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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_3학년3반_59_홍다니엘
 작성자 : 홍다니엘  2020-07-06 15:59:51   조회: 381   
 첨부 : Peter Van Lierop(edited).hwp (2905600 Byte) 
I. 기본사항

이름: Van Lierop, Peter / 반리어럽 / 한국명: 반피득(潘彼得)
생몰연도: 1918-2012.7.28.
출신 및 소속: 미국, 연합장로교
학력: 피츠버그대학교에서 교육심리학 전공
연표:
1918. 시카고에서 출생
1943. 입대하여 2차 세계대전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
부인 반애란 여사와 결혼
1945.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미국 귀환
1949. 미국 연합장로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
1950. 6.25 전란으로 일본에 피신, 부인은 주일학교 관련 일을 함
1951-52. 개혁교회 남일본대학에서 강의
주말에는 센다이, 시오가마 등지의 한국인 정착촌 전도
1952. 안동으로 돌아왔고, 가족은 1954.3 귀환
1954. 학교법인 경안학원(경안고/경안여고/경안중/경안여중) 설립
초대 이사장/교장으로 활동
1956. 서울로 전임, 조선기독교대학(연세대 신학과 전신) 설립
연세대학교 종교심리학 강의
1960. 서울 서대문구에 미혼모 보호시설 은혜원(애란원 전신) 설립
1976.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귀국
1983.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에 애란원 기증
2012.7.28. 향년 94세로 미국 시카고에서 소천
2015.8.9. 부인 반애란 여사, 향년 94세로 미국 시카고에서 소천
가족사항: Van Lierop, Eleanor(부인)
논저: [논문] 고등교육에 있어서의 기독교교육, 연대80주년논문집, 1965; 음악의 도덕적 종교적 가치, 기상 2.10(1958.11); 죽음의 이해, 기독교사상강좌1(1963.8); The Concept of Sin and Freud’s Theory of the Unconscious Processes, 신학논단 13(1977.2); Empathy And Its Unique Function in Counseling In Christian Service, 신학논단 4(1958.7); Pastoral Ministry to the Alcoholic, 신학논단 12(1974.1).


II. 선교사 소개: 반피득(Van Lierop. Peter, 1918-)

한국 교육과 복지 사업에 반평생을 바친 벽안(碧眼)의 선교사 반피득(Van Lierop. Peter)은 1918년 시카고에서 태어나 31세 때인 1949년 미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아내인 반애란(Van Lierop, Eleanor)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안동선교부에서 시무하던 중 6.25 사변을 당하여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부인과 함께 일본 카루이자와 지역에 거주하면서 1개혁교회 남일본 대학에서 가르쳤다(1951-52). 토요일과 일요일에 그는 일본 센다이, 시오가마 등지에 있는 한국인 정착촌의 전도사업을 수행하면서 한국인 속에서 일했다. 그의 부인은 무교회지역을 위한 주일학교 일을 도왔다. 그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믿음에 따라 그는 1954년 경북 안동에 학교법인 경안학원(경안고·경안여고·경안중·경안여중)을 설립해, 초기 3년 동안 이사장 및 교장직을 지냈다. 반 선교사는 학교 건립비용을 위해 직접 시카고로 가서 시카고와 주변 150여개 교회를 순회하며 1만2000달러를 모금했다. 1957년부턴 연세대 신과대학 및 연합신학대학원 종교상담학 교수로 일했다. 1968년 연세대에 학생상담소를 개설하고, 1974년에는 국내 최초로 임상목회교육 과정을 개설하기도 했다. 서울 대신동 미혼모 보호시설 ‘애란원’도 반 선교사가 설립한 것이다. 한국정부는 이들의 공을 인정해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1977년, 30년 가까운 한국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2012년 7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향년 94세의 나이로 소천 했다.

※ 선교를 향한 무한한 열정
1918년 반피득 선교사는 벨기에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네덜란드계 미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카고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부모는 리어럽이라는 네덜란드 도시의 이름을 그에게 붙여 주었다. 무디 바이블학교를 졸업한 부친 베르나르 헨리 선교사는 남다른 선교 사명을 가졌던 훌륭한 신앙인이었다. 어린 시절을 벨기에에서 지낸 반 리어럽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벨기에 침공을 피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반 리어럽은 헌신적으로 선교 사역하던 아버지를 존경했다. 언젠가 자신도 선교사로서 미지의 땅에서 사역할 비전을 품었다. 당시 그의 마음속에는 중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시간 주립 대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다음 의학을 전공해 의술로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반 리어럽은 미시간 대에서 부인 엘리노어를 만났다. 반 선교사의 어머니는 대학에 들어가면 반드시 IVF(기독대학학생회)에 가입해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날 것을 당부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엘리노어도 믿음의 동역자를 찾기 위해 미시간대 IVF 동아리를 찾았다. 이들은 만나는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믿음의 짝임을 느꼈다. 엘리노어, 아니 반애란 여사의 부친은 미시간 주 포티맥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셨다. 기독교 분위기에서 성장한 반애란은 일찍 자신의 일생을 하나님께 드릴 것을 헌신했다. 선교의 열정을 지닌 반 리어럽을 만나 그녀의 선교에 대한 비전은 더욱 불타올랐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결혼했다. 결혼 전에 반 리어럽은 군에 입대했다. 심리학을 마치고 의학 공부 중이던 그는 위스콘신에서 훈련을 받은 뒤 의료 전문인으로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됐다. 그는 전쟁에서 여러 번 죽음의 문턱을 오갔다. 엘리노어는 가족과 함께 남편의 무사귀환을 위해 기도했다.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1945년 10월 반 리어럽은 미국으로 돌아와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전쟁터에서주저 없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바칠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피츠버그 신학교에 입학했다. 부부는 피츠버그 신학교 재학 중에 중국 선교를 위해 준비했다. 그러나 졸업할 무렵,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모택동은 모든 외국인들, 특히 외국인 선교사의 중국 입국을 불허했다. 그래도 부부는 중국으로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기도는 다른 방법으로 응답됐다.


※ 경안고교와 연세 신학대 설립

경안고 설립
1945년 2월 20일 반피득 선교사는 경안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경안고등학교의 교훈은 “먼저 하나님(God First)”이었다. 이것은 신약성서 마태복음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는 성서구적을 기초한 것으로서 경안 고등학교의 설립자인 반피득 선교사 및 다른 선교사들의 교육 철학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대한 실천의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선교사들의 생활신조인 ‘청교도 정신’이 깃들여 있다. 그들은 이곳에 있으면서도 항상 근면, 검소한 생활을 했고 개척자적인 정신에 입각해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정신은 경안학원 네 개 학교 곳곳에 아직도 남아 있으며, 그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다.

미국 장로교 선교부에서 부부에게 한국에 관해 소개했다. 일제 치하에서 일어난 한국의 놀라운 영적 부흥운동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장로교 선교부는 독립한 한국은 새로운 선교사들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데 당신이 바로 한국을 위해 준비된 선교사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해 생소했던 부부는 이후 한국 선교를 놓고 기도했다. 기도 중에 중국을 향한 마음이 한국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1949년 반 선교사부부는 한국에 왔다. 미 장로교선교부는 이들에게 안동에서 사역할 것을 명했다. 한국에서도 안동은 가장보수적인 지역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안동에는 적지 않은 교회가 있었다. 반선교사부부는 안동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크리스천 학교를 세우는 것이라 생각하고 교육사업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처음에는 계획대로 되지 많았다. 바로 한국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당시 대천 해수욕장에서 열린 미 장로교 선교사회의에 참석했던 부부는 선교부의 지시로 일단 거처를 일본으로 옮겼다. 2년 남짓 도쿄에 머문 뒤 다시 안동으로 돌아왔다. 그는 당초 계획대로 미션 스쿨인 경안 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경안고교를 통해 장래 한국사회를 책임질 크리스천 인재를 양성할 생각이었다. 미 장로교 본부의 지원으로 경안고교는 개교되었고 지금까지 기독교정신을 잃지 않고 교육사역을 진행해 나가고 있다.
반선교사부부는 경안고교에 오래 있지 못했다. 당시 연세대 총장으로 있던 백낙준박사가 반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백 박사는 연세대에 신학대학을 설립할 예정인데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다. 교육사역을 계획했던 반선교사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서울로 왔다. 그는 백 박사를 도와 연세대 신학대학의 전신인 조선기독교대학을 설립했다. 그리고 기독교 교육학과에서 강의를 담당했다. 이후 연세 신학대 학장을 맡아 1977년 미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봉사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연세대가 최고 대학이 되기보다 하나님의 대학이 되기 바란다면서 기독교 정신을 강조했다. 학과 강의뿐 아니라 채플 시간에도 진정한 연세 정신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강조했다. 반 선교사가 학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 한국의 대학가는 거센 반정부 시위의 중심지였다. 연세대생들은 항상 그 중심에 있었다. 때로 학생들은 미국인 반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미국인 학장이 반정부 발언을 할 경우, 파급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운동권 학생들은 반선교사를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국에 온 것은 정치 활동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리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오직 학생들을 하나님 안에서 가르치는 데 전력했다. 처음에 실망했던 학생들도 반 선교사의 일관성과 하나님을 향한 사람을 이해하고 이후 모든 학생들이 그를 진정으로 따랐다.


※ 애란원을 설립하다
반 선교사가 대학에서 사역하는 동안 부인 반애란 여사는 한국 여성들을 위한 사회사업에 전력했다.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반선교사보다 반 여사의 명성이 더욱 높았다. 또 미국의 각 언론에서도 반여사의 사역을 집중적으로 취재해 보도하기도 했다. 반 여사는 1950년대 말부터 윤락 여성들의 갱생 사역에 헌신했다. 전쟁 후 어려웠던 시절에 한국의 많은 여성들, 특히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여성들이 쉽게 윤락업에 빠져들었다. 1960년 반 여사는 이들을 위한 갱생 보호 기관인 은혜윈을 설립하여 윤락 여성들의 문제를 사회에 부각시켰다. 은혜원은 윤락 여성들을 모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한 뒤 직업 교육을 시켜 사회로 복귀시키는 사역을 담당했다. 반 여사는 이를 위해 직접 전국의 사창가를 뒤지면서 실테 조사하는 열심을 보였다.
반여사가 윤락여성에게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남편과 함께 연세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1950년대 말 한 학생이 윤락 여성을 데리고 와서 돌봐 달라고 부탁하면서부터다. 이를 통해 반 여사는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알게 됐고, 특히 윤락 여성들의 그늘진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상의해 사재를 털어 서울 봉원동에 은혜원을 짓고 윤락 여성을 모으는 한편, 윤락방지를 위해 서울역을 찾아 무작정 상경한 소녀들을 데려왔다.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소녀들은 부모에게 연락해 귀향시키고, 나머지는 기술학교에 보내 기술을 배우게 하고 또 집중적으로 성경 교육을 시켰다. 이를 위한 비용 충당 목적으로 세브란스병원과 학교 등에 구내매점을 차리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은혜원에 온 여인들의 상당수가 자살미수 경험자였고, 질병을 앓고 있던 여인들은 선도에 따르기보다 도망치기가 일쑤였다. 친구들은 반 여사에게 쓸데없는 짓을 그만두라고 권하기도 했다. 또한 은혜원 근처의 주민들은 더러운 여자들 때문에 동네 분위기가 험해진다며 비난했다. 그럴 때마다 반 여사를 격려하고 위로한 사람은 남편 반 선교사였다. 반 여사의 사역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격려했다.
반 여사는 초창기에 윤락 여성들이 은혜원에서 도망쳤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가 가장 기뻤다고 술회한다. 윤락 여성들은 더 이상은혜원에서 도망치지 않았고 언론에 보도되면서 주민들의 눈길도 바뀌었다. 은혜원에서 살았던 윤락 여성들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뒤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다. 적지 않은 윤락여성들이 결혼한 뒤 아이들을 데리고 반선교사부부를 찾기도 했다. “나쁜 사람은 없어요. 희망과 웅기를 주고 삶의 방법을 가르쳐 주면 누구나 선량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외롭고 힘든 기간이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 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이었어요.” 이제 몸을 가누기도 힘든 반 여사는 한국 여성들이 높은 사회적 위치에서 전문성을 갖고 일하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당시 그녀의 활동은 한국과 외국 언론에 수없이 소개됐다. 반 여사는 ‘푸른 눈을 가진 윤락 여성의 어머니’로 불리기도 했다. 지난 1977년 은혜원은 애란복지회로 변경되었다가 1983년 애란원으로 명칭이 바뀌어 지속적으로 불우 여성들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반 선교사부부에게 한국에서의 삶은 새로운 실험이었지만, 사랑을 가지고 나갔을 떼 모든 실험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는다는 사실도 체험했다. 한때 불우했던 윤락 여성들이 갱생한 뒤 이웃을 돕기 위해 나서는 모습을 보며 감격하곤 했다. 반 선교사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모든 허물을 덮어주지요. 우리가 서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애란원을 통해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반 여사는 한국에서 사역하면서 2남 3녀의 자녀들을 훌륭하게 교육시켰다. 그 중 딸 한 명은 한국에서 입양했다. 반 선교사 부부는 앤드리아라는 이름의 입양 자녀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앤드리아를 통해 많은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우리 부부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반 선교사는 자신들의 사역이 희생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었다면서 다시 태어나도 같은 길을 가겠다고 덧붙인다. 한국 정부는 이들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다음은 동백장 수상에 대한 반 선교사의 말이다. “우리는 훈장을 받기 위해 일하지 많았습니다. 인간의 훈장보다 하나님의 훈장을 사모했어요. 그럼에도 한국에서 우리 사역을 인정해 준 것은 감사한 일이지요.”
1977년 이들은 한국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웨스트민스터 가든에 있는 반 리어럽 선교사의 집에는 한국 정부의 훈장과 애란원에서 준 감사장이 벽에 걸려 있었다. 집안 도처에는 한국을 생각나게 하는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한국의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이며 자개상, 돌탑 등이 집 주인이 어디에서 인생을 보냈는지 말해 주고 있다. 반 리어럽은 미국으로 돌아온 뒤 위스콘신 메모리얼 병원에서 원목으로 지냈다. 그러고 1987년에 웨스트민스터 가든에 들어왔다. 이후에 그는 호프 시티 병원에서 원목으로 일했다.
그는 한국에서 사역을 마치고 떠난 후 세 차례 다시 한국을 찾았다. 1984년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대회 때 초청을 받았고, 최근에는 3년 전 온누리교회 초청으로 방문했다. “한국은 참 많이 변했습니다. 모든 것이 발전했어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1970년대가 더 좋았는지도 몰라요. 당시 여의도 광장을 가득 메웠던 ‘74엑스플로 전도대회’는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한국이 계속 영적으로 성장하기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착하고 순수했던 한국인들을 그리워했다. “한국인들은 너무나 순수했습니다. 대접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아마도 그 같은 대접 정신을 가진 민족은 드물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립습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수많은 선교사를 세계 각국에 보내고 있다는 필자의 설명을 듣고 반 선교사는 하나님이 한국인들을 쓰실 것이라 확신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찾았던 귀한경험들을 잊지 말 것을 부탁했다. 반피득, 반애란 선교사부부. 이들은 주님 안에서 역사를 만들었던 영적 거인들이다. 지금 이들의 인생은 황혼 빛 같이 저물어 가고 있지만, 한국에서 행한 사역은 아침 햇살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2020-07-06 15:5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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