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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Pierce, Robert Willard(1914-1978, BC)
 작성자 : 김성현v  2019-12-13 17:14:19   조회: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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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B084/Pierce, Robert Willard(1914-1978, BC)


1. 출생과 성장(침례교 목사가 되기까지)

로버트 윌라드 피어스(Robert Willard Pierce), 애칭 밥 피어스(Bob Pierce)는 1914년 8월 8일, 미국 일리노이주 포트 다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걸을 수 있게 되자 곧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으며,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한 뒤에는 11살이 되던 해에 나사렛교회에 등록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12세 되던 해에 이미 선교와 구제에 대한 사명이 생겼다.
피어스는 1936년에 파사데나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대학을 다니면서 만난 목사의 딸, 로레인(Lorraine)과 결혼하였다. 그 후, 1942년에는 미국 침례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캘리포니아의 웰링턴제일침례교회에서 목회했다. 1944년에는 십대선교회(Youth for Christ)를 창설하는데 참여하였고,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부총재로 활동했다.

2. 한국 선교 준비

2.1. 확실한 믿음의 자리
피어스는 한국에 오기 전, 믿음에 있어서 결정적인 두 가지 사건을 경험했다. 첫 번째는 ‘20달러짜리 기적 이야기’이다. 피어스가 로스앤젤레스 복음센터에서 부목사직을 맡고 있던 청년 시절에 받은 사례비는 20달러였는데, 생활비로는 아주 부족한 액수였다. 그러나, 어느 주일 아침에 부흥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 사례비 전부를 군부대 천막교회 건립을 위해 즉흥적으로 헌금했다. 그 날 오후, 그는 예정되지 않은 결혼식 주례를 하게 되었는데, 새신랑과 신부가 감사의 표시로 20달러를 주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그 부흥목사의 설교가 너무나 은혜로워서 그 20달러를 다시 헌금했다. 집회가 끝나고 한 노인 성도의 부탁을 받고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그녀가 감사의 표시로 20달러를 주었다. 이 일이 그에게 믿음을 가르쳐주었다. 피어스는 말한다.

“인간의 최선을 다 한데서 그치는 것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인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영역 밖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일, 그것이 ‘하나님의 방’이다. 이 하나님의 처소가 내 일상생활의 일부분, 경험의 전부이며, 기본철학이다. 나는 더 강조할 수 없을 만큼 주장한다. 당신이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가능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그보다 더 약속을 하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두 번째는 피어스가 상해 부흥집회 강사로 초청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초청을 받았지만 여비가 없었던 그는 하루 종일 번민하고 기도하다가 덮어놓고 국제공항으로 나갔다. 당시 그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호놀룰루까지의 비행기 삯 밖에는 안 되었지만, 일단 하와이로 가고 볼 일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서 갑자기 외국 여행기간에 부흥집회 인도 약속을 해놓은 일이 생각이 나서 십대선교회 이사장 윌버 넬슨에게 전화로 설교부탁을 했다. 그 때, 넬슨 목사가 “여비가 없을 텐데 어떻게 중국에 가려고 하는가?”라고 물었 고, 그는 “우선 하와이까지 가는 표를 사고 나니 117달러가 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넬슨 목사가 “밥! 알았소. 그렇게 주님 한 분만 믿고 주께서 길을 열어 주시리라는 확신에서 떠난다면 출발하세요. 여러 사람에게 급히 연락을 해서 모금이 된다면 호놀룰루 공항으로 급히 송금하겠습니다.”고 했고, 11시간 후, 그가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500달러가 와 있었다. 그 돈으로 필리핀에 가서 8일 동안 전역을 누비며 집회를 은혜롭게 인도하였다. 그리고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 좌석은 화물수송기의 기장 옆자리를 구해 무료로 갈 수 있게 되었다. 피어스는 그 조종사에게도 전도를 하였는데 조종사가 그에게 전한 봉투 안에 300달러가 들어있었다. 그 300달러는 홍콩에서 상해로 가는 표 값이었다. 그의 믿음과 집념은 결국 상해 집회가 시작되던 날 그가 도착할 수 있게 해주었다. 피어스는 말한다.

“나는 중국에 도착했을 때 문자 그대로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몇 백만 달러를 주고도 못 얻을 귀중한 경험을 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고 하는 말씀을 증명했다. 여호수아 1장 9절이 내 삶에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지 않았는가?”

2.2. 월드비전을 향한 꿈
피어스가 세계기독교선명회, 즉 월드비전 사업을 위한 꿈을 가지게 된 것은 1947년 중국의 곤명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는 여기에서도 두 사건을 통해서 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첫 번째 사건은 그 곳 중국내지선교회에서 혼자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알버트 여사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120여명이나 되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선교회에서의 도움은 이미 끊겼고, 다만 몇몇 선교사들이 사비에서 내는 지원금과 자신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돕고 있었다. 다음날, 그는 알버트가 안내하는대로 독일 수녀들 네 사람이 돌보고 있는 52명의 맹아 수용소를 방문하였다. 히틀러가 선교기금 해외송금 금지 조치를 취한 이후 이들은 줄곧 자신들의 자비량으로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일들을 다 보고 나서 그는 가슴이 메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그들의 몸과 살을 불태우며 가련한 어린 아이들과 내버려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이름 없이 충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피어스는 무엇이든 다 필요한 상태인 그들을 바라보며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며 애통하여 기도하고 있을 때, 사진을 찍어 보고 들은 것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의 향후 기록 필름 촬영의 선교형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두 번째 사건은 아모이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피어스는 네덜란드계 미국인 노년의 여자 선교사 티나 홀케보어(Tena Hoelkeboer)의 초청을 받아 4백여 학생이 있는 미션스쿨에서 나흘에 걸쳐 설교를 한 일이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듣고 한 어린 소녀 ‘백옥’이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기쁨을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이 딸의 회심에 놀라 딸을 매질하고는 집에서 내쫓고 말았다. 홀케보어는 이 어린 소녀를 그의 가슴에 안겨주었다. 그리고는 “자 이제 이 어린아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이 때 그는 그의 가슴을 흠뻑 적시는 대지를 흔드는 것과 같은 감동이 거칠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그에게는 단 5달러밖에 없었다. 홀케보어는 만일 매달 5달러씩만 보내준다면 이 어린아이를 맡겠다고 하였다. 그는 곧바로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월드비전 결연사업의 원점 곧 싹이었다.

3. 한국 선교 사역

3.1. 한국 방문과 월드비전 설립
1947년부터 중국 선교사로 3년간 활동했던 피어스는 1949년 9월에 독립된 한국에 방문하여 서울 남대문 교회에서 부흥전도집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당시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 김치선 목사가 주도한 300만 구령운동의 일환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그는 한국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50년년에는 닷스(G.Dodds), 핀리(R.Finley) 등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부흥사들과 함께 동남아지역 순회전도단을 조직하여 중국을 방문했다가 그 해의 3월에 다시 내한하여 3월 27일부터 1개월간 대구, 부산, 서울, 광주 등지를 돌며 전도집회를 개최하고 돌아갔다. 그 후 3개월만에 6·25사변이 터지자 그는 전쟁으로 인한 고아들을 돕기 위해서 선교단체 창설에 착수하였고, 필립(F.Phillip)과 함께 1950년 9월 22일에 미국 포틀랜드에서 ‘세계기독교선명회’, 즉 월드비전 국제기구를 조직하고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3.2. 종군기자로서의 활동
1950년 12월에는 지 특파원 자격으로 내한하여 종군기자로서 전후방 각지를 돌며 전쟁의 참상을 담은 영화를 제작해 본국에서 모금운동을 벌였다. 피어스는 거의 매년 한국을 방문하여 전쟁고아, 미망인 및 전쟁포로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였고, 1953년 5월에는 정식 한국지부를 설립, 고아원과 영아원, 모자원, 탁아소, 아동병원 등 사회사업을 시작하거나 지원하여 전쟁 중의 한국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3.3. 신앙부흥운동
피어스는 6·25사변 직전, 옥호열(Harold Voelkel) 선교사의 주선으로 1950년 봄 종로에서 한경직 목사를 만났다. 한경직의 주선으로 남대문 옆 공터를 빌려 초교파적인 연합대회를 개최하게 되었고, 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만나 1953년에 300명가량의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목회자수양회를 개최하였다. 강사는 피어스, 통역은 한경직이었다. 뿐 만 아니라, 꾸준히 전도집회를 개최하여 1954년에는 가을 스완슨(E.Swanson), 핼버슨(D.Halverson) 등과 함께 부흥전도단을 조직하고 대구, 대전, 전주 등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특히, 1955년 9월에 서울 남산 조선신궁 옛 터에서 개최한 집회와 1957년 9월 29일부터 10월 20일까지 서울 국제전신전화국 옆 공터에서 개최한 집회는 수많은 결신자를 낳았고, 전국적 부흥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되었다.

3.4. 사회사업
피어스는 전쟁 미망인을 비롯하여 고아, 전쟁포로, 한센병, 농아, 맹아들을 위한 구호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피어스가 행한 첫 구호사역은 미망인을 위한 지원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모자원, ‘다비다 모자원’을 세웠다. 특히, 다비다 모자원에서는 미망인 백옥현 여사가 재봉기술을 여러 미망인들에게 가르쳐서 생계에 도움이 되게 했다.
월드비전(세계기독교선명회)의 사역 핵심은 ‘아동사역’이라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에는 전쟁으로 발생한 고아의 수가 20만에 이르고 있었고, 그 중 5만명만이 고아원에 수용되는 형편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교단 및 선교기관을 통하여 지원금을 모금하는 형식을 취하다가 운영 중인 고아원, 신축하는 고아원을 책임질 수 있는 기관에 넘기고 자금을 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뿐 만 아니라, 그는 막연한 구호 사업이 되지 않도록 인간적인 접촉을 하게 하는 생명력 있는 구호방법으로 결연사업을 시작했다. 전쟁 중의 고아 사업은 사실 한국에서 먼저 시작된 것으로, 이후에는 20여개국의 고아원을 지원했다.
피어스는 전쟁포로를 대상으로도 사역했다. 부산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포로의 수가 164,000명에 이르렀고, 옥호열 선교사가 20여명의 한국 목사들과 함께 수용소가 폐쇄될 때까지 3년간 계속했는데, 피어스가 이 사역에 연계되었다. 수용소에는 한때 5개월간의 성경학교가 12개소가 있었으며, 졸업한 중공군이 308명, 등록된 포로들이 1,500명에 이르기도 했다. 인민군들 중에는 100,000명이 교적부에 등록하고, 6,000명이 주님을 영접했는데, 이들 중 많은 수가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실제로 월드비전은 130명의 반공포로들을 장로교나 감리교, 성결교의 신학교로 보냈다.
1950년대의 통계에 의하면 한센병 환자들의 수는 2백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피어스는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육체적인 병임과 동시에 정신적, 사회적인 병이었던 한센병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월드비전을 통해 ‘선명회특수피부진료소’와 ‘나병연구소’를 설립하여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1959년 5월 9일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재가치료를 위해 서울 중심가에서 공인기관으로 설립되었다. 피어스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 유준 박사와 함께 한센병 문제를 논의하고 그로 하여금 주도적 역할을 하게 했다.
피어스와 월드비전은 농아나 맹아들을 위한 구호사업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애린 선교단 사회사업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라이트 하우스’라는 맹아원(대구)을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1954년에는 2층 규모의 대구 농아학교를 건립하기도 했다. 성경을 가르치고 점자나 수화로 글을 쓰고 읽고 대화하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직업훈련을 하게 하여 자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전쟁은 많은 불구자를 만들었다. 그래서, 피어스와 월드비전은 의수족 사업에 큰 도움을 주며 직업재활센터를 세워 자활을 위한 직업교육과 사업에 정진하게 했다. 이와 같은 센터는 서울과 대전, 전주, 대구 등 네 군데에 있었다.

3.5. 그 밖의 활동
1950년에 공산군이 38선 이북으로 퇴각한 후, 피어스는 빌리 그래함(B.Graham)과 함께 방송망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954년에는 그래함과 함께 기독교방송(CBS) 설립을 지원하였으며, 1956년에는 방송출력원 5,000W에서 10,000W로 승압하는데 따른 재정적 지원을 도맡았다. 피어스는 한국 외에 국제적으로 활동을 넓혀갔다. 월드비전 창설 이후 총재로 역임하며 한국 등 20여개국의 고아원을 지원한 것은 물론 국제적인 자선모금운동체, ‘사마리아인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동양선교회’나 ‘겨자씨회’ 등에도 이사로 취임하여 협력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해서도 역할을 했는데, 1961년 서울에서 개최된 선명회 창립 10주년 기념식에서 교권 혹은 교리적 문제로 분열되어 한국교회를 향하여 단결과 화합을 호소하였다. 피어스는 파사데나 대학을 졸업한 이외에 1949년 미네아폴리스의 노드웨스턴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1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1967년에는 존브라운대학에서 각각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4. 투병생활과 임종

피어스가 한국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에서 보여준 그의 헌신적인 공을 기려 1959년 대통령 표창을, 1964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많은 사역과 헌신을 감당했던 피어스는 1967년에 백혈병으로 활동이 어려워져 월드비전(세계기독교선명회) 총재직을 사임했고, 1975년 10월 2일 이화여대에서 베풀어진 한국봉사 25주년 축하예배에 참석하여 한국 교인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에 국민훈장 무궁화장까지 정부로부터 받았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한 차례 내한했으나 오랜 투병 끝에 1978년 9월 6일 미국에서 아내와 3명의 자녀를 남겨두고 별세했다.
월드비전(세계기독교선명회) 국제본부는 그의 업적을 기려 ‘피어스상’을 제정, 사회사업에 공로가 큰 이들에게 상을 주고 있으며, 한국본부에서는 ‘피어스 장학금’을 설정해 그의 공을 기리고 있다.
2019-12-13 17: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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