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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Hobbs, Thomas(1880-?, SA, BFBS) / Hobbs, T.(1880-1934, SA, BFBS); Van Fleet, Edna Marie(미상,
 작성자 : 박상연  2019-11-26 17:15:07   조회: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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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B027 / Hobbs, Thomas(1880-?, SA, BFBS) / Hobbs, T.(1880-1934, SA, BFBS); Van Fleet, Edna Mar


토마스 홉스 선교사 / Hobbs, Thomas (1880-?)
엘런 홉스 선교사 / Hobbs, Beatrice Ellen Pugh (1880-1934)
밴 플랫 선교사 / Van Fleet, Edna Marie (?)

I. 기본사항

1. 이름: Hobbs, Thomas / 홉스 / 한국명: 허엽(許曄)
2. 생몰연도: 1880. - ?
3. 출신 및 소속: 구세군(Salvation Army), 영국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4. 한국선교기간: 1910.9.16 - 1941.5
5. 연표
1880. 영국 출생함
18??. 영국 만국사관학교를 부인(Hobbs, Beatrice Ellen Pugh)과 함께 졸업함
1910.9.16. 구세군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함
1911. 구세군 한국본영근무자로 발령되어, 개성지방관 전임됨
1913.1. 영국성서공회(BFBS) 부총무로 선임됨
1916.7-1917.8 밀러의 안식년 동안 영국성서공회 총무대리로 활동함
1918.2. 제1차 세계대전기간 동안 병역의 의무를 감당함(자원입대)
1919.2. 런던법학원 장교훈련단 하사관 제대
1919.9.3. 서울로 내한함.
1921. 권서인을 위한 영문잡지 를 창간 및 편집을 주관함
1924.11. 아내의 치료를 위해 영국으로 귀국함
1925.2, 다시 서울로 내한함
1932.1.30. 안식년을 영국으로 보냄
1933.2.7. 안식년을 마치고 서울로 다시 내한함
1934.4.8. 부인과 사별함 – 외국선교사로는 첫 번째로 양화진에 안장됨
1935.9.11. 이화여전 교수 벤 플리트(Van Fleet, Edna Marie)와 재혼함
1937.10. 제3대 영국성서공회 총무로 선임됨
1938. 영국성서공회의 명칭을 조선성서공회로 변경함
1940.9. 영국성서공회 총무직 퇴임
1941.3. 영국성서공회의 모든 성경 재고와 자금을 조선성서공회에 기부함
1941.5.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후, 상해에서 미국성서공회 임시 총무로 활동함
6. 가족사항
부인(초혼) : Hobbs, Beatrice Ellen Pugh(Salvation Army) (1880-1934)
부인(재혼) : Van Fleet, Edna Marie(Methodist Church)(?-?)

II. 선교사 소개:
토마스 홉스 선교사 / Hobbs, Thomas (1880-?)

1. 한국을 찾아온 영국 구세군 선교사
‘홉스(Hobbs, Thomas, 1880-?)’는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증거했던 선교사로서, 한국 선교의 숨겨진 주역이다. 홉스는 1880년에 영국에서 출생하였고, 영국 런던에 위치한 ‘만국사관학교(萬國士官學校)’를 그의 부인 엘렌(Hobbs, Beatrice Ellen Pugh, 1880-1934)과 함께 졸업한 뒤 사관(captain)에 임명되었다. 이후 1910년 9월 10일, 홉스와 그의 부인은 힐(W. Hill)과 게이(Herry J, Gay) 등과 함께 한국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내한하였고, 1911년에 구세군 한국본영근무자로 발령받아 ‘개성지방관’으로서 활동하였다. 홉스는 ‘개성지방관’으로서 개성 · 원당 · 사평 · 장단 · 새장 · 서도몰에 군영과 지영을 개설했고, 지방의 각 군영을 관리하면서 순회전도 등에 열성을 보였으며, 문맹퇴치사업 등의 사회계몽활동에도 열심을 다했다.
2년 뒤인 1913년 1월, 홉스는 구세군을 떠나 영국성서공회(BFBS)의 부총무가 된다. 당시 영국성서공회의 총무였던 밀러(H. Miller)는 권서들을 ‘평균 선교사 수준’으로 훈련시킬 수 있는 사람을 본부에 요청했고, 그 후보가 필처(R. Pilcher)와 홉스였다. 밀러는 한국구세군으로 선교 현장 가운데 있었던 홉스가 한국어에 능통하였고 한국인 권서들과 이미 순회전도를 해오고 있었으므로 그를 강력하게 추천하였다. 이에 영국성서공회 본부는 밀러의 추천에 따라 당시 32세였던 홉스를 연봉 250파운드, 전세비 60파운드, 여행비 10파운드, 의료비 10파운드를 조건으로 영국성서공회 부총무로 임명하였다.
홉스가 부총무로 임명되는 과정에는 약간의 어려움도 있었다. 홉스는 부총무로 임명된 후 자원하여 구세군 선교사직을 사임했으나, 구세군 측에서는 그가 한국까지 오는 여행비를 지불했던 것과 영국성서공회로 옮긴 후 동료들에게 높은 봉급을 자랑한 것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여행비 지불의 문제는 홉스가 지금까지 열심히 봉사한 것으로 인해 해결되었고, 후자의 문제는 사실무근의 헛소문으로 해명되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2. 병역의 의무 속에도 꺼지지 않은 선교의 열정
영국성서공회의 부총무로서 홉스는 권서들을 훈련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고, 권서들과 전도여행을 함께하는 가운데 큰 효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홉스는 한국인들과 잘 어울렸으며, 도를 행하는 데 초점을 둔 아름다운 발을 가진 전도자로서 열심을 다하였다. 이처럼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던 홉스는 1916년 7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밀러의 안식년 기간 동안 밀러를 대신하여 영국성서공회의 총무직을 잠시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에 홉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병역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하여 자원입대하였다. 한국의 영국총영사관에서는 자원입대한 홉스에게 프랑스로 가는 중국인 노동부대를 인솔하는 장교일을 맡겼고, 홉스는 1918년 2월 말에 천진으로 가서 이 부대를 이끌고서 캐나다를 경유한 뒤, 3월 말에 프랑스에 도착하였다. 홉스의 복음전파를 향한 뜨거운 열정은 병역의 의무를 다 하는 중에도 전혀 식을 줄 몰랐다. 그는 장교로서 중국인 노동자들을 인솔하는 중에도 그들에게 한문 복음서를 반포하며 전도의 열심을 다했다.
이후 영국의 가자 전쟁성(War Office)에서는 홉스를 런던법학원(the Inns of Court)의 장교훈련단(OTC)에서 하사관으로 근무하도록 했다. 홉스는 제대하는 1919년 2월까지 병역의 의무를 충실히 감당했고, 6월까지 휴가를 즐긴 뒤 1919년 9월 3일 서울로 돌아왔다.

3. 한국을 하나님의 말씀(성경)으로 세우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홉스는 한국을 하나님의 말씀(성경)으로 세워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 했는데, 영국성서공회의 부총무로서 한국인 권서들의 조직과 관리를 주도했고 전도활동을 지휘하는일에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홉스는 특별히 ‘모든 가정, 모든 사람(Every home, and Every man)’이라는 표어를 내걸고서 권서활동을 이끌어 나갔는데, 이를 통해 호별 방문 형식의 권서보급운동을 장려함으로 많은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최선을 다 했다. 이처럼 한국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바르게 세워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 했던 그는 1921년 권서인을 위한 영문잡지 를 창간하여 편집 및 발간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4. 사별의 아픔을 뛰어넘는 선교의 열정
홉스의 아내인 ‘엘렌’ 선교사는 1880년 8월 24일 영국에서 출생하였고, 1910년 9월 16일 남편과 함께 구세군 간호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남편의 성서공회사업 등 선교활동을 지원하였고, 기독교 부인절제연합회 회계로 봉사했고, 사경회 강사로도 활동했으며, 동물학대방지협회 등에서 사회활동도 하였다. 또한 진명여학교 등 2개의 학교에서 영어 교사로서 학생들의 교육에도 힘썼던, 육체적 힘을 능가하는 열정을 가진 헌신적인 선교사였다.
선교활동에 열심을 다하던 엘렌은 이질에 걸려 서울에서 치료를 하였으나, 해외 치료가 필요하여 1924년 11월 서울을 떠나 치료를 받은 뒤 1925년 2월에 돌아오기도 했다. 홉스는 아내 엘렌의 건강이 평소 좋지 않았기 때문에, 1932년 1월 30일에 서울을 떠나 영국에서 안식년을 보내었고 1933년 2월 7일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엘렌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1934년 4월 8일 서울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동갑내기 남편 홉스를 열심히 내조하면서 22년간 한국을 위해 봉사했던 엘렌 선교사는 영국성서공회와 한국교회의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5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홉스의 아내 엘렌 선교사는 영국성서공회 외국인 선교사로는 첫 번째로 양화진 서남쪽 언덕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홉스는 아내와 사별한 아픔 속에서도 한국선교를 멈추지 않았다. 1935년 9월 11일 이화여전 교수였던 벤 플리트(Van Fleet, Edna Marie, ?-?)와 재혼하였으며, 사별의 아픔을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한국선교를 위한 뜨거운 헌신을 이어나갔다.

5. 영국성서공회 총무가 되다
영국성서공회의 총무로 열정적으로 일했던 밀러는 1937년 8월 9일, 만65세가 되는 날로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영국성서공회는 1936년 3월에 밀러의 은퇴문제를 의논하면서 그의 후임으로 홉스를 지목했고, 1936년 말에 안식년 휴가를 주어 영국을 다녀가도록 하였다.
홉스는 영국성서공회의 배려 속에 1936년 12월 26일 한국을 떠나 미국을 향하였고, 미국을 거쳐 1937년 5월 18일 영국을 향했다. 영국에 도착한 뒤, 홉스는 영국성서공회 본부를 방문하여 밀러 은퇴 후의 한국 직원 재조직안을 올렸고, 본부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홉스는 본부의 허락을 받은 뒤 1937년 9월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1937년 10월 1일, 밀러는 홉스에게 영국성서공회의 총무직을 인계하였다. 홉스는 1913년 부총무에 임명된 후 25년의 세월이 흘러 57세의 나이에 총무직을 맡게 되었기 때문에 이미 성경사업에 있어서는 노련한 전문가로서 높은 명망을 얻고 있었다. 홉스가 총무를 맡았던 때는 일제의 전시체제 강화로 인해 한국교회 가운데 수난이 다가오고 있던 위기의 시점이었다.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은 홉스가 그의 첫 연례보고서에서 언급한 다음의 기록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중일전쟁의 발발로 재한 화교들이 한국을 떠났다. 그중에는 저명한 교인들이 있는데, 그들과의 교제는 교계를 풍요롭게 했었다. 집회에 제한이 가해졌지만, 선교사업과 교회 활동은 중단할 수 없었다. 일상적인 교회예배 외에는 어떤 모임도 허가 없이 열리지 못한다. 매우 작은 위원회 모임까지 경찰 관계관이 입석한다. …”
홉스는 이처럼 어려운 시기 가운데 영국성서공회의 총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홉스의 뛰어난 위기관리능력은 이 시기 속에도 빛났다. 그는 매우 뛰어난 위기관리능력을 통해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는 시기 속에도 개역개정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여 출판하였다. 불안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성경번역에 최선을 다 했던 홉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6.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영국인 홉스
영국성서공회의 총무가 된 홉스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선교사였다. 그는 일제의 압박 속에서 영국성서공회 조직을 ‘죠션셩셔공회’로 개편하는 일에 앞장섰는데, 이는 한국교회의 자치와 자조에는 한국인에 의해 운영되는 성서공회가 필수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홉스의 이러한 판단은 1930년대 한국교회 안에서 외국 선교사와 외국적 요소에 대한 반감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며, 한국교회의 독립과 자치를 위한 자조의식이 무르익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상황은 다음의 1933년 밀러의 편지 속에서 드러난다.
“홉스가 지방 순회에서 돌아왔습니다. 외국인은 이제 더 이상 많은 지방에서 환영받는 손님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이 모임을 지도하는데, 비록 이것이 당연히 자연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항상 지도자의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독립을 향한 움직임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홉스는 한국교회의 민족적인 요소가 강화된 것은 이미 192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라 판단하였는데, 이는 훗날 죠션셩셔공회 탄생 후 그 배경을 설명하는 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제1차 세계대전 결과 재현된 식민지 국가에서의 민족주의는 한국에서 1919년 독립운동으로 불타올랐다. 엄격한 외국정부에 의해 억압되고 감시되던 민족정신이 힘차게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기독교회는 단호하게 독립운동에 참가했고, 교회지도자 문제에서 그 태도 변화가 분명하게 노정되었다. 그 때까지 외국 선교사들은 지도자로 받아들여졌고, 그가 참석한 어떤 예배이든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것이 내가 한국에 체류했던 첫 기간의 경험이었다. 한번은 나보다 훨씬 설교를 잘 하는 나의 한국인 조사가 설교를 하고나자, 몇 명의 한국인들이 외국 선교사의 설교를 들으려고 왔다고 말했고, 결국 나는 그 모임이 끝나기 전에 한 말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19년 이후에는 그러한 태도가 변하였고, 이는 외국 선교사들이 환영하는 바였다. 한국인들이 교회와 교회기관에서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그들은 이 지도력이 그들의 권리이자 책임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의 13개 도를 두루 여행하면서 조선성서공회에 대한 점증하는 요구를 감지하였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조를 목표로 하고 있었으므로, 성서공회가 없이는 교회가 불완전하게 되리라는 것을 점점 깨달아 가고 있었다. 지원문제가 고려되자 그들은 이것이 그들 힘에 너무 지나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홉스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상황 속에서 조선성서공회 출범을 계획하였으나, 그 운영에 필요한 재정 부담으로 인해 쉽지는 않았다. 1930년대 말에 와서야 개역개정 성경번역이 완료되어 출판됨으로 재정적인 기초가 뒷받침됨에 따라 가능하게 되었다. 홉스는 총무가 된 후 이듬해 9월에 열린 한국성서위원회에서는 영국성서공회의 명칭을 ‘죠션셩셔공회’로 변경하기로 결정하였고, 홉스는 런던에 있는 영국성서공회 본부에 허락을 하며 다음의 편지를 썼다.
“이미 일본, 중국, 만주국 등에서 명칭 변경이 이루어졌으므로 그 논리적 귀결로 한국에 있는 우리의 친구들도 동일 노선에 서길 원하고 있습니다. 영어 이름을 현재 계속 사용중입니다.”
홉스는 이 명칭 변경이 한국인들의 소원에 부응하는 일이므로 한국교회로부터 추가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고, 적극적인 재정후원책을 세우고 있다고 부연하여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홉스의 요구는 1938년 12월 6일, 해외행정소위원회를 통해 허락되었다. 이후 홉스는 한국교회의 재정적인 지원을 위해 ‘죠션셩셔공회’로 우선 명칭을 변경하였고, 후원자 모집을 수석서기였던 ‘정태웅’에게 맡겼다. 홉스는 후원자 모집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1939년 1월에 그를 부총무로 임명했고 본부에 허락을 맡았다. 부총무로 임명된 정태웅의 빛나는 노력으로 1939년에는 708명의 후원자들이 총 2,626엔을 기부했고, 1940년에는 581명이 2,297엔을 기부했다. 부총무 정태웅의 활동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홉스와 정태웅은 후원자 모집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죠션셩셔공회 정관 작성에도 열심을 기울였다. 일제의 압박으로 인해 외국기관이 중지되더라도 본토인 공회를 통해 사업을 계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1940년 9월 19일 성서위원회에서는 홉스가 제안한 안에서 후원자 가운데 2명을 성서위원회 위원으로 하는 것과 부칙을 추가 제정하면서 ‘죠션셩셔공회 정관’을 채택하였다. 이 정관은 일본성서공회의 것을 모델로 하여 작성되었는데, 이 정관에는 홉스와 성서위원회가 협력 성서공회들의 지원이 계속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들이 가득하다. 이처럼 홉스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뜨겁게 사랑했던 헌신적인 선교사였다.

7. 순수한 죠션셩셔공회 설립을 위한 홉스의 노력
외국 선교사들을 향한 일제의 압박은 점점 더 거세졌다. 정관을 채택한 이후 한국인 직원들이 일본경찰에게 구속되었고, 계속되는 한국인 직원들의 구속과 고문을 통해서 일본의 목표가 홉스 자신이며, 외국인에 대한 간섭을 끊어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파악하였다. 이후 1940년 10월, 일본은 미국에 대한 전의(戰意)를 표면화하였고, 이에 재한 주미영사 마쉬는 미국인의 완전철수를 명령했다. 대부분의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나기 시작했고, 재산관리를 위해 선교회별로 소수의 인원만 남았다. 홉스는 한국을 떠나는 미국 선교사들을 보며 자신의 상황 역시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전국의 권서들에게 1941년 3월말부로 전원을 해고한다고 통보했다. 이후 홉스는 10월 24일 일본을 향했다. 고베에서는 미야지를 찾아가 자신이 한국을 떠날 경우 한국 사업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따라 미야지는 야마무라를 서울로 보내 약 1년간 회계업무 등을 돕기로 약속했다. 요코하마에서는 메이어와 다나카를 만났고, 1941년 서울 사업을 위해 20,000엔을 지원받을 것을 약속받았다.
홉스는 일본의 압박 속에서, 한국의 성경사업이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운영권을 한국인의 손에 넘겨주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홉스는 죠션셩셔공회 조직을 위해 노력하였고, 한글성경의 가격이 중국이나 일본보다 비쌌기 때문에 1년에 20,000엔의 이윤이 생기고 있었으므로 행정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하고, 사무실은 현 건물을 넘겨주고 저렴한 전세비를 받게 되면 죠션셩셔공회의 운영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1940년 11월 12일, 홉스는 경찰서로 소환되어 한국을 떠나는 문제로 심문을 당했다. 그의 통역을 맡았던 야마무라는 홉스가 곧 떠나야 할 것 같다는 심각성을 말했다. 홉스는 곧 성서위원회 임시회의를 열기 위해 노력했고, 11월 21일 임시회의를 소집하였다. 홉스는 임시회의를 통해 죠션셩셔공회 설립을 위한 정관 개정을 위한 배경을 설명했고, 앞선 9월 11일 정기회의 때 채택된 정관에 대한 축조심의를 거쳐 수정된 정관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영국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지 않는 순수한 죠션셩셔공회 설립을 위한 조치였다. 이미 장로교와 감리교, 구세군 등은 성명서를 통해 ‘민족정책’, 곧 ‘일본적 지도이념’을 표방하며 외국과의 관계 단절을 선언했기에 성서공회 역시 정관수정을 통해 순수한 죠션셩셔공회를 설립하려한 것이다.
이 날 성서위원회에서는 죠션셩셔공회를 인수하여 성서출판공회로 운영하려는 장로교 총회측 대표로 ‘차재명 목사’와 ‘김우현 목사’가 참석해 연설하였다. 이에 대해 장감 목사들은 홉스에게 와서 장로교총회가 사업을 인수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현 공회 건물을 유지하면서 초교파적으로 공회를 운영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따라 성서위원회는 죠션셩셔공회를 양도받을 자들에게 대처할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홉스는 모든 문제를 성서위원회와 런던의 본부에 일임하였다. 이러한 홉스의 조치는 그의 우선권이 “확고한 죠션셩셔공회 설립”에 있었기 때문이다. 홉스는 성서위원회 후 4일간 매일 4시간 30분씩 종로경찰서에 출두하여 심문을 받았다. 경찰은 홉스를 간첩혐의로 구속하고, 순수 조선성서공회를 설립하려고 했으나 그에게서 간첩혐의는 찾지 못했다. 구속되었던 한국인 직원들(정태경, 서상경, 김영원, 양익환)은 정관이 개정되고 홉스에 대한 심문이 끝난 후 11월 29일 모두 풀려났는데 홉스는 직원 1명당 100엔의 보석금을 물었고, 석방된 직원들은 감옥에서 당한 고초로 인해 한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

8. 그는 복음을 심고 떠났으나,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다.
마침내 한국인과 일본인만으로 구성된 죠션셩셔공회를 설립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홉스는 1940년 12월 16일 새로운 성서위원들을 선출하기 위해 성서위원회를 소집했다. 홉스는 회의의 목적을 설명한 후 새 성서위원들을 선출했는데, 혹여 거절할 경우를 대비하여 후보위원도 선출했다. 그러나 홉스는 그동안 영국성서공회가 엄청난 투자를 해왔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스스로 조선성서공회를 통해 사업을 운영하는 것을 희망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증거가 있기 전까지는 완전히 양도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고, 런던본부에서도 “조선성서공회를 통해 사업을 지속하되, 부동산은 보유하기를 원한다.”고 함으로써 홉스의 입장을 지지했다.
1941년 1월 10일, 홉스가 불참한 가운데 한국인과 일본인만으로 구성된 성서위원회가 모여 죠션셩셔공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죠션셩셔공회가 정식으로 조직되어 출발하게 된 것이다. 죠션셩셔공회는 ‘정태웅’을 총무로, 홉스를 예의상 협동총무로 하여 시작되었으나 죠션셩셔공회가 50만 엔을 모금하여 명실공히 독자적인 재단을 설립하고 사업을 운영하게 될 때까지는 홉스와 런던본부는 영국성서공회의 재산을 유지 및 관리하였고 죠션셩셔공회를 지원하기 위한 유지재단을 설립했다. 1941년 2월이 되어서는 죠션셩셔공회 재단 설립을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진전이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거액의 기부금(과부요 진실한 교인이던 여인이 30만 엔을 기부함)이 들어왔고, 1941년 3월 18일 공식적으로 영국성서공회에 속했던 모든 성경재고와 자금이 죠션셩셔공회에 기부되었다. 성경의 반포량이 영국성서공회로 귀속되고 홉스의 이사직이 계속되는 조건이 있긴 했으나, 홉스는 한국을 떠나야 할 시점이 임박해 옴을 느끼고 런던본부에 한국으로부터 안식년을 요청하였다. 이에 런던본부는 홉스에게 죠션셩셔공회 유지재단에 대한 총독부의 수용의사가 확실한지 물었고, 재단문제를 정리한 후에 안식년을 떠날 것을 지시했다. 홉스는 자신이 없는 동안의 대리총무 및 임시재단이사장으로 ‘정태웅’을 임명했고, 법적인 문제는 ‘베리스터’에게 맡긴 뒤 1941년 5월 안식년을 떠났다.
홉스는 다른 선교사들보다 오래 끝까지 한국에 남아서 어떻게 하든지 죠션셩셔공회가 정상적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어 성경사업이 제대로 진행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홉스는 뜨겁게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한국에 주기 위해서 불확실하고 불안한 나날 속에서도 끝까지 고군분투했었던 선교사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위에 든든히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홉스의 뜨거운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2019-11-26 17:15:07
121.xxx.xxx.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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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 한국교회사 과제 제출관련   평양대부흥   -   2019-07-02   29220
  로그인 '비밀번호 찾기' 관련 안내   평양대부흥   -   2018-12-06   56167
  [주의 사항] 첨부파일의 이름 작명시 주의 사항 (2)   평양대부흥   -   2017-05-18   8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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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36 / Brown, George Thompson (미국, SP) / Brown, Mardia Alexander Hopper (미국, SP)   배영운     2020-07-02   2
2506
  내한선교사 / 10 / Jackson Carrie Una   윤선교     2020-07-02   9
2505
  내한선교사/42/Sharrocks, Ella J   수연     2020-07-02   3
2504
  내한선교사 / B046 / Ingerson, Vera F.   이정환     2020-07-02   2
2503
  내한선교사 / 60 / Venable William Anderson   이원석     2020-07-02   3
2502
  내한선교사/41/Scott, Stella May   박원국     2020-07-02   8
2501
  내한선교사/57/Turner, Arthur Beresford   김철호     2020-07-01   15
2500
  내한선교사 / 52 / Clark, Allen D.(1908~1990)   이정현     2020-07-01   16
2499
  내한선교사 / 61 / Corbett, Hunter(1835-1920, 미국)   조광원     2020-07-01   6
2498
  내한선교사/53/Linton, Thomas Dwight(1927-2010, SP) / Linton, Marjory Ann Potter   정진성     2020-07-01   6
2497
  내한선교사/52/Levie, James Kellum(1890-1977, SP)   정주영     2020-07-01   12
2496
  내한선교사/30/Boyer, Elmer Timothy(1893-1976, SP) / Boyer, Sarah Gladys Perkins   문학준     2020-07-0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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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 선교사/47 / Chamness, O. Vaughan(1898–1987, NP) / Chamness, Helen Mitchell (1893–1952, NP)   윤한수1     2020-07-01   9
2494
  내한선교사 / 7 / Fisher, James Earnest(1886-1989, MS, 1919-1935)   강호경(3-2)     2020-07-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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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1 / Dodson, Mary Lucy(1881-1972, SP) 도마리아   김찬양     2020-06-3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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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37/Roberts Stacy L(1881~1946)   조상호     2020-06-3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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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24/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   김형률     2020-06-30   17
2490
  내한선교사 / 34 / Emily Irene Haynes(1877-1960)   송주영     2020-06-29   20
2489
  내한선교사 / 6 / George Anderson(1880-1969)   danielpark     2020-06-29   14
2488
  내한선교사/31/Merriman Colbert Harris(1846-1921, M)   배예준     2020-06-2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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