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토렛이 비극의 역사”(tragic history)라고 명명했던 우리민족 최대 수난 시대, 20세기 초 한반도에는 세 차례에 걸쳐 놀라운 부흥운동이 발흥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의 백만인구령운동이 그것이다. 19세기가 지나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후 10년 사이에 놀라운 부흥운동의 영적 파고가 세 차례나 계속된 것은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조지 휘필드(George Whitefield)로 대변되는 제1차대각성운동도 1734-36, 1740-42년 두 차례에 걸쳐 부흥운동의 파장이 일어났을 뿐이다. 한국인으로서 필자는 이 놀라운 부흥운동을 이 땅에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의 부흥운동의 파장 중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은 가장 강력한 성령의 현시였다. 평양대부흥운동은 1907114일과 15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도 겨울남자사경회 기간 중 발흥했다. 그 부흥의 현장 한 가운데 서 있던 조지 매큔(George McCune)은 이 때 임한 성령의 역사가 웨일즈와 인도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 어떤 성령의 역사보다도 더 강력한 놀라운 성령의 현시였다.

장로교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이 부흥의 불길은 곧 교파를 초월 평양 남산현감리교회를 비롯한 평양전역으로, 다시 한반도 전역으로, 그리고 만주와 중국으로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그 결과 부흥을 경험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19071월과 6월 사이 한반도 전역에서는 성령의 불길이 훨훨 타올랐다. 이 놀라운 부흥의 불길을 경험한 노블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코리아 미션 필드(The Korea Mission Field)에 이것은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라고 증언했다.

모든 신앙운동이 그렇듯이 “1907 대부흥운동이라 불리는 평양대부흥운동 역시 하루아침에 솟아난 것은 아니었다. 이전의 수많은 지류들이 하나의 거대한 강줄기를 형성한 것처럼 평양대부흥운동은 이전의 크고 작은 영적각성의 움직임이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 속에 강력한 부흥운동으로 현시되었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이 시대의 부흥운동은 다음 세 가지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운동은 한국만의 독자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던 부흥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 등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19세기 말 무디부흥운동, 1904년 웨일즈부흥운동, 1904년 호주부흥운동, 1905년 인도부흥운동, 1906년 오순절운동, 1908년 중국대부흥운동 등 전 세계적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20세기 초엽에 전 세계적으로 이 같은 놀라운 부흥운동이 연속된 것은 돌이켜 볼 때 세계선교를 앞당기시기 위한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였다. 이 시대만큼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된 적이 없으며, 그 세계선교 가운데 눈에 띠게 두드러진 것이 아시아 선교였고, 그 아시아 선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한반도였다. 따라서 이 시대 한국의 부흥운동은 전 세계적인 부흥운동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지리적 정치적 상황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고종의 퇴위, 1910년 한일합방, 1911105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 조선의 역사는 비운의 역사였다. 미국의 유명한 외교가 포스터(John W. Foster)가 증언한 것처럼 당시 한반도는 강대국들이 노리는 나봇의 포도원이었다. 러시아, , 일본 등 강대국들의 식민야욕 앞에 조선정부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한반도는 전쟁터로 돌변했다. 이 시대를 살아간 민중이라면 이구동성으로 우리 민족이 의지할 유일한 대상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암울한 시대적 환경이 백성의 심령을 옥토로 만들어 준 것이다.

셋째, 전국적으로 널리 시행된 사경회운동이다. 1890년 채택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근간으로 사경회가 널리 시행되었는데, 이 사경회가 부흥운동을 위한 영적각성의 토양을 제공해주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도 일종의 사경회였던 기도회에서 발흥했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역시 그해 1월에 열린 평안남도도사경회 동안에 일어났다. 1890년부터 사경회가 널리 시행되면서 말씀과 기도를 통한 영적각성이 서북지역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 개혁주의 교회사가 조지 말스던(George M. Marsden)이 지적한 것처럼 사경회가 미국 부흥운동의 토양을 제공했듯이 한국의 사경회도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때문에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를 통한 전형적인 부흥운동이었다.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20.12.02 15:58
  • 수정 2021.01.1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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