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6.23 화 09:15
 
 내한선교사 / Chesshir, L. Haskell(1916-2003, CC) / Chesshir, Enid Nadara(1923- , CC)
 작성자 : 이효진, 임성연  2019-07-02 17:42:34   조회: 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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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조사
(Chesshir, L. Haskell / Chesshir, Enid Nadara)

3학년 2반
2017210116 이효진
2017210117 임성연


Ⅰ. 기본사항
Chesshir, L. Haskell (체셔/ 최수열/ 미국/ CC)
1. 생몰연도: 1916.4.24.-2003. 7.22. 미국 아칸사스 센터포인트 출생
2. 학력: 1942 내쉬빌의 데이비드 림스컴대학 졸업
하와이 대학에서 수학
1948-52 데이비드 립스컴대학, 밴더빌트대학 사회학 전공
1950 피바디 대학, 스카릿 대학에서 종교교육, 사회하업 교육
3. 경력: 1945-48 하와이에서 목회활동
1954.10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로 내한
1958.4 용산에 한국기독학원 개설(→그리스도신학대학)
1960.3 경기도 김포, 파주에 신학교 직영 목장 조성ㄴ
1962 낙농 선교사업으로 농촌 식생활 개량, 생활수준 향상에 기여
그리스도의 교회 한국 선교부 책임자로 선교 사업 주관
4. 가족사항: Chesshir, Enid Nadara (부인, 1923- ) 과 4남 3녀


II. 선교사 소개


1) 생애와 신앙
1916년 4월 24일 아칸소 주 센터포인트(Centerpoint, Arkansas)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부모 뉴먼(John Newman)과 헤리슨(Gene Harrison)을 따라 텍사스 주 터키로 이주하여 목회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여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대공항기에 미국의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영업사원으로 회사에 취직한다. 그 후 복음 전도자의 소명을 받고 망설임 없이 회사를 사직한다. 테네시 주 내쉬빌에 립스컴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 때에는 백스터(B. B. Baxter) 같은 명성있는 학자들이 있어 학문적으로, 신앙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해군에 입대하여 샌디애고와 하와이 진주만에서 복무를 한다. 1945년 군복무를 끝낸 후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키아우모쿠 그리스의 교회에서 그의 열심과 성실한 신앙심을 눈여겨보던 교회는 전역과 동시에 청빙을 받아 목회를 한다. 동시에 그곳에서 평소 기독교 교육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기에 대학을 세우려 하였으나 여건이 맞지 않아 중등교육 과정을 개설한다. 하와이 지역 특성상 아시아계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아시아의 역사, 문화, 언어를 접하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아시아 선교의 필요성과 한국 선교에 대한 동기부여를 받게 된다. 1948년 립스컴대학교에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하면서 아시아 선교를 준비한다.
최수열 선교사는 언론매체를 통하여 전쟁으로 폐허화된 한국 소식을 접하고 한국 선교를 마음에 담는다. 전쟁 후 한국의 경제적, 사회적 여건을 감안하여 사회사업을 공부하는 것이 한국 선교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밴더스빌드 대학교 스카릴 대학원에서 사회사업 석사 과정을 공부한다. 8가와 파크 애브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하였고, 볼디악스 우너호병원 원목으로 활동하였다.
사회 사업은 그 당시로서는 생소한 학문 분야로 그 누구도 선교지에 사회적 여건을 감안하여 사회사업학을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최수열은 단지 복음만을 전하는 식의 선교사가 아니라 선교지의 사회 전체를 아우를 선교 계획을 구성하였다. 선교지 현장의 실상과 그 사회의 미래를 아우를 선교 계획을 구상하였다.

2) 한국 선교 활동
최수열은 두 번째 선교사로 1954년 11월 29일 한국에 와서 평생을 보냈다. 한국을 선교사지로 정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평소에 아시아 선교를 꿈꾸고 준비해왔으며, 선교기금 모금 차 미국에 들어온 동서기로부터 “일본, 필리핀, 아프리카, 유럽 등지에는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왜 한국에는 보내지 않느냐”는 간곡한 호소와 전쟁 후 한국의 경제적, 영적 빈곤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동기들이 청년 최수열의 가슴을 뒤 흔들었고, 결국 한국 선교를 결심한다. 2년여 동안 선교 준비를 한 후에, 「한국을 위한 위대한 선교」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워싱톤 교회를 후원교회로 정한다. 워싱톤 교회 장로들은 최수열의 선교에 대한 열망, 학력과 목회 경력 등을 볼 때 선교사로서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으며, 리차슨과 동역하면 선교의 효율성을 극대화 될 것으로 판단하여 흔쾌히 결정한다. 교회뉴스 레터에는‘최수열 형제는 워싱톤 교회 장로들에게 여행 경비, 생활비, 시설 구입비 등 제반 선교사역에 필요한 사항을 지원하고 감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우리 교회 장로들은 한국에서 선교 역략이 증대될 수 있기에 기꺼이 수락했다’고 기술되었다. 워싱톤 교회로부터 수락통보를 받은 최수열은 곧 바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여 선교비에 보탠다. 1954년 10월 15일 워싱톤 주 에베렛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을 거쳐 11월 29일 서울에 도착한다. 최수열 선교사 가족이 입국함으로써 한국 선교 활동이 본격화된다. 최수열은 곧바로 한국에 들어와서 효창동선교부를 중심으로 선교에 매진한다. 전후 한국인들의 경제적 빈곤을 해결키 위해 생필품을 배급하고 낙후된 의료수준으로 인한 질병 극복을 위해 무료진료를 실행하였으나, 대책 없이 퍼주는 방식으로는 한국선교의 미래가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구호 활동을 통한 인시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선교정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을 양육하는 것이 최상의 선교정책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대학 설립을 준비한다. 그는 대학을 설립한 후 적합한 대학 부지로 현재의 위치는 정한다. 그 당시에는 논밭이었지만 앞으로는 대학촌으로 적합한 위치가 될 것으로 판단한다. 공항이 여의도에서 김포로 옮긴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도로와 교통 등의 인프라 구축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행정구역도 서울이 아닌 경기도이며, 산한 농촌 마을에 불과하였다(경기도 김포군 양동명 등촌리). 그러나 서울에서 공항으로 가는 도로변이라면 교통의 편리성과 발전성이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여느 선교사들이 갖지 못한 선교의 큰 꿈과 전략을 가지고 그는 기독교 대학을 세운다. 대학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양성하여 한국과 아시아복음화의 큰 그림을 그린다. 그의 선교의 꿈을 보면‘한국은 이 시대 아시아 모든 주변국의 미래를 결정할 영향력 있는 나라이다. 복음으로 훈련된 한국의 자비량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시아로 나아갈 것이다. 충성된 주의 청지기들이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을 최고의 성경 교사와 전도자로 만들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최수열은 단지 기독교 대학을 세우는 것이 그의 선교사역의 전부는 아니었다. 대학촌을 형성하여 그 안에 교회, 대학, 고등학교, 중학교, 유치원, 부속목장, 선교사 사택을 포괄하는 한국 선교의 큰 그림을 그렸다.

a. 교육 사업
서울시 한 중심 지대인 종로구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에 중심이 되었다. 왜냐하면 국내외 모든 문제나 거의 내수동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특히 8.15 해방 이후 함경남도의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들이 월남하여 내수동 교회를 중심으로 모였다. 1956년 여름부터 주한미군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몇 차례씩 차례로 중, 고등학생에게 영어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들은 복무하는 동안 충실히 와서 가르쳤으며 년한이 되어서 귀국하게 되면 꼭 그 후임으로 미군들을 소개 해주게 되었다. 그들 가르침에 못지않게 한국 학생들도 영어를 통해 성경을 배우게 될 때 그곳 교회의 전도자로 봉사하고 계시된 박선흠 주선으로 이홍식, 동층모, 최수열 선교사는 차츰차츰 자리를 잡아 야간으로 성경학교를 마련하여 몇몇의 청년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 때 학생수는 5,6명으로 김재환, 이용, 조희순, 공삼열, 김세복 등이 배우고 있을 때 좀 더 본격적인 교육을 실시하자는 뜻이 일치되어 1958년 4월 1일 효창동 선교사 주택으로 학교를 옮기고 1958년 4월 19일 ‘한국 신학원’을 창설하였다.
이에 앞서 홀튼 선교사와 그의 부인이 워싱톤 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한국에 와서 열심히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각 교역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으며 효창동 사택과 예배당에서 청소년들에게 영어 성경을 가르쳐 수 많은 학생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홀튼 선교사 부부와 멜바양이 워싱톤 교회에 보고차 본국에 1958년 7월 18일에 들어가게 되니 자연적으로 신학원의 운영은 최수열 선교사가 원장을 대행했으며 내수동 성경학교가 효창동으로 옮겨지고 효창동 성경반이 합치가 된 것이 바 한국 그리스도교회 신학교의 발전에 첫 발걸음이 되었다.
초대원장으로 홀튼 선교사가 되었고 부원장으로 최수열 선교사로 학생 수 약 25명으로 동년 4월 21일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이에 교직원 회의에서 최수열 선교사는 신학워 목적을 다음과 같이 기도중에 굳게 의결했다. “한국이 필요로 하는 사회사업가와 가르칠 수 있는 교육자와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전도자를 양성할 것이다” 라고 결단하였다.
최수열 선교사는 원래 성격도 활동적인데 원장직에 임하면서 다각적인 선교사업 및 사회사업에 치중해 열렬히 일을 하게 되면서 그의 능력있는 지도력에 학교와 교회가 급진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의 웅변술은 많은 사람에게 자극을 주어 한번 외침에 한국 군인 교회에서 군인 약 백명이 세례를 받는 기적도 일어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최수열 선교사는 의정부 근처 미군 부대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될 때 좋은 친구 이철선 중위 (William A. Richardson) 를 만나게 되어 복음을 같이 전하자고 권면하여 이철선 형제가 1958년 8월 31일 부로 이곳에서 현지 제대하고 미국 테네시주에 있는 부인과 아이들을 한국으로 오게 하고 이철선 형제는 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런 형태로 차츰 신학교가 발전을 보게 될 때 홀튼 부부와 멜바양이 한국을 재차 방문했으나 최수열 선교사와 의견 충돌과 사업분야에 성과를 위해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홀튼 선교사는 교회와 교역자를 중심으로 교육을 주장하였으며 최수열 선교사는 사회사업을 통한 주님 사업을 주장해서 농업과 목장업을 하여 교회 일꾼을 양성하되 영육으로 일하여 경제자립을 할 수 있는 것을 원했다. 두 선교사 간의 의견 차이가 생겨 결국 신학교를 중심으로 최수열, 하등, 이철선 선교사 가족들이 효창동에서 나와 영등포구 상도동에서 한국식 집을 얻어 이사를 하고 학교는 상도 1동 45번지 ‘직업 소년학교’ 건물을 전세로 얻어 1961년 3월 3일에 옮기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최수열은 후원교회를 워싱톤 교회에서 테네시 주 내쉬빌에 소재한 오터 크릭 교회로 바꾼다. 그 외에도 모교인 립스컴 대학 및 밴더빌트 대학과 목회하였던 교회들이 같은 도시에 소재하고, 테네시 주를 중심으로한 중남부 지역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융성하므로 모금활동의 효율성이 크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최수열 선교사는 본국의 여러 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할 것과 경제적 자금 원조를 호소하며 1960년 11월에 파스리 선교사가 미국 택사스주 에빌린 대학을 졸업하고 부인과 어린 딸과 나와 상도동에 머무르면서 신약을 가르치게 되었다.
한편 재정적인 문제도 최수열 선교사와 주한 선교사들의 호소와 이젤장로의 노력으로 모금되어 경기도 김포군 양동명 등촌(현주소 영등포구 등촌동 산 61번지)에 임야 6만 4천평을 당시 시세로 50환쯤 주고 1960년 3월 경에 구입하여 일단 임야를 주택지로 깎아 선교사집 4동을 각 집을 천만원쯤 들여 현대식 건물 이층으로 짓고 윗층에는 선교사가 살고 밑에 층 지하실에서 신학생들을 공부하게 만들어, 1961년 11월 3일 현지로 학교를 옮기었다. 그 후 꾸준한 노력으로 1963년 2월 28일에 신학교 건물 약 200평을 이층 벽돌로 짓고, 강당, 도서관, 사무실, 교실 등을 아담하고 짓고 여자 기숙사를 □자형으로 지어 공부하기에 안성맞춤으로 짓고 학교 법인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로 1963년 8월 28일에 인가를 얻게 되었다.
또한 최수열 선교사는 등촌고등공민학교 (현 등촌중학교)를 세워 대학부지 내에 경제 사정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중등교육과정을 개설하였다. 1962년 1월 22일 개교하여 1967년까지 11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그 이후 정규 학교로 전환하고 교명을 「등촌 중학교」로 변경하였다. 또한 그는 화곡 유치원을 세워 알랜 선교사와 함께 취학 전 연령의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설립하였다.

b. 전도사역
최수열 선교사는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회’를 설립하고, 선교 연구와 분석을 통하여 적합한 선교 정책과 방향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가 만든 선교의 큰 그림은 그의 선교 계획 속에 세밀하게 서술되었다. 최우선적 기본 계획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성장시키고 신약 성경의 표본에 예시된 모형대로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으로
1)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고 2)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표본대로 아카펠라 예배를 드리며,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말하고 침묵하는 것은 침묵하며, 요한계시록 22:18-19말씀대로 성경을 가감하지 않고 새로운 사상이나 의식을 첨가하지 않으며,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많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선교계획으로 등촌 그리스도의 교회(현 강서교회)와, 화곡 그리스도의 교회, 동서화목 교회(현 연합 선교교회)등을 개척하였다.

c. 목장사역
최수열 선교사는 전쟁 후에 한국 사람들의 영양 상태를 볼 때 우유공급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대학 부속목장을 세운다. 우유를 생산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영양실조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신선한 우유를 공급하여 건강증진에 도움을 주고, 잉여분은 판매하여 대학 재정 자립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1963년에 수의사인 시드니 알랜 선교사와 함께 파주에 4만 6천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부속목장을 이전한다.
미국의 크리스천 목장주들에게 한국의 경제적 상황을 설명하고, ‘한국에 젖소 보내기 운동’을 펼치며 젖소가 당신들에게는 단지 고기와 우유를 제공하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근원이 된다고 설득하여 젖소를 기증받는다. 크리스천 목장주들의 기증으로 1963년에 일차적으로 92마리의 홀스타인 젖소를 도입하고, 1969년에 20마리를 더 들어와 명실상부한 목장의 규모를 갖춘다. 그 당시 한국의 젖소가 1,500마리에 불과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112마리는 적지 않은 숫자이다. 처음에는 대학 캠퍼스 남쪽에 목장을 만들었으나 도시화 되어가면서 파주시 광탄면 방축리에 46,000여 평 부지를 마련하고 옮기게 되었다.

d. 문서 사업
1954년 11월에 최수열 선교사가 동석기 전도자와 공동 발행인이 되어 최초의 정기 간행물인 ‘바른 길’을 창간한다. 그 후에 이철선 선교사가 발행인이 되고 최수열 선교사와 홀튼 선교사가 편집인으로 발행하다가 1962년 9월에 ‘그리스도의 교회’로 제호를 변경한다. 1963년 8월 1일 이철선 선교사는 참빛 출판사를 설립하고, 1964년 8월호부터 ‘그리스도의 교회’ 제호를 ‘참빛' 으로 변경하여 발행한다. 그 당시로는 교계에 유일한 신앙 잡지로서 강단, 논단, 성경적 교리, 신앙 수필, 교계소식 등이 실렸다. 월간으로 발행하다가 현재는 격월간으로 발행하고 있다.
이 문서 활동의 목적으로는
(1) 우리가 봉사하여 발간되는 이 문서들은 그리스도를 신봉하는 신자들의 영적성장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디모데후서 12:15의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의 말씀으로 나아갈 것이다.
(2) 십자가의 군병으로 앞으로 도전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가치 있는 삶과 순교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게 만들고 교회가 목적하는 바 목표를 향해 같이 참여할 수 있는 자로 만들기 위함이다.
(3) 신앙의 목적하는바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즉 영적인 발전과 신앙 생활의 지속을 계속시켜 줄 것 이다.
(4) 교리에 대한 옮은 평가로서 성서에 가르침을 연구하여 비진리에 대해 배격할 줄 알고 진리를 타인에게 가르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참빛사」 라는 출판사를 정식으로 등록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의 다양한 책들과 ‘참빛’으로 변경하여 월간지를 내게 되었다. 이 참빛에는 최수열이 직접 쓴 글들도 발견할 수 있다. 총 4번의 글을 발견할 수 있는데 1966년에 쓴 탕자의 비유와 축복받을 자, 1967년에 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 과업, 1978년의 예수님 세우신 교회가 그것이다. 이 중 그가 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의 과업'이라는 글을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의 과업
최수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는 교회를 위한 성실한 기독교 교사들을 훈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대부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영어로 교수한다.
1) 성경을 이해하는 안내서로써 한국어로 된 훌륭한 교재가 부족하다.
2) 영어로 교수하는 것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는 대로 강의를 시작하는 일을 가능케 하며 한국인들은 그들의 공립학교 교육에 있어서 영어의 뒷받침을 얻게 하는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는 일꾼들을 훈련하도록 꾸며졌다.
한국은 옛날부터 많은 교사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일할 수 있는 교사와 전도자를 배출하기를 희망한다. 한국은 가난한 나라이지만 총명하고 잘 훈련된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서 건설될 수 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좋은 물건들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고장의 자원을 잘 이용하여 그들의 손으로 하여금 그들 고장의 자원을 잘 이용하여 그들의 손으로 건설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e. 귀국 후에 활동
여러 차례 교사 건축과 학교 운영비를 위하여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모금 활동을 하였으나 소정의 재정이 확보되지 않아 학교 운영을 다른 선교사들에게 맡기고 1972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에서 그는 모금 활동에 전념한다. 이때에 그리스도의 교회의 대표적인 신문 크리스천 크로니클 편집인이 되어 한국 선교를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제반 여건이 여의치 않고 대학 운영에도 어려움이 가중된다. 이처럼 온몸으로 부딪히며 대학과 한국 선교에 매진 하던 중 1987년 본인의 건강과 아내의 심장 질환으로 더 이상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없어 33년 동안의 한국 선교를 접고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에도 그의 가슴에는 한국과 KCC만이 자리 잡아 기도와 후원을 그치지 않았다. 최수열은 한국과 아시아 선교를 위해 KCC를 세우고, 선교의 비전과 기독교 교육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열악한 여건을 괘념치 않고 평생토록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 누구도 그의 원대한 선교 비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하여 묵묵히 앞만 바라보고 걸었다.
그의 말년은 외롭고 가난하였다. 한적한 작은 도시, 방 두 칸짜리에서 얼마 안 되는 연급으로 궁핍하게 살면서도 그는 품위를 잃지 않고 의연하게 자신을 지켰다.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에게는 유산 한 푼 상속하지 않고, 조위금은 전액을 대학 장학금으로 기탁하였다. 최수열 선교사는 그의 모든 것을 마지막 재산까지 한 푼도 남김없이 대학에 주고 떠났다. 이처럼 KC대학교는 기독교 교육에 미친 한 사람의 땀과 눈물, 열정과 헌신에 의하여 오늘의 대학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88세를 일기로 한 때 원목으로 사역하였던 볼디악스 보훈병원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장례식 때, 행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최수열은 기독교 선교사, 교육가, 전도자, 박애자, 선견자, 그리고 훌륭한 가장이었다.”
2019-07-02 17: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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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65 / Cozens, Henry(미상, SA) / Cozens, H.(미상, SA)   천국     2020-07-06   34
1982
  내한선교사_17_Baugh, Harold T   김동행     2020-07-06   49
1981
  내한선교사_3_Adamson, Andrew   이유진     2020-07-06   28
1980
  내한선교사 /50 / Church, Marie E.   이상돈     2020-07-06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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