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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15 / Byron P. Barnhart
 작성자 : 김경종  2020-07-23 10:24:08   조회: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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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s)에서 파송된 반하트 선교사(한국명 반하두)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1915년에 시카고 대학을 졸업, 그 후에 일리노이 주 페오리아 YMCA 소년부 간사로 일하다가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인 1916년 3월 4일부터 1940년 11월 4일까지 약 이십오 년간 대한민국에서 사역을 감당했다. 그의 출생과 사망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고, 그 기록은 그가 대한민국 사회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하였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반하드 선교사의 가족은 사모님과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두 아들 리차드 C. 반하드와 바톤 J. 반하드는 각각 약 8개월, 약 13개월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다. 이 두 아들은 현재 “외국인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두 아들을 너무나 어린 나에게 떠나보내야 했던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는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대한민국에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사역을 감당했다.


<선교활동>

1) 체육선교사

반하드가 복음을 전달하는 매체로 사용했던 것은 스포츠이다. 반하드는 1916년 2월에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배구를 도입시켰다. 그 전에는 질레트와 함께 농구를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래도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국내에 최초의 실내체육관을 세웠다는 것이다. 반하드는 “체육은 신체적 건강과 생활을 명랑하게 한다”고 주장하면서 “실내 체육 운동은 추운 겨울이나, 비가 오는 날이다, 저녁에도 운동할 수 있다”고 권장했다. 그렇게해서 세워진 실내체육관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실내체육관에 대해 반하드가 1916년 9월 30일에 작성한 보고서인 『Annual Report』에 기록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실내체육관은 대 인기이다. 지금까지 참가한 연 인원은 17,666명이고, 소년부의 연인원도 24,756명에 달한다. 마약 운동기구를 더 보완한다면 더 많은 인원이 차가할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실내체육관을 세우고 스포츠를 전파한 것은 단순히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 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1909년 한일병탄 이후 일제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 더 큰 박해가 가해지긴 했으나, 그 이전에도 수많은 수탈과 핍박이 있었던 것은 결코 묵인될 수 없었던 것이다. 점점 국민들의 삶의 질은 떨어졌고, 그럴수록 국민들은 술과 마약, 도박 등에 빠지기 시작했다.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고 난 후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각종 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삶의 영역이 무너져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일제의 수탈에 대한 저항으로만 운동이 펼쳐진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무너진 삶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도 분명히 있었다. 그만큼 국민들의 삶은 상당히 무너져 있었고, 운동을 통해서라도 정상으로 되돌려 놓아야 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성과가 분명히 있었던 것은 맞으나, 무너진 삶의 모습은 여전히 상당 부분 남아 있었다. 이런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 국민들의 무너진 삶은 실내체육관과 스포츠를 통해 허랑방탕한 삶에서 건강한 취미와 문화로 이동시키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청소년과 청년들이 음주, 흡연, 성인물, 그 밖에 다양한 건강하지 못한 문화를 접하게 될 경우, 그것들을 대체할 수 있는 문화나 취미로 언급되는 것이 체육이다. 체육은 실제로 건강한 신체를 갖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각종 좋지 못한 중독을 치료할 수 있는 건강한 취미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그 당시의 정황을 생각해 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실내체육관을 이용하고 다음 세대에 해당하는 소년부에 많은 참가자가 있었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부분까지 고려했을 때 엄청난 일을 했던 것이다. 반하드가 대한민국에 실내체육관을 세우고 스포츠를 발전시킨 것은 단순히 스포츠의 발전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증진시킨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하드의 사역이 실제로 그런 역할을 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반하드가 1919년 9월 30일에 작성한 또 다른 보고서에서는 “추운 겨울에도 쉼 없이 운동을 했다. 몇 해 전만해도 신사들과 그 자제들은 운동 경기를 천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이 일변하여 모든 신사들이 운동을 즐기게 되었다. 이것은 틀림없는 YMCA의 공헌이다. 사실상 한국에서 실내 체육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은 YMCA 밖에 없다”라고 했다. 이 기록은 『서울 YMCA운동 100년사』-체육관 활동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반하드는 1929년 6월에 발간한 선교 잡지 『The Korea Mission Field』에서 YMCA 체육 시설에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있다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생활을 명랑하게 하여주는 사회적 친고의 기뢰도 마련하고 있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 보면 반하드의 사역은 분명 스프초 발전 그 이상의 대단한 업적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해준다.

지금까지 반하드가 체육을 통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그의 신분이 선교사였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안타깝게도 반하드의 대한 자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마저 찾아볼 수 있는 자료는 대게 YMCA와 관련된 자료들이다. 더구나 오늘날 YMCA의 성격이 국내에 처음 들어 왔을 때와는 상당히 달라진 상황이라 선교나 복음 전도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그의 신분을 생각할 때 분명 반하드는 이 체육 활동을 통해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체육이라는 문화에 복음을 담아 전했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여러 체육 동아리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동아리는 교회 내에 성도들의 취미 생활을 증진시키는 것이 주요 목적이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자가 교회 안에 잘 머무르고, 그렇게 오랜 시간 머물러 복음을 접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거부감 없이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게 해주고,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장이 마련하기 위한 것이 교회 내의 체육 동아리의 목적이다. 사실 체육 동아리가 교인들의 취미생활을 돕는 것은 부수적인 일이다. 그리고 반하드 역시 기록된 자료는 없지만 분명 여러 가지 체육을 통해 복음을 선포했을 것이다.


2) 농촌 청년 계몽 운동

일제는 정말이지 다양한 것들을 수탈해 갔다. 광물, 곡식, 사람, 그 밖에 수많은 것들을 수탈해갔다. 그리고 그 정도는 너무나 심해 정작 대한민국 국민들이 제대로 된 식사가 어려울 정도였다. 결국 식량문제는 큰 이슈가 되었다. 이런 사태를 모를 리 없는 대한민국에 선교사들은 이 일을 돕기 위해 애썼다.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던 단체가 기독교였다. 특히 장로교와 감리교가 주를 이루었었는데, 그 대열에 YMCA도 합류했다.
당시 국제 YMCA는 농촌 분야의 전문가인 미국 간사를 1925년부터 일 년에 두 명씩 오 년간 총 열 명을 파송한다는 것과 이들이 함께 일할 국내 간사 열 명을 한국 YMCA 측이 준비해 줄 것, 그리고 각 지역에 회의도 하고 교육도 할 수 있는 시설을 구비하여 농사 계량과 증산을 범할 수 있는 최소한의 농토를 마련한다는 한국 농촌 지원에 대한 합의를 1924년에 맺게 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국제 YMCA가 파송한 외국인 전문인 간사들이 입국하여 Avison이 농촌 교육을, Frederic T. Ship이 쌀 문제를, H. C. Bunce가 축산과 가축을, F. O. Clark)이 농촌 경제를 반하트가 농촌사업을 전담했다.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런 움직임은 많은 기록물에, 심지어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다. 그만큼 이런 운동이 있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아는 내용이다. 안타까운 점은 이 일에 대한 오늘날의 기록에는 대부분 “기독교”는 쏙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 반하트도 함께했다. 3‧1운동 이후 실의와 좌절에 빠진 대한민국 사회와 교회에 대하여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한 문서 선교의 일환으로 1923년 ‘신생명(The New Life)’ 잡지를 발행하고, 1926년 12월부터 “靑年”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1937년까지 활동했다. 1929년 2월 1일에는 “農村靑年(농촌청년, The Rural Young Korean)"이라는 월간지를 창간하며 주간을 맡았다. 이 잡지는 1931년 4월 ‘청년’에 통합됨
이 시기 범교단적이고 지속적인 농촌 계몽 운동은 농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대단히 높였는데, 그 결과 1929년 9월 16일 ‘농촌사업협동위원회’가 창립 될 때 그는 서기 겸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농촌 계몽운동에 깊이 참여했다. 그가 편집했던 ‘청년’지는 1940년 12월호로 종간되었다.
이처럼 반하트는 전국을 순회하며 농촌의 청년들을 지도하는 계몽 운동을 적극 참여하고, 자신의 발이 닿을 수 없는 곳에도 지속적인 문서 사업을, 우리의 표현으로 문서 사역을 했던 것이다. 문화를 넘어 실제적인 삶의 현실에까지 그의 사역이 넓혀진 것이다.

반하트는 이렇게 YMCA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면서 브로크만 선교사가 안식년 휴가 때 명예 총무 직무를 대리하였고, 1935년 신흥우 총무가 사임하였을 때 후임 총무가 선임 될 때 까지 총무 직무를 대리하기도 했다. 1938년 한국 YMCA가 강제로 일본 YMCA 산하로 조직될 때 명예총무로 선임되었으며 한국에서 25년간 활동한 뒤 사임하고, 1940년 11월 4일 일제의 선교사를 배척했던 시대적 배경 이 당시 이백십구 명이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그 중에 일백팔십구 명이었다. 이렇게 복귀가 이루어진 이유는 당시 국제적인 전쟁(제 2차 세계대전)이 확대되었고, 그로 인해 일제의 선교사와 교회에 대한 탄압이 극에 치달았기에, 자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 여파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2020-07-23 10:2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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