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6.23 화 09:15
 
 내한선교사 / Bonwick, Gerald William(1872-1954, SA, CWS) / Bonwick, C. Amy Jones(미상, SA)
 작성자 : 원신앙  2019-12-02 19:45:19   조회: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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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우거 선교사 / Bonwick, Gerald W. (1872-1954) 보고서>

I. 기본사항

1. 이름: Bonwick, Gerald W. / 본윅 / 한국명: 반우거(班禹巨)
1. 생몰연도: 1872-1954.10.19.
1. 출신 및 소속: 영국 / SA, CWS
1. 한국선교기간: 1908.10.1.-1938.
1. 활동지역: 서울, 보은
1. 연표1872. 호주 멜버른에서 출생1875. 영국으로 이주1888 부친이 교장으로 있던 고등학교 졸업1892 런던 메트로폴리탄상업학교 졸업1893.1 런던 구세군사관학교 입학1893.8 정위 임관1908.10.1. 구세군 선교사로 내한 구세군 본부에서 호가드 보좌, 충북 보은에서 개척1910.2 구세군사관학교 개교시 교육활동1910 카다린 존스와 결혼.1910.10 구세군 떠나 예수교서회 총무로 취임, 28년간 회관 건립, 한국기독문서선교에 큰 공헌.1938 은퇴 후 귀국1954.10.19. 토론토에서 소천
1. 가족사항부인: Bonwick, C. Amy Jones딸: Bonwick, Frances Evelyn 외 2명.외손: 3명
II. 선교사 소개: 반우거 (Bonwick, Gerald W, 1872-1954)

참령 본윅은 호주 출생으로 영국으로 이주하였으며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장이었다. 그는 런던 메트로폴리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직물상을 하다가 사관이 되어 17년간 사역하였다. 그는 구세군 선교사관이었으며, 조선예수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2대 총무였고, 한국명은 반우거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출생했고, 3세때 영국으로 이주하여 부친이 교장으로 있던 고등학교를 1888년 졸업하였으며 1892년 런던 메트로폴리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직물업상에서 훈련을 쌓기도 했다. 1892년 구세군 사관이 되어 15년간 봉직하여 참령으로 승급되었으며 1908년 10월 1일 한국개척사관의 일원으로 호가드 정령과 함께 내한하였다. 서대문구 평동 옛 덴마크 영사관 자리를 구세군 본부를 설치하고 그는 제 2인자로 호가드를 보좌하였다. 그는 충북 보은에 가서 구세군영을 개척하기도 하였으며 1910년 2월에는 서울에서 성경대학이란 이름으로 구세군사관학교가 정식 개교되었을 때 긴급양성반을 맡고 황종률 등 20여명을 지도하였다. 1910년 10월 그는 구세군을 떠나 빈톤의 후임으로 예수교서회 총무가 되었다. 이후 1938년 정년 은퇴하기까지 28년을 실행총무로 있으며서 두 차례의 회관건립(1911년과 1931년)과 1천 여종의 도서 및 찬송가, 주일학교공과, 신문 등을 발행하여 한국 기독교 문서선교에 있어서 큰 공을 남겼다. 그가 총무로 취임한 이듬해(1911) 14만, 7241부에 불과했던 출판부수가 은퇴한 1938년에 이르러는 169만 1,385부에 달했으며, 반포수도 32만 7,448부에서 184만 5,313부로, [판매액도 6,546원에서 3만 3,885원으로 크게 오른 실적을 쌓았다. 은퇴 후 본국에 귀환하였으며 1954년 1954년 10월 19일 토론토에서 별세하였다 한편 그의 부인은 남편과 함께 한국에 온 후 구세군에 소속되어 1938년까지 선교활동을 계속했으며 딸도 1929년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보흥여학교 명신여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 구세군
1908년 8월 18일 역사적인 구세군 한국개척의길에 올랐다. 증기선 ‘자이텐호’를 타고 10월 1일, 허가두 정령 동부인이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10월 12일 허가두 정령이 첫 예배를 드렸고, 이 때 6명이 회개를 했다. 또한 선교팀 일행은 8월 21일 오후 일본 증기선 ‘카나가와 마루호’에 승선하여,10월 15일에는 선교팀 일행 인천 제물포에 도착했고 16일에 허가두 정령 자택에서 모였다. 10월 18일 허가두 정령와 반우거 참령과 함께 총독을 방문하여 한 시간동안 면담하였다. 여기서 허가두는 구세군이 조선에 영적 전투를 위해 일하러 왔으며 교육의 최일선에 서서 의롭게 사역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세군은 전적으로 정치성을 배제하며 당파주의 방식은 그 어떤 것이라고 배격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구세군의 사회사업에 대해 설명하였으며 경성 내 하급노무자 계층을 위한 시설이 크게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한 사업을 위해서는 건물이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하였고 정부가 이러한 목적을 위해 내어줄 수 있는 정부 소유 자산들이 있는지에 대하여도 언급하였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사회사업을 위해 대다수의 정부들이 지원금을 제공해주고 있음을 말하였다. 이 자리에서 총독은 구세군의 종교의식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했으며, 구세군이 비예전적 성례전을 통해 행동하는 교회라는 소개를 듣고 흐뭇해했다. 총독은 허가두 정령에게 앞으로도 구세군에서 만나기를 원한다면 언제라도 면담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1908년 10월 20일 허가두 정령은 본윅 참령과 함께 경무총감인 마츠이씨를 방문했다. 허가두 정령은 구세군이 법과 질서를 매우 존중하며 모든 나라에서 권위를 순종할 것을 가르친다는 점과 조선에서도 그리할 것임을 설득했고, 총독은 굉장히 흐뭇해했다.
1909년 4월 20일 경성 제1영문에서 사관 양성을 위한 사관훈련반을 시작하여 서울에서 16명, 지방엑서 4명, 모두 20명의 남성으로 1개월동안 공부하고 시험을 치렀다. 같은 해 6월 29일에는 22명으로 제 2회 사관훈련반이 시작되었다. 정규 사관학교의 시작은 1910년 2월 15일 서대문 밖 현 종로구에서 성경대학교란 이름으로 20명의 사관학생을 받아들여 기숙형 학교로 개교하였다. 교육기관은 8개월이었다. 교육과정은 신구약성경, 회개문답, 구세군교훈(교리), 구세군 규칙(군령군율), 한문, 기타 산수, 성서지리 등을 교수하였다. 제 1대 교장인 참령 반우거가 일반과정을 통역을 통해 교수하였고, 허가두 정령은 주 2회 특별집회를 가졌다. 이들 최초의 사관학생 서임식은 8개월 후인 1910년 10월에 견습참위로 임관하여 경성지방, 대구지방, 전라지방, 충청지방, 개성지방으로 임명 파송되었다.
11월 29일 충북 보은지역 개척했고, 1909년 2월 9일 반우거 참령이 충청도 보은지역에 8일간 방문하여 전도하였다. 반우거는 기차나 말을 타고 다니며 조선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전도에 힘써 12회에 걸친 집회에서 32명이 개심하였고 80명이 영문을 시작해줄 것을 간청했다. 또한 한 남자는 회관건축을 위한 땅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병사집회의 경우 병사가 될 지격이 있는 자들에게 인증카드를 작성하여 배부하고 병사들만 들어올 수 있도록 입장권을 배부했는데, 반우거 참령은 입장권을 얻을 자격이 없는 178명의 회개인들을 만나는 사역들을 감당했다.

2. 조선 예수교 서회
서회 창립 이후 한동안 편집, 출판, 판매 실무를 맡을 실무책임자를 얻지 못해 효율적인 문서선교를 추진할 수 없었다. 1909년에 이용균이 판매인으로 부임하고 1910년에 본윅이 총무로 부임함에 따라 비로소 서회의 기본조직이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38년 은퇴하기까지 28년간 서회 업무에만 전념하여 서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남겼다.
본윅의 취임으로 서회 조직이 체계화되고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안정을 이루었다. 1911년 당시 매년 2원 이상을 내는 일반회원이 143명, 20원을 낸 평생회원이 47명, 해외에 거주하며 거액의 기금을 낸 명예 평생회원 5명이 회원으로 확보되어 있어 이들이 낸 1년 회비가 337원에 이르고 있다. 이 외에 5,880원 규모 헐버트 기금, 2,213원 규모의 장로회 출판기금 등이 확보되어 있었고 런던 전도문서회를 통해 한국인 목회자를 위한 도서출판 기금으로 100파운드, 전도부인 기금 20파운드가 별도로 제공되고 있었다.
서회가 독자적인 사무실을 마련한 것은 1906년이었다. 한옥을 개조해서 사용하던 사무실은 사업의 확장으로 비좁게 되었다. 종로에 정착한 직후부터 증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본윅이 총무로 부임하면서 가장 먼저 서둘러 착수한 일이 회관 증축이었다. 이미 6년동안 서회 건축기금으로 비축해 놓은 것이 1,464원 72전이 있었고 새로이 언더우드를 통해 익명으로 2명이 600달러를 기금으로 내놓은 상태였다. 서회건축은 1910년 11월 초에 시작되었다. 한국인 건축업자가 공사를 맡아서 6개월만에 공사가 완료되어 1911년 6월 28일에 개관예배를 드렸다. 건물 크기는 16X63피트 정도였고 2층 양옥에 벽돌을 사용하였으며 사무실 방은 모두 6개였다. 1층의 방 세 개는 총무실, 사무실, 서점으로 사용했고, 2층의 방 세 개는 번역과 교정실, 회의실 및 전시실로 사용했다. 새로운 건물이 마련됨에 따라 원고 편집 및 교정에 이르는 출판 업무 뿐 아니라 전시, 판매까지도 체계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순수서회 출판물은 본윅이나 이용균이 교정과 출판 업무를 맡아하였다. 1913년부터 요청했던 편집부가 정식으로 출범한 것은 1918년이었다.
1910년에 본윅이 전임 총무로 부임할 수 있게된 배경에는 미국과 런던전도문서회에서 3년간 총무 봉급을 전담해주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약속된 3년이 끝나자 총무 봉급을 누가 책임지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1913년 3월 세계적 교회연합운동가 모트가 내한한 것을 계기로 주한 외국인 선교사 연석회의가 정동교회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모트는 교회 연합운동을 역설하였고 이어 서회 총무 봉급 문제를 다루었다. 선교사들은 본국 선교부에 이 일을 위해 재정 지원을 강력하게 요청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이러한 요청이 장, 감 선교부로부터 이의없이 받아들여져 1915년 초부터 7개 선교부가 총무 봉급을 전담하게 되었다. 이처럼 선교부가 재정 참여를 하게되며 기존 이사회 구성에도 변화가 생겨 선교부 추천 이사들로 또 다른 이사회가 구축이 되었다. 선교기금은 총무 봉급을 지급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고로 선교부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말도 된다. 반면 한국교회의 모금은 점점 줄어들었고, 대신 책 판매 대금과 구독대금은 크게 신장되어 전체 수익금의 33%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서회는 교회연합우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서회는 1910-30년대 한국 기독교의 유일한 교파연하합지로 교회 내의 여론 형성 뿐 아니라 대사회적인 교회 언론 기능도 감당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주필이었던 박동완이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당당히 참여하여 1년 반동안 옥고를 치르고 나온 사실은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 위상이 어떠했는지 암시해준다. 3.1운동 전후하여 총독부로부터 몇 차례 발매 금지 및 발행 정지 처분을 받으면서도 민족주의 교회언론으로서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며 오히려 구독자가 3배나 늘어갔다.
1911년에 마련한 2층짜리 사옥은 오래지 않아 비좁게 되었다. 사업이 계속 확장되고 직원도 늘었으며 책의 재고도 늘었기 때문이다. 보다 큰 사옥이 필요했다. 본윅은 새 건물이 시급히 요청됨을 알렸다. 이 일을 위해 이사회를 열어 각 선교부별로 5만 5천달러의 건축기금을 할당해 걷기로 하였다. 그러나 3.1 운동으로 인한 사회 혼란과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취체가 심해짐에 따라 건축은 상당히 지연될 수 밖에 없었다. 건축계획이 활발하게 추진된 것은 1924년 스와인하트가 서회 건축을 위해 노력했을 때였다. 그의 노력으로 미국의 개인 모금액이 5만 2,400달러에 달했으며 별도 창고 건축비로 5천달러도 모금했다. 그렇게 15개월만에 완성되었고 1931년 6월 8일 헌당예배를 드린 서회의 새 사옥은 연건평 700평에 사무실 방이 85개에 달하였는데 이 건물이 마련됨으로 서회뿐 아니라 조선주일학교연합회, 기독교조선 감리회 총리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같은 교회 연합기관, 기독산비솨, 미션필드사, 아이생활사, 신생사, 종교교육사 등 기독교 잡지사들도 입주하여 명실공히 “기독교 운동기관의 총본영”역할을 하게 되었다. 서회 건물 말고도 그 옆에는 대영성서공회가 있었고 길 건너편에는 YMCA회관이 있어서 종로 2가는 기독교 출판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서회가 새 건물을 마련하게 됨에 따라 조직과 구조에서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우선 서회 건축이 본격화되던 1929년에 총무제도를 세분화하여 출판 총무, 재정 총무, 행정 총무의 3개 부서로 나누어 본윅이 출판 총무, 스와인하트가 재정 총무, 북장로회의 노련한 선교사 휘트모어가 행정 총무를 맡게되었다. 1931년 건축이 끝난 후에는 재정총무직이 사라지고, 출판총무, 행정 총무의 이원구조로 서회가 운영되었다.
1931년 6월 5층짜리 새 사옥이 마련되고 서회건물이 ‘기독교 단체의 총본영’ 기능을 하게 됨에 따라 서횐느 단순한 문서선교 기관의 기능만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즉 새로운 교회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이 커졌다는 말이다. 실제로 문제 중 한국인과 선교사 사이의 갈등이었다. 1920년부터 서회가 판권을 인수하여 발행하던 서회 기능 중에 한국인 참여가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한국교회의 지도급 문필가들이 이것을 통해 배출되었고 유일한 초교파 연합지로 17-18만부를 꾸준히 발행하면서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지로 정착ㄷ했다. 1년 구독료만 해도 5-8천원 수준으로 서회 재정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교계에 미치는 영향력이나 재정규모로 보아 중요한 위치에 있는 발행권을 놓고 전필순과 서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창간 때부터 선교사들이 발행인이었던 것이 한국인으로 바뀐 것이 1933년 5월의 일이다.



[3권 전체 서평 / 반우거 Bonwick, Gerald W. (1872-1954) 선교사 과제] 2014210238 3학년 4반 원신앙
2019-12-02 19:4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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