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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Gillett, Philip Loring(1874-1939, YMCA)
 작성자 : 문소라, 엄지  2019-07-02 11:36:48   조회: 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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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기본사항

1. 이름 : Gillett, Phillip Loring / 한국이름 : 길례태

2. 생물연도 : 1874년 – 1939 (심장마비로 사망)

3. 출신 및 소속
- 출신 : 콜로라도 대학교, 예일 대학교 출신(예일 대학교 1년 6개월 수학, 예일 대학교 YMCA 전도사업 담당간사 활동)
- 소속 : 미국 YMCA

4. 한국선교기간 : 1901.9 – 1913.6

5. 연표(활동내용)

연도
내용
상세내용
1900.6.28-9.17
조선 YMCA 창설준비
(라이언의 보고)
조선파견 간사로 질레트 선정,
예산 : 5천달러 책정
1901.9
질레트 서울 도착
배제학당 기독학생회 조직
1903.3
YMCA 창성준비협의회 조직
(브록크만)
청년회관 건립 자문위원회 조직
1903.10.28
황성기독교청년회 창설
우리나라 최초의 청년회,
정동 공동 서적실에서,
5개국 37명 참여, 질레트는 초대 총무
1904.
서울 YMCA 대지 매입

1907.12
YMCA 사옥 건립
야구, 농구를 최초로 들여옴
1911.
105인 사건을 국제선교협회회의 에든버러 본부실에 제소
이후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심해짐,
질레트 사표(수리거부)
1913.6
중국으로 추방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함
1933.
퇴임



6. 가족사항
- 아내 : Bertha Gillett - 1903년 11월 상해에 있던 아내와 결혼한 후 한국으로 데리러 옴
- 자녀 : 이름 없음 – 1905년 태어났지만 얼마 살지 못하고 이름 없이 사망함


Ⅱ. 선교사 소개


1. 북미 YMCA 국제위원회로부터 조선으로 파견됨

북미YMCA 국제위원회는 조선 개화청년들의 요구를 접수한 뒤, 중국YMCA 운동을 개척한 라이언(D. W. Lyon)으로 하여금 현지 정황을 조사하게 했다. 1900년 6월 28일부터 9월 17일까지 서울에 머물러 있었던 라이언은 북미 YMCA 국제위원회에 조선 YMCA창설에 대한 긍정적인 보고를 한다.
북미YMCA 국제위원회는 라이언의 보고를 받은 후 조선에 파견할 간사로 필립 질레트(Philip L. Gillet)를 선정했고, 회관건립 예산으로 5천불을 책정했다. 1901년 9월 서울에 도착한 청년간사 질레트는, 1년간 대한제국의 청년들을 사귀고 당시 상황을 파악하면서 YMCA 창립을 준비했다. 그리고 1903년 3월, 당시 중국, 조선, 홍콩 YMCA 전체위원회 총무였던 브록크만(F. S. Brockman)을 초청, YMCA 창설준비협의회를 조직했다. YMCA 창설준비협의회가 열린 것은 1903년 3월 18일이었고, 조선YMCA의 창립의지가 재확인되면서 회관건립을 위한 금액이 모금되었다.
1903년 10월 28일 수요일 저녁 8시, 서울 유니언회관(정동 공동서적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청년회인 "황성기독교청년회"가 탄생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였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서울을 한성대신 황성으로 불렀는데, 청년회는 그것을 땄던 것이었다. 독립의 의지를 나타내는 명칭이었다. 이날 헐버트가 의장이 되어 사회를 보았고, 게일 목사가 헌장초안을 낭독하고 통과된 헌장에 모인 이들이 서명날인을 했다. 정회원이 28명이고 준회원이 9명이었다. 헌장에 따라 조선인 2명, 미국인 4명, 캐나다인 2명, 일본인 1명으로 구성된 12명의 이사를 선출했다. 그러나 YMCA는 당시 정치운동을 하고자 하는 조선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했다. YMCA를 영국·미국의 보호를 받는 정치적 단체로 오해하고 입회하는 경우가 많아 회원이 500명을 넘었으나 게일과 질레트 등이 그 활동을 종교적 활동에 국한하자 회원들이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정치적 성향이 강한 회원들은 을사조약 철회를 위해 YMCA를 이용하려다가 게일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2. 황성기독교청년회(한국 YMCA) 창설 및 활동

위 내용에서 언급하였던 것과 이어 좀 더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1903년 10월 28일 창설되었다. 이보다 앞서 1899년에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장감 양 교파 선교사들과 150명의 한국청년들이 YMCA 국제위원회에 설립 청원서를 냈고, 1900년에는 라이언(D. W. Lyon)이 기초 조사를 했으며, 1901년에는 YMCA 국제위원회가 전문가를 한국에 파송하게 되었다. 이 때 파송되어 온 사람이 질레트였다.
그는 1874년 미국 일리올스(Illiols)에서 나서 콜로라도 대학을 졸업한 뒤 예일대학에서 1년 6개월 간 공부하고 그 대학 YMCA의 전도사업의 담당간사가 되었다. 때마침 YMCA 국제위원회가 한국YMCA의 창설간사로서 “지식층 청년들을 다룰 수 있고, 대인관계가 좋고, 한국말을 열심히 배울 수 있고, 총각이고, 편협한 사람이 아니라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이고, 범세계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고, 사고적인 인물”을 물색 중에 있다가 그를 적임자로 선정했던 것이다.
그는 1901년 9월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하자 ‘하느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셨으니 뜻대로 이루소서! 한국 청년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했다. 2년이 조금 지나 그는 창설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즉 1903년 3월 18일 그는 미국정부의 주한대리공사인 알렌(H. N. Alllen)을 비롯하여 영, 독, 일, 중, 노 등 각국 공사 또는 그 대표자들과 각 교파선교사들, 은행가, 실업가, 세관장 등, 그리고 민영환 등 한국정보의 고관들을 초청하여 소위 『‘한국역사상 최초의 각국 대표자 회의』를 소집했다. 이때에 선출된 위원장이 헐버트였다.
헐버트와 질레트는 손잡고 열심히 일했다. 우선 Y회관을 짓기 위한 기금으로서 1,600원을 모금했고, 창립총회에 내어놓을 Y헌장 초안을 작성했다. 그리고 1903년 10월 28일 헐버트의 사회로 창립총회가 열렸을 때 만장일치로 헌장을 통과시키고 12명의 창립이사를 선출하게 되었다.
한국 YMCA(황성기독교청년회)의 초대총무로 정식 취임한 질레트는 먼저 배재학당 학생클럽과 성경 연구반을 조직했다. 그리고 등산클럽을 조직했다. 1904년에는 현 서울Y의 대지를 사는데 성공했고, 거기다가 가건물을 짓고 사업을 시작했다. 1907년부터는 YMCA 국제위원회가 기부한 8만원(4만 달러)을 가지고 3층 양옥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12월에 낙성했으니, 이것이 즉 매천야록(梅泉夜錄)의 저자 황 현(黃 玹) 씨의 말대로 “그 집은 높기가 산과 같고 종현(種峴)의 천주교당과 함께 남과 북에 우뚝 마주 서서 서울 장안의 제일 큰 집이 되었다”

3. 황성기독교청년회(한국 YMCA) 와 애국계몽운동

1908년 종로에 YMCA회관이 낙성되었다.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나서 새로운 계몽단체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150여명의 조선청년들은 1899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를 만나 YMCA의 창설을 강변했다. 이 조선청년들의 주장에 깊이 공감한 두 선교사는 북미 YMCA 연합회 국제위원회에 조선 YMCA 창설을 요청했고, 그 결과 1901년 질레트를 파송하게 되었다.
이들은 1903년 3월 18일 저녁 종로의 한미전기회사 사옥에는 서울에 와 있던 외국인들을 만찬에 초청해서 YMCA 설립모금을 하였다. 당시 상당한 금액이었던 7천원이 모금되었다. 그 모금을 시작으로 1903년 10월 29일 수요일 저녁 8시 정동 유니언 클럽에서 기독교청년회가 발족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만민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전제 하에 인권과 민권의 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계급제의 철폐, 부부가 서로 존중하기 위해 존댓말을 쓰고 함께 식사를 하는 등의 성 차별의 철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노동의 신성화 강조를 통한 사농공상 폐지, 축첩제도, 조혼제도 폐지운동까지 주도했다. 기독교 교육 또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그것은 초등교육에서부터 고등교육, 특수교육에까지 걸치는 것이었다. 교육내용은 자연과학계통의 과목과 아울러 국어, 국사, 지리, 그리고 합창과 체조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런 과목을 통해 신식교육에 대한 열망과 애국사상이 고취되었다.

4. 한국에 처음으로 야구와 농구 등 다양한 운동을 보급함

1905년 봄, 질레트에 의해 이 땅에 야구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한국 야구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옛 태화관 건물 앞 공터였다. 질레트가 처음 도입하여 YMCA 회원들에게 가르쳐준 것이 한국 야구의 시작이다. 1906년 2월 YMCA 팀과 독일어학교 팀 간의 훈련원 마동산에서 있었던 경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경기로 전해진다. 1907년 7월 YMCA 체육실에서 동경 유학생팀과 서양외국인연합팀의 경기는 농구역사의 서막이라 할 수 있다.

5. 105인 사건에서의 공헌

그의 가장 큰 공헌은 105인 사건에서 볼 수 있다. YMCA가 국제적인 조직망을 통하여 그 세력이 해외에까지 뻗어나가는 것을 싫어한 일제는 YMCA를 말살하기 위한 조작극을 꾸며내었다. 그것은 1911년 압록강 철교 낙성식에 참석하러 가는 데라우찌(寺內正敎) 총독을 기독교인들이 죽이려고 했다고 하며 수백 명을 잡아다가 허위진술서를 꾸미게 하고, 105명에 대하여 치고 6년형을 언도한 사건이다.
105명 중 주모자로 몰린 사람이 윤치호 부회장이었다. 보통 이것은 서북지방의 안창호 계통의 지하조직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분명히 한국YMCA 세력, 특히 YMCA의 외국인 세력을 꺾기 위한 음모였다.
질레트는 이 사실을 국제선교협의회의 에딘바라 본부실에 제소했다. 다른 선교사들이 못하는 일을 그만이 용감하게 폭로했던 것이다. 드디어 총독부의 탄압이 노골화되었다. 총독부는 질레트 총무의 파면을 요구했다. Y이사가 이에 응할 리가 없었다. 허나 총독부의 탄압은 날로 가중해지므로 질레트는 자진 사표를 냈다. 허나 수리되지 않고 다만 잠시 중국 YMCA 지도자 협의회 강사로 보낸다는 구실로 한국을 떠나게 했다.
그 뒤 질레트의 재입국은 허락되지 않았다. 한편 YMCA는 총무를 잃고, 또한 부회장 윤치호는 감옥에 들어가 본교 학생운동의 총수격이던 이승만과 김규식은 해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총독부의 탄압이 너무 잔인하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총독부는 질레트에게 공한을 내기를 “만일 운동만 하지 않겠다는 보장이 서면 재입국하여 총무가 되는 것을 환영한다”라고 했다. 이에 질레트 총무는 “조건부로 나를 오라고 하는데, 나에게도 조건이 있소, 죄 없는 윤치호 부회장을 석방하시오. 그러면 가겠소”라는 회답을 써 보냈다. 그 뒤 그는 다시 한국에 오지 못했다.(총독부가 그의 조건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 민족에게 남긴 공적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2019-07-02 11: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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