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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32번/Hartness E. Marion(미상, NP)
 작성자 : 백운진  2020-06-23 17:00:05   조회: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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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사항]

1. 이름 : Hartness Marion E. (하마련)
2. 출신 및 소속 : 미국, 북장로교
3. 한국선교기간 : 1915.08.24. ~ 1955.12.31.
4. 연표
1915.08.24. 내한
1918. 북장로회 선교사로 정식 인정
→ 서울 연지동 거주, 서울 및 경기지역 복음전도, 평양 및 서울 외국인학교 교사로 자원봉사
→ 앤더슨을 도와 서울 피어선기념고등학교 성경학원 교사, 선교사 연합어학원 교사로 활동
1940. 일제에 의해 강제 귀환
1947. 재내한
1949. 피어선기념고등학교 성경학원 재건에 헌신하여 다시 열게 함.
→ 킨슬러, 언더우드와 함께 연합어학원 재건하고 교사로 활약, 외국인 학교 교사로도 재직
1950. 6‧25 전란 중 일본 토쿄에 설치된 연합어학원 원장으로 재직
1953.05. 피어선성서학원을 재건하고 원장으로 재직
1955. 은퇴 후 귀국

5. 논저 : [논문] Ka Ri Bong, A Modern Miracle, The Presbyterian, 1925.7; Destroying Idols at Ka Ri Bong, Missionary, Review, 1927.1


[선교사 소개]

1. 하마련, 그녀는 누구인가?

Harness Marion E. 선교사는 한국에서 “하마련” 혹은 “하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아마도 현재 남아있는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하마련’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던 것 같다. 하마련 선교사의 출생 연도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녀는 미국에서 생활했으며, 미북장로회(NP) 소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1915년 8월 24일에 한국에 들어왔으며, 1955년까지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렇게 1918년에는 미북장로회 선교사로 정식 임명을 받았고, 서울 연지동에 거주하여 서울 및 경기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또한 평양 및 서울에 있는 외국인 학교에서 교사로 자원봉사를 했으며, 일제 말기에는 한국에서 금주 금연 등 절제운동을 주도한 미북장로회 앤더슨(W. Anderson) 선교사를 도와 서울 피어선기념고등성경학원 교사와 선교사 연합어학원 교사로 활동한 바 있다.
그러던 중 1940년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 귀환되었지만, 한국 선교에 대한 사명을 잊지 못한 하마련은 1947년에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후 1949년에 피어선기념고등성경학원의 재건을 위해 헌신했고, 학원은 결국 다시 열게 되었다. 그렇게 킨슬러, 언더우드와 함께 연합어학원도 재건하는데 헌신했고, 교사로 활약하였다. 이어서 외국인학교 교사로도 재직하며 자원봉사를 하였다.
1950년 6‧25 전란 중에는 일본 도쿄에 설치된 연합어학원 원장으로 재직했으며, 1953년 5월에는 전쟁으로 인해 중단된 피어선성서학원을 다시 재건하여 원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렇게 원장으로 학원을 운영하다가 1955년에 은퇴 후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녀는 선교 사역을 감당하면서 두 개의 논문을 썼다. 1925년 7월에는 “Ka Ri Bong, A Mordern Miracle”을, 1927년 1월에는 “Destroying Idols at Ka Ri Bong”을 기록하였다. 이 두 논문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하마련과 가리봉이 적지 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가리봉에서의 섬김

1925년 을축년, 서울에 기록에 남을 만한 홍수가 있었다. 7월 4일부터 네 차례에 걸친 비가 748.9㎜를 기록하였다. 용산의 철도 관사가 1층까지 침수되고, 영등포와 청량리도 철도 운행이 중단될 정도였다. 가리봉동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안양천이 범람했던 것이다. 을축년 이전에는 이렇다 할 둑이나 제방 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평소에도 농사가 풍년일 수도 혹은 흉년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가리봉동의 사람들은 하늘의 뜻이려니 하고 그대로 견디며 살았다. 그렇게 하천이 가끔 범람해도 가리봉동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다. 물이 넘쳐 흉작이 들면 보리나 산나물, 물고기 같은 것을 잡아 끼니를 때웠다. 그래도 배를 곯고 살던 동네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을축년 홍수는 만만치 않았다. 서울을 초토화시킨 홍수였다. 가리봉동의 논도 못쓰게 되었다. 당시에 그렇게 망가진 논을 복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가에서 어느 정도의 지원해주길 기다리기엔 모두 굶어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당시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기독교가 안양천에 둑을 쌓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때 하마련 선교사가 가리봉동에 들어왔다. 그 계기는 을축년 홍수 때문이고, 수해 복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가리봉교회”가 설립되었다. 하마련 선교사는 같이 일하던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지원을 받아 당시 제일 싼 곡식인 좁쌀을 들고 가리봉동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가리봉동에서 안양천에 둑을 쌓는 수해 복구는 물론이고 주민들의 식량까지 교회에서 제공하였다. 다만, ‘교회에 나오는 사람에 한해’라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나 농촌 마을에 둑이 생기고 식량까지 제공해 주니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다. 당장 먹고살기 급한데 종교가 어느 것이든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렇게 대홍수로 인한 피해는 가리봉교회를 통해 극복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하마련 선교사는 좁쌀을 나누어 주어 복음을 전하면서 이 민족의 슬픔과 아픔을 달래준 여선교사였다.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줄 뿐만 아니라, 복음과 말씀을 심어주어 교회를 실현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열매라 할 수 있다. 현재 가리봉교회는 1925년부터 15개의 교회를 개척했고, 매월 미자립 교회와 선교기관을 50여 곳 돕고 있다. 그리고 지정학적인 특징을 살려서 구로공단에 200여개의 지회를 건설하는 등 공단복음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하마련 선교사가 심은 복음과 말씀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역사는 하마련 선교사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보는 역사를 뚫고 작은 섬김으로 교회를 세운 선교사들의 열매를 지금 이 땅 가운데 보여주고 계신다.

3. 피어선성서학원에서의 초빙

하마련 선교사가 피어선성서학원에서 초빙 받았을 당시, 성경학원은 1936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여학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933년 조직된 연구위원회에서 검토하여 이사회에 제안한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성경학원 안에 ‘여자부’(女子部)를 설치하자는 안을 이사회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지금까지 성경학원은 남학생만 받아들였다. 교수진도 남자들로만 구성되었다. 그런데 1930년대 들어서 재정과 학생 부족으로 학교가 위기를 맞게 되자 이를 타개하는 방법으로 여학생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피어선성서학원은 여자부를 담당할 교수로 미국 북장로회 소속 여선교사 하트니스(Marion Hartness, 하마련)를 초빙하여 여자부 부장으로서 여학생 모집과 교육에 관한 모든 과정을 맡겼다. 1915년에 내한해서 1918년부터 서울선교부에 속하여 서울과 경기도 지역 여성선교사역을 지도해 왔던 하트니스는 평양에 있는 여자고등성경학원보다 평이한 수준으로 여성 전도자와 지도자를 양성할 목적에서 학제와 교과목을 정하였다.
여자부는 기대했던 것 이상의 효과를 얻었다. 그동안 남성들에 비해 성경과 신학 공부의 기회를 쉽게 얻지 못했던 교회여성들이 피어선성경학원 여자부에 대거 지원하여 학교는 성황을 이루었고 수업 결과도 좋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하트니스 부장은 1936년 가을학기부터 여자부 안에 4개 과정을 설치하여 보다 많은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즉 1) 매년 2학기로 운영하는 성경학원 외에 2) 1주간 과정으로 “여교역자와 교회 직분을 가진 분, 성경학원 졸업자”에게 성경(골로새서, 시편)과 신자생활 과목을 집중 강의하는 ‘여교역자사범공부’, 3)1개월 과정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여자 청년들에게 성경과 산술, 한문, 주일학교교수법, 음악 등을 가르치는 ‘청년성경학원’, 4) 교역자와 성경학원 출신을 위한 3주 과정의 ‘특별과’ 등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이처럼 1930년대 학생 감소와 재정 축소로 위기를 맞았던 피어선성경학원은 여자부를 신설함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학교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게 되었다.

4. 귀국 이후 – 은퇴

역사는 많은 언급이 없지만, 우리는 하마련 선교사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한국 교회를 위해 일했는지 알 수 있다. 하마련 선교사는 1955년에 피어선성서학원 원장에서 은퇴하여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미국으로 귀국한 하마련 선교사는 그동안의 업적을 인정받았다. 퇴직 이사회는 1955년 11월 21-22일에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였다.
퇴직 이사회는 하트니스 선교사가 미북장로회 선교사로 인정받은 1918년 곧 38세를 기준으로, 1955년 12월 31일 곧 65세 및 9개월에 연금 규정을 적용하여 한국 선교사 Hartness Marion Easter의 은퇴를 기록하였다. 연금공단에서 준비한 연금은 588.81달러였고, 지금의 한화로 약 71만 8천원 가까이 된다. 또한 사회적 보장 연금도 주어지는데 그 값은 942달러였다. 지금의 한화로는 약 114만 8천원 가까이 된다. 이렇게 총 1530.81달러의 연금이 책정되었다. 이 수치는 이사회 규정에 따라 보장된 금액을 초과하기 때문에 추가로 주어지는 연금은 없었다. 어쨌든 하마련 선교사가 미국에서도 이정도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사회는 미스 하트니스(Miss Hartness)의 봉사를 인정하여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수여하기로 하였다. 바로 “CITATION OF MARION EASTER HARTNESS”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 장로교 외국인 선교위원회는 1918년부터 1955년까지 한국에서의 업적과 봉사를 인정하여 Miss. Marion Easter Hartness에게 이 인용문을 수여합니다.  하트니스 씨는 복음주의 선교사이며 서울의 피어선기념성경연구소의 교사이자 교장으로 섬겼습니다. 이때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의 공산주의 침공 이후 건물 및 국가 기독교 사역자들의 재활이 매우 중요했던 시기였습니다.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지도력은 기독교 사역자들을 훈련시키는 주요 원천이 되어, 이 연구소를 다시 설립하였습니다.   이사회는 한국교회 사업에 대한 이 독특한 개인적 기여에 있어서 하트니스 씨와 협력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 후, 이사회는 한국 선교집행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하마련 선교사는 1956년 3월까지 현장에서 거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렇게 이사회는 하마련 선교사에게 퇴직 날인 1955년 12월 31일부터 1956년 3월 학기가 끝날 때까지 현장에 있을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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