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6.23 화 09:15
 
 내한선교사 / Burdick, George M.(미상, M)
 작성자 : 손평인, 설요셉  2019-07-02 12:26:54   조회: 756   
 첨부 : 기말보고서_3학년 2반_046_설요셉_손평인.hwp (1798656 Byte) 
내한선교사 연구. “Burdick George m.(변조진 선교사)”
3학년 2반 2017210096 설요셉
2017210097 손평인
1부 기본사항

내한선교사총람의 글을 골자로 참고자료에 나온 것을 보충하여 기본사항을 기재했습니다.

이름: Burdick George M.
한국명: 변조진(邊兆鎭) 선교사.
생물연도: 미상
학력: 미상
출신 및 소속: 미국,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한국선교기간: 31년(1903~1933)
경력을 통한 연표: 1903년 미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수원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미감리회 제 19회 선교회에서 수원구역장으로 임명되었다.
삼일여학교 설립자로 학교발전에 헌신하였다
1908년 수원지방회 초대 지방감리사를 역임하였다.
1918-24년에는 강원도 영월, 평북 영변, 경기도 이천지방까지 관활하여 순회선교를 하였다. 밀러와 학교, 교회사업에 또한 주력하였다.
1929-30년에는 인천에서 활동을 하였다.
1933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가족사항: 미상
논저: 조직신학, 조직신학 속. 감리교회협성신학교 1928.
참고문헌: 기백 7권; KMYB; CMYB; Official Minutes of the Korea Mission, M. E. C. 1903-05; 기감연합연회록, 1931-33; 감리교요람 60; 삼일학원 50년사 1968; 홍석창, 수원지방의 발자취, 기감수원동지방회, 1978; 구미인조사록; 감리교회사 상; 한국감리교회 외국인선교사.

2부 선교사 소개

1. 변조진 선교사님의 일대기

미감리회 선교사 버딕(Burdick, George, M). 한국명 변조진(邊兆鎭)
미감리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03년 미감리회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그 해 5월 제19회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수원구역장으로 임명되어 수원 선교를 담당하였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수원 보시동(普施洞)교회에 삼일학교를 창설하고 학교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1904년부터는 남양구역까지 관할하게 되었고 1908년 수원이 지방으로 승격되면서 수원지방 초대 감리사가 되었다. 그의 관할구역은 점차 확대되어 1918년에는 영월, 1922년 영변, 1924년에는 이천지방까지 관할하게 되었다.
주요활동은 수원, 이천을 중심한 경기도지방에서 이루어졌는데 특히 여선교사 밀러(L. Miller)와 함께 학교ㆍ교회사업에 주력하였다. 그는 하루 일과 중 반 이상을 순회하는 데에 활용하였고, 1927년 한 해 동안에 수원, 이천지방의 13개 구역 79처 교회를 순회하여 2천 마일 이상을 여행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후 1929년에는 인천에서 순회활동을 하였고, 1933년에 31년간의 한국선교사역을 마치고 은퇴한 선교사가 된 변조진 선교사는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갔다.

1) 평양대부흥 운동을 경험한 변조진 선교사
버딕선교사는 평양대부흥의 운동을 경험하고 기록한 선교사이다. 1907년 장로교회에서는 길선주 목사를 중심으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는 동안, 감리교회에서는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대부흥의 불길이 붙기 시작하여 충청도 공주까지 이어졌다. 평양에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각기 자기 교회로 돌아가 집회를 인도하여 영변지방, 제물포교회, 해주 등에서도 성령의 불길을 일으켰다. 수원에서 구정을 기해 1주일간 특별 부흥회가 열렸는데 수원교회 교인들뿐 아니라 남자 소학교 학생들까지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 특히 버딕의 사무실에서 열린 준비기도회에 참석한 교인들이 은혜를 체험하여 "집회 기간 내내 기도의 영이 교인들을 사로잡아. 교회의 영적 생활이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1907년 여주에서 부흥회가 개최되었는데, 강사는 테일러(C. Taylor), 윌리엄즈(F.E.C. Williams), 버딕 등 선교사였다. 이 부흥회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하여 회개와 고백이 잇따랐다. 부흥회가 끝나고 1백 명 이상의 신도들이 죄의 용서와 성령의 확신을 가지고 새로 거듭나게 되었다. 여주에서 집회를 마친 선교사 일행은 충청도 목천, 공주에서 부흥회를 계속해서 열었는데 모든 사람에게 성결함과 성령의 충만하심이 강하게 역사하였다. 남한지역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의 출발점은 여주 집회였다. 버딕은 1929~1930년에는 인천에서 활동하였으며 30년을 한국 선교에 헌신하고 1933년 은퇴한 후 귀국하였다.

2) 복음으로 무장된 조선청년들을 양육한 민족지도자 양성가인 버딕 선교사
그가 평양대부흥운동을 경험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조선인을 향한 사랑이 있었던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단순히 복음만을 전하지 않고, 약탈적인 일본제국의 통치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조선의 영혼들을 위하여 정치적인 핍박을 무릎쓰고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민족운동가들의 선동적인 기질에 휩쓸리는 교회청년들을 복음 앞에 바로 서게 하고, 제자훈련을 통하여 평화적인 독립운동인 3.1운동을 기획하는 청년지도자들로 양육한 것이다(대표적으로 민족대표 33인 이필주).

그의 이러한 입장이 잘 들어나는 사례는 엡윗청년회 사건이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어간에 교회 청년단체들이 민족운동가들의 선동을 당하여 폭력적인 정치단체가 되고 있는 현실을 보았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이를 우려하였고, 버딕 선교사도 마찬가지의 입장이었다. 1897년 순수 교회 신앙훈련 조직으로 출발했던 엡윗청년회는 1904년 이후 다양한 계층의 민족운동가들이 가입하면서 점차 정치적인 성향을 띠었고, 그 결과 민중계몽운동뿐 아니라 무장테러까지 모의하는 과격한 정치 운동체로 변질된 것이다.

순수교회 신앙훈련을 통한 조국혼을 가진 청년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위기에 빠진 한국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라 믿었던 버딕과 동료 선교사들은 미래를 위하여 큰 결정을 내린다. 당시 한국 선교를 관장하고 있던 스크랜턴은 을사조약 체결 보름 전인 1905년 11월 1일 엡윗청년회를 해산시켰는데, 청년회 해산 이유는 "청년회의 정치화"에 있었음을 밝혔다. 수원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버딕도 "무법적인 행위"를 하던 엡윗청년회 해산이 시기적절한 결정이었음을 밝히며 선교사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2. 변조진 선교사가 순회하였던 지방과 교회들

1) 수원지역 - 당시 수원읍교회 현. 수원종로교회
1899년 4월 10일 수원 및 공주 순회구역 전담선교사이신 스웨어러(서원보 W. C. Swearer)선교사가 능력있고 영향력 있는 이들을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주시켜 정착시킴으로 한 신앙공동체가 탄생되었다. 1901년 1월 보시동 16번지에 13칸의 집(예배당 및 사택)을 마련하고 이명숙 전도사를 파송하여 이명숙 전도사 일가가 입주하게 됨. 인접한 지역에 작은 집이 달린 부지800평을 확보하여 예배당과 선교사 숙소를 지었다. 1902년 2월 17일 남자, 3명, 여자 4명 첫 열매로 등록하게 되고, 지역의 인사 김제원, 홍돈후, 김연구, 임면수, 차희균, 이하영 제씨는 메리 스크랜턴의 기도와 헌신, 베크(S.A.Beck)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15명의 학생으로 교회 안에 남자매일학교(삼일학교)와 여성들을 모아 여자매일학교(삼일여학교 현, 매향학교)를 세우게 된다.

이러한 수원읍교회에 1903년 1월 변조진 선교사(G.M.Burdick)선교사가 스웨어러 선교사를 도우기 위해 찾아온다. 1904년에는 변조진 선교사가 수원 순회 구역 선교사로서 사역을 하였고, 수원읍교회도 그 사역의 일환으로 목회를 하였다. 1905년부터 1909년까지 수원 지방 감리사로 변조진 선교사가 사역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13년 1월 변조진 선교사가 미국 알테라 밥콕스 티터 부인의 모친 기념 예배당 건축을 위해 보관 중이던 150불(300원)과 전 보시동 교회를 매각한 돈과 합쳐 900여원으로 40평의 함석 예배당을 새로 건축한다. 교회가 “종로에 소재한다”하여 교회명칭을 “수원읍교회”에서 “수원종로교회”로 자연스럽게 부르고 표기를 하게 되니, 오늘날에 수원종로교회가 변조진 선교사의 노고를 통해 세워지는 것이다.

1915년이후 변조진 선교사는 수원지방 감리사를 노블에게 맡긴다.
1927년 수원지방 감리사로 다시 사역하는 변조진선교사.
1928년 이후부터는 수원지방 감리사를 노블에게 맡기고 떠난 변조진선교사.

2) 이천지역 - 이천중앙교회
1902년 8월 13일 남한지방 수원구역 이천교회(이천읍 창전리 153 구 읍사무소를 설립한다. 1903년 8월 초대 문경호 전도사는 서원보(W.C.Swearer)선교사 시무를 받으며 초대 담임전도사로 부임받는다. 1903년 2대 담임전도사로서 고시영 전도사가 부임받는데 그는 변조진선교사가 이천지방 선교책임자로 있을 때 부임받은 것이다. 따라서 고시영전도사부터 이천지방 선교책임자인 변조진선교사로부터 지도를 받는다.

3) 충주지역 - 유봉교회
유봉교회는 엄정면 유봉리 221번지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총회) 소속의 규모가 작은 교회로, 충주지역에서 처음 건립된 교회이다(1903년). 현재의 교회는 샌드위치판넬을 이용하여 예배당을 만들었고, 컨테이너 1동을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유봉교회는 1902년 임치수가 목계장에서 미국에서 온 레이놀드 선교사를 만난뒤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서화영과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 모태가 되었다. 1903년 3월 25일 엄정면 유봉리 221번지에 초가삼간의 예배당을 세웠다. 1904년 12월 변조진 선교사가 부임하였다. 그는 1905년 8월 소태면 기독학교를 통합시켜, 충주&제천 일원의 청년을 가르쳤고, 야간에는 엄정 지역의 청년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교과서는 『청년필학』이었는데, 일제에 압수된 책입니다. 이렇게 충주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변조진 선교사는 1907년 김석현 목사를 통해 소사경회를 실시하였고, 1909년 장춘무 목사를 통해 복음전도회를 조직하였다.

1911년 서양인 선교사 순휘에게 지도를 맡기었고, 1914년 부인, 소사경회를 개최하며, 1915년 목계 구역에서 부인친목회를 발족하였다. 그리고 1922년 황희수 전도사가 금주, 단연회를 조직하면서 선교사가 세운 본 교회를 토착목회자에게 위임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다. 1923년 교회당을 보수하고, 8월에 목계 구역 자치귀성회를 조직하였고, 1927년 8월 조선예수교회로 전환되었다. 이를 통해 레이놀즈 선교사 복음의 씨앗을 뿌려 발아한 충주의 첫 교회인 유봉교회는 초대 담임목회자인 변조진 선교사를 통해 성장하였고, 23년 만에 조선예수교회로 전환되면서 네비우스 정책을 따랐던 변조진 선교사의 뜻이 성취되었다.

4) 안산지역

1905년 발간된 『조선감리회 연회록』에 다음과 같은 버딕(George M. Burdick)의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나는 수원 구역 오미, 선납재 그리고 고주물(Ko Chyu Mul)[지금의 안산시 화정동] 등 새로운 세 그룹을 등록시켰는데 각기 24명, 31명, 94명의 명단이 작성되었다.”

기록에서 고주물(꽃 우물)의 신도 수가 오산의 4배, 선납재의 3배에 이르는 것은 이 지역이 월등하게 부흥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조선감리회 연회록』에는 같은 선교사의 보고서에 고주물(꽃 우물)이 한 번 더 거론된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다가오는 곤경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아니면 분쟁으로부터 백성과 신앙 그룹을 도와주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호소를 받았다. 남양 구역은 전도사 박세창, 수원 지역은 각 전도가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신도들의 이주로 해산된 막골과 최근 수원 구역에 등록된 선납재와 고주물(꽃우물)은 이 호소에서 제외되었다. 무지내·삼막골·덕고개·오미는 일본인과의 분쟁으로, 아리실과 장내는 토착민의 박해로 고통을 받고 있다.”

이 기사는 개신교 초창기 안산 지역 교회들이 일본인과 토착민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으나 고주물(꽃우물 교회)은 선교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신도가 94명이나 되었다는 먼저 기록과도 연관이 된다. 이들이 안산의 복음화에 쓰임받는 첫 씨앗들이었음을 변조진선교사의 보고를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1) 남양감리교회
버딕은 남양교회 뿐만 아니라 안산의 교회사에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버딕 선교사에 의해 안산에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교회가 세워진다. 그 당시에 안산에 세워진 감리교회는 모두 버딕의 영향을 받게 된다. 남지방의 버딕 선교사는 1905년 동안 19번의 지방여행을 했다. 그 중에 세 번은 서지방의 케이블 형제와 함께 남양 구역을 순회하였고, 그러한 결과들을 수원과 남양 구역이라 하여 선교연합회에 보고 하였다.

1905년에 남양 읍내에 6칸 자리 새로운 교회를 지었고, 남양 구역 전체로 지어지게 된다. 마치 네비우스의 자립정신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1905년 버딕의 보고에 따르면 1899년에 설립된 남양교회는 여러 가지 박해를 만나고 있었지만. 대체로 잘 승리하였다고 보고한다.
김광식 선교사가 사역할 때 남양지역을 관장한 선교사도 버딕선교사였다. 버딕은 12명의 순회 설교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당시 남양에는 21개의 교회가 있어 동 지방과 서 지방을 나눌 정도로 규모가 컸다. 1911년 힐만, 밀러선교사의 보고로는 남양지방에 전도부인 하나가 있었다. 이 하나 전도부인이 폐결핵으로 병마와 싸고 있었다. 한나전도부인은 그 이전부터 전도부인으로 남양 구역을 봉사해 왔는데 이 때에 이르러 폐결핵으로 더는 전도부인의 사역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사역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들, 즉 관용함, 상냥함, 근면, 낙담하지 않는 신앙을 소유했는데, 이러한 동역자와 함께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이 버딕 선교사가 받은 축복이었다.

1913년 6월 감리교 연회에서 버딕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보고 하였다. 테일러 선교사는 남양을 포함한 서쪽 4개(화정교회, 샘골, 성광) 구역을 담당하고, 홍순화 목사는 수원을 중심으로 한 중앙의 4개 구역을 감독하며, 버딕 선교사는 나머지 4구역을 맡게 된다. 그리고 남양감리교회는 민족대표 33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이필주 목사가 시무 했던 교회로 광복운동에 앞장섰던 교회이다. 따라서 버딕 선교사는 광복운동을 앞장서게 한 교회로 동역한 조국혼을 심어준 민족적 선교사인 것이다.

(2) 화정감리교회
화정교회는 고주물교회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옛날 신부 마을에 내려와 살던 선녀들이 이곳에 물이 너무 맛이 좋아 길어다 먹었으며, 이 우물에 선화라는 아주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화정이라는 마을 이름은 바로 꽃 우물에서 유래되었다.
화정교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남양지역에서 사역을 했던 버딕(G. M. Burdick)선교사의 수원지방 초대 감리사 수원 남양구역 보고서에서 나온다.

“올해 나는 수원구역에서 3개의 새로운 모임을 등록 했는데, 오뫼에서는 24명, 선납재에서는 31명, 고주물에서는 94명의 신도들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 화정감리교회를 돌보았고, 그가 은퇴한 이후(1933년 이후), 1940년 감리회보에는 화정리 뒷산에서 물왕, 오이, 거모, 목내, 원시, 무지, 화정, 안양 등 8교회 성도들 1,500명이 모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렇게 94명에서 1,500명이 모이는 교회가 된 것에는 버딕 선교사의 돌봄이 영향을 주었고, 이 교회는 독립운동가인 김병권 목사가 1917년부터 수원과 안산구역을 관할하면서 삼일독립만세를 이끄는 신앙공동체가 된 것이다. 버딕선교사는 남양감리교회의 이병주 목사를 민족대표 33인이 될 정도로 관리감독한 사역을 하였다. 따라서 남양감리교회와 함께 고주물 교회도 민족혼이 살아 숨쉬는 교회가 되어 민족을 살리는 교회로서 건강한 부흥을 맛본 것이다.

5) 영변지방과 3.1 운동
영변지방 감리사 변조진 선교사는 한편으로 눈물이 나고 한편으로 감사하다고 하며, 독립운동 상황을 보고하였다.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대사경회가 정지되고, 10월로 연기되었다가 다시 정지되었음을 보고하였다(1919년).
또한 3월 이후 조선독립운동사건으로 인하여 목사와 전도사가 없는 곳은 영변, 태천, 신창이며, 독리, 복원, 운산이며, 독립운동이 전개된 곳은 복원, 운산이며, 수금된 이는 목사 2명, 전도사 2명, 속장 1명, 전도부인 1명, 학교교사2명, 학생 5명, 남녀교우 3명인데, 근일 출옥된 이는 7명, 피신자수는 목사 1명, 전도사 1명이다.“라고 조선연회록 1919년 보고했다.
버딕선교사는 평양대부흥 이후, 은퇴할 때까지 남북한지역을 순회하며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 결과 순수한 복음과 조국혼을 지닌 성도를 배출하여 오늘날까지 지역사회에 이바지하였다.
2019-07-02 12: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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