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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Ogle, George Eving(1929- , M) / Ogle, Dorothy(미상, M)
 작성자 : 허성도  2019-12-13 17:58:14   조회: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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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3-5 / B007 / Ogle, George Eving (1929- , M) 그의 아내 Olge, Dorothy (미상, M) / 허성도


오글 선교사 / Ogle, George Eving (1929- , M)
그의 아내 Olge, Dorothy (미상, M)

I. 기본사항

1. 이름: Ogle, George Eving / 오글 / 한국명: 오명걸(吳明傑)
2. 생몰연도: 1929.1.17-
3. 출신 및 소속: 미국, 미연합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1954-1974
5. 연표
1929.1.17. 미국 필라델피아 피트케어인에서 출생
1955.9 미연합감리회 선교사로 내한
1957 귀국, 위스컨신대학교 대학원에서 산업사회와 노사관계 전공, 박사학위 취득
1960 Ogle, Dorothy와 결혼 후 한국으로 재내한
1961.9 인천선교부에 부임,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열고 활동
1965 귀국해서 노사문제 연구. <한국노동사에 관한 소고> 논문 남김.
1967 인천을 근거지로 영등포, 부산, 대전, 영월, 함백탄광 등까지 활동무대 넓힘.
<한국근로자의 실태와 교회의 과제>,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라는 저서 남김
1971-73 감리교신학대학 선교사학 강의
1973 서울대학교 노사관계 전임강사
1974.10 목요기도회에서 인혁당이 고문에 의한 조작임을 폭로
1974.12.14 박정히 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됨
1975 에모리대학 교수로 취임
1980 미연학감리회 교회, 사회국 실무간사로 워싱턴에서 활동
200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해외 민주인사 초청 사업 참석자 방한. 제 5회 한국인권상 수상, 출간.
2012 부인 도로시 오글과 함께 출간.

6. 가족사항
부인: Ogle, Dorothy(*생몰일시 미상)
아들: Ogle, Martin(*생몰일시 미상)

II. 선교사 소개

1. 선교사 파송 전 오글의 생애: “가치관이 형성되다.”
오글은 주식시장이 붕괴된 1929년 펜실베이니아 서쪽 탄광지대 작은 철도 마을인 핏케언에서 태어났다. 형들 중 두 명은 2차 세계대전 동안 군에 복무를 했으며, 어머니는 웨스팅하우스 에어브레이크 공장에서 일했다. 오글은 이런 경제난국의 시기 동안에 생존을 해야만 했고, 이 배경은 그의 가치관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그는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을 통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교장선생님을 오글이 공장 노동자가 아닌, 대학에 가도록 격려했으며 특별 장학금을 알선해 주었다. 그래서 오글은 테네시에 있는 메리빌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퀴너 박사의 지도하에 “경제정책들이 어떻게 노동자에 대한 정의와 불의에 영향을 주는가?”를 배우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오글은 어린 시절 보았던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보다 긍정적인 미래를 가져올 수 있는 지에 대해 어느 정도 통찰 할 수 있게 되었다.
오글은 메리빌대학을 졸업한 후, 듀크대학신학교를 진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노동운동’을 접할 수 있었다. 또한 천주교 노동자-신부운동도 접하게 되었다.
감리교의 선교위원회가 선교사들을 모집하기 위해 듀크대학신학교에 왔을 때, 오글은 한국의 3년제 선교프로그램에 합류하게 되었고, 인턴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1954년 9월 한국 사람들과 함께하게 될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오글이 미혼의 선교사였기에 한국어 교사와 함께 한국 가정에 입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한국어에 몰두했으며, 한국적인 생활에 가능한 모두 참여했다. 한국을 공감하고 이해하려 했다.
이렇게 ‘오글의 가치관’이 조금씩 자리 잡히기 시작했다.

2. 선교사 파송 후: “ 가치관의 진동: 한국에서 그의 가치관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다.”
1955년 9월 오글은 미연합감리회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 받아 왔다. 그는 한국에서 3년의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다시 자신의 본국으로 돌아가 시카고에서 목회를 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3개의 대학교를 다니면서 한국에서 노동 목회활동을 펴는 데 도움이 될 과정들을 이수했다. 또한 이 때 아내 도로시를 만났으며, 그녀는 오글이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알았지만 그의 삶의 동의하며 결혼하게 되었다.
1960년 2월 오글은 아내 도로시와 함께 한국에 돌아왔고, 아내와 함께 한국어를 배우는 것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던 정치적 혼란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당시 전후 한국은 사람들이 생존과 재건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반공주의와 전쟁에 대한 공포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대구에서는 학생들이 정부의 부패와 경제적 혼란에 항의하면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선교활동을 막 시작할 참이었던 오글 부부는 앞으로 26년간 군부통치하에서 알게 될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게 될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3. 선교사 파송 후: “ 가치관의 진동: 한국에서 그의 가치관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다.”
오글이 서울에서 어학 과정을 마쳤을 때, 한국감리교의 주교는 도로시와 서울 인근의 산업도시 인천에서 노동자들 가운데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도록 배정했다. 그리고 인천에 있는 한 공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큰 공장 안에는 50갤런짜리 드럼통을 잘라서 만든 단 한 개의 난로로 난방을 하고 있었다. 계속 톱밥을 집어넣어 불은 벌겋게 타고 있었다. 드럼통의 쇠는 녹아 내릴듯한 분홍색이었다.
난로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앞은 뜨거웠으나, 황폐한 공장을 휘감는 차가운 바람으로 등쪽은 계속 덜덜 떨렸다. 지붕과 벽의 일부가 전쟁 통에 날아가 버렸다. 남아 있는 모든 것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의 뼈대였다. 건물의 뼈대 안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바깥 바람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상과 사고의 흔적이 사방에 있었다. 20여 명의 일꾼들이 불 주변에 모였으며 그들 중 일곱 사람은 엄지손가락이 없었다.
그 공장의 반장이며 내리감리교회 신자인 박용희의 도움으로 오글 선교사는 노동자들 앞에 설 수 있었고, 오글 선교사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신앙과 우리 일상의 관계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 설교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에 대해 듣고 싶고 또한 제 신앙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관심이 있으시다면,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에 제가 오겠습니다.” 그리고 “도시산업선교회”가 인천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조승혁, 조화순 목사 등으로 구성된 “도시산업선교회”는 공통되는 문제들에 대해 서로 의논했다.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인이건 모두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힘이 자신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노동자-목사로서의 경험과 공장 목회 프로그램을 통해 공장 안에 목회적인 관심과 상호간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60년대 후반기에 도시산업선교회는 금속, 방직, 군속, 철도 및 운송, 전기, 항만, 자동차 관련 노조와 함께 정기적으로 노동교육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도시산업선교에서는 1960년대의 한국 노동운동이 한국을 민주주의와 경제가 함께 발전하는 길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정부가 단체교섭관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군사정권은 노동자들의 권리와 경제 발전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군의 입장에서 볼 때, “도시산업선교회”의 목회활동은 공산주의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도시산업선교회는 1970년대 초에 계속해서 성장했다. 그러나 유신 기간 동안(1972~1979), 군사 정부는 도시산업선교회가 선교 활동을 펼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제 오글의 의무는 “군사독재정권의 손아귀에서 고통받고 있는 한국동료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른 활동으로는 월요모임과 기독교 구속자들을 위한 목요기도회에 참여했다. 이 모임을 통해, “인혁당”의 여덟사람들의 가족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4. 선교사 파송 후: “역동적인 가치관의 현현: 긍휼의 삶을 실천하다.”
1972년 박정권은 정부를 비판하는 행위에 사형까지 처벌할 수 있는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1974년 4월 정부는 정부를 전복하려는 대규모의 공산주의 음모를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기독교 단체의 지도자 다수가 포함된 천 명 이상의 재야 민주인사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여덟 명은 남한 정부를 전복시키고 공산 정권을 수립하려는 음모를 꾸민 소위 “인혁당”의 주동자로 기소되었다. 여덟 사람들에게 주어진 죄목은 조작이라는 것이었다. 이 여덟 사람은 도살정으로 끌려가는 무고한 양들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인혁당원으로 지목된 8명을 고문했고, 그들이 북한에서 온 첩자임을 자백하도록 강요했다. 그런 뒤 8명 모두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뜻밖의 계기로, 오글과 아내 도로시는 여덟 사람의 비극과 연루되었다. 위의 사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행동 계획을 결정했다. 구속된 기독교인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매주 서울 기독교 회관에서 모여서 목요기도회를 개최했다. 기도회에서 하나님께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해주도록, 그리고 그들을 감옥에서 석방시켜주도록 간청했다. 1974년 10월 8일 목요일, 그는 묵상을 하고 기도를 인도하는 차례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 구속자들뿐만 아니라, 유죄판결을 받은 비기독교인 여덟 명에 대해서 말하고 이렇게 기도했다.
“예수님은 종종 우리들의 형제자매들 중 가장 보잘 것 없고 약한 자를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혹독한 형을 받은 여덟 사람이 있습니다.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우리들 중 가장 가난한 자로서 예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생명과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사형을 받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곧 그는 심문을 받게 되었고, 심문을 받으면서도 그의 가치관을 결코 잊지 않았다. “나는 한국과 한국의 전통을 가장 존경하지만, 기독교목사로서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의 가치관을 잊지 않고, 예수님을 본 받아 긍휼의 삶을 실천한 오글은 결국, 1974년 12월 14일 마침내 한국에서 추방당했다. 정부는 미국으로 가는 편도 항공권의 비용을 지불했다.

5. 한국에서의 추방: “한국에 대한 오글의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길 & 그 결과”
경찰이 오글을 집에서 끌어내 김포공항으로 싣고 갈 지프로 데려가고 있을 때, 누군가 손을 뻗어 그의 손에 작은 금반지를 쥐어 주었다. 그것을 그의 약지에 끼었을 때, 오글의 눈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리고 한 젊은 여승무원이 그 앞에 식판을 놓고는 무릎에 엽서 한 장을 떨어뜨리고는 아무 말 없이 서둘러 갔다. 그 엽서의 내용은 이렇다.
“오늘 목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저는 한 젊은이입니다. 저희 대부분은 목사님께서 저희 나라의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일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마음도 목사님과 함께 울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상황이 변할 것이며 머지않아 목사님께서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한국으로 초청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발 건강하십시오.”
마침내 2022년, 한국의 대통령 직속 기간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부의 완벽한 조작극이었음을 선언했다. 2005년 12월에 국가정보원의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는, 인혁당 사람들이 자백하도록 고문을 받았으며 “그들이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이라는 혐의는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과 국방부가 다른 활동가들을 위협하려는 목적에서 공동으로 조작한 데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하면서 조작극임을 확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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