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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7 / Fisher, James Earnest(1886-1989, MS, 1919-1935)
 작성자 : 강호경(3-2)  2020-07-01 00:12:25   조회: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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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내한 선교사 조사
[Fisher, James Earnest]

Ⅰ. 기본사항
이름: Fisher, James Earnest(피셔/皮時阿/미국/MS)
생몰연도: 1886.5(미국 테네시주 파이크빌) ~ 1989.10.18.
출생지: 미국 테네시주 팍스빌리에서 출생
학력: 컬럼비아대학 졸업, 철학박사 학위 취득
가족: Bessie Hardie. (부인, 1890~1974)

1890년 서울에서 R. A. Hardie의 셋째 딸로 출생. 본명은 Annie Elizabeth.
1905년 Millersburg Female College 입학, 이때 J. E. Fisher를 처음 만남
1911년 Millersburg Female College 졸업
New York Theological Seminary 성경 세미나 과정을 1년간 다님
1912년 The Scarritt Bilbe and Training School 수료
1913년 1913년 그의 자매 Eva와 함께 한국 선교사로 내한
1915-1916년 여름휴가 때 일본을 방문하여 J. E. Fisher를 만남
1918년 J. E. Fisher와 결혼(11월 9일)
1919년 Fisher의 해군 복무로 인해 귀국하여 뉴욕에 거주함.
1919년 10월 Fisher와 함께 한국 선교사로 내한
1935년 J. E. Fisher와 이혼
1974년 Eaton Rapids부근에 있는 요양원에서 73세의 나이로 별세

경력

1911년 에모리와 헨리 대학교(Emory and Henry College) 졸업
필리핀 공립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1915년 일본에서 4년간 영문학 교수로 재직
1916년 뉴욕에 있는 성경 세미나 과정을 1년간 다님
1917년 대학원 공부를 위해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
1918년 베시 하디(Bessie Hardie)와 결혼석사과정 중 미국 해군에 입대해 군복무도 함
1919년 6월 심리학 전공, 영문학 부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마침
1919.10 남감리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
연희전문학교 심리학과 영어 교수로 취임
제23대 문과 과장 및 도서관장 역임
1925년 미국으로 복귀,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박사과정 입학
1927년 “Democracy and Mission Education in Korea”로 박사학위 취득
조선으로 돌아와 연희전문의 교육학 교수로 재직
민주주의 교육이론 국내에 소개, 한국의 현대교육 발전에 공헌
남감리회 조선연회, 기독교조선감리회 중부연회 협동회원.
석교교회에 소속되어 목회를 지원. 전도 집회를 엶.
영어강습소 차려 교육을 통한 선교사업
1934년 귀국, 정부에서 국가청소년행정가로 근무
1935년 B Hardie와 이혼
1944년 워싱턴 D.C. 전략실에서 극동아시아 전문가로 근무
1945년 재차 내한하여 3년간 미군정의 정치교육 담당자로 근무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정치자문위원회의 회원으로 참여
1948년 대한민국 독립 정부를 세우는 국회의원 선거에 공식 참관자로 활동
1950년 한국전쟁 동안 도쿄에 있는 유엔 참모 미국 담당으로 심리전 부서에 관여
1953년 한국전쟁 종료 후 일본 아오야마 대학, 다이쇼 대학 교수로 재직
1956년 은퇴 후 버지니아 주 브리스톨에 정착
은퇴 후에도 한국과 일본 등을 여러 번 방문함
1989년 103세의 나이로 별세

논저

[저서] Democaracy and Mission Education in Korea, New York, 1928.
[논문] 경로의 미덕, 신학세계 19.2(1934.3);
근본적 종교, 신학세계 16.6(1931.12);
살인과 자살문제, 신학세계 17.3(1932.5);
종교교육의 근본목적, 신학세계16.5(1931.10).

Ⅱ. 선교사 소개


제임스 피셔(James Earnest Fisher, 1886~1989)는 1920년대에서 30년대 초반까지 연희전문의 교수로 봉직하면서 한국의 교육근대화와 선교교육의 새로운 길을 열어 가는데 이론적인 면에서나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선교사이자 교육철학자로서 한국의 근대사에 의미심장한 족적을 남겼지만, 신학계에서는 그의 자유주의적 성격을 띤 선교관으로 인해 크게 주목을 받지 못 했다.

1.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

피셔는 1886년 미국 테네시스 파이크빌에서 태어나 버지니아 서남부와 켄터키 중부에서 자랐다. 그는 1911년 에모리와 헨리 대학교(Emory and Henry College)를 졸업한 후 1911년 필리핀 공립학교에서 4년간, 1915년 일본에서 4년간 영문학 교수로 재직했다. 1916년에는 뉴욕에 있는 성경 세미나 과정을 1년간 다녔고, 이후 1917년 대학원 공부를 위해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19년 6월에 심리학 전공, 영문학 부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또한 그는 대학원 석사과정 중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해 미 해군에 입대해 잠시 군 복무도 했다.

2. R. A. Hardie의 가족, 그리고 그의 딸 Bessie Hardie를 만나 조선을 품게 되다.

Fisher는 1905년 켄터키 주의 밀러스버그에서 처음으로 R. A. Hardie 가족을 만났다. 당시 조선의 선교사였던 하디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잠시 미국으로 귀국해 있던 상태였다. 하디는 자신의 둘째 딸 Eva와 셋째 딸 Bessie(본명은 Annie Elizabeth지만 Bessie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를 Devenport College의 부속 고등학교로 입학시켰는데, 그녀들은 2년 뒤 Millersburg Female College로 진학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Millersburg Female College의 총장이 바로 피셔의 아버지 Rev. Charles Crockett Fisher였다. 그래서 피셔는 그때 처음으로 딸들과 함께 학교를 찾아온 하디와 그녀의 두 딸들을 만나게 된다. 하디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두 딸인 에바와 베시는 학업을 위해 밀러스버그에 남았다. 그녀들은 1911년에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로 인해 피셔와 하디 가족의 관계는 깊어지게 되었다.
에바와 베시는 매우 신실한 청년들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밀러스버그에 있는 동안 다양한 기독교 활동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들은 1911년 Millersburg Female College를 졸업한 후에 New York Theological Seminary(당시 이름은 Dr. White’s Bible Teacher’s Training School)에서 1년간 성경 교사로서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또 1912년에는 the Scarritt Bible and Training School에 들어가 또 한 번 여성 선교사로서의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들은 아버지처럼 한국에 대한 비전을 갖고 1913년 조선의 선교사로 내한하게 된다.
이후 하디 가족은 1915년과 1916년 두 차례에 걸쳐 여름휴가를 목적으로 일본의 가루이자와(karuizawa)를 방문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선교사들에게 인기 있는 휴양 리조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피셔는 그곳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때 일본을 방문한 하디 가족과 재회하게 된다. 피셔는 한국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에바와 베시에게 깊이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그의 자서전격 저서인 “Pioneers of Modern Korea”에서 “에바와 베시, 그녀들은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에 푹 빠져 있었다”고 회고한다. 피셔는 두 자매 중 베시에게 좀 더 끌렸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1918년 11월 9일에 결혼하게 된다.
이후 피셔와 베시는 학업과 해군 복무로 인해 미국으로 귀국하여 뉴욕에 거주하게 된다. 그리고 석사과정을 마친 직후인 1919년 10월에 베시와 함께 조선의 선교사로 한국에 오게 된다. 이처럼 한국에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던 피셔가 조선의 선교사로 오기를 결단한 것은 아내인 베시의 영향이 매우 컸다.

3. Fisher의 내한 후 선교 사역

피셔는 1919년 10월 베시와 함께 남감리교 선교회 선교사로서 조선에 내한하였다. 그리고 조선 기독교 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 조선어로는 ‘연희전문학교’로 표기됨)에서 심리학과 영어 교수로 있으면서, 연희전문학교 제23대 문과과장 및 도서관장을 역임하고 동 대학 교수단의 남감리회 대표를 맡기도 하였다. 1925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의 교육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2년 후인 1927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의 제목은 “Democracy and Mission Education in Korea(한국의 선교교육과 민주주의)”이었고 이 논문은 이듬해에 저서로 출간, 피셔의 대표적 저작이 된다. 또 그는 남감리교회 조선연회 및 조선감리교회 중부연회 협동회원으로 석교교회에 소속되어 전도집회, 영어강습 등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4. 귀국 이후 Fisher의 삶.

1934년에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정부에 몸담고서 국가청소년행정가로서 일을 했다. 그러나 1935년에 그는 자신의 아내였던 하디와 이혼을 하는 슬픔을 겪게 된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에는 워싱턴(Washington D.C.)으로 부름을 받아 전략실에서 정치교육 담당자로 일했고 후에 공공여런 부서 책임도 맡았다. 1947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정치자문위원회의 멤버로 참여했고, 1948년에는 대한민국 독립 정부를 세우는 국회의원 선거의 공식 참관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 한국전쟁기간 동안에는 도쿄에 있던 유엔 참모 미국 담당으로 심리전 부서에 관여했다. 1953년 한국전쟁 종료 후에는 일본에 남아서 아오야마 대학이나 다이쇼 대학에서 미국사와 교육의 원리와 방법을 가르쳤다.
이렇게 피셔는 14년의 조선 선교사 생활과 25년의 미국 정부 공직을 거친 후에 1956년 은퇴를 했는데, 은퇴 후에는 버지니아주 브리스톨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은퇴 후에도 한국과 일본 등을 여러 번 방문하며 많은 애착을 보였다. 또 글쓰기, 종교, 교육, 공공 조직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리고 1977년 그는 그의 마지막 저서인 “Pioneer of Modern Korea(근대 한국의 개척자들)”도 저술하였다. 그리고 1989년 그는 10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5. Fisher의 저술 활동

피셔의 생애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삶은 한국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선교사 이자 교수로서는 물론이고 미국 정부의 공직을 맡고서도 늘 한국 관련 일을 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그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특별했고 선교교육과 교육학 일반을 둘러싼 그의 학문적 성취도 대부분 한국적 상황을 소재로 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한국 사회와 교육의 근대적 발전에 대한 피셔의 열망은 그가 남긴 네 종의 책에 드러나 있다. 피셔의 대표저작인 Democracy and Mission Education in Korea는 1928년에 콜럼비아 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되었는데, 1970년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재간되었다. 또한 피셔는 1946년에 미군정정치교육위원회 책임자로 있을 때 Democracy As a Way of Living을 출간했다. 이 책은 한국어로 출간되어 공공 정보국에 의해 남한 전체에 걸쳐 보급되었다. 또한 그는 Landmarks of Democracy라는 작은 책을 썼는데 이 책은 서울에 있는 잡지출간회사에서 한국어와 영어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1977년에 한국 기독교문학회에서 출간된 Pioneer of Modern Korea가 있는데, 이 책은 피셔가 한국 생활을 하면서 직접 접촉했던 인물들 중 한 국 사회에 근대적 가치를 뿌리 내리는데 개척자적 역할을 한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6. “Democracy and Mission Education in Korea”와 선교교육

피셔의 사상은 무엇보다 1928년에 발행된 그의 대표 저작인 Democracy and Mission Education in Korea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은 개화기에서 일제시기를 거친 한국 교육 근대화의 전개 과정에서 출현한 교육철학적 사유의 백미를 보여주는 동시에, 한국 교육 근대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녀 온 선교교육의 진정한 의의와 방법에 대한 합리적 사유의 모범을 보여준다. 이 저작은 일제시기 선교사들의 교육적 역할이나 선교교육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자료일 뿐 아니라, 민주와 자유와 과학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세계문명사의 전환기에서의 조선 교육의 실상과 과제를 깊이 통찰하고 전망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를 지닌 이 저작에 대해 한국 근대교육 사상사의 한 자리를 내어 주어도 좋을 만 하다.
Democracy and Mission Education in Korea은 전체 여덟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I장부터 III장에서는 연구문제의 전체 윤곽을 밝힌 후, 조선 선교교육을 분석하는 준거로서 민주주의 교육 원리를 설명하고 이에 근거하여 선교교육의 목적을 검토했다. 나머지 IV장에서 VIII장까지는 민주주의라는 원리에 입각해 재구성된 선교교육의 목적관에 비추어 당시 선교교육이 당면한 문제와 과제를 보다 미시적 차원에서 점검한다. 즉 IV장에서는 선교교육과 총독부의 관계, 교육에 대한 총독부 통제를 둘러싼 문제를 다루고, V장에서는 선교교육과 조선인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의 관계를 검토했다. VI장에서는 선교교육과 조선 전통의 문화의 관계를 다루며, VII장에서는 선교사와 전통적 교육자들 사이의 개인적, 사회적 적응의 문제를, VIII장에서는 지적 자유주의와 종교적 권위주의 사이의 갈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Fisher가 한국 교육을 분석하는 방식은 선행 연구인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의 Modern Education in Korea(1926)와 비교할 때도 독특성을 드러낸다. 언더우드가 현황 기술을 중심으로 소개와 개관을 한 데 비해 피셔는 민주적 교육원리라는 관점에서 당시 현안들을 논의하는 형식으로 전개한다. 피셔는 제2장에서 민주주의 혹은 민주적 교육의 이상을 집중적으로 다루는데, 존 듀이(John Dewey)의 『민주주의와 교육(Democracy and Education)』로부터 직접 인용한 기본적 원리들을 정리하고 있다. 피셔에 의하면 교육은 삶(life, 혹은 생활)을 만족스럽게 하는 것과 관련도니다. 그에 의하면 교육은 넓은 의미에서 삶 혹은 생활을 만족스럽게 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에 의하면 교육은 넓은 의미에서 삶 혹은 생활 그 자체와 관련되며 삶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에도 종속되지 않는다고 본다. 즉 교육의 목적은 삶을 풍부하게 하고 더욱 만족스럽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p.17). 교육은 모든 개인에게 고유한 과정이기 때문에 개인이 처한 교육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야 한다고 본다. 교육의 목적은 추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개인이 처한 경험과 상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선교사교육은 학습자인 한국인들의 문화, 생활상의 필요, 가치 등에 기반하고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p.20). 또한 피셔는 현세는 가치가 없기 때문에 내세를 준비해야 한다는 관점은 사회적 정의(justice)를 헤쳐왔다고 보면서 한국에서의 선교교육도 현세 생활을 있는 그대로 가치롭게 여기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p.32). 또한 미국에서 1910-20년대에 행해진 실험적 교육의 성과들을 인용하면서 교육과 생활이 연결된 민주적 교육이 선교교육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저자는 한국인들이 처한 현실과 요구들, 그리고 선교사들의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저자는 당시 1920년대말 한국인들이 학력을 통한 사회이동과 일반교육(종교교육 자체보다)에 대한 요구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한국인들은 제국대학(Imperial University)에 가서 명예롭고 보상도 좋은 좋은 직종을 얻을 수 있는데 도움이 되는 학교를 가고자 한다고 본다. 이러한 필요가 선교계 학교들이 학력인정을 받도록 요청했다는 것이다. 특히 청원서명이나 파업농성 등의 요구 형식들로 인해 선교계 학교는 총독부기준에 맞추지 않으면 학교를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는 수준의 압력을 받게 되었고, 많은 학교들이 종교교육을 전적으로 희생하지 않는 선에서 총독부 인가학교나 지정학교로 되었다고 설명한다(pp.6-7). 피셔는 한국인들의 일반교육에 대한 욕구는 매우 타당한 것이라고 본다.
2020-07-01 00: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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