과장으로써 학생들을 가르쳤다. 베이커는 1940년 11월 16일 미·일 관계 악화로 인하여 본국의 소환에 따라 출국을 하게 됨으로 14년간의 이화학당의 사역을 정리하게 된다.
이러한 이화의 음악교육을 바라볼 때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이화가 여성선교회의 예산, 즉 미국인 여성들이 모금한 선교기금으로 운영된 교육기관이었으며, 선교사들의 교육사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육을 통한 기독교 복음의 전파였다는 사실이다. 즉 이화여전 음악과는 선교기관이자 교육기관이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이화여전을 설립한 WFMS는 미국 내 여타 여성선교회와는 달리 독립 재정을 운영하였다. 그 결과 한국에서 활동한 다른 선교회에 비해 독신 여성선교사의 리더십이 확고하였고, 의료, 교육, 복지 방면에서 한국 여성을 위한 선교 사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화여전의 교육이 선교현장의 요구에 특화되었고, 졸업생이 선교회 소속 기관들에 투입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화여자전문학교는 1925년에 문을 열어, 1945년까지 존재하였으며 일제의 강압에 의해 1944년 1월부터는 1년제 이화여자전문학교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라는 단일과정으로 운영되었다. 1945년 4월부터는‘경성여자전문학교’로 이름을 변경하여 해방을 맞이하였다.

3. 시인이자 음악가
베이커는 한 설문지에서 자신의 관심사는 “시와 음악”이라고 기재하였는데,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던 그녀지만 문학에서도 꽤나 탁월한 실력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총 9권의 시집을 출간한 그녀의 시 중에서 ‘Spring in Korea’와 ‘These My Brethren’은 한국을 향한 그녀의 열정과 사랑을 알 수 있는 시이다. 그중에서 ‘These My Brethren’을 함께 보며 그녀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하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해 열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함께 느끼며, 선교사들의 눈물과 섬김과 사랑으로 한국이 이렇게까지 복음으로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Our Father,
Send us as thy messengers
To hearts without a home,
To children
Who have longed in vain for human love,
To the famished whom none have fed,
To the sick whom none have visited,
To the fallen whom none have lifted,
To the lepers whom none have touched,
To the bereaved whom none have comforted.

Be light in our souls
So that lost ones shall see the way,
Make our hands skilful for those in need,
Quicken our sympathy
For the hidden tragedies in many a heart.

Inspirer of the world's joy,
Bearer, of the world's pain,
Make us glad
That we have inherited the world's burdens. Amen.”

<이 내 형제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아버지의 전령으로 보내주소서.
안식처가 없는 마음들에게,
헛되이 인간의 사랑을 갈구했던
어린 아이들에게,
아무도 음식을 주지 않았던 굶주린 사람들에게,
아무도 방문하지 않았던 병자들에게,
아무도 세워 주지 않았던 쓰러진 사람들에게,
아무도 만지지 않았던 문둥병자들에게,
아무도 위안을 주지 않았던 사별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영혼 안에서 빛이 되소서.
멸망한 자들에게 길을 밝혀 주시고,
필요한 자들을 위해 우리의 손이 숙달되게 하시고,
숨겨진 비극들을 마음에 지닌 많은 자들에게
애처로운 마음을 더욱 더 가지게 하소서.

이 세상 기쁨의 영감을 주시는 주님
이 세상 고통을 들어주시는 주님,
저희로 하여금 기꺼이
이 세상의 짐을 물려받게 해주소서. 아멘.”

4. 강제 송환으로 인한 철수
신사참배문제로 국내에서 기독교회 및 선교사들과 일제와의 노골적인 대립이 심해지고, 더욱이 중일전쟁 후 미국이 중국의 장개석 정부를 지지하고 전쟁이 세계대전화하면서 국내 선교사들이 설 자리가 점점 없어졌다. 1940년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10월 초에 미 국무성을 통하여 한국, 중국 등지에 거주하는 모든 미국시민에게 귀국할 것을 통보하였다.
서울에 주재하던 미국공사 마쉬(G. Marsh)는 서둘러 미국인들의 귀국을 주선하였다. 10월 9일 귀국통지를 받은 이화의 선교사 교수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 최후의 조처만은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자신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화가 당해야 했던 수난과, 한국 감리교회가 일본식 기독교화에 따른 신앙의 변질을 강요당하고, 당시 교권주의자들이 결국 이에 편승하여 교회를 일본의 어용단체로 전락시키는 등, 한국의 감리교회가 신앙적으로 크게 변질되어 버린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선교사들은 마침내 귀국을 결정하였다. 학생들과 한국인 교수들도 선교사들이 겪는 수모를 눈앞에서 보면서 도저히 그들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하고, 또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들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마지막 순간이 오기까지 며칠 동안 떠나야 할 사람들과 보내야 할 사람들은 서로의 아픈 데를 건드리지 않고 평온한 모습을 나타내려고 무척 조심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평생 가장 슬픈 날로 기억될 며칠 동안은 평소에 그렇게도 잘 주고받던 이별 인사와 선물, 감사의 표현 등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말없이 주고받은 뜨거운 우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감격스러운 경험으로 남았다.
마침내 떠나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학생들은 스승이자 부모처럼 믿고 의지했던 선교사 선생님들을 보내는 송별식에서 큰 절을 올렸다. 1940년 11월 15일 이화의 선생님 7분을 포함한 미국인 216명이 서울을 출발하여 16일 인천항에서 증기선 마리포사(S.S.Mariposa) 호를 타고 한국을 떠났다. 그레이스 우드, 칸로, 모리스, 헐버트, 매리 영, 베이커, 아펜젤러 선생. 이들은 길게는 평생을, 혹은 25년 혹은 10년 이상을 이화에서 봉직하면서 이화를 평생의 삶의 터전으로 생각하고 살아 온 분들이었다. 김활란 교장과 재직 선생들 그리고 학생들이 서울역과 인천까지 따라 갔다.
“1940년 11월 15일은 미국 사람들을 실어가는 마지막 배가 인천에서 떠나는 날이었다. 이들을 송별하려는 선생님과 학생대표들은 인천행 기차를 탔다. 그러나 찻간은 벌써 미리 갈라놓아서 앞 칸에서 뒤 칸에 서로 ‘있거니…’하는 것으로 위로가 될 뿐이었다. 배가 닿은 인천부두 가에는 정사복 형사들이 시끌시끌하고 경계가 삼엄했다. 배 곁에는 쇠사슬을 쳐놓고 서로 가까이 가지도 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환송객들은 많이 나왔다. 수십 년 동안을 사랑하는 부모와 같이 정이든 선생님들, 한국에 나와서 갖은 고생을 다해 오신 이 사도들은 오늘날 무슨 큰 죄나 지은 것처럼 모욕적인 제재와 구속을 받으면서 이 땅으로부터 쫓겨 나가는 것이다. 우리 학생들과 전송객 일동은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먼발치에서 눈물을 흘리며 바라만 보고 서 있었다. 혹시 쇠줄 옆에 까지 간다 해도 그들과 아무 이야기도 할 수는 없었다 ….”
2019-07-02 11: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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