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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54/ Torrey Reuben Archer III
 작성자 : 오준석  2020-07-04 20:09:07   조회: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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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ben Archer Torrey Ⅲ / 대천덕 선교사(1918-2002)


Ⅰ. 기본사항

1. 이름: Reuben Archer Torrey Ⅲ / 한국명: 대천덕
2. 생몰연도: 1918. 1. 19 – 2002. 8. 6
3. 출신 및 소속: 미국, 성공회
4. 한국선교기간: 1957-2002

5. 연표

1918. 1. 19 중국 산동성 제남 출생
1933-34 평양 외국인 대학교 졸업
1934 북경의 연경대학교 입학, 1년간 심리학 공부
1935-39 미국 데이비슨 대학에서 교육학 전공
1936 무디성서학원에서 성서 공부
1939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
1940 프린스턴 대학에서 터키어
1940-1941 유에스 엔지니어(U. S. Engineers)에서 시간기록원으로 근무
1941-1942 철강 회사(Structural Iron Work)에서 철공으로 근무
1942-1947 단속적으로 선원 생활
1943-1945 남부 대학(University of the south, 성공회 신학교)에서 석사
1946 2월 2일, 미국 성공회에서 사제 서품(조지아 교구)
1946-1948 조지아 주에서 목회
1948 결혼
1950-51 하버드 대학에서 아람어, 신학 공부
1957-64 성공회 선교사로 내한, 연세대에서 한국어 공부
성 미가엘 신학원 재건 후 교수로 취임
1960 영국의 성 어거스틴 신학원에서 1년간 신학 공부
1965 강원도 삼척에 신앙수도원인 예수원 설립, 원장으로 취임
1974 강원 교무구 총사제로 임명
1990 미국 남부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
2002 8월 6일, 84세로 영면

6. 가족사항
부모: Torrey, Reuben Archer Jr.(부), Torrey, Janet M.(모)
부인: Jane Grey Torrey(1921. 2. 4-2012. 4. 6 /한국명: 현재인)
자녀: 1남(벤 토레이) 2녀(옌시 클레어, 버니)

7. Jane Grey Torrey (한국명: 현재인) 연표

1921년 2월4일, 미국 노스케롤라이나 주 데이빗슨 시 출생
1939 센트럴 고등학교 (Charlotte, North Carolina) 졸업
1943 퀸즈 대학교 (Charlotte, North Carolina) 졸업 B.S. in Art
1943 항공 공학 트레이닝 (3개월) - Pratt & Whitney Aircraft Company, Connecticut
1943-1945 Engineering Aid 로 일함
1945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미술 연구 (6개월)
Art Students' League, New York City 수학
1948 1Reuben Archer Torrey 3세와 결혼 (8월 28 일)
1948-1957 St. John's Episcopal Church (Athol, Massachusetts 주)에서 사제인 남편의
사모로서 활동함
1957 성미가엘 신학원(현, 성공회 대학교)에 학장으로 취임한 남편과 함께 내한
1957-1964 성미가엘 신학원에서 학장인 남편과 함께 선교 사로서 활동
1960-1961 영국 켄터베리 소재 성어거스틴 대학에서 수학
1965 월드선교회 (World Outreach International) 소속 선교사로서 활동 시작
1965-2012 강원도 태백시에서 남편과 함께 기독교공동체인 예수원 설립, 사역
2002-2012 예수원 대표이사
2012 4월 5일, 91세로 영면(永眠)

현 사모는 결혼 전 미국 전역 40여개 주에서 60여회의 전시회를 할 정도의 역량 있는 화가였다. 샬럿시 퀸즈대를 다닐 때 메이퀸으로 뽑힐 정도로 미모가 있었다. 대 신부는 처음 만난 그녀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와 같이 아름다웠으며 정결한 영혼의 소유자였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가 대 신부와의 결혼을 통해 또 하나의 선교사로 미지의 땅 한국으로 건너오는 모험을 기쁘게 감행한 것이다. 우리로선 축복이었지만 그녀로선 ‘거룩한 희생’이었다.

8. 대천덕 논저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1-5권
산골짜기에서 외치는 소리: 성령론
토지와 자유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
신학과 사회
신학과 사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나와 하나님
우리와 하나님
대천덕 절기 설교
토지와 경제정의
하나님의 배를 젓는 사람들 1, 2

Ⅱ. 선교사 소개: 대천덕(Reuben Archer Torrey Ⅲ, 1918-2002)

대천덕 신부는 1918년 1월 19일, 중국 산동성 제남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신학자, 전도자, 설교가로 잘 알려진 R. A. Torrey는 무디성서학원의 초대 원장을 지내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Torrey, Reuben Archer, Jr.)는 북장로회 선교사로 중국에서 사역하였다.

대천덕 신부는 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교 1년을 마쳤고 다양한 현장 체험을 쌓기 위해서 학교를 쉬었다. 그때 그는 건설공사장에서 일하면서 설계도면을 읽는 법을 배우고 철강빔을 조립하는 일을 맡아 하기도 했으며 상선의 선원이 되어 전 세계를 항해했다. 그는 이때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신학적 자세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일과 기도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이 곧 육체를 통한 기도임을 그 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이 밑바닥 생활 체험을 통해 흑인과 노동자들의 억눌림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젊을 때의 이러한 경험은 대천덕이 평생동안 ‘일과 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는 예수원 사역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천덕의 할아버지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R. A. Torrey였다. 그는 장로교 소속으로 그의 아들까지 장로교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대천덕 신부는 어떻게 성공회의 신부가 되었을까? 이는 그가 프린스턴 신학교의 재학 중이던 때의 경험으로 말미암았다.
1939년 가을,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에 등록했다. 이 신학교는 프린스턴 대학 소속은 아니었지만, 프린스턴 대학과 상호 학점 인정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캠퍼스 건너편에는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의 이름이 ‘성삼위 성공회 교회’였다. 그는 학교에서 맞이한 첫째 주일에 그 교회를 방문했고,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얼마 후 교구 목사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대천덕은 그 교회로부터 주일 학교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이에 성공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성공회에서 공부하면서 그가 이전에 소속되어있었던 장로교와 그 신학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 그는 해외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의 선교 방법은 당시의 장로교회에서 받아 드려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에 그는 비록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장로교 출신의 사역자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회 소속으로 전향하게 된다. 그는 테네시주에 있는 남부 대학(성공회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대천덕 신부는 학창 시절인 1933년, 일제하의 한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그때 대천덕 신부한테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 저물어가는 저녁의 나라’로 비쳐졌다. 그에 눈에는 강제로 한국 땅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도 나쁘게 보였지만,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않고 있는 조선인의 모습도 답답하게 보였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사역하게 될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티베트나 중국 산강성에 나가서 선교를 하려던 대천덕 신부는, 1957년, 한국에서 일하고 있던 데일리 신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한국의 성 미가엘 신학원(현 성공회 신학 대학교)의 재건을 위해 일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대천적 신부는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맡기고 6. 25 동란 후 폐허가 된 한국 땅에 다시 발을 딛게 되었다.
대천덕 신부는 7년 후에 성 미가엘신학원 원장직을 사임했다. 그동안 학교의 기틀이 어느 정도 마련되기도 하였고 그의 신학적 방향성과 학생들 사이의 마찰도 있었다. 게다가 그는 목회자보다는 평신도를 상대로 그의 신학적 체험을 전하고 싶은 일념이 더 강하였기 때문에 원장직을 사임하고 그가 계획한 일을 실천에 옮겼다. 대천덕 신부는 휴전선에서 제주도까지 무려 32군데를 돌아다니면서 공동체를 일굴 땅을 찾다가 그 당시 가장 오지로 소문났던 하사미리 산골을 발견하였다.

대천덕 신부가 그 곳에 지은 공동체의 이름이 ‘예수원(Jesus Abbey)’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능력을 확인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수도원 같은 규칙 생활속에 이루어지는 중보기도의 삶,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안에서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배우는 사랑의 공동체, 풍요로운 대자연 속에서 조용히 가질 수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 받기보다는 주기를 배우는 예수원 공동체는 1965년 봄, 이렇게 문을 열었다.

하나님께서는 대천덕 신부를 통하여 한국의 여러 사역들이 일어나는 것을 돕게 하셨다. 대천덕 신부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들 중에는 예수전도단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데이비드 로스 데이비드 E. 로스 목사는 ‘한국 예수전도단’의 설립자로서 한국 이름은 ‘오대원’이다.
가 한국에 왔을 때부터 그와 알고 지냈고, 예수전도단의 성장을 계속 지켜보면서 지원했다. 대천덕은 한국어가 우랄-알타이어 계에 속하기 때문에 한국인이 몽고인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을 복음화해야 한다고 항상 말해왔다. 그리고 그는 한국 국경 바로 건너편 러시아 땅에 살던 많은 한국인들이 스탈린 정권 때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흩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지어에 능통한 그 곳의 그리스도인들은 핵심 그룹을 구성하여, 중앙아시아의 각 나라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 자신들을 사용해 주시길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원은 이러한 선교를 격려하는 일에 작은 역할을 해왔다.

그가 행한 여러 일 중에 ‘기독교 대학 설립 동역회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는 처음 한국에 와서 전국 기독인 대학 교수들의 모임에 초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그들에게 교육과 성경을 어떻게 연관시키고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이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대천덕은 미국의 창조과학회와 그 밖에 내가 잘 알고 있는 기독교 학문 기관들처럼, 모든 과목을 성경의 관점에서 가르치는 기독교 대학의 설립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부터 기독교 대학 설립 동호회가 시작되었다. 이 동역회는 많은 책을 출판했으며 정기 간행물을 계속 발행하고 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몇몇 부유한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을 움직여 포항에 새로운 대학을 설립하게 하셨다. 이 대학이 ‘한동대학교‘이다.

(그의 막내 딸 버니는 한동대학교에서 2년간 영어와 중국어를 가르쳤다.) 대학을 설립한 사람들은 한국 과학 기술 연구원장 김영길씨를 총장으로 추대했다. 김 박사는 미국에서 막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과학자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조병호 목사가 어느 그믐날 그 과학자들을 데리고 신년기도를 하기 위해 예수원에 같이 온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이들을 통해 한국에도 창조과학회가 세워졌고, 한국의 지성계와 종교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대천덕은 토지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는 북한의 기아 상태와 남한의 실업 문제를 보며 계속해서 성경적 경제학을 강조했다. 그는 100년 전에 헨리 조지가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확산시킨 단일세가 해결책이라는 주장을 신문과 잡지를 통해 이야기 했다. 이 제도는 땅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빈민가를 없애며 취업률을 증가시키고 정부가 필요로 하는 모든 세입을 충당해 주기 때문에 다른 세금은 전부 폐지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준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가 본 문제는 토지가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투기꾼들 때문에 전혀 사용되지 않는 토지가 있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적절한 토지세 제도로 해결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대천덕 신부는 믿음의 경제 원칙을 추구하였다. 경제적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께만 모든 것을 청하고 공급받는 믿음의 원칙을 따라 살았다. 그의 삶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로 요약된다. 재정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신뢰했을 뿐 아니라 청지기 의식 또한 강했다.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것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철칙이었다. 대 신부는 이같은 삶을 예수원 공동체의 경제 원칙으로 삼아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예수원 역시 아무 예산 없이 믿음으로 시작했다. 그의 부인인 현재인 사모는 “예수원의 재정원칙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만큼 일하는 것이었다”며 “결과는 놀라웠다”고 고백했다. 믿음에 입각한 삶, 전적인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맡기는 삶은 IMF 외환위기 때도 영향을 받지 않았고 요즘 같은 불황에도 어려움이 없다.


대천덕 신부가 생전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주제 중 하나는 성령론이다. 대천덕 신부는 기독교 정통 교리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성령을 삼위의 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전제하여 말한다. 성령론에 관해서 대천덕의 가장 큰 공헌은 성령 사역을 신자와 관계하여 내적 사역과 외적 사역으로 나눈 것과 성령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을 ’코이노니아‘로 본 것이다. 그의 성령세례론은 그의 조부의 성령서례론과 많이 다르지 않다. 대천덕 신부는 성령의 내적인 역사는 신자의 구원과 성화와 관계된 것으로, 외적인 역사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과 관계된 것으로 본다.


한 번은 대천덕 신부의 아주 가까운 분이 "신부님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한가지를 꼽으라면 무엇이라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대천덕 신부는 "지붕위에 올라가 외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인생의 말년에 정의에 관해 말하고 정의의 기초인 성서적 토지법을 '외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성령에 의한 회심을 중시하고, 복음주의적인 전통에 서 있던 그가 어째서 이런 문제에 그토록 집중했을까?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분리될 수 없다. 물질적인 문제는 기도와 영적 전쟁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영적인 문제는 현실의 삶, 즉 실제적인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다." 한국교회에는 성령과 말씀을 강조하면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고, 사회문제를 강조하면 성령과 말씀에는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천덕 신부는 성령과 말씀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에 입각하면서도 사회정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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