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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Hall, Sherwood(1893-1991 , M) / Hall, Marian Bottmly(1896-1991, M)
 작성자 : 유재준 / 김선교  2019-07-02 16:42:27   조회: 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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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기말보고서 / M091 / Hall. Sherwood / Hall. Marian Bottmley

2016210176 유재준
2017210144 김선교

1. 기본 소개

이름
Hall, Sherwood (남편)
Hall, Marian Bottmley (아내)
생몰연도
1893.11.10. ~ 1991.04.05.
1896.06.21. ~ 1991.09.19
출신 및 소속
캐나다 & 미국 북감리교
한국선교 기간
1926.04.19 ~ 1940.11
연표
1893.11.10 서울에서 출생
1894.11.24 아버지 (닥터 홀) 사망
1894.12. 미국으로 떠남
1895.05.23 에디스 마거리트 출생
1898.05.01 홀 가족, 4년만에 다시 평양에
23 에디스 마거리트 사망
1911.04 셔우드 홀, 마운트 허몬학교 입학
1915 셔우드 홀, 마운트 유니언 대학 입학


1896.06.21. 영국에서 출생
1911.04 버텀리 가족, 캐나다로 이민
1917 여름 메리안 버텀리, 미국으로 건너와
루츠타운학교 교사로 취임


1920.09 메리안, 필라델피아 여의대 입학
1922.06.21 셔우드 홀, 메리안 버텀리와 결혼
1923 셔우드 홀, 토론토 대의과대학 졸업
1924.06 메리안, 의사 자격 획득
1925.08.15 닥터 셔우드 홀 부부, 조선으로 출발
1927.02.18 윌리엄 제임즈 홀 출생
1927.06 결핵요양원 설립안, 선교부 연례 회의에서 통과
1928.03 요양원 건축 허가 나옴
1928.10.27 결핵 환자 위생학교(요양원) 개교
1929.01 닥터 셔우드 홀, 조선 총독의 감사장 받음
1929.02 닥터 셔우드 홀, 일본 천황의 감사장 받음
1930.06.27 셔우드 홀 부부, 안식년 휴가
1931 셔우드 홀 부부, 한국으로 귀임
1932 크리스마스 실 방행 허가 받음
1932.10.08 조셉 카이틀리 출생
12.03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 발행
1933.09.23 로제타 기념 교회당 준공(해주)
1938 셔우드 홀 부부, 두 번째 안식년 휴가
1940.08 닥터 셔우드 헌병대에서 연행
10.25 닥터 셔우드 홀 부부 재판에서 징역 3년 또는 5,000엔 벌금형 언도 받음
11 닥터 셔우드 홀, 조선을 떠나 인도로 전근
1978 닥터 홀 내외 인도에서 은퇴, 귀국길에 23년 만에 한국 방문
1978 「조선회상」 발간(영어판)

* 가족사항
아버지 : Hall, William James 어머니 : Hall, Rosetta Sherwood
본인 : Hall, Sherwood 아내 : Hall, Marian Bottomley
누이동생 : Hall, Edith Margaret 첫째아들 : Hall, William James
둘째아들 : Hall, Joseph Keightley

2. 선교사 소개
셔우드 홀은 아버지 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어머니 로제타 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조선의 평양 선교사로 사역하다가 전염병으로 인해 1894년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 해에 셔우드 홀은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3년 후인 1897년 어머니를 따라서 다시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1900년 평양외국인학교가 설립되자 첫 입학생으로 들어가 1908년까지 수학하였고, 1911년 본국에 돌아가 매사추세츠 주의 마운트 허몬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하였다. 그해 오하이오주에 있는 마운트 유니온 대학에 진학하여 1919년에 졸업하였고, 토론토 의과대학에 진학, 1923년 졸업하였다. 졸업 1년전 마운트 유니온 대학 동창이며 같은 의사가 된 메리안 버텀리와 결혼하였으며, 졸업 후 펜실베니아의료선교협회 추천으로 스텟슨(Stetson) 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쳤다. 그 이후에 셔우드는 부인과 함께 한국선교사로 1926년 4월 19일에 들어와 의료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셔우드 홀은 어떻게 선교사가 된 것일까? 셔우드 홀은 자신의 자서전인 「닥터 홀의 조선회상」에서 자신은 1906년 8월에 평양 선교사들의 모임에서 캐나다 의료 선교사인 닥터 하아디를 초청하여 들었던 설교를 통해서 자신은 다시 이 땅에 선교사로 오기로 마음먹었다. 그 때의 설교를 듣고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닥터 하이디의 설교는 어린 내 가슴에 큰 파문이 되어 깊이 새겨졌다. 그때 나는 서양으로 돌아가 사업가가 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내 인생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졌던 그날 예배 후 의료 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일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새해만 되면 어제나 새 설계를 세우곤 했지만 작심 3일로 끝나곤 했다. 내 의지만으로는 조선으로 돌아와 선교 사업을 하겠다는 결심은 이루어지지 못할 게 자명했다. 그러나 닥터 하아디의 설교에서 영적인 힘을 얻어, 마음이 열망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므로 나는 새 결심을 완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찼다.

그날의 사건 이후로 셔우드는 의료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였던 것이고, 부인과 함께 의료선교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특별히 그는 조선인들이 많이 겪고 있던 결핵 치료를 위해서 매진을 다한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와 함께 했었던 조선 최초 대학 졸업한 에스터 김 박 의사 때문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때 에스터는 폐결핵에 걸려 투병 중이었는데 이미 병세가 악화되어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 당시 조선에는 폐결핵을 치료할 요양원과 같은 시설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지난 10년간 병원과 성경학교에 봉사하다가 1910년 4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내게 있어서 에스터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할 수 있는 가장 황금기의 인생을 맞고 있었던 에스터, 그녀를 이 세상에서 앗아갔고 그녀가 사랑한 수많은 동족들의 생명을 앗아간 병. 나는 이 병을 퇴치하는 데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나는 반드시 폐결핵 전문 의사가 되어 조선에 돌아올 것과 결핵 요양원을 세우기로 굳게 맹세했다.

이러한 계기로 인하여서 홀 부부는 해주에서 의료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역을 하는 중에서 결핵으로 인한 피해가 막대함을 보여주었다.

시일이 지나면서 내 청진기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거의 결핵 환자들이라는 점을 알려주었다. 이들 중 대부분의 경우는 이미 병세가 상당히 진전됐으므로 입원시켜 치료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상태였다. 이러한 사실은 결핵요양소의 설립이 더 시급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결핵은 조선인들의 생명과 건강을 해치는 주요 질병이었다. 결핵에 걸린 환자가 경제적 곤란으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그 처지에 절망한 나머지 자살했다는 기사는 언론에 종종 등장하고 있었다. 결핵은 만성병이기에 환자가 겪는 고통은 그 이환의 길이만큼 깊었을 것이다. 같은 만성 전염병이라 할지라도 한센병과 결핵 중 하나를 고르라면 격리의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약한 한센병을 선택하겠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결핵에 대한 공포는 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셔우드 홀 부부는 해주에 결핵 요양소를 설립하려고 했지만, 설립과정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어려움 가운데에서 1928년 10월 28일 개교식을 통해서 설립되었다.
황해도 해주에 노튼 의사가 자기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1913년 병원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노튼기념병원이다. 이 병원이 후일 해주구세병원이 되었고, 이 병원은 1928년 결핵전문병원인 해주 구세 요양원을 부설한 것이다.
초기에는 환자들이 많지 않았는데, 후에 전국적으로 요양원을 찾기 시작하였다. 요양치료를 시작한 사람은 완쾌될 때까지는 결코 떠날 마음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까지 했다. 이는 요양원의 위치와 설비가 좋을 뿐만 아니라 홀 이하 일반 직원들의 친절한 사랑이 위로와 희망을 주었기 때문으로 분석되었다.
요양원 초기에는 환자들을 이해시키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결핵 요양원은 치료만 받고 퇴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요양과 치료를 받아야 치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주지시키는 것이 많이 필요했고, 또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재발하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과도한 노동과 업무가 기다리고 있었고, 또한 정기적으로 검진할 수 없기 때문에 안타까운 죽음이 계속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시의 인구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범 농장을 만들었다.
셔우드 홀은 전국에서 몰려온 결핵 요양원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닭, 염소 돼지, 토끼 등 가축 사육, 농사 및 과수와 채소재배 방법 등을 가르쳤다. 또한 서양인 농업전문기술자를 초청해 과학화된 영농기법을 전수했으며, 오늘날 새마을 운동과 같은 활동을 펼쳐 소득창출과 농업지도자를 양성했다.
초기 요양원은 여러 가지 문제는 있었으나, 비교적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선교부에서 경제적 지원에 대한 우려와 함께 당장의 경제적인 문제를 위해서 또한 건강상 휴식 필요 뿐만 아니라 현지 선교 활동의 보고를 위해서 1930년에 안식년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본국에서 선교 보고를 통해서 필립 제이콥스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결핵 협회의 뉴욕 본부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제이콥스를 통해서 크리스마스 씰을 통해서 수입을 얻게 되었고, 그것이 선교 활동에 중요한 도움을 줄 것을 듣게 되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해주에서 돌아가서 크리스마스 씰에 대한 운동이 조선에서 가능할지에 대한 의견들을 수렴하였는데, 대부분 관심이 없었고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셔우드 홀은 조선에 크리스마스 씰 보급을 통해서 결핵의 위험성을 알리고 조선인들에게 결핵 퇴치운동에 하게끔 하기 위해서 크리스마스 씰 발행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셔우드 홀은 크리스마스 씰의 도안을 조선인들에게 열성과 가능성을 부채질할 수 있는 그림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거북선을 도안해서 허가를 받으러 갔지만, 당시에 일제 강점기 상황 속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첫 번째 도안은 국보 1호였던 남대문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남대문은 조선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그림이었고, 이는 방어력을 나타내므로 크리스마스 실에 나타난 남대문은 결핵을 방어하고자 하는 뜻으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조선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은 1932년 12월 3일에 발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해주구세요양원에서는 결핵 예방과 각종의 홍보자료도 발행하였는데, 100여종 이상의 다종 다양한 홍보자료에는 비매품과 판매품이 있었고, 이중에서 판매품은 전액이 결핵 기금으로 활용되면서 열악했던 식민지 조선의 결핵예방과 퇴치에 커다란 분기점을 마련하였다.
그 이후에 1937년에 중일전쟁이 시작되었고, 셔우드 홀 부부는 1938년 안식년 휴가를 얻게 된다. 1939년 서울에 다시 도착하고 보니 조선의 상황은 일제의 탄압이 더욱 더 심하게 되었다. 조선의 달력이 일본의 달력으로 바뀌고, 일본식 연호를 쓰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군부는 서양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 성공회 캐럴 신부와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와 20미터 이상 높이 화진포 해안선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명분으로 셔우드 홀 부부를 소환해서 조사를 하였고, 그 이후에 크리스마스 씰이 일본 육군 국방 안보의 규정을 어겼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발행 중단을 받기까지 하였고, 결국 말도 안되는 육군의 재판을 통해서 간첩혐의를 받고 3개월 감옥살이 혹은 벌금 1천달러를 지불해야 하는 판결을 받게 된 것이다.
이후에 셔우드 홀 부부는 1천달러를 벌금을 내고, 감옥에서 풀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알았던 뉴욕 선교 위원회는 홀 셔우드 부부를 인도로의 전근 여부를 묻는 전보를 보냈고, 그것에 답해서 홀 셔우드 부부는 인도로 전근을 가기로 했다. 조선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병원 및 학교에 대한 후속조치를 취한 뒤에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한국에서의 14년 6개월 간의 의료사역을 마치게 된 것이다.
이후에 홀 셔우드 부부는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결핵퇴치를 위한 선교사역을 진행하였고, 23년간 인도에서 의료선교를 하고 1963년에 은퇴를 하였고, 본국으로 귀국길에 23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였고, 1978년에는 조선에서의 사역을 회상하는 자서전 「조선회상」을 발간하게 되었다.
1984년 11월 3일 한국의사협회 초청으로 내한하였고,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같은 달 12일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1호관에서 로제타 홀 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하여 현판식을 가진 후 귀국했다.
그 후에 1991년 4월 5일 셔우드 홀 박사는 캐나다 벤쿠버에서 별세하였고, 같은 해 9월 19일 부인 마리안 버팅리 홀이 별세하였고, 부부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게 되었다.
홀 셔우드 부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부부였고, 또한 그 사랑을 이웃과 함께 나누었던 진정한 선교사였다. 그들과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 친구와 같은 선교사였다.
조선의 풍습과 환경을 바꾸려고 하기 보다는 그것을 이해하려고 했고 그것을 더 나을 방법으로 이용했다. 온돌이라는 우리네 난방방식에 침대라는 서양요를 결합하여 먼지도 덜 타고 따뜻하면서 서양의사가 쪼그리고 힘들게 앉은 필요 없이 장시간의 수술이나 평상시 환자를 돌보기도 편리한 온돌침대를 개발해낸 것이다. 또한 조선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교육하여 후에 그들을 통해 목사가 배출되고 의사가 배출되었다.
사역의 기간 동안 어려움과 위기가 많았지만, 하나님은 상황 속에서 인도해주시고 길을 열어주셨다. 병원이 세워지는 과정과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기 전까지의 안식년 휴가에서 있었던 일들과 발행하고 나서의 일들, 그리고 두 번 째 안식년 후에 있었던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비록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 가운데에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홀 셔우드 선교사 부부를 인도하셨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조선에 땅에 많은 복음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특별히 의료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홀 셔우드 선교사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 대한민국에는 대한결핵협회가 설립되어서 지금까지도 결핵퇴치를 위한 의료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홀 셔우드의 아내인 메리안이 그 당시 <조선 선교계(Korea Mission Field)>에 기고했던 글을 홀 셔우드는 자신의 자서전인 「닥터 홀의 조선회상」에서 인용하였는데, 당시의 조선에서의 의료선교사역을 마치고 난 후에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는 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었고, 그 꿈에 성실히 매달렸기에 하나님께서 이를 성취시켜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려울 때면 하나님께서는 친구들을 통해 도와주셨다. 우리는 온갖 난관을 하나하나 극복했다. 이제 이곳은 절망에 빠졌던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얻는 장소가 되었다….

이는 요양원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실 이것은 요양원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는 대한민국 전체를 향한 회고록이라고 볼 수 있다. 100년 전에 이 땅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땅에서 이제는 희망을 주는 땅이 되었고, 우리는 지금 그 땅을 살아가고 있다. 희망을 주는 땅이 되기까지 많은 분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조선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일이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이는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 가운데 일어난 일들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고, 주님을 사랑하고, 조선을 사랑한 선교사의 마음을 본받아 우리 시대에서의 맡겨진 자리에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나가야 할 것이다.
2019-07-02 16: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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