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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Clark, Francis Orville(1886-?, YMCA)
 작성자 : 정요한3-2  2019-07-05 14:15:23   조회: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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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선교사 보고서
Francis O. Clark, 구을락(057) 선교사

정요한(2017210122), 정재돈(2017210123)

I. 기본사항

1. 이름: Clark, Francis Orville / 클라크 / 푸랜시스 오 클락/ 한국명: 구을락
2. 생몰연도: 1886 - ?
3. 출신 및 소속: Cornell University 졸업, Columbia University 졸업, 켄터키주 베리아 대학 직업교육 담당 교수.
4. 한국 선교기간: 1929.4-1933.5
5. 연표: 1929.4. 한국 입국
1933.5. 미국 귀국
6. 가족사항: 알 수 없음

II. 선교사 소개: Francis O. Clark

1. 서론: YMCA 농촌사업과 한국의 농촌사회 환경
"1920년대 한국 농촌사회는 일제의 수탈적 농업정책이 강화되는 가운데 자작농의 몰락과 소작농의 급증, 농가부채의 증가, 농업의 영세구조 심화 등 갈수록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특히 일본자본주의의 저미가-저임금 구조 유지에 필요한 쌀의 대량 수탈을 위해 대대적으로 추진된 산미증식계획은 한국의 농업생산과 농업생산자를 일본 금융자본, 투기자본에 긴박시키는 한편으로 수많은 농민의 몰락을 가져왔다. 당시 주민의 8할 이상이 농민이었고, 국민총생산에서 농업생산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절대적이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농촌사회의 피폐는 이 시기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일제는 안정적인 한국 강점 지배와 수탈을 위해, 그리고 한국인은 생사의 기로에 선 농민․민족을 구제하고 신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YMCA 농촌사업은 민족․자본주의 진영- 기독교 계열 농업문제 타개책의 일환이었다."
한국 YMCA는 1901년 배재학당 학생 YMCA가 조직되었다. 1925년에 접어들면서 YMCA는 사업의 중점을 농촌사업에 두었는데, 이는 상류층과 도시사업 그리고 학생사업을 벗어나 한국민 대다수가 사는 농촌속에 YMCA운동을 토착화 하려던 노력이었다. YMCA 농촌사업은 기독교에 대해 날로 거세어지는 비판과 도전에 자극된 것이기도 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근대문화의 선구자로 자처하던 기독교의 위치가 흔들렸다. 장규식 교수는 YMCA 농촌사업이 시작하게 된 큰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시 Y 내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문제, 사회개조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타진하였던 논자는 학생부 간사 이대위였다. 그는 「민중화할 금일과 농촌 개량문제」(󰡔청년󰡕 1924. 5.)라는 글에서 “전 세계인구 16억 중 10의 8과 9는 노동자라 할진대, 그네들을 제외한 이론이 합리적인 이론이 될 이유가 무엇이며, 그네들을 제외한 운동이 합리적인 운동이 될 것이 무엇인가? 그리하여 과거의 뭇 사회개조가들 중에 톨스토이와 러스킨 같은 이는 그의 운동중의 최고봉은 오직 농민에게로 나아가라 하였으며, 레닌 같은 이는 전 러시아로 하여금 공산주의까지 실행케 하였으니 ··· 농민과 노동자를 제한 외에 다른 계급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이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한 문제요, 긴급한 문제이다”라고 하면서 농민과 노동자를 중심한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와 기독교사상」(󰡔청년󰡕 1923. 5.), 「사회적 혁명의 예수」(󰡔청년󰡕 1928. 6.) 등의 글을 통해 현 사회질서의 폐해를 인식하고 그것을 개조하려 한다는 면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일치한다는 점과 기독교의 사회혁명에의 적극적인 참여를 주장하였다."

그래서 YMCA는 한국의 농업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1926년 4월 5-9일 서울에서 "YMCA 농촌사업협의회"를 열어 농촌사업의 필요성, 목적, 교회와의 관계, 총독부와의 관계에 대해 논의했다. 1925년부터 본격적으로 농촌사업을 착수했으며 193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10년여에 걸쳐 지속되었다. 농촌사업은 제1기(1925-1928), 제2기(1928-1932), 제3기(1932 –1937)로 나눌수 있는데 우리가 배정받은 구을락 선교사는 제2기에 속한다.

2. 본론: 구을락 선교사
Francis Orville Clark의 한국이름은 구을락으로 그는 1908년에 켄터키주에 있는 베레아 대학교(Berea College)에서 과학으로 학사를 받았으며 미시간 대학과 콜롬비아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이 후 코넬에서 1904년에 졸업했다. 그의 농작물을 개량하고자 하는 열심히 대단해 그는 1910년 여름에 유럽으로 연구하기 위해 떠났다. 그는 1929년 2월에 한국으로 향해 배를 타고 떠났다. 구을락 선교사는 농업행정 전문가로 1929년 4월 프랭크 브로크만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클라크는 YMCA는 물론 각 기독교 교단, 선교회, 예수교 연합공의회 대표들로 구성된 에큐메니칼 운동 차원의 농촌사업 기구인 농촌사업 협동위원회 총무로서 전국적인 농사강습회를 비롯한 YMCA의 농사개량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켄터키주 베리아 대학에서 직업교육 담당 교수로 11년간 근무했으며, YMCA 농촌사업의 재정적 후원자이기도 한 Penny(J. C. Penny Store 백화점의 경영자)가 플로리다에 설치한 농장의 지배인으로써 덴마크 농촌 모델을 미국에 실현시키기 위해 분투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홍병선과 함께 서울지방 농촌산업 책임자로 임명받았으며 이 후 신흥우의 지원으로 신촌에 덴마크식 농민고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구을락의 한국에서의 사역은 YMCA와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YMCA는 한국의 다섯지방에서 농촌사업을 시작했고 동시에 한국의 교회들도 그들만의 농촌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둘이 같은 것을 함으로 효과를 흐리지 않기 위해 "농촌사업 협동 위원회"를 1929년 9월에 만들게 된다. 이는 예수교 연합공의회, 장로회 및 감리교 교단, 선교회, 기독교사회단체의 모임이었는데 그 대표로 구을락선교사가 총무로 세워져 그의 지휘아래 전국을 순회하는 농사강습회가(itinerant Farm School) 전국에서 진행되게 된다. 이 농사강습회의 목적은 농부들에게 직접 농사와 농학에 대한 과학적으로 바른 지식을 전달해주기 위함이었다. 2명의 교사로 구성된(1 외국인, 1 한국인) 5개의 팀이 총 18개의 도시들을 겨울내내 다니며 강의했다.
농사개량사업은 비교적 초기부터 실행되었지만 사실 채소나 화초의 종자, 종계, 종돈을 배부하거나, 농촌청년회, 삼각농우회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단기강습회를 개최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구을락이 한국에 들어오고 난 후 YMCA 농사개량사업이 질적, 양적으로 비약적 발전을 기하게 되었다.

제1회 농사강습회는 1929년 12월 3일부터 1930년 4월 초순까지 열흘 단위로 전국 20개 거점지역에서 개최되었다. 강사는 YMCA와 숭실전문에서 담당하였으며, 같은 때에 두 곳에 강습회를 열어, 루츠(D.N. Lutz) 번스, 김상근, 박윤근 등이 한 곳에서 시작하고, 클라크, 에비슨, 홍병선, 이대위 등이 다른 곳에서 시작하여 각각 두 곳에서 닷새씩 가르친 뒤 서로 맞바꾸어 나머지 닷새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강의 분야도 루츠 일행은 토양 비료 종자선택 원예 등에 대한 일반 상식과 양봉법, 클라크 일행은 목축에 대한 여러 가지 필수공과와 농사관리 재정 생산품매매 가정부업 등으로 나뉘어졌다. 강습회가 열린 곳마다 조건이 허락되는 경우에는 해당 지역 농사실습장을 방문하여 토양개량, 토양실험, 과수접목과 돼지 닭 소의 판정과 간단한 농구 만드는 법 등에 대하여 실험을 행하였으며, 개량종자와 서적․신문․잡지 등을 판매하기도 하였다. 통역․준비․시간표 입안 등에 대하여는 박윤근, 이대위가 각각 주관하였으며, 운영 실무와 회계 등은 해당 지역에서 자치적으로 처리하였다. 재정면에서는 회비 등 수입총액이 1,315원이었으며, 이 가운데 인쇄비, 우편료, 강사 여비, 식비 등을 제하고 60원의 흑자를 보았다. 강습회에 등록 참석한 인원은 4,081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8할이 실제 농부였으며, 7할이 기독교 신자였다. 그리고 강습회를 여는 곳마다 저녁 모임은 공개하여 여기에 참석한 사람의 총수는 4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각 지방별 강습회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구·· 197명, 함흥··· 80명, 안동···255명, 마산·· 170명
군산·· 455명, 전주··· 00명, 서울···130명, 광주···145명
순천··· 75명, 원산···180명, 철원···135명, 성진···110명
회령·· 170명, 재령···363명, 해주··· 65명, 송도··· 50명
평양·· 621명, 영변···350명, 선천···300명, 강계··· 30명
<총계: 4,081명>

한편 농촌사업협동위원회는 단기 강습회에 참석한 강습생 가운데서 선발하여 평양 등 중심지에서 한 차례 6주간의 농사지도강습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서 교육을 받은 농촌 지도자들은 각자 마을로 돌아가 단기 강습회를 인도했다. 1930년 11월 평양에서 6주 동안 열린 농사지도자강습회에 참석한 40명의 수강생 가운데 24명이 개최한 단기 농사강습회의 수는 41차였으며, 수강생 수는 3천 6백명이었다. 이 밖에도 구을락은 1930년 여름 미국에서 사온 농기구를 20개소 농장에 나누어주고 그 사용방법과 종자선택하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실험농장을 확대해 나가는 등 일련의 농사개량사업을 추진하였다. 1930년 말부터 1931년 4월 초까지 개최된 순회강습회에서는 축산 방법에 대한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총 15차에, 전체 수강인원 2천명 가량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1년 말부터 1932년 초에 걸쳐서는 전국적으로 19처에서 농사강습회가 개최되었으며, 평균 출석인원은 40명이었다. 농사강습회의 진행방침과 관련해서 인원을 선별하여 겨울 동안 장기강습을 할 것이냐, 좀 더 폭넓게 단기강습을 계속할 것이냐의 문제는 전국적인 농사강습회의 시작 당시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던 문제였다. 3년 동안 전국에 걸쳐 대규모로 진행된 단기 농사 강습회는 농촌 지도자의 거주지, 그 농업 환경 속으로 강습회를 끌어내림으로써 실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대다수 소작농민들에게 다가가는 방향으로 궤도 수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33년 세계적 불경기로 인한 YMCA 국제위원회 지원의 감소로 인해 사업을 축소하게 되고, 구을락을 비롯한 북미 출신 농업전문가들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장규식 교수가 잘 정리했듯이 구을락의 한국 농촌사업의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그는 각종의 농사강습회와 실험농장, 농민수양소등을 통해 농사개량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농업 강좌를 통해 조림과 밭농사의 강조, 과수, 채소재배, 면화, 삼 재배, 양잠, 목축등을 통한 영농의 다각화, 농기구의 개량과 연간 노동의 평균적 분배를 통한 영농의 과학화, 시장제도의 개선과 직업윤리의 각성등을 농사개량과 관련하여 제시했다.

구을락 선교사에 대한 자료들과 그의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농학과 농업개량에 대해 진지하고 깊은 지식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다. 그때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이 농사를 지었으며 구을락 선교사는 그들의 농사 짓는 환경의 개선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시간과 열정을 투자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농업에 대한 일들만 강조되는 것 같지만 그는 실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이었다. 그가 졸업하고 교수로 있던 베레아 대학의 잡지는 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As farm manager, he lad the process of admitting "industrious, thrifty, sober, God-fearing" farmers."(농장 관리자로써 그는 근면하고 검소하며 술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농부들을 받아들였다) 이 표현만 봐도 그가 농업을 하는데 있어 크리스천으로써의 인성과 더 나아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엿볼수 있다.

3. 구을락 선교사 조사 과정
처음 구을락 선교사를 우리가 배정받았을 때 매우 적은 정보만이 있었다. 기독교대백과사전에 몇줄의 정보만이 있었다. 그러나 장규식 교수의 논문이나 인터넷과 YMCA자료들, 논문들을 조사해 여러 가지 자료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구을락 선교사에 대해 가장 정확한 정보와 자료들을 가진 곳은 아무래도 YMCA의 기록이 있는 미네소타 주립대학에 있는 Andersen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YMCA Archives 목록에 보면 Francis Clark 즉 구을락의 기본정보들과 그가 쓴 보고서 그리고 자료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를 구하기 위해 도서관에 연락했으나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즉 스태프의 제한으로 인해 대답해줄 수 없다는 것과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메시지만 있었는데, 연락을 한 결과 한국에서 구을락 선교사에 대한 자료들을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직원이 안내하기로는 직접 도서관에 있는 YMCA기록실에 와서 자료를 찾아 스캔을 해가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다행이 여기 기록을 사용한 Yeon-Seung Lee의 학위논문을 찾아 이를 적극 활용하였다.

III. 사진 및 기타자료

구을락 선교사는 한국에서 다량의 글을 남겼다. 우리가 찾을 수 있던 자료들은 기독신보에 있는 자료들이었다. 이 외에 YMCA에서 발간하던 "청년"지에도 구을락 선교사에 대한 자료가 있음을 장규신 교수의 논문을 통해 확인하였으나, "청년"지를 어디에서도 구할방법이 없었다. 아래는 구을락의 사진과 그가 기독신보에 실은 글은 현대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왼쪽의 사진은 베레아 대학 잡지에서 찾은 구을락의 사진이다. 사진의 날짜는 미상이다. 오른쪽의 사진은 기독신보 1930년 5월 14일자의 "농사강습회 경과보고"에 있는 사진이다.

1. 기독신보자료
먼저 하리영이라는 사람이 구을락의 강의를 대필한 "클락씨의 농업강좌"의 사진과 현대한글 번역본을 먼저 제시한다. 우리가 찾은 것은 1, 3, 4, 5이며 2편은 찾을 수 없었다.
하리영의 글은 "클락씨의 농업강좌"라는 제목으로 1929년에 1편(8.28), 3편(9.11), 4편(9.18), 5편(9.25)이 있다.




A-1 클락씨의 농업강좌 1 - 하리영
기독신보 1929년 8월 16일


A-2 현대 한글 번역
머리말 [클락]씨를 소개함
[프랜시스 오우 클락]씨는 미국의 [페니쒸] 재단의 농업 기사로서 [플로리다]에 있는 농장 지배인이었으니 그의 경력을 소개하면 그는 대학을 마친 후에 [킨더키]주에 있는 쎄리아대학에 직업 교육의 직분을 가지고 11년간이나 근무하는 가운데 그 대학 안에서 가장 큰 과로 발전케 한 사람이다. 그 후에 미국의 부호 [페이]씨가 그를 청빙하여 [플로리다]에 있는 장 60리 광 50여리 되는 농장을 설치하고 농민의 실패하는 원인을 연구하여 어찌하면 성공하게 되는가를 실험하였다. 즉 정말 농촌의 성적을 미국에서 실현시킬 것을 목표로 삼고 그 농장을 창설할 때로부터 지금까지 분투하고 노력하였다.

그는 원래 농부의 아들이다. 그의 부친은 큰 농장을 하였는데 나이가 많아 농사를 감동하기 어렵게 되어 그 아들들 중에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농장을 상속하여 주기 위하여 아들들을 불러 놓고 차례로 물어 보았다. 물어 보기 전에 농업의 실상은 이익 많이 나는 업이로되 중개상인들에게 큰 이익은 뺏기게 되는 사실을 설명하고 또 농사에 대한 모든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큰 아들은 목사가 되겠다고 그리고 다음은 의사가 되겠다고 하여 모두 농부가 되기는 싫어하였다. 마지막으로 막내아들 [프랜시스]를 불러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도 역언하였으니 [나는 그와 같이 뼈 힘이 드는 농사일을 하지 않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농장에서 성장한 만큼 일찍이 농산에 대한 지식은 다른 사람보다 많이 있었다. 그 후에 그는 그의 말과 같이 농장을 버리고 학교의 교사 노릇을 하였다. [킨더키] 산 지방에 가서 빈민 아동을 가리치는 학교에 교원으로 임용되어 있는 중 미구에 교감의 요임을 맡게 되었는데 교수 과정 중에는 농업에 대한 것을 힘쓰게 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그 학교가 농업학교로 아주 변하였다. 이 기회에 농업을 전공하여 농업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11년 동안이나 근무하여 큰 성적을 내었다. 이와 같이 그는 처음에 싫어하던 농부로 환원하게 되었으니 물론 그 부친의 가르치던 말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도시 성장보다 실제이 있어서 농산업에 대한 일을 많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그는 미국 천지에서 가장 이름 있는 농업기사가 되었다.

그는 중앙 기독교 청년회 총무 고 뿌락만 씨의 간절한 청을 받고 조선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사람으로는 고 뿌락만 씨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조선을 몹시 사랑하였다.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지극하였던지 자기 유골을 조선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까지 하였다. 그래서 이제 그의 유골은 조선 강산을 향하고 운반되어 오는 중이다. 그는 병으로 인하여 조선을 떠나 미국에서 치료하고 있는 중에도 자기를 대신하여 조선에 나가 일할 인물을 물색하기에 바빴다. 그러는 중에 가장 적임자 아니 자기 이상으로 조선을 위하여 큰 사업을 이룰 인물 클락 씨를 만났다.

그리하여 클락 씨는 뿌락만 씨에게 조선 사정을 자세히 듣고 마침내 뜻을 결심하고 지난 3월에 이 땅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는 그동안 각처 농촌과 선교사 주재처를 방문하여 어찌하면 조선의 농촌 문제가 해결될 것을 많이 연구하였다. 그는 금년 여름의 휴가기를 이용하여 지리산과 구미포와 원산의 각 선교사들 피서지로 다니며 몇 주일씩 계속하여 큰 강연회를 열었었는데 열광적 환영을 받게 되었다. 조선 농촌이 만일 그의 가르치는 것을 철저히 실행한다면 그 장래는 빛나게 될 것이다.

나는 원산에서 그의 강연을 듣고 그 강연의 대의를 필기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하거니와 이로부터 만일의 비익을 얻는다면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B-1 클락씨의 농업강좌 3 – 하리영
기독신보 1929년 9월 11일


B-2 현대 한글 번역

2. 어찌하면 조선의 경제난을 구할까?

조선이 만일 현재의 당한 경제적 난관에서 벗어나려할 것이면 과거의 경험에서 매움이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인으로서 지난 경험을 다시 추구하는 것이 새로운 맛은 없겠지만 우리는 그로부터 큰 진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점에 주의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앞길은 더욱 참담할 것뿐이다. [클락] 씨는 [카-버-] 박사의 교훈을 따라 민족적 부원을 세 계급으로 나누어 말하였다. 초등, 중등, 직업이 그것이었다. 민족적 재원의 초등으로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산양, 고기잡이, 재목 만드는 일, 광업, 농업, 축산업이 그것이다. 그런데 조선인의 대개는 이상의 말한 것 중에 첫째로 네 가지는 독립생활을 하게 할 만 한 직업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산양질은 장구한 생업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특히 이익이 많이 나는 업이 못된다. 고기잡이는 운반하는데 따라서 이익을 많이 남기게도 되고 적게 남기게도 되는 것임으로 대개는 돈 s많은 회사나 중개인의 손으로 이 업을 경영하게 되는 것이다. 또 삼림업은 이 방면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이용되지 못하였고 여러 가지 기계와 자본이 많이 드는 광업은 이미 외인의 소유가 되었다.

조선 사람의 연국 덕으로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농업이 제일이다. 농업과 축산업에 있어서는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이면 완전한 독립생활을 할 수 있는 큰 기회가 많이 있으니 조선에는 마른 땅 농사 특히 유리한 축산업을 할 수 있는 빈 땅이 많이 놀고 있다. 여기에 대한 것은 다음에 자세히 말 할 것이고 나는 여기서 [클락] 씨가 말한 부원의 중등과 직업적 계급에 대하여 먼저 말해두려 한다.

중등 정도의 민족적 부원이라 할 것은 운송업과 제조업과 장사이다.

운송업은 대체로 철도 회사와 배 회사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니 누구든지 이 영음을 하여 이익을 보려면 자본을 많이 내어놓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영업의 용인이 되어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소선에는 지금 각종의 공업이 가속도로 증가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조선 사람은 자본을 세워 가지고 여러 가지 공업을 경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업에 투자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업의 내용을 세밀히 알고 하여야 성공할 것이다. 광고할 줄도 알아야 하고 정직하게 매매 할 줄도 알아야 하며 부리는 노동자들을 공평히 대우를 하여 주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바라기는 조선인으로 자기 동족에게 해독을 주는 양주업 등과 같은 것은 경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족의 신체, 정신, 영혼을 해하는 곳에는 번영이 없는 것이다. 지금 조선에는 의복감 제조 원료가 풍성하여 의복감 제조 공업이나 또는 의복 제조업 매우 유리한 업이 될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 또 장사하는 법을 개량할 큰 기회가 많이 있나니 재래의 장사법은 심히 비경제적이다. 소매상인이 너무 많고 또 소매상점 중에는 그 가족을 호구할 만큼 파는 상점 몇이 안 된다.

조선인은 직업적 재원을 너무도 중요시하나니 다른 생업에 비하여 목사, 교사, 의사, 변호사, 은행사무원, 상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너무 지나치도록 많다. 내가 예언자는 아니나 몇해 안이면 조선에 큰 변화가 나는 믿는 바이다. 일본으로 말하면 큰 공업국으로 변하는 중이니 어떤 나라든지 제조 공업이 시작될 때는 한상 큰 변화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노동임금은 올라가고 인구는 가속도로 증가하는 중이다. 그래서 발서부터 식료 부족 문제가 생겼다. 그럼으로 조선의 농부들은 이제 큰 기회를 만나게 되었으니 일본인의 부족하여 하는 식품 공급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여러 해 동안 그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시세를 잘 이해하는 농부가 있어 무식한 농부들의 함부로 팔아먹는 땅을 미리 사둔다면 생산이 증가함에 따라 나중에는 고가를 받아 부자가 될 것이다.
세계에 농업으로써 국가를 유지하는 적은 나라들이 한둘이 아니라 [서서] 국은 조선 면적의 5분의 1에 불과하고 인구가 조밀하여 1평방 리에 240명이 산다. 인구의 밀도는 조선과 같다 하겠지만 [서서]는 조선보다도 산이 많다. 그러나 [서서] 사람들은 무식한 사람이 없고 행복하고 부요하게 산다. [서서]에는 250만 마리의 우유 짜는 소가 있고 50여만 머리의 양과 염소가 있다. 목축업에 있어서 [조선]은 [서서]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조선에는 양과 염소와 소를 칠 수 있는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목축업은 목장산물 뿐 아니라 직조와 의복과 피혁과 심히 필요하게 생각하는 식료품까지도 생산할 것이다. 그리하여 겨울의 털옷을 입게 되면 조선인의 건강도 증진이 되고 질병도 줄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실업을 협동하여 경영하는 사람은 밭농사를 계속하여 증진할 수 있고 또 차차 좋은 논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양에게 유독한 풀이 있어서 목축이 곤란하다고 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유독한 풀은 제거하고 그 대신에 [알팔파] 풀씨를 심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풀노리다] 주는 사막으로 된 반도인데 소산이 별로 없고 인구가 적더니 지금은 부요한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살게 되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신선한 우유를 얻기 위하여 철도를 부설하였는데 반도서 북 제주 내지에 사는 목장업자들은 우유는 큰 통에 담고 고기는 큰 짐으로 만들어 모아 얼음을 장하여 운송한다. 이런 것을 기차로 운송할 진대 기선으로도 못할 바 없을 것이다. 조선에도 농부들이 협동적으로 배를 지어 일본의 공업 중심지에 다량의 우유를 수출할 수 있나니 일본은 우유를 많이 먹는 나라임으로 조선에서 보다 비싸게 팔 것이다. 또 배로 우유를 수출하는 도중에 [아이스크림]과 [버터] 등을 만들어 팔면 큰 이익을 얻을 것이요 조선에서 잡는 신선한 소고기도 일본에서 많이 먹힐 것이니 축산업자는 이와 같은 것으로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유와 양유와 소고기와 또 양 털 등을 수출하여 금전으로 이익을 보는 것 보다 더 큰 이익을 얻을 것이 또 한 가지 있으니 조선인은 식사에 특히 우유와 소고기를 사용하여 크게 개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필자가 40년 전에 처음으로 원산에 나왔을 때 일이었다. 원산 와서는 일본인 하나가 내게 묻기를 무슨 음식을 먹으면 우리도 서양인들과 같이 장대하고 튼튼하여 지겠는가 하였다. 실로 일본인의 건강과 활력은 식사를 개량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크게 증진이 되었다. 조선 사람들도 계란과 소고기와 과일을 장사들에게 팔기만 하지 말고 식사에 많이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누구는 말하기를 조선에는 능금 재배법이 과도하게 많아 졌다고 하지만 클락 씨는 그 보다 몇 갑절 더 많아 져야 된다고 하였으니 과연 그의 말이 옳게 한 말이다. 그는 말하기를 조선인들이 능금을 키워서 제일 좋은 것은 팔고 병들고 나쁜 것만 먹는 것이 상례인데 그렇게 하지 말고 좋은 것은 자가의 식료품으로 사용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실로 좋은 충고이다. 일꾼은 품값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니 만일 농부가 되어 농사한 것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은 팔고 시장에 팔지 못할 것만 먹고 사는 것은 그 가족과 또 자기 자신에 대하여 공평하지 못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C-1 클락씨의 농업강좌 4 – 하리영
기독신보 1929년 9월 18일

C-2 현대 한글 번역

3. 실업교육

지나간 이십년 동안에 교육의 방법과 교수과정에 있어 크게 개량된 것이 많은 중 특히 미국과 캐나다에는 현저히 진보됨을 볼 수 있다. 전일에는 교육을 받을 뜻이있고 돈이 있는 사람은 무슨 직업(사무실에서 편히하는 일을 의미한 것) 이든지 직업을 위하여 교육 받기를 원하였다. 즉 육체노동을 면할만한 이력을 얻기위해 공부했고 빈민의 자손들은 보통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을 자가 몇이 못되었다. 또 보통학교에서도 독본과 습자와 산술이외에는 별로 가르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학교에서 남녀학생들에게 일하는 것을 가르치지않는 학교가 별로 없게 되었으니 그래서 육체노동을 할수 있도록 준비해준다. 빈민학교에서는 오전에 공부하고 오후에 일시키는 학교가 많고 또 어떤 학교에서는 1년에 여섯달 일하고 여설닷은 공부하는 곳도 있다. 그래서 지금은 소학교 부터 전문학교와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어떤 학교에서든지 남녀학생에게 살길을 여러 가지 형식으로 가르쳐준다. 어떤 학교에서는 전혀 실업만 가르치는 학교가 많은데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많이 배운다. 금년에는 야학이 무수히 많아서 야학의 학생수는 미국학교 학생 총수의 반 정도가 된다. 야학에서 가르치는 과정은 대게 제조업, 목공, 대장장이일, 가사, 간호사일, 전기공업 및 농업등이다. 이러한 교육은 미국에서 필요한만큼 조선에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조선에 나와 일하는 각 선교회에서는 적어도 이와같은 학교를 도처에 설립하고 학교교육을 받지못한 남녀 청년들과 보통학교와 또는 고등학교 졸업생을 모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조선에서는 사범학교나 전문학교나 신학교보다도 위에 말한 실업학교가 더욱 필요하다. 사범학교에서는 제조업과 농업을 위해 교사를 양성해야 할 것이다. 오늘 조선에서 있어서 신학교는 하나만 있으면 넉넉하지만 농업교는 동네마다 있어야 할 것이다.

"클락"씨는 조선의 일반산물을 시장에 파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조선 농부들이 농업에 이익을 남기려면 생산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보통으로 말하면 철도연변에서 나는 물건은 외국시장에라도 수출하기가 용이하다. 그러나 시장에 운송하는 문제를 가지고 말할 시간이 없다. 이보다 급한 문제를 먼저 말하려 한다.

1) 자국소비의 개발
조선에는 조선안에서 파는 큰시장을 설치해야 될 것이다. 자국의 시장이 외국의 그것보다 더 유리함은 운송비가 적게 드는 까닭이다. 조선인은 반드시 우유와 계란과 소고기를 지금보다 더 많이 식료품으로 사용해야 될 것이다. 이같은 식료품은 육체의 건강과 정신상 활력과 질병을 저항하는데 지극히 필요한 것이니 그 중에 우유는 특히 소아와 학생들에게 필요한 식료품이다. 과일도 역시 필요한 식료이니 다량의 사과와 포도를 소비해야 될 것이다. 위에 언급한 모든 식료품은 현재보다 값을 싸게 해야 할텐데 값을 싸게 만들 유일한 방책은 생산을 더 많이 하는 것 밖에 없다. 현재로 말하면 실제로 과수원을 경영하는 자는 이익이 별로 없고 중개 상인만 배부르게 만든다. 조선인은 이와 같이 양분이 많은 식료를 먹을 형편이 못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같이 양분이 많은 식료를 먹으면 육체와 정신이 건전하고 특히 소아들은 질병을 저항하고 이기는 힘을 얻는 것이기에 양분이 적은 식료를 먹으므로 건강을 잃고 병에 걸려서 치료비로 허비하는 것보다 애초에 좋은 식료를 잘 먹어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므로 산물을 시장에 내놓는데 첫째로 생각할 것은 내국에서의 소비를 장려함이다. 즉 조선인 자체가 우유와 계란과 소고기와 과일등을 잘 사서 먹도록 장려할 것이다. 둘째로, 외국산보다 국산물을 장려하라. 남선지방에서 다량의 목화를 산출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년 영국에서 다량의 목화를 수입한다. 북선에 사는 조선인중에는 남선지방에서 목화를 수입하는 대신에 자기지방에 재배하려고 실험하는 이가 있다하니 그와같은 정신으로 전진해야 될 것이다. 셋째로, 조선의 양복직공들도 자꾸 변하는 신식을 따라서 광고하고 지을 방법을 배워야 한다. 조선청년들은 대게 중국인에게서 복을 지어입는데 보통 저고리, 조끼, 바지를 오십원에 산다. 그런데 그것이 미국에서는 십원짜리 밖에는 안된다. 우리는 외국으로부터 비싼물품을 사인다. 조선에서도 양복감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또 조선에서 재배해야 싸게 사서 먹을 식료품도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이 적지 않다. 넷째, 조선물산의 광고술을 대워라. 칼이 조선에서 나는줄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미국상인은 상품의 면도를 만들어서 조선제라고 표를 붙였다가 팔리지 않아 독일제라는 표를 붙여서 많이 팔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은 제조상품을 광고할줄을 배워야 할 것이다. 좋은상품을 만들되 양과 질에어서 한결같이하고 직접 크게 광고하면 중개상인에게 이익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 또 조선농부나 상인들은 상품을 보기 좋게 장식할줄을 모른다. 나는 일본 어떤 항구에서 미국사과와 조선산의 사과 파는 것을 보았는데 미국사과는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그림그린 종이에 싸서 팔고, 조선사과는 먼지 많은 등겨속에다 묻어놨다. 조선사과는 미국산보다 품질이 좋지많 사는사람들은 조선사과 값의 갑절을 주고라도 미국산 사과를 사가게 된다. 정결하고 아름다운 봉를 만들어서 사과나 기타 모든 과일들 넣어팔면 산자는 보다 큰 이익을 얻을 것이다.

D-1 클락씨의 농업강좌 5 – 하리영
기독신보 1929년 9월 25일


D-2 현대 한글 번역

4. 농업대학의 필요

농업교육 외에 보통, 소, 중, 대학교를 공부하면 모든 종류의 교육을 다 받은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농학이 어떤 과학보다도 필요한것이다. 농업은 완미한 육체생활의 기초가 되니, 이는 사람의 육체가 토량에 의지하여 살고 각양으로 발전하기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농학의 여러가지 방면을 거론해 현재 조선이 무엇보다 가장 요구하는 점을 생각하여 보자. 오늘날 우리는 과학에 대한 것을 귀가 젖도록 듣는다. 농업은 곧 과학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 놓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29) 말씀하신 좋은 결과를 내게 하려면 이 농업을 과학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1) 농사
농사도 의학이나 기타 다른 과학과 마찬가지로 복작한 것이다. 현재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교에 많은 교수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전문학교도 완전한 기관이 되려면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다. 세브란스 의학교와 및 그 병원이 조선에 공헌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나 이제 우리는 농업대학교를 의학교 이상으로 요구하는 바이다. 만일 사람들이 농학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 될 모든 것을 다 알았더라면 질병도 적었을 것이고, 의사를 요구할 필요도 적었을 것이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조선 사람을 미국으로 유학보내는 것이 조선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조선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학생으로는 외국대학에서 가르치는 학과로 유익을 받을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다. 미국과 조선의 사정이 심히 서로 틀림으로 미국대학의 교수들은 조선학생으로 하여금 조선에 나와서 농사에 성공할 만큼 가르쳐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류학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오는 학생은 대게 망하게 되는 것이다. 농학에는 여러가지 과목이 포함되어 있으니, 기상학, 토량학, 경작법, 곡식의 각종에 대한 것, 채소, 과일, 종자, 추수, 농장의 선택, 모자리, 선전에 대한 설비, 질병방비에 대한 설비, 거름, 가축사육, 농촌개선, 시장문제등이 그것이다. 완전한 농업대학 하나를 경영하려면 위에 말한 과목의 전문가들을 요한다. 아니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람을 요구한다. 한 사람이 여러가지를 다 가르치지는 못하는 법이니, 조선에 농업대학이 시작되면 최소한으로 위에 말한 과목을 가르칠 교수 세 사람은 있어야 한다.

(2) 원예
술, 과수재배, 채소재배, 뽕나무재배, 삼림업, 화초재배등은 다원예술에 속한 것이다. 야채재배에 있어서는 중국인이 노련한 전문가라 할지니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움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일본인은 삼림에 대하여 찬란한 진보를 보였으니 미국보다도 훨씬 이상으로 발달하였다. 이뿐아니라 일본인은 과수재배와 비료제조에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농업대학이 시작된다면 원예술에 있어서만해도 세사람의 전문가가 있어야 될것이다.

(3) 목축업
목축업은 조선에 있어서 매우 유리한 농사의 한가지다. 동양 사람은 육식보다 더 요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목축과에도 5-6인의 전문가가 있어야 대학이 될 것이다. 또 이 과에서는 가장노릇할 만한 교수가 있어서 조선에서 사육하기에 적당한 동물의 종자에 대하여 가르쳐주어야 할것이다. 이과의 과정은 각종 짐승의 사육법과 젖 짜는 법과 짠 젖을 보관하는 법과, 시장에 내다파는 법에 대한 것들이다. 가금사육에 대하여도 전문가 하나는 있어야 되고, 양, 염소를 기르는데도 전문가 한 사람은 있어야 될것이다. 조선에는 양잠, 양봉이 잘되고 및 기타 여러가지 털있는 짐승을 사육할수 있다. 미국에서는 들짐승들을 대게 죽여버렸으나 근년의 어떤 청년 기업가는 여우와 및 기타 동물을 사육하기 시작하여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4) 농장의 정리
농업대학에는 농사정리과가 필요하다. 이 과안에는 다섯부가 있는데, 각부에 전문가 한사람씩 있어야 할 것이다.

ㄱ) 농업공학
이 과에는 배수공사, 광개공사, 위생등에 관한 일을 정리한다. 조선에는 습한 땅이 많은데 어떤 곳에는 지면 배수가 필요한 곳이 있다. 또 조선농부들은 두레박이나 수차로 논에 물을 퍼올리기에 시간과 힘을 많이 쓰게 된다. 이 노력이 무익하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이 힘들어 퍼 올린 물의 양이 부족한 까닭이니 그대신에 전기 기계를 사용했으면 종전에 하던 것보다 돈도 적게 들고 효과는 크게 될것이다. 이 전기기계는 어떤 농부이든지 소에 싫고 다니며 인수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기계이다. 또 위생문제로 말하면 건강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경제문제에도 관계 되는 것이다. 인분이 거름으로써는 오분의 일의 가치밖에 주지 못한다는 것이 과학으로 증명되었다. 인분을 사용하면 여러가지 질병 즉 십이지장충과 같은 것의 전염을 받기 쉬우니 이병으로 인하여 남선 사람들은 원기의 50%를 잃고 있다. 남자나 여자나 십이지장충이 있는 자는 정신상과 육체상으로 적어도 30%는 무능하게 되는 것이다.

ㄴ) 농촌재정
위에 말한 모든 것을 하려면 상당한 금전이 드니 재정을 잘 관리 감독 하는 기관이 필요한것이다. 만일 농사에 대한 경상비를 악용함이 없이 “요리한다면 조선에서 해마다 경제되는 돈이 여리백만원씩 될 것이다.”(정확히 이해하지 못함)

5. 시장판매
조선에서는 시장에 물건을 내다 팔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 짐나무를 사서 모아 파는데 얼마나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을 생각해보자. 짐나무장사의 비용드는 것을 예상하여 보는 가운데 또 그나무를 하느라고 시간과 노력의 허비된 것도 생각하여 볼것이며 따라서 나무하는 사람이 나뭇가지를 쳐서 나무의 자람을 방조하고 나뭇잎을 갈퀴로 긁어서 토량의 필요한 녹비를 빼앗어 옴으로 손해를 주는 것도 생각하여 볼 것이다. 이제 조선에는 신작로가 상당히 많으니 이밖에 짐차가 다닐만한 길을 많이 닦아서 농산물을 기차 정거장과 중앙시장으로 운반하도록 할것이다. 이런일을 하려면 물론 협동조합 같은 것을 조직해야 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우리는 조합이 농부에게 이익분배하여 준다는 말을 믿을수 없다고 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조선이 그리스도교를 요구하는 실증이 되리니 그리스도교는 인생의 정직과 공평 무사를 가르치는 것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함은 그리스도인들의 금률이다.

ㄷ) 가정부업
농부들이 실제 농사일에는 일년의 반정도 밖에 시간을 들이므로 농사하는 집마다 전 가족이 합농해 십이세 이상된 아동까지 무엇이든지 가정부업을 해야만 될것이다.
(완)



E-1 농사 강습회에 대하여 - 프랜시스. 오. 클락
1930년 1월 15일

E-2 현대 한글 번역

나는 지난 아홉 달 동안에 조선을 동서남북으로 골고루 여행하는 중에 조선과 및 조선인의 생활 상태를 주의하여 살펴보았다. 나는 조선인의 현재 경제 상태를 가장 속히 개선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인에게 각종 밭농사와 목축에 대한 가장 좋은 방법을 가르쳐 줌으로써 한층 윤택한 생활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총독부에서는 논농사의 개량을 주장해왔다. 그래서 쌀농사로 말하면 많이 개량이 되어가는 중이다.

이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단기 농사 강습회를 열고 실제 밭농사하는 농부들과 또 특별히 이 운동에 취미를 까진 사람에 한하여 출장을 허하였다. 금년 겨울에는 전 조선을 통하여 20처에 강습회를 열기로 하였는데 기한은 열흘 동안씩이다. 이 강습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실제 문제들이다. 가르치는 시간의 3분의 1은 질문 응답과 토론을 하고 3분의 1은 실제 농사법 곧 토량 개량법과 간리농구 개량, 가축의 감정법 등에 대하여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때에 두곳에 강습회를 열도록 마련하였으니 [룻스]씨 [팬스]씨 김상근씨 박윤근씨로 한곳에서 시작케 하고 필자와 [어비손]씨와 홍병선씨와 리대위씨도 다른 곳에 시작케 하였다.

그래서 두곳에서 각 닷새씩 가르친 뒤에는 교사를 서로 교환하여 나머지 닷새를 가르치게 만들었다. 이 방법대로 하여 교사들은 각 그들의 가르칠 과정을 닷새 동안에 마치고 문제를 토론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또한 시간 경제의 좋은 방법인가 한다. 그리고 우리의 분담한 교수 과목은 이러하다.

[룻스]씨 일행은 토량, 비료, 종자 선택, 원예 등에 대한 일반 상식과 양봉법 등을 가르치고 필자의 일행은 목축에 대한 여러 가지 필수 공과와 농사관리, 재정, 생산품 매매 가정 부업 등에 대한 것을 가르친다.

그동안 대구, 안동, 마산, 군산, 청주, 서울 등 여섯 곳에서 한 번에 두 군대씩 강습회를 열어 왔었는데 그 결과에 의지하여 보면 금년 4월 10일까지 우리는 적어도 2500인의 강습생을 접촉하게 될 줄로 예상한다. 우리는 많은 강습생 중에서 몇 사람을 선택하여 오는 1년 동안 실험 농장에서 실제로 농사를 하도록 하려 한다. 이 실험 농장에서는 경작의 개량과 또 콩과 같은 종류의 식물과 풀, 거름 사용법 그밖에 중요한 작농법 등을 실제로 배우게 하고 조선산 농작물의 재배법과 장래에 쓸 종자 선택에 대하여 특별히 가르쳐 주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한 실험 농장이 크게 개량이 되고 또 그 수효가 증가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1931년에는 목축업에 대한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할 것이다. 이 것을 가르치려면 축산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는 교사가 있어야 된다. 우리는 1931년 1월 1일로 4월 1일까지 조선인 농촌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두 곳에 농사 실습회를 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이 것을 실행하려면 돈도 상당히 있어야 되고 그동안 농학을 가르칠 교사도 많아져야 될 것이다. 기독교 청년회와 조선에 와있는 각 선교회에서 이 방면에 상당히 훈련 받은 사람을 얻어서 우리와 협력하여 이 동기 강습과 뜻을 같이하게 되고 또 실험 농장도 감독하게 되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이 사업은 실제 미국대학에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기로 함이 가장 좋은 것이다. 필자는 1907년에 미국 어떤 대학에서 12주 강습회 다녀본 일이 있는데 나는 거기서 한 학기 동안 배운 것이 다른 곳에서 몇 해를 배운 것보다 더 실제 농업에 대한 것을 배우게 되었다. 조선에는 문학, 정치학, 역사 등을 전공한 청년이 많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직업을 얻을 수 없어서 놀고 있는 자가 많다. 만일 이런 처지에 있는 청년들이 육체노동을 달게 알고 하겠다면 우리 강습회에 다니며 실제 농사법을 배움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우리가 하는 단기 강습회에서 상당한 실용적 지식을 얻어가지고 각 선교회 경영의 보통학교나 고등보통학교에 가서 농법을 가르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해하여 둘 점은 이 강습회는 조선 농부의 시급한 요구를 수응하여 줄 목적으로 실제 농사일을 주로 가르친다는 것이다.

필자는 얼마 전에 경도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거기서 주로 통의한 문제는 식료품과 인구 문제였으니 이 문제는 많은 흥미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어떤 일본인 교수는 동양인 농부들에게 쌀농사 이외에 밭농사법을 가르쳐주어야 하겠다고 주장하였다. 실로 밭에서 밀 한 말을 생산함에는 논에서 쌀 한 말을 생산하기보다 힘이 아주 적게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양가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니 조선인의 식료품 문제도 밀, 보리 그밖에 여러 가지 밭농사를 힘써 함이다. 조선에 와서 1만 5천여 마일을 여행하는 가운데 38개소 선교사 주재지 중의 35개소를 시찰하고 상당한 방법으로 산전을 이용하였으면 조선인이 지금 경작하는 면적의 배를 더 늘릴 수 있는 것을 보았다. 산전 경작은 절기나 또는 해를 따라서 다른 곡식을 번갈아 심고 또는 목축을 힘 쓸 것이다. 경사가 심한 산에 비탈에는 과수와 뽕나무와 밤나무와 기타 과목을 재배할 것이요 평평한 곳은 곡식을 경작하도록 할 것이다. 산전의 비료는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항상 기름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산은 평지보다 값이 싼고로 이 방면을 발전시킬 수 있는 큰 기회가 많을 줄로 믿는다.

나는 조선에서 가는 곳마다 농업을 강연회에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농사 개량에 대하여 좋은 방법을 배우려는 간절한 생각을 가지고 모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농촌 개량 운동이 그리스도교 단체에 서 시작된 것은 선교 사업을 위하여 다 한 일이라고 보는 바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농촌부원을 선정하여 가지고 교우와 이웃사람들에게 농사 개량 방법을 보여 줄 목적으로 협동하여 토지를 사 놓은 곳도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오 k같이 농촌 계발을 위하여 조직체가 생긴 교회에 대하여 각 대표자를 우리 강습회에 보내어 한층 더 명확한 지식을 얻게 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우리 농사 강습회는 삼도에 보인바와 같이 조선을 통하여 20처에서 열게 되었다.

이 강습회 교사중에서는 강습회가 열리는 곳에서 가까운 농장에 농사하여 농부들의 시급히 요구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실제로 가르쳐 주고 도와줄 수 도 있게 되었다. 우리는 각 강습회에서 3년 동안 할 일을 세밀한 점까지 가르쳐 준다. 그리하여 개량 농구를 소개하며 개량한 장기를 사용함으로 토량을 충분히 갈아서 곡식을 심게 하려는 것이다. 조선 농사의 가장 큰 결점은 논이나 밭을 충분히 갈 수 있는 기계가 없는 것이다. 지금도 조선에서 쓰는 장기는 논이나 밭에 흙을 온전히 뒤집어 놓지를 못한다. 곡식을 비워낸 그를 파 풀어내 덥힌 면이 땅 속으로 들어가도록 뒤집어 놓은 것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또 조선에서는 씨를 뿌린 후에 그것을 충분히 덥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밭고랑을 너무 좁게 하기 때문에 소로써 밭을 매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농부와 및 그 가족들은 이것을 호미를 가지고 손으로 매느라 몹시 힘든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 농부들은 1년에 한 가지 밭에서 두 가지 추수를 하기 위하여 심은 것을 거두기 전에 또 다른 것을 심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한다. 이 방법으로 하여서 각 밭에 생산량의 반씩 밖에 생산을 못한다. 한 밭에 두 가지를 먼저 심고 나중에 심어 섞여 자라지 말게 하여야 할지니 한 가지씩 한편으로 몰아쳐서 심게 하고 그것을 추수한 뒤에는 다른 곡식을 심을 수가 없게 되면 비료에 적당한 것을 심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밭에 거름을 잘 되게 할 것이다.

우리의 강습회는 농촌 선교사들과 좃건 교회 지도자들이 연합하여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강습생 모집에 대한 책임은 그들이 지게 된 것이다. 대구, 안동, 마산, 세 곳에서 열린 강습회의 청강료를 내고 다닌 강습생의 총 수는 624명이었고 밤 집회에 참여한 수효는 5천명 이상에 달하였다.

서울에서 연 강습회에는 여자부를 따로 두지 못한 것은 유감이지만 다른 시골에는 청강생의 수가 많지 못하였었다. 멀지 않은 장래에 각 선교부에서도 가사를 전공한 여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여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운동에 협력케 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어느 나라든지 농촌 발전 운동에 있어서 여자가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니 특히 조선에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여자는 남자보다는 부지런할 뿐 아니라 농사에도 큰 부분을 맡게 되는 연고이다.

농사 방법이 개량됨을 따라서 조선인의 신사에는 현저한 변화가 생길 것이다. 나는 기숙사 있는 여 학교를 가서 구경할 때에 교사들이 여기는 학생들이 밥 짓는 곳이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히 여겼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하여 본 즉 조선 사람의 주된 식료품이 쌀인지라 큰 솥이 필요한 줄 몰랐었다. 쌀 외의 여러 가지 곡식과 과실과 우유, 양유, 기타 목축으로부터 생산되는 것으로 일상 식료가 되게 하려면 종래 관습상 큰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말한 모든 것은 건강을 위하여 필요한 식품들이다. 그런데 여자들이 식료 개량의 필요를 느끼고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기까지는 이 것이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나의 관찰에 의하여 보면 보통 가장에서는 우유, 계란, 과실 등은 너무 비싼 식품으로 생각이 드는데 물론 이것이 조선의 현재 형펀으로 보아 사실이 그러하다. 그러나 농사의 개량 방법을 가르쳐 줌으로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용되지 않은 땅들을 이용하여 이것을 생산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람이 먹을 곡식을 추수한 뒤의 시기를 이용하여 육축 먹이를 심을 수 있음을 배울지니 여기에 대한 실 예 하나를 들어 말하겠다. 조선에서 여름에 추수하는 곡식은 서리가 날리기 60일 전에 다 익는다. 그것을 추수한 뒤에는 귀리, 보리, 밀, 등을 심어서 성탄 절기까지 두면 육축 먹이로 훌륭한 것이 될 것이요 그것을 봄에 갈아엎으면 훌륭한 거름이 도리 것이다. 나는 조선이 방금 크게 요구하는 이런 여러 가지 개량 방법을 생각할 때에 [백이의], [화란], [서서], 독일 사람의 농사짓는 방법이 생각난다. 이 여러 나라에서는 인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방법에 의하여 적은 면적에서 다량으로 생산할 뿐만 아니라 목축을 장려하여서 많은 수입을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식료에 대한 문제가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계획을 실현하려면 농업을 전공한 농촌 교사 15명은 있어야 할 것이다. 15명이 합력하여 조선인 지도자를 양성한다면 10년이면 이 사업의 주요한 부분을 조선인 지도자들에게 넘겨 줄 수 있고 15년이나 20년 후에는 농촌의 수입이 배로 증가할 것이다. 나는 각 선교회에서 여기 필요한 남녀 선교사와 금전의 보조가 있기를 바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회 사람들에게 영적 생활을 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육신 복리를 위하여 참으로 주 위하는 사실을 보여 줌으로써 앞으로 흥왕케 될 것이다.




F-1 조선 농업에 대한 나의 관견
기독신보 1930년 2월 19일

F-2 현대 한글 번역

이 글은 2월 8일(토) 철원읍 예배당에 개최된 농부업 강습회에서 연설한 것을 본사 서장 하리영 박사가 필기하여 번역한 것이다. 역자

여러분의 부모나 자녀가 병이 들면 의사를 청하여 진단을 받는 것이 상례일 것이다. 의사는 와서 병자의 진상을 자세히 검사하여 그 진산대로 말할 수는 있지마는 그 진산을 떠나서 병자에 대한 듣기 좋은 말로 시간을 보내지는 아니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도 조선농업의 현상을 나의 관찰한 사실 그대로 여러분에게 말하여 듣게 하려느 바이다.

그런즉 여러분은 이 점을 먼저 양해하고 듣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것은 조선 농업의 약점을 말함이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지어서 말함이 결코 아니다.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뿐이다. 여러분과 더불어 논쟁을 하거나 여러분을 비평하려 하는 것이 아니요 사실을 말함에 불과한 것인즉 여러분은 스스로 내가 약점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조선에서 가는 곳마다 볼 수 있는 벌거벗은 산들은 보는 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여러분은 물으리라, [산에 나무 없는 것이 농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농사에 있어서 가장 주용한 것은 수분이다. 만일 산에 나무가 없으면 비가 올지라도 그 물이 머물러 있지를 못하고 즉시 다 흩어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좀 큰 홍수가 나서 많은 수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산에 나무가 꽉 틀어박혔다 하면 아무리 비가 많이 온다 할지라도 나무뿌리와 자라는 풀뿌리로 인하여 물이 일시로 다 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 (문장의 일부 소실) 답에 필요한 물을 점차로 공급케 될 것이다.
흉년과 홍수는 항상 산에 나무가 없음으로 원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조선 산야에 어린 나무들만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가 그 같이 크지를 못하는 것은 곁가지를 자꾸 쳐내는 까닭이다. 나무 밑에 달린 곁가지들은 그 나무 원 줄기의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폐와 위장이 되는 것이다. 그런즉 나무의 가지를 치는 것은 그 나무의 호흡 기관을 버려버리는 것이요 밥통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이 가지들이야말로 그 나무의 상부와 윗줄기의 성장에 있어서 지극히 필요한 것들이다. 조선에는 이와 같이 나무의 가지들을 몹시 쳐서 그 자람을 방해함이 심하다. 또한 나무 밑에 떨어진 나뭇잎으로 말하면 수분의 증말을 막아서 흙 속에 수분이 항상 있게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떨어진 나뭇잎을 긁어서 땔나무로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나 그러나 그것이 그보다 더 낳은 땔나무를 만드는데 필요할 것만 아니라 전답에서 나는 식물의 생산고를 늘리는데 지극히 필요한 것이다. 떨어진 나뭇잎을 긁지 말고 걸어두면 그것이 거름이 되어서 나무들을 더 잘자라게 할 것이요 또 그로 인하여 산의 수분이 마름을 면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보다 더 낳은 땔나를 얻게 되고 또 보다 더 많이 양식을 산출하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조선 형제들이 말하기를 땔나무가 없이는 살 수가 없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연료를 얻는 방법은 너무나 돈이 많이 드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대신에 많은 돈을 들여서 비료를 사게 되는 연고이다.

통계표에 의하여 보면 조선 농부들이 매년 비료로 사서 쓰는 콩깨묵의 가격은 400 내지는 500만원에 달한다고 하나 이 것은 거액을 임야 개략 곧 화목 개량에 곧 쓸 것이다. 특히 목춤 개량에 쓸 것이다. 특히 목축 개량에 쓰라 목축을 잘하면 좋은 고기를 식료품으로 쓸 수 있게 될 것이요 또 거기서 나는 거름은 훌륭한 거름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들에 함부로 나는 풀은 육축 먹이를 위하여 좋은 종자를 심은 후에라야 좋은 육축을 보다 더 많이 생산할 것이다.

2. 조선 농부들이 벼농사에 치중하노라고 밭농사를 등한히 하는 것은 여간 큰 실수가 아니다. 농부들 생각에는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더 이익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이 다 통계표에 나타난 숫자에 의하여 보면 조선에는 농사경작지 중에 논이 반이 다 그런데 미국으로 보면 논은 전경작지의 3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나 미국의 농부들은 논보다 밭농사로 더 많은 수입이 있다. 조선에는 논을 너무 중대시 한다. 그래서 논 한편의 값은 50전 이상 1원이 넘어가는 것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밭 한 평에는 또는 그 이상 10전 이상 30전이면 좋은 것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논에는 물을 대어야 됨으로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논과 논 사이에 허비하는 땅이 상당히 많게 된다. 그러나 만일 밭으로 붙이면 이 같은 허비하는 땅도 없게 될 것이요 그로 인하여 비용이 날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밭농사에는 기계를 사용하여서 손쉽게 일할 수 있는 것이다. 논농사는 1인분 3천 평 이상을 더 할 수 없지만 밭농사는 개 배수를 경작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에는 농부 한 사람이 경작하는 땅이 평균으로 2만4천 평이 된다. 자본이 적은 여러분인지라 미국 사람과 같이 큰 농사는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농사방법을 개량하면 현재 농사하는 땅을 10년 안에 갑절씩 더 할 수 있을 것이요 또 그 후 10년이면 갑절의 갑절을 더 경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벼농사는 계속해야 된다. 그러나 산의 땅을 이용하여 양식을 얻도록 실험하는 동시에 땔나무도 얻도록 할 것이다. 여러분 농부의 주된 목적은 식료품 산출에 있어야 할 것이다. 쌀은 양반이 먹고 사는 유일한 식료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만일 여러 가지 식료를 이것저것 섞어서 먹을 것이면 건강에도 훨씬 좋고 돈도 적게 들 것이다.

3. 조선은 농산물의 종류가 부족하다. 예를 들면 목화, 삼, 뽕나무 농사, 목축 등 생산물이 그것이다. 이런 것을 생산하면 의복감의 원료로도 좋음은 물론이요 목축에서는 식료품으로도 좋은 식료품을 얻게 될 것이다. 서양 각국을 평균으로 보면 식료품의 여러 가지 종류를 생산하는 동시에 의복감의 원료도 여러 가지를 생산한다. 그래서 농부들은 육축 기르기와 빈틈만 있으면 직조 가족 다루기, 마차로 물건 운반하기에 골몰하여 연중에 노는 때가 없게 되는 것이다. 목축에서는 상당한 비료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농부들은 특히 겨울과 같이 동한 시에는 일하지 아니하고 논다.

4. 작물의 종류가 부족함도 조선 농업의 약점이다. 밀 한 말, 콩 한 말도 쌀 한 말이나 마찬가지의 영양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밀이나 보리나 콩도 논이나 마찬가지 면적에서 논보다 비용은 적게 들이고도 그와 같은 분량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감자, 일년감, 기타 곡식의 새로운 종류를 심는 것이 좋다고 말할 때에 농부들은 말하기를 [그런 것은 심으면 나중에 팔아먹을 길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그러나 이제 보라, 저 과수원 하는 사람들을. 그들은 각종 임금을 생산하지만 힘들이지 아니하고 다 팔 수 있다고 한다. 만일 조선의 가정에서 채소를 좀 더 많이 식료로 사용한다면 쌀을 덜 먹고 남음이 있어서 그 남는 쌀로는 돈을 장만할 수 있을 것이다.

5. 일을 규칙적으로 평균적으로 계속 할 줄을 모르는 것도 조선 농업의 약점이다. 나는 조선에 와서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며 보는 가운데 조선 농부들의 노동하는 것이 균일치 못함을 발견하였다. 어느 때는 힘에 지나치도록 일을 하다가도 어느 때는 몇 주일씩 번번히 놀고 있음을 보았다. 남자들은 놀고 여자들만 집안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그런 때에는 소들도 외양간에 매어두고 먹이기만 한다. 어느 때에 그랬느냐 하면 모 심기 전이나 밭이나 논 갈기 전이나 논 매기 전에 흠히 그리한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노는 때라고 굶고 사는 것은 아니다. 일을 하던 아니 하던 먹고야 산다. 일하지 아니하면 벌어 놓은 것만 먹기만 하면 평생에 모을 것은 없게 될 것이다. 나머지는 다음호에 계속하여 말하려 하는 바이다.

G-1 농사 강습회 경과보고 - 구을락
기독신보 1930년 5월 14일자


G-2 현대 한글 번역구을락
금년 1월~4월까지 20처 중요지에서 개최된 농사 강습회에 대하여는 종자본보를 통하여 보도한바 있거니와 이제 동 강습회를 주장 지휘한 구을낙 씨의 경과보고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 기자

작년 가을에 계획한 농사 강습회는 20개소로 나눠서 처음 계획대로 진행하여 택을 막았습니다. 처음에는 강사 여덟 사람이 가르치기로 하였으나 병과 그밖에 다른 사정으로 인하여 일곱 사람이 그르치기로 되었습니다.

북장로교 선교회에서는 숭실전문학교 교수 료소 씨와 김상근 씨를 보내주셨고 남감리교 선교부에서는 기독신보 주필 박연서 씨를 통하여 많은 조력을 하였으며 중앙 기독교 청년회에서는 홍병선 씨와 리대위 씨가 합력하여 일하셨으며 또 어비슨 씨와 번쓰 씨와 교체(에푸·오우·클락)은 번갈아서 가르쳤습니다. 이상에 말한 강상 이외에 여자 기독교 청년회에서는 김성실 양이 와서 여덟 곳 강습회에 출석하여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총독부 농업 기사의 조력을 받은 것이 열두 곳 강습회나 됩니다. 또한 긍습회를 여는 곳마다 할 수만 있으면 당지 권업 모범장과 실험장을 찾아 가보고 각자 그 감독자의 설명을 듣게 하였습니다. 또 이밖에도 여자반을 따로 가르치는 곳에서는 김성실 양과 및 그 지방 교역자들이 우리와 협동 협력하여 가정경제아 유아양육에 대한 과정을 가르쳐 주게 하였습니다. 재령에서는 여자 성경학원 학생들의 요구로 가금사양을 가르치기로 하였습니다. 강습회마다 매일 기도시간으로 20분씩을 정하고 유명한 목사와 선교사와 그밖에 다른 연사들을 청하여 청강생에게 유익을 받게 하였습니다. 저녁에는 학과를 가르치지 못하게 됨으로 기도회로 모이고 일반 강습생으로 참석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강습할 동안은 주일날도 이 방법을 조차 저녁예배를 보았으며 어떤 곳에서는 그 지방위원들이 강습회에 신자에 한하여 청강을 허하였으나 다른 곳에서는 불신자에게도 청강을 허하여 나중에 새로 믿기를 작정한 자도 있게 되었습니다. 한 곳에서는 주일예배를 마친 뒤에 새로 믿기를 작정한 사람이 열사람이나 되었습니다.

열일곱 곳에서는 예정한 일자대로 강습회의 과정을 가르치고 14처에서는 열흘 동안 식만 하였으며 세 곳에서는 사경회와 연합하여 강습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예정한 청강료는 1원인데 이대로 다 받은 강습회 수는 14요 이중의 12처에서는 청강료로 모든 비용을 쓰고 외국인 강사들에 대한 비용만 여기 포함하지 않게 되었으며 청강료를 줄여서 받은 곳에서는 당 지의원들이 그 부족액을 부담하였는데 대략 말하자면 부족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개 강습회에서 걷은 돈으로 비용을 다 제하고도 60원 잔금이 있게 되었습니다.

수입 총액 1천 3백 15원 중에서 4분의 1은 인쇄, 우편, 저보료로 쓰고 3분의 1은 여행비 기차, 자동차, 침대료, 식비로 썼습니다. 청강생 중의 천명 이상이 개량종자를 샀고 서적과 신문잡지를 산 사람이 2천여명에 달합니다. 만일 상당한 서적이 더 있었다면 사는 사람이 더 많았으리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청강생 총 수는 4081인대 그 중에 여자 회원으로 청강료를 내고 다닌 수가 50명 가량이오 특별히 회원으로 청강료를 내지 않고 참여한 여자 수는 450명에 달합니다. 청강생의 8할은 실 농부였고 또 그중의 그리스도 신자가 7할은 되었습니다.

강습회를 여는 곳마다 저녁 모임은 공개를 하였고 또 강사들은 주일예배와 기도회와 학교와 그밖에 다른 곳에 연사로 초대를 받아 다녔는데 각 지 강습회 동안 강사들의 말을 들은 사람의 총 수는 4만명에 달하였습니다. 각지에서 이 일에 다 취미를 두는 것은 매우 반가운 현상이었으나 각지 강습회의 위원들과 조선 교우들과 선교사들과 군과 도 당국에서 다같이 조선 농촌 운동에 협동하려는 것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덟 사람이 가르칠 일은 일곱 사람이 가르치게 만들엇음으로 비용이 줄게 되었고 여행할 때에도 삼등으로 하였음으로 강사들의 월급을 제하고는 모든 비용을 충분 판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농촌 사업 진행 방침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각 협동 단체 위원회를 속히 열고 오는 해에 일할 것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야 될 것입니다. 혹자는 금년 강습회에 참가하였던 학생들 중에서 수재를 선발하여 오는 겨울에는 장기 강습 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고 또 혹자는 금년과 같은 단기 강습 제도를 계속하자는 의견도 있는데 방법 문제는 고사하고라도 농부들이 농사 개량에 열중함은 분명한 사실인 즉 각 협동단체가 최선의 힘을 다 합하여 이 사업을 위하여 노력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강습회가 열린 곳마다 일기가 날씨가 좋은 경우에는 당지 농사 실습장을 방문하여 토량개종, 토량실험, 과수접목과 돗, 닭, 소의 판정과 간단한 농구를 개량함으로 일의 능률을 늘일줄을 모르는 것인데 혹자는 생각하기를 놓은 농구 없이라도 성공한다 하지만 서양에는 농업의 성공이 농구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열려고 하는 강습회에서도 실습 방면에 더 시간을 쓰고 어디서든지 할 수만 있으면 실험하는 것을 힘써서 청강생들로 하여금 각기 눈으로 친히 그 개량의 결과를 보도록 하려고 하는 바입니다.

질소비료를 만들어 내는 두과신물의 이용을 장려하며 농부로 하여금 자기의 특수한 토량에 맞도록 어디서든지 할 수만 있으면 실험하는 것을 힘써서 청강생들로 하여금 각기 눈으로 친히 그 개량의 결과를 보도록 하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질소비료 더 많이 이용함을 장려하며 농부들로 하여금 각기 특수한 토량에 가장 적당한 종자를 심게 함에 도음이 되고 또 각기 토량에 합당한 비료를 사는데 지도하기 위하여 우리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다 토량 검사소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래서 토량개량에 취미를 두는 인사와 개인당 연락을 취하여 륜작과 비료배포에 대한 가르침을 주려 합니다. 어떤 농부든지 가장 적당한 경작법을 발견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고 따라서 앞으로 다른 농부들을 가르쳐 줌에 있어서 그 실험의 결과를 가지고 증명하여 주기에 편리하게 될 것입니다. 작년에 각지의 토량을 검사한 결과를 보니 4백여에 달하였는데 금년에는 농사 강습회에 다닌 사람이 많은 만큼 앞으로 검사를 받기 위하여 토량의 견본을 보내는 일이 한층 더 증가할 줄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금년에 강습회를 열었던 장소와 및 출석한 강습회원 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소 인원
대구 197명 안동 255명 마산 455명 청주 100명 서울 130명 광주 145명 슌천 75명
원산 180명 철원 135명 함흥 80명 성진 110명 희령 170명 재령 363명 해주 165명
송도 50명 평양 621명 영변 350명 선천 300명 강게 30명
총계 4081명

H-1 조선 농촌사업의 진전 - 에푸오 클락
기독신보 1931년 5월 30일


H-2 현대 한글 번역

이것은 과거 2년간 조선각지에 개척된 농사강습회와 농촌 사업의 진전을 총괄적으로 보고하는 것이다.

1929년과 1930년 동지를 이용해 농사 강습회를 개최한 수는 21회, 주간청강생 총 수가 4,280, 저녁집회에 출석이 40,000명에 달했다. 각지에서 개최된 이 농사강습이 끝날때마다 그 지방에 시설되어있는 다수 한 개인의 모범 농장을 찾아가서 청강생들로 하여금 개량농사 방법에 대한 좋은말을 듣게 만들어 주었다. 작년에 나는 조선농사에 적당한 농구가 있어야 될 것을 깨닫고 여름동안 미국각지를 순회하며 조선에 적당한 농구를 구해보려고 했다. 어떤 농부에게 경지방법을 개량하면 어떻냐고 하니 그는 즉시 대답하기를 경지에 개량방법을 사용하면 손이 더 필요해 불가불 일꾼을 따로 고용하게 됨으로 결국은 농사의 이익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조선인의 경작지 평균면적은 사흘거리 반 가량이니 4200평이 된다. 그렇기에 일꾼의 1가족을 따로 두면 이 면적에서 나는 이익은 일꾼의 가족이 다 먹어버리게 된다. 개량한 농사방법은 종래 조선에서 연료로 사용하던 풀나무를 논이나 밭에다 패고 갈아업는 것인데 그렇기에 조선농부들도 이 방법을 채용하기를 원한다고 하니 어떤사람은 대번에 반문하기를 “겨울에 땔 나무는 어디서 구합니까? 만일 한 가족이 겨울동안 땔 나무를 사려면 적어도 20원어치는 사야됩니다.”고 했다. 나는 미국에서 2800원 어치의 농구를 사가지고 조선으로 나왔다. 운송료와 관세등은 뉴욕에서 조선까지 400원 가량이 들었는데, 미국 농구상회에서 우리에게 특히 정가에서 4할을 할인해 주니까 결국은 조선에서도 미국안에서 미국 농부들이 사는 같은 값에 사온셈이다. 앞으로 이 농구는 이와같은 값으로 사오게 되었다. 지난 두달동안 나는 이사온 농구중에 얼마를 20개 소농장에 분급하여주고 농부들에게 사용방법을 가르쳐주는 동시에 개선방법으로 종자 선택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1930년 가을에 나는 평양에서 여섯주 동안 농사지도강습회를 인도했는데, 청강생은 40명이었다. 최근 이 40명 청강생들에게 그 후로 한 사업의 유무와 성적여하를 물었더니 회답한 사람이 24명인데 그들이 단기농사 강습회를 개최한 수가 41차이고, 청강생수는 3600명이라 했다. 지난 1월 이후로 루쓰, 뻔스, 에모릭 제씨와 필자가 순회교수한 강습회수는 14차인데 청강인 총수는 2000명 가량이었다. 그래서 지난 겨울까지 조선에서 이 농촌운동을 통해 강습회에 참가할 농부의 총수는 5600명에 달했다. 이 5600이라는 사람의 수는 많이 않은 것이니 만일 이것을 다 계산한다면 이보다 여러배가 될 것이다. 조선사람의 농촌문제에 대한 흥미는 나날이 증가 되어가는 현상이다.

농촌 사업 실습장은 감독자의 주밀한 감독을 요하는 것이니 상당히 훈련받은 감독의 지도가 아니고는 이를 성공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실습장으로 말하면 전국 각지에 산재하게 되었는데, 대게는 각 지방에 있는 지도자들의 감독과 관리를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선교회에서 일하는 전도인 제씨에게 이방면에 대한 특별한 훈련은 받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농장관리와 감독하는 일을 협력해 주기를 환영하는 바이다. 전도인이나 교사나 의사된 여러분은 농부의 가정과 농사 진행순서에 대한 구문과 충고를 줄 수 있는 것이니, 실로 절실히 요구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잘 이해하고 못함에 따라서 이 나라안에 교회의 성공과 진보가 좌우될 수 있는 까닭이다. 당국에서는 보통학교와 중등학교에 실습과를 두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각 선교회 경영에 학교에서는 실업에 대한 상당한 훈련받은 사람을 요하게 되었다. 기독교청년회에서는 조선에 있는 두 곳의 기독교 경영 전문학교와 협동하기로 됐다. 하나는 서울에 있는 연회전문학교인데 여기는 9600평 되는 땅을 농사 실습장으로 사용하는 중인데, 개량방법에 의한 원예, 과수 재배를 실시하고 있다. 앞으로는 적은 범위에서 목축을 사육하려 하는데 여기에다 농민학교를 모방하되 조선사정에 적합하도록 조선 농민학교를 두려 생각한다. 이것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되는 일인 것인만큼 많은 흥미를 갖고 대하는 사람이 많다. 또 하나는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학교인데 거기는 이미 당국의 송인을 받은 농과의 설립을 협동으로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목양도 도와주려고 하는데, 메리노 종의 양을 사다가 이미 학술상으로 원만히 연구가 되었다는 그 방법에 의해 사육하려고 한다. 따라서 양털을 산출해야 북조선 기후에 맞을 의복을 만들어 보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목장을 설치하고 양의 젖과 염소의 젖을 짜보려고도 한다. 또 그리고 가금과도 기르려고 한다. 이곳에서는 양계를 위해 병아리 3000마리를 각 고을에 분배했다. 당국에서는 가금사육을 장려하므로 좋은 종계를 구하기 용이하다. 끝으로 말하면 우리는 지난 동지는 농사강습회로 보냈고, 앞으로는 각지에 있는 실습장을 관리 감독할 것인데, 그래서 조선형제들로 하여금 이것을 본받아 “랴사?”를 개량하여 수입을 증가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생활표준을 유지케 하려는 것이다.

I-1 농사개량에 대한 나의 관찰 – 구을락
기독신보 1932년 2월 24일

I-2 현대 한글 번역

나는 조선각지를 별로 안가본곳이 없이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조선 농부들의 농사짓는 것을 시찰하고 이를 생각해 보았다. 나의 관찰과 생각의 결과는 나로 하여금 서너가지 결론을 내리게 했다.

1. 개량농구와 방법을 시급히 필요로 함
개량농구와 개량한 농사방법은 조선농민의 노동을 많이 덜어줄 것이다. 지금 사람이 하는 일의 대부분을 우마를 사용해 할 수 있다. 전토에 씨를 심기 전에 이것을 충분히 잘 갈아야 할 것인데, 이것은 소를 사용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전토를 여섯인치 깊이 갈고 곡식을 심으면 지금과 같이 사람의 노력이 많이 들지 않게 될것이다. 전토를 가는데 지금 사용하는 것보다 개량된 나은 농구를 필요로 하며, 또 콩과 목화와 가지와 일년감 등을 심는데 특히 개량된 농구가 필요한 것이다. 위에 말한 식료원료를 심는데는 손으로 하지 말고 기계와 소를 사용해야 팰 수 있을 만큼 두 둑의 간격을 넓게 함이 좋다. 또 곡식을 기꼐로 심도록 함이 좋으니 기계로 심으면 습기 있는 일정한 깊이에 씨를 심을 수 있으며 심는거리도 일정하게 될것이다. 기계를 사용하여 씨를 심으면 또한 씨위에 덮이는 흙의 분량도 일정하게 되어 전토의 평균한 수분을 보전하게 될 것이다.

2. 밭농사에 더 주의를 요함
조선에서 베농사는 잘한다. 그러나 높은 땅의 밭농사는 많이 개량할 필요가 있다. 논 농사에 적당하고 좋은 기구와 방법이 밭농사에는 소용없게 되는 것이 많다. 밭을 가는 기계는 논을 가는 그것보다 일층 더 깊이 갈지 않으면 안된다. 밭에 곡식이 잘되게 하려면 이것을 갈때에 깊이 갈아서 위에 팬 거름과 잡초가 푹 파묻히도록 싶이 갈아야 할 것이다. 밭가는 기계는 날이 날카롭고 넓으며 논 가는 것보다 구부정 해야 할것이다. 그렇기에 맡을 갈때에는 기계가 큰 소 한마리를 사용하는 대신에 두마리를 사용할 것이다. 밭농사를 힘쓰게 되면 농사의 일하는 일수가 증가되고 할일 없어 노는 일수가 적게 될 것이다. 농부가 노는 날이 많으면 농사해야 이익얻는 것을 다 먹어버리고 말게 될 것이다. 적당한 밭농사는 농부의 수입을 증가시키며 집안 식구의 식료의 품질과 종류를 개량 증가하게 할 것이다. 우리가 밭농사의 종류의 수를 증가식킴을 따라서 한 밭에 이것저것을 돌려가며 농사하여 땅의 비료를 더 오랫동안 지탱하도록 할 것이다.

3. 농가의 목축의 종류를 증가함이 필요하다
조선은 산이 많은 나라이다. 전면적의 반 이상이 고원지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산지를 조림과 목축에 사용한다. 현재 조선에서는 총독부에서 계획한대로 산야에 조림을 힘쓰는 것이 매우 유리하리라고 생각한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경사가 심하고 두 둑이 많게 된 땅에는 양과 소와 돗?을 기르기에 적당한 좋은 풀을 많이 심는 것이 좋다. 조선은 육축 먹이로 제일가는 협두류(일종의 클로버)의 소산지같이 보인다. 얼마전에 세브란스 병원의 “밀스”씨는 조선산의 협두류를 채집해 중부 미국의 마른땅에 갖다가 심었는데 그 성적이 매우 양호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이 조선산의 클로버를 심어서 육축먹이의 값을 적게 들이게 된 농부가 수천명에 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육축을 사육하면 땅의 비료가 많아지고 겨울동안 농부의 일할거리가 많게되는 것이다. 우리 조선농부들도 목축을 힘써서 조선농촌 생활의 이익과 행복을 증가하게 해보자.


2. 그 외 자료들

아래 사진들은 YMCA의 유대감(Fellowship)이라는 자료에서 찾은 "한국을 현대화하려는 미국인의 노력들의 사진"이라는 제목 담긴 사진들이다. 농업과 관련된 사진은 총 4장으로 구을락 선교사의 사진이 없으나 1910-1930년대 사이에 찍힌 사진이다. 농업사업이 192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 활성화 된 것으로 보아 구을락 선교사가 활동하던 시절에 찍힌 사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Shop Work(공장 가공)

Pruning Class(가지치기 수업)



Oatmeal Manufacturer(오트밀 제조장)

Better Cattle(더 나은 축우)








IV. 참고문헌

한글 책
이만열, 『한국기독교의료사』 서울: 아카넷, (2003)

한글 논문
장규식, "1920-30년대 YMCA 농촌사업의 전개와 그 성격," 「한국기독교와 역사」 4 (1995.12)

영어 논문
Yeon-Seung Lee, "Between Nationalism and Internationalism; Yun Ch'l-ho and the YMCA in Colonial Korea" STH Theses and Diss., Boston University, 2011.

Koen De Ceuster, "The YMCA's Rural Development Program in Colonial Korea, 1925035: Doctrine and objectives,"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3 (2000).

YMCA 기록실 자료 및 베레아대학 잡지
Clark, Francis Orville [i].. YMCA biographical files, . Kautz Family YMCA Archives. https://archives.lib.umn.edu/repositories/7/archival_objects/195216 Accessed July 01, 2019.

Clark, Frank. YMCA biographical files, . Kautz Family YMCA Archives. https://archives.lib.umn.edu/repositories/7/archival_objects/831667 Accessed July 01, 2019.

Jason Lee Miller & Benjamin Willhite, "J.C. Penney Had a Farm", (2017), https://magazine.berea.edu/article/j-c-penney-farm/

Records of YMCA International Work in Korea. Kautz Family YMCA Archives. University of Minnesota. https://archives.lib.umn.edu/repositories/7/resources/948 Accessed July 01, 2019.

YMCA biographical files, . Kautz Family YMCA Archives. https://archives.lib.umn.edu/repositories/7/archival_objects/195216 Accessed July 01, 2019.

구을락의 글
구을락, 「경제상으로 본 나의 첫 감상」, 󰡔청년󰡕 1929. 7.
구을락, 「조선농업에 대한 나의 관견」(1)(2)(3)(4) 󰡔기독신보󰡕 1930. 2.19, 2.26, 3. 5, 3.12.
구을락, 「농사개량에 대한 나의 관찰」 󰡔기독신보󰡕 1932. 2.24.
구을락, 「농사강습회 경과보고」 󰡔기독신보󰡕 1930. 5.14.
에푸 오 클락, 「조선농촌사업의 진전」 󰡔기독신보󰡕 1931. 5.30.
푸랜시스 오 클락, 「농사강습회에 대하야」 󰡔기독신보󰡕 1930. 1.15.
하리영, 「클락씨의 농업강좌」(1)(3)(4)(5) 󰡔기독신보󰡕 1929. 8.28, 9.11, 9.18, 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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