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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07 / Hulbert, Homer Bezalee(1863. 01. 26 – 1949. 08. 05) / Hulbert, H. B(~1948.09.25)
 작성자 : 김우람  2020-07-06 23:33:17   조회: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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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 선교사 / Hulbert, Homer Bezaleel, (1863. 1. 26 ~ 1949. 8. 5)

Ⅰ. 기본사항
1. 이름 : Hulbert, Homer Bezaleel / 헐버트/ 한국명: 홀법 또는 할보
2. 생몰연도 : 1863. 01. 26 – 1949. 08. 05
3. 출신 및 소속 : 미국, 미북감리회
4. 한국선교기간 : 1886년 7월 5일 – 1907년
5. 연표 :
1863년 1월 26일 미국의 버몬트주에서 미들베리 대학 총장이셨던 아버지 칼빈 헐버트 목사와 다트머스 대학의 창립자 후손인 어머니 매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칼빈주의의 엄격한 도덕성, 인간 중심 사상 및 “인격이 승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신념”의 가훈 속에서 성장.
1884년 미국동부의 명문 다트머스(Dartmouth)대학 졸업,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입학(2학년 때 한국에 오기 위해 학업중단)
1886년 7월 5일 고종황제께서 영어 및 서양문화를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한 “육영공원”의 교사로 내한, 같은 해 가을 학생 35명으로 개교
1888년 9월 18일 메이 한나(May B. Hanna)와 결혼(New York시 35번가 Grace 장로교회에서)
1889년 Seoul Union 클럽(스포츠클럽:테니스)을 만들었음.
1889년 육영공원의 교재용으로 지리총서를 발간
1891년 한국인의 문화교육 창달을 위하여 한국최초의 한글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
1891년 육영공원교사 계약이 끝나면서 유럽을 경유 미국으로 귀환
1892년 남군사학교(Putnam Miltary Academy, Ohio) 운영책임자
1893년 9월 미감리회 선교사로 재내한, 삼문출판사 운영책임자로 문서선교, 한국학 연구지 <The Korean Repository>의 인쇄, 운영 맡음
1893년 10월 1일 감리교 선교출판회사인 트라이링규얼(Trilingual) 출판사 책임자로 선임되면서 재방한
1893-1897년 한국사를 계속하여 공부하면서 언론출판업에 적극적으로 종사함.
1893년 볼드윈교회(현 동대문교회) 담임목사.
1895년 영문월간지 “Korean Repository"의 운영책임자(Business Manager)
1895년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등의 격변기에 고종황제를 가까이서 돕게 되었고 특히 명성황후 시해 직후 고종황제를 보호하기 위하여 선교사 언더우드, 애비슨 등과 함께 고종황제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
1896년 구전만으로 불려왔던 아리랑을 역사상 최초로 서양식 악보로 채보함
1895-1897년 이승만, 서재필, 윤치호 등을 만나게 되며 독립협회, 교육, 언론, 개방등 문명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전개함
1896년 서재필을 도와 최초의 한글신문 “독립신문” 창간
1897년 제국 보통학교 교장으로 임명, 제국보통학교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배출했고(오늘날 교육대학), 별도로 양반집 자제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반도 있었음
1897-1905년 고종황제의 후원아래 교육창달에 힘쓰며 교과서 시스템을 개발, “헐버트 교육 시리즈” 프로그램하에서 “초학지지”등 교과서를 출판했음
1898년 고종황제로부터 교육최고책임자로 임명(Superintendent of Education)
1898년 "The Mongols in Korea"를 저술
1898년 "Times"지 특파원
1898년 “Royal Geographical Society" 회원
1899년 한국 YMCA 설립추진위원회 위원장
1901년 영문 월간지인 “The Korea Review” 창간. “The Korea Review”를 통해 한국을 전 세계에 알렸고 구독나라를 19개국까지 넓힘(1906년까지 운영).
1901-1904년 한국사에 관한 각종 연구논문을 <The Korea Review>에 4년에 걸쳐 기고
1903년 한국 YMCA 초대 회장에 선출, “대동기년”이라는 조선왕조 역사서 저술.
1903년 관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전신) 교사
1903-1905년 “AP" 통신 특파원
1905년 영어로 된 최초의 역사서 “한국(History of Korea)”를 출판
1905년 10월-11월 고종황제의 특사로 Roosevelt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을 방문, 일본의 국권찬탈을 저지 해 줄 것을 호소
1906년 6월 한국의 역사, 풍물 등이 포함된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출판
1906년 제 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제기,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세계열강의 국가원수들을 방문하기 위한 고종황제의 특사로 임명됨
1907년 개성부근 경천사 석탑을 일본 궁내부대신이 약탈해 갖는 바, 이의 반환을 전세계 언론 등을 통해 호소
1907년 5월 고종황제의 특사로써 세계열강원수를 방문하기 위하여, 그리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 2차 만국평화회의 한국인 특사인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지원하기 위하여 서울을 출발, 일본, 러시아, 유럽을 경유 동년 7월 헤이그에 도착 3특사를 만나고 7월 10일 평화클럽에서 을사늑약 및 일본의 부당성을 질타
1907년 7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사건 이후 일본의 박해로 귀국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메세추셋주 스프링필드에 정착
1909년 비밀리에 미국정부가 주선한 경호원과 함께 한국을 방문, 일신에 대한 정리를 하고 한국 개신교 전래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가재를 정리한 후 미국으로 돌아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추방 상태가 8.15 해방 때까지 계속됨
1911년 스프링필드 훼이스(Faith) 회중교회에서 목사 안수
1909-1945년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걸쳐 초토쿠어(Chautauqua) 및 YMCA를 포함한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조선의 독립을 역설
1919년 미국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
1942년 이승만 박사와 함께 워싱톤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Korea Liberty Conference)에 참석
1948년 아내 메이 한나 별세
1949년 7월 29일 대한밈국 정부의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
1949년 8월 5일 내한 일주일 만에 여독으로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별세,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
1950년 3월 1일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The Republic's Order of Taeguk)추서
1999년 8월 5일 헐버트박사 서거 50주기 추모식에서 김대중 대통령 휘호를 받아 50년 동안 비어있던 묘비명을 각인하고, 별도의 기념비 제막
6. 가족사항 : 아내 Hulbert, H. B

Ⅱ. 선교사 소개

출생 및 성장
호머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 주에서 아버지 칼빈 헐버트(Calvin B. Hulbert)와 어머니 매리 우드워드(Mary Woodward)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이자 미들베리(Middlebury) 대학 총장을 지내셨고, 그의 어머니는 미국의 명문 가문의 딸, 다트머스(Dartmouth) 대학의 창립자 후손이며, 그녀의 아버지는 인도와 스리랑카 선교사로 활동했다. 헐버트의 부계, 모계 모두 교육과 그리스도 정신의 피가 흐르는 가문이었다. 헐버트는 칼빈주의의 엄격한 도덕성, 인간 중심 사상 및 “원칙이 승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신념의 가훈 속에서 성장하였다. 1884년에는 미국동부 뉴햄프셔 주에 있는 명문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했고, 1884년 뉴욕시 소재의 유니온 신학교에 입학했다.
1884년 여름, 조선 조정은 서양식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 서울의 미국 공사관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 3명의 교사 파견을 요청했고, 미국 국무부는 교육위원장 이튼에게 교사를 구하는 일을 맡겼다. 이튼 위원장은 대학 한 해 선배인 헐버트의 아버지에게 아들 중 한명을 조선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문의했다.
1884년 가을, 헐버트와 그의 형 헨리에게 아버지가 갑자기 찾아왔고, 아버지는 형제에게 극동의 ‘Korea’라는 나라에서 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이 소식을 들은 형은 손사래를 쳤지만, 헐버트는 아버지의 제안이 희망의 도전으로 다가왔고, 조선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으로 계획이 틀어지게 되면서 조선에 오지 못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1885년 겨울 조선이 학교설립 계획을 다시 진행하게 되었고, 헐버트는 길모어와 벙커와 함께 1886년 5월 4일 뉴욕을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와 요코하마, 고베, 나가사키를 지나 1886년 7월 5일 아침, 2년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조선 땅을 밟게 된다.


내한 및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
1) 교육자로서의 사역
헐버트는 내한하자마자 학생들을 조선말로 가르치겠다는 사명감으로 선생을 세 번이나 바꿔가며 순전히 자신이 고안한 창의적 방법으로 조선 말글을 공부했다. 먼저 선생에게 자신을 가르치는 교수법을 몸동작으로 가르치고, 조선의 전설을 들려달라고 선생을 졸라 다양한 어휘를 익히고, 눈을 감은 채 읊조림으로 한 시간에 5-60개의 문장을 외웠다. 내한 5개월째에 대수학 수업을 더듬더듬 조선말로 진행하고, 1년 만에는 신의 존재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2년만에는 조선어는 동사가 제일 중요하다며 교육용 동사 알람표를 만들었다. 이후 헐버트는 조선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외교 행사에서 조선어 통역을 도맡으며 고종을 비롯한 조선의 지성사회와 교분을 쌓아갔다. 또한 조선은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한글을 통해 교육을 확장하고, 교육 확장을 통해 평등 사회와 문명국가를 형성해야 한다는 교육철학을 확고하게 다졌다.
헐버트는 육영공원 개교 후 이틀간의 교육과정을 어머니에게 편지로 써서 자세히 소개했다. 대부분 20세가 넘고 30세가 가까운 학생들이었는데, 그는 9월 23일 첫수업에서 학생들의 이름을 조선어로 불렀다. 첫 공부는 영어 대문자, 소문자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미국에서 가지고 온 타자기, 바이올린 등을 보여주어 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고, 가을에는 동대문 밖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개교 후 두달이 지난 1886년 11월 24일 치러진 첫 영어시험에서 학생 대부분은 거의 만점수준의 성적을 거뒀고, 학생들은 2주간 200여개의 단어를 배웠으며, 1년 뒤에는 3천여 개의 단어를 읽힐 정도로 열심이었다. 헐버트는 국제무대에서 영어를 원활하게 구사하게 하기 위해서 발음 교정에 최선을 다했고, 문장 암송이 영어 공부의 첩경이라며, 학생들이 문장을 완전히 암송해야만 집에 갈 수 있게 했다.
육영공원은 대체로 잘 운영되었지만, 좋지않은 사건도 빈번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헐버트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로 1889년에는 학생이 112명으로 늘었다. 또한 1888년 3월경부터는 하루 2시간씩 제중원 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 외교관으로서의 사역
헐버트는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조선에 관한 글을 국외 언론에 기고하여 조선을 국제사회에 소개했다. 그는 조선이 처한 정치적 현실, 문화, 풍광에 관한 글 25편, 종교에 관한 글 5편, 일본 여행기 4편 등 34편을 미국, 영국, 일본 언론에 기고했다. 조선 내에서도 1권의 서적을 출간하고 2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헐버트는 기고문에서 ‘특파원’이라는 직함을 사용했다. 황우선 교수는 “조선 말기 헐버트의 국제 사회를 향한 언론 활동은 조선 최초의 언론 외교관이자 글로벌 시민정신의 선구자적 역할이었다.”고 헐버트의 활동을 평가한다. 헐버트는 자신의 글 말미에서 “조선은 이제 문명국의 대열에 합류하는 문턱에 서 있다. 따라서 모든 나라는 조선의 근대화 노력을 지원하고 조선인들을 격려해줘야 한다. 특히 기독교 국가들이 앞장서서 조선을 도와야 한다.”라고 국제사회에 조선을 도울 것을 호소한다.그는 내한 1년 동안 12편의 기고문을 국외 언론에 발표하여 조선의 풍광과 풍습을 정감있게, 국제정세를 날카롭게 분석하여 국제사회에 소개했다. 그는 내한 3개월 만에 기고한 <청나라의 횡포>에서 청나라를 조선 근대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보았다. 그는 “조선은 지난 십 수세기 동안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두 나라의 불화의 희생자였다. 한때 두 나라는 조선의 예술, 성장 동력, 그리고 꿈까지 빼앗아 흡혈귀 같은 존재들이었다.”라고 역사적 악연을 설파했다. 헐버트는 이처럼 내한하자마자 한민족이 역사적으로 중국과 일본에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3) 한글 전파자
헐버트는 내한하자마자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조선 말글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1주일만에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문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곧바로 한글의 문자적 우수성을 학술적으로 증명하여 한글의 가치에 혼을 불어넣으며, ‘한글을 통해 교육을 넓히고, 교육 확장으로 문명 진화를 이뤄야 한다’는 확고한 교육철학을 세웠다. 더 나아가 한글로 교육해야 모든 백성의 지식이 넓어져 반상 타파와 남녀평등을 이룰 수 있다며 한글을 사회개혁의 기본개념으로 인식했다. 이어서 역사상 최초로 한글 교과서를 저술하고, 한글 보급운동을 펼치며 그의 교육 철학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한글 혁명가였다. 그는 외국인이지만 조선의 말과 글을 과학적으로 고찰한 최초의 근대적 언어학자이다. 그는 조선에 온지 3년만인 1889년 <뉴욕트리뷴>지에 <조선어>라는 7쪽 분량의 글을 기고했다. 그 글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소개하고, 조선어를 구문론적 관점에서 영어와 비교분석했다. 이 기교문은 역사상 최로로 한국어에 대한 근대적 의미의 언어학적 고찰이자, 한국어의 우수성에 대한 최초의 국제적 소개다.

4) 사민필지 저술
헐버트는 내한 3년 만에 170쪽의 『사민필지』 원고를 거의 완성하고, 서울에는 납 활자 시설이 빈약하여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하고, 제본은 서울에서 하는 등 1년여의 기나긴 출판 과정을 거쳐 책을 출간했다. 특히 세계지도 9장을 『사민필지』에 넣기 위해 조선인 공예가에게 질 좋은 강철 칼을 외국에서 구입 제공하여, 인쇄용 목판 지도를 만들게 하였다. 1890년 12월 말에 지도를 삽입하여 곧바로 제본에 들어간다는 내용의 편지를 확인했다. 사민필지는 1892년 이후 기독교학교는 물론이고 일반 학교에서도 필수교재로 사용하게 되었다.

5) 선교사이자 목회자로서의 사역
1891년에 육영공원의 재정악화로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헐버트는 1893년 9월에 목사안수를 받고, 1893년 10월에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1893년 10월 14일 조선에 귀환하여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 출판사’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출판 일을 하면서도 배재학당에서 틈틈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삼문출판사를 기독교 출판물의 중심 기관으로 거듭나게 했으며, 경영 수완도 발휘했다. 삼문출판사는 1893년 10월부터 1894년 8월까지 10개월동안 밤낮없이 작업하여 2백만여 면의 주보, 전도지, 종교 서적을 인쇄했다. 1년이 안되어 출판사를 자급자족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종교관련 출판물 뿐만 아니라 일반서적도 출판하며 조선 출판계를 이끌었다. 헐버트는 삼문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목회자로도 활동했다. 그는 1893년 10월부터 스크랜턴 목사에 이어 동대문교회 2대 담임 목사가 되었다. 헐버트는 1906년 노량진교회 설립을 인도하여 무당들을 교인으로 전환시켰다. 일본이 노량진에 수원지를 만든다며 인근 지역을 몰수하려했는데, 이 지역에는 무당들이 다수 살았으며, 일제는 제대로 된 보상도 없이 그들을 쫓아내려했다.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그 지역에 교회 설립을 추진하고 헐버트를 인도자로 초빙했다. 그는 보상도 없이 땅을 빼앗기는 한국인들을 돕고자 기꺼이 응했고, 교회 설립을 무사히 인도하고, 지역민들의 재산권을 보호했다. 이 때 많은 무당들이 교회 성도가 되었다.

6) YMCA 설립
헐버트는 조선의 유능한 청년들에게 근대적인 사회개혁의식을 고취시키고 이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을 했다. 그 노력의 결실이 YMCA운동이었다. YMCA를 출범시킨 헐버트는 1907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Y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교회로부터의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발의 시선도 있었는데 헐버트는 자신이 맡고 있는 코리아 리뷰 1903년 4월호를 통해 YMCA의 창설 목적을 교육, 계몽, 선교 세가지로 구분을 하여 창설목적을 명확히 했다. 교육은 질레트를 통한 신앙교육이 있는 교육이 될 것이며, 계몽은 사랑방이나 유흥을 통한 허송세월을 막고 한국 청년들이 성장하고 배울 수 있도록 자극을 주고, 선교는 기독교가 이들의 삶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함을 분명히 함으로써 지역교회가 아닌 협력교회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림으로써 정면으로 돌파해나갔다.

7) 독립운동가로서의 사역
당시 조선의 상황은 가츠라테프트 밀약, 을사늑약등을 통해 일본에 점점 잠식되어 가고 있는 풍전등화였다. 이때 헐버트는 조선의 친구로서 일제의 불의와 탄압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고종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특히 을사늑약 직전에 고종은 미국과의 조약을 근거로 하여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무력에 의해 강압적인 수탈을 일으키고 있는 것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고종의 친서를 들고 헐버트를 밀사로 미국에 파견한다. 이는 헐버트가 고종에게 얼마나 신의가 있었고 헐버트를 의지했는지 알 수 있다. 헐버트는 일본의 불법적이고 불의한 행동에 대해 굉장히 분노했다. 그 내용은 그가 쓴 저서 The Passing of Korea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조국인 미국이 힘없이 보호받지 못한 조선에게 하는 무관심과 태도를 보며 매우 분노하며 실망했다.
미국정부를 향한 밀사방법이 실패한 후 고종은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3명의 밀사를 파견하는데 이들을 보호하고 도와준 사람이 바로 헐버트였다. 특히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헐버트가 밀사로 파견된다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는데 이것은 실제 고종의 특사들의 활동과 정체가 탄로나지 않도록 일본이 헐버트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일부러 흘린 것이다. 헐버트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고종의 계획이 성공하도록 노력했다. 헐버트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사건 이후 일본의 박해로 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귀국 이후 한국을 위해 한 일들
헐버트의 대부분의 사역과 활동은 1905년으로 기록을 멈춘다. 그러나 헐버트의 한국을 위한 도움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헐버트는 미국으로 송환된 이후에도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과 협력하여,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일본의 탄압에 대하여 끊임없는 연설과 신문기고를 통해 국제사회에 알렸다. <하퍼스 위클리>잡지의 엘리스 기자는 친한파 헐버트와 친일파로 활동한 대한제국 고문 스티븐스를 비교하는 글을 기고했다. 스티븐스는 헐버트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외교능력을 가졌지만 이에 반해 헐버트는 용기, 위험을 감당할 수 있는 의지와 정의감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소식에 헐버트는 7월 21일 신문기자와의 회견으로 일본의 불법점거와 탄압을 알렸다. 한국을 대변하는 일이라면 어디든 헐버트는 나섰고 한국의 진정한 친구라는 평가를 받는 헐버트였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의 고문으로 활동한 레드와 신문을 통해 논쟁하며 일본의 부당함을 미국에 끊임없이 알렸다.
헐버트는 미국으로 귀환 후에 메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였고 그의 형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헐버트는 강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한국을 대변할 것이라고 설교했다. 이후 미국에서 한국에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언론을 통해 계속 알렸다. 이완용이 일본의 앞잡이 활동하는 것과 1911년에 일어난 105인 사건이 한국 기독교인을 탄압한 것임을 알렸다. 특히 일본이 한국을 잠식하고 태평양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미국과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헐버트는 이미 예견했고 진주만 사건을 통해 헐버트가 옳았다는 것이 후에 드러났다. 1916년에 헐버트는 루즈벨트가 조미수호조약을 불이행했음을 고발하며, “미국이 한국의 도움을 무시했고, 한국을 도와야 한다”고 <뉴욕타임즈>에 기고했다. 1919년 8월 15일자로 작성한 진술서 “What about Korea(한국을 어찌 할 것인가)”를 휴 바(Hugh W. Barr)와 스펜스의 도움을 받아 8월 16일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제출했고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제출한 헐버트의 주장은 1919년 8월 17일자 미국 주요 신문에 상세히 보도됐다. 이로 인해 미국의 국제적 불이행을 고발함으로 이 기고문은 미국 의회에 영향을 미치고 진상을 밝히도록 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헐버트는 미국에서 극동전문가로 인정받아 미국 전역을 다니며 순회강연을 했다. 이 강연을 통해 끊임없이 일본의 탄압실정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강연했고, 헐버트가 다닌 곳마다 한국 친우회를 세워서 한국의 독립을 위한지지 세력들을 만들어나갔다. 그는 1934년 영문잡지 <The Orient> 발간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러한 헐버트의 사역은 헐버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으며, 한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는지를 보여준다. 헐버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한국을 살리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에 묻히다
1948년 9월 25일 헐버트 부인이 세상을 떠난다. 이승만 대통령이 헐버트를 초청했으나 헐버트 부부가 연로하여 초청에 응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1949년 1월 헐버트를 흠모하던 김을한 등이 헐버트를 기리는 ‘헐벗박사기념회’를 조직하여 헐버트의 귀환을 다시 추진했다. 이승만은 헐버트를 1949년 광복절에 다시 국빈으로 초청했다. 헐버트는 1949년 7월 4일 스프링필드를 떠나 워싱턴으로 향했다. 몸은 노쇠했지만 한국에 간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헌버트의 외손녀는 86살의 할아버지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달 여정의 배편으로 한국에 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할아버지 자신도 알고 가족도 알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평소 그토록 갈망하던 길이었기에 가족들은 만류하지 못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전송했다. 헐버트는 1949년 7월 8일 워싱턴의 주미한국대사관으로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 초청장을 받아들고 대사관 문을 나섰다. 그는 <AP통신>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국빈초청이었지만 헐버트는 홀로 미군 군용선에 올라타야 했다. 그리고 1949년 7월 29일 오후 1시, 마침내 헐버트는 인천항에 도착했다. 기나긴 여정에 지친 헐버트는 서울에 도착하여 퇴계로의 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으나 다음 날 청량리 위생병원에 몸을 의탁했다. 그리고 내한 일주일만인 8월 5일, 헐버트는 세상을 떠났다.
2020-07-06 23:3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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