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6.23 화 09:15
 
 내한선교사 / Jones, George Heber(1867-1919, M) / Jones, Margaret J. Bengel(미상, M)
 작성자 : 오진성,최안드레  2019-07-02 17:49:04   조회: 717   
 첨부 : 기말보고서_3-3_78변경_2012210195_최안드레은성_2012210169_오진성.hwp (488960 Byte) 
 첨부 : 기말보고서_3-3_78변경_2012210195_최안드레은성_2012210169_오진성.pdf (708262 Byte) 
George Heber Jones (1867–1919)

Ⅰ. 기본사항

1. 이름: George Heber Jones / 존스 / 한글명: 조원시(趙元時)
아내: Margaret J. Bengel Jones / 뱅글
2. 생몰연도: 1867.8.14. - 1919. 5. 11.
3. 출신 및 소속: 미국, 감리교
4. 연표
1887. 아메리칸 대학교(American University) 졸업
1887. 9. 미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1890. 9. 4. 뱅글 내한
1892-93 배재학당의 당장, 제물포지방 감리사
1892 뱅글이 인천에 영화여학당 설립
1892-98 창간
1983. 5. 존스, 뱅글 결혼
1892 <찬미가>로 편찬
1892-1894 배재학당 당장
1897 엡윗청년회 창설, 총무
1900 <신학월보> 창간
1900 제물포웨슬레기념학교 건축
1903 YMCA 창설
1901-06 창간, 주필 활동
1902 하와이 이민사업 후원, 재미한인사회 형성 공헌, 사경회 신학회 운영
1905 안식년
1907-09 협성신학교장 역임
1907 Korea, the Land, People and Customs 집필
1909 귀국
1919. 5. 11. 소천 (미국, 마이에미)


Ⅱ. 선교사 소개: 조원시(George Heber Jones, 1867–1919)

1. 소년이 받은 소명
1867년 8월 14일 미국 뉴욕 주 모호크에서 태어난 조원시는 신실한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의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로의 소명을 결심했다. 조원시는 고향 우티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의 명문대인 아메리칸 대학을 졸업 후 한국 선교사로 지원을 했다. 그가 선교사로 임명된 때는 1887년 9월 29일. 미감리회에서 임명받은 한국 선교사로는 아펜젤러, 스크랜턴 다음으로 그가 세 번째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엮음,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 (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2002), 463.

2. 최연소 내한 선교사
조원시가 1888년 5월 14일 서울에 내렸을 때 그의 나이는 21세, 내한 선교사 중에 최연소를 기록했다. 그는 서울을 기점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으며 한국어를 독학으로 배웠다. 그는 문학적인 측면에서 두각을 보였는데 그의 능통한 한국어 실력은 그의 저술을 통해서 잘 알아볼 수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 , 463.


3. 선교사로 그리고 남편으로
1890년 9월 4일 여선교사 벵겔(Margaret J. Bengel)이 제물포에 선교사로 도착했다. 그녀를 마중 나간 조원시는 그녀와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고 1893년 5월 둘은 결혼함으로 가정 동반자와 선교 동반자로 사역을 한다. 조원시는 1892년부터 1903년까지 제물포지방 감리사로 활약하면서 지경 내 44교회를 관리한다. 이 당시 제물포는 현 인천을 포함한 강화, 황해도 일부, 시흥군 서부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 , 463.


4. 불타오르는 선교의 열정
조원시의 타오르는 선교의 열정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강화도 출신의 이승환이란 자가 제물포에서 예수를 믿고 그의 어머니를 전도하고 조원시를 강화도로 초청했다. 조원시가 배를 타고 강화도에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동네에서 세례식을 진행하면 이승환의 집을 불태운다고 협박한다. 당시 강화도는 프랑스와 미국 병선의 침범으로 외국인들에 대해 적대시하는 분위기였다. 어쩔 수 없이 어두운 밤에 달빛 아래에서 세례문답을 하고 세례식을 조용히 끝냈다. 이일로 강화에 교회가 설립된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 , 463-464.

1892년부터 약 2년 동안 조원시는 배재학당의 당장을 겸하며 교육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미 1892년 인천에 영화여학당을 세웠으며 1896년부터 신학회를 설립하여 평신도의 신앙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사경회, 지방 교역자 양성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90년부터 신학회 교수로 섬기다 1902년 아펜젤러가 순직한 후 신학회를 맡아 관리하며 1907년 남감리회 선교부와 함께 “협성성경학원(Union Biblical Institute)”를 설립하고 초대원장을 지낸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 , 464.

조원시는 문서활동을 활발하게 했는데 에 많은 글을 쓰고 1898년 임진왜란의 역사를 다루었으며 <한국 어학원연구>를 기술했다. 1901년 The Korea Review를 창간했으며 특히 기록물과 한국학 연구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한국어 최초의 월간지인 <신학월보>를 1900년 창간했으며 한국 찬송가 보급에도 큰 기여를 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 , 464.

1897년엔 한국 감리교회 엡윗청년회를 창설할 때 총무 역할을 하며 조직의 전도, 인제, 학문, 다정, 통신, 회계국 등의 조직을 만들었다. 1903년 10월 28일에는 서울 정동의 유니언구락부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설립하는데 힘을 썼다. 1902년 5월 하와이 사탕수수재배자협회에게 한국 노동자들의 취업이민을 위해 적극 노력했으며 조정에서는 궁내부에 수민원을 설치하고 이민사업을 추진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 , 464.

1905년 안식년을 얻어 미국을 갔을 때 미국 보스턴대학과 일리노이 주 웨슬리안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며 교수로 임용하려 했지만 조원시는 그의 두 번째 고향인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1909년 6월 부모님의 건강 악화로 자식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했으며 이후 “한국 선교 25주년 기념사업회” 등을 하며 선교 후원금을 모금했으며 미국에 한국 선교 역사와 부흥운동을 소개하는 책자를 발행하는 등 미국 교회에서 한국 선교를 계속 지지했다. 1913년에는 미감리회 해외선교부 편집 및 협동 총무로 활약하면서 한국 선교를 지원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 , 465.

그는 1919년 5월 11일 마이애미에서 별세했다. 한국 감리교회는 그의 공로를 기리며 1932년 6월 그의 흉상을 감리교회신학교 복도에 부착했으며 비문을 새겼는데 기념비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趙元時博士
韓國恩人 趙元時博士 本以美國人
渡我韓國 多年宣敎 愛人爲己
培村敎育 新學建設 自負其任
盡心努力 終以養新而歸國
主後 1932年 6月 27日
監理敎神學校白” 김승태, 박혜진, 『내한 선교사 총람(수정 증보판)』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1263.


6. 구체적 선교사역
조원시는 한국교회의 초석을 세우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의 선교사역은 크게, 제물포교회 사역, 강화의 선교사역, 신학교육사역과 문서선교사역으로 나눌 수 있다.

6.1. 제물포교회 사역
제물포교회는 초대 목사인 아펜젤러가 세웠다. 제2대로 부임한 조원시는 교회의 전도와 교육전반에 걸친 토대를 세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매일학교(day-school)을 개설해서 인천지역의 복음전도사업과 주민들의 교육 양성에 최선을 다했다. 소년매일학교는 1899년에는 야간 기초영어학교가 신설되었으며 1900년 4월 2일에는 소녀매일학교(여학당)가 용동 교회당 내로 이전한 이후 ‘영화학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날로 늘어나는 교인들에 비해 여성들의 예배처가 마련되지 않았는데 조원시는 이를 위해 여성 예배당을 위한 모금사업을 시작했고 1894년 한국 최초로 여성예배당이 제물포에 세워졌다. 이때 성장한 한국 여성도들은 권사와 전도사의 직분을 받는다.
하와이 이민은 주한 미국 공사의 중재로 시작되었다. 한국인들이 이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했으므로 그들은 조원시에게 이민 모집에 협조를 요청했다 조원시는 하와이의 좋은 기후, 좋은 노동조건을 공감하고 이들을 설득했다. 조원시는 자신이 목회하는 제물포교인들을 하와이 이민에 적극 참여케 했다. 하와이 첫 이민단의 상당수가 제물포교인들이었다. 하와이 이민은 1903년까지 16차에 걸쳐 1,133명의 이민자를 배출했다.

6.2. 강화의 선교사역
조원시는 제물포교회의 담임으로 임명될 때부터 강화도 선교를 위한 꿈이 있었다. 그가 한국 선교 관리장인 W. B. Scranton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는 처음에 갑곶을 통해 강화에 상륙해서 남문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니 거절당한다. 하지만 그의 부단한 노력은 결국 결실을 맺기에 이른다. 여기서 강화도 출신의 첫 교인은 ‘이승환’이며 그의 어머니를 전도하고 조원시가 세례를 주므로 ‘강화의 첫 세례교인’이 되었다.

6.3. 신학 교육사역
아펜젤러가 시작한 신학부는 조원시를 통해 구체화 되었다. 그는 신학교육에서 신학부, 신학반, 신학회, 성경학원, 협성신학당 등을 조직함으로 체계적으로 신학 교육을 시작하였다. 신학교육이 공식적으로 출발한 것은 1893년부터이다. 전국적으로 교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교역자의 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조원시는 이에 따라 배재학당 안에 신학반을 개설하고 12명의 학생들에게 수업을 진행했다. 교수진은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존스였다. 1899년 ‘신학회’란 이름으로 신학교육과정의 명칭이 확정되었으며 이는 서울 외에 제물포, 평양, 삼화, 증산 등의 지방에서도 개최되었다.

6.4. 문서 선교사역
조원시는 성경번역사업과 찬송가 편찬 사업을 진행했다. 그는 상임성서실행위원회의 활동원장으로 근무했으며 이때부터 성경번역에 적극적으로 참석하기 시작했다. 1892년에는 한국 최초의 찬미가를 편찬했다. 조원시가 창간한 신학월보는 한국 최초의 신학잡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7. 조원시의 한국교회 영향과 의의
조원시가 한국교회에 미친 지대한 영향은 그의 행한 업적들 중에 한국 ‘최초의’ 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들이 허다하게 있음에 증명이 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조원시는 1893년 제물포에서 한국 최초의 신학 교육이라 할 수 신학반을 열어서 체계적으로 신학을 교육함으로써 교역자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한국 최초의 한글 찬송가 《찬미가》(1892)와 한국 최초의 잡지 《Korean Repository》, 최초의 한국어 신학 잡지 《신학월보》(1900~1909) 등을 발간하여 출판 분야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George Heber Jones, The Rise of the Church in Korea (1917); 옥성등 편역, 『한국 교회 형성사』 (서울: 홍성사, 2013), 8.

또한 그는 당시 불모지와 같은 뿌리 깊은 유교적 문화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의 열정으로 말씀의 씨앗을 계속 뿌림으로서 44개의 교회 개척과 3천 여명에게 세례를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었다. 지난 4월 필자가 그 교회 중 하나인 강화 교산교회에 다녀오면서 조원시 선교사를 통하여 강화 지역을 복음화 시키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교역사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되어 하나님의 일에 사용된 사람의 선한 영향력은 당대를 넘어 오고 오는 모든 세대 가운데에서도 그 빛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영원토록 빛나게 됨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섭리 안에서 이처럼 많은 선교사들의 생명을 통해 이 땅 가운데 일어나게 되었음을 기억하며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내한 선교사들이 그러하였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드리어 많은 사람들을 옳은 길로 돌이키는 일에 헌신되고 사용되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2019-07-02 17:49:04
121.xxx.xxx.174


작성자 :  비밀번호 : 


번호
제 목
작성자
첨부
날짜
조회
  선교사 조사 과제시 참고할 사이트 소개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2020-04-16   8497
  [공지] 2020년 1학기 내한선교사 수정 및 보완과제 안내 (1)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20-04-16   8571
  [공지] 2019학년 2학기 한국교회사 퀴즈와 독후과제   평양대부흥   -   2019-10-10   19932
  [공지] 한국교회사 과제 제출관련   평양대부흥   -   2019-07-02   29437
  로그인 '비밀번호 찾기' 관련 안내   평양대부흥   -   2018-12-06   56349
  [주의 사항] 첨부파일의 이름 작명시 주의 사항 (2)   평양대부흥   -   2017-05-18   81349
1998
  내한선교사 / 64 / Covingtom, Hallie (1)   3-1 주관우   -   2020-07-06   39
1997
  내한선교사 / 48 / Chase, Maria Louise   이동근     2020-07-06   33
1996
  내한선교사 / 30 / Harris, Lillian A.   박천광     2020-07-06   25
1995
  내한선교사 _ 40 _ Buckland, S. Mepham   심요셉     2020-07-06   27
1994
  내한선교사 / 29 / Nicholson Thomas   김연주     2020-07-06   26
1993
  내한선교사 / 07 / Hulbert, Homer Bezalee(1863. 01. 26 – 1949. 08. 05) / Hulbert, H. B(~1948.09.25)   김우람   -   2020-07-06   25
1992
  내한선교사/04/Hoffman, Robert Edwin/3-3반 정주원   정주원     2020-07-06   23
1991
  내한선교사 / 24 / Lomas, E. K.(미상, AP)   이민형     2020-07-06   23
1990
  내한선교사 / 23 / Biggar Meta Louise   김윤수     2020-07-06   33
1989
  내한선교사 / 63 / Cottrell, A. T. (1903~1982)   조은애     2020-07-06   43
1988
  내한선교사/ 45/ Butts, Alice M.   유병익.     2020-07-06   30
1987
  내한선교사 / 57 / Collyer, Charles T.   정광윤     2020-07-06   30
1986
  내한선교사 / 64 / Mary Culler White   3반 전찬양     2020-07-06   30
1985
  내한선교사_16_Kerr, Edith A   유일신     2020-07-06   31
1984
  내한선교사 / 32 / Phillips, Charles L.   이준규     2020-07-06   30
1983
  내한선교사 / 44 / Smith, Walter Everett   임정섭     2020-07-06   29
1982
  내한선교사 / 65 / Cozens, Henry(미상, SA) / Cozens, H.(미상, SA)   천국     2020-07-06   35
1981
  내한선교사_17_Baugh, Harold T   김동행     2020-07-06   50
1980
  내한선교사_3_Adamson, Andrew   이유진     2020-07-06   29
1979
  내한선교사 /50 / Church, Marie E.   이상돈     2020-07-06   54
제목 내용 제목+내용 이름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오늘 : 410 / 전체 : 15,412,513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우) 121-884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376-32 | TEL 02)3141-1964 | FAX 02)3141-1984
Copyright by 한국기독교사연구소 기사등 모든 컨텐츠에 대한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를 금합니다 | 문의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