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성공회

북장로교와 북감리교 선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선교를 시작한 교단은 영국 성공회이다. 1883년 말경 얼마 동안 제물포와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온 주중 영국 전권대사 해리 팍스(Harry Parkes) 경은 한국에서의 복음 전파의 문호개방에 관한 1884년 1월 12일자 편지를 받고 한국선교의 시급성과 필요성을 담은 서신을 띄웠으며, 찰스 스캇(Charles Perry Scott) 감독은 이 편지를 켄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에게 전했다. 하지만 영국 성공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기까지는 그로부터 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890년 영국 성공회의 선교 기관인“해외복음전파회”(The Society for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가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白樂濬은 파스코(C. F. Pascoe)의 해외복음전파회 1701-1900년을 인용하여 영국 성공회가 어떻게 한국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아래와 같이 그 전후 상황에 대해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韓國에서의 영국 성공회사업은 當時 해외 일본 선교사업의 창시자 중의 한 분이요, 또한 개척 선교사이던 쇼(A. C. Shaw) 신부가 1880년에 구상한 데서 출발했다. 한국과 對外交通을 개시할 목적으로 쇼는 이 전도회에서 주교 한 분과 신부를 함께 한국에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주도해야 할 준비의 필요성을 느끼고, 또한 그 길을 열기 위하여 1880년에 그 隸下 일본인 전도사 한 사람을 보내어 한국말을 배우게 하였는데 그 전도인의 봉급은 해외 일본교회 교인들이 부담했다. 이 구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쇼 부주교는 이 일을 계속하여 추진했다. 그 후 1884년에 한영통상조약의 체결교섭이 진행 중에 있을 때 중국에 주재한 영국교회 주교 세분도 이 기회를 捕捉하고 동일한 시도를 제기했다. 그 조약내용에 영국인에게 신교자유권 賦與條款이 여러 象譯권 항목보다 더 많이 토의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전통적 사교배척정책에 의하여 일어났던 병인(丙寅, 1866), 신미(辛未, 1871)의 박해와 같은 사건을 대비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영조약에서 선교 활동이 용허되어 있지 아니하지만 한어를 통하고 한국 정부와 민간사정을 아는 선교사들은 척사책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약 체결 직후에 한국 정부는 병원설립에 필요한 의사와 외국어 특히 영어와 기타과목을 가르칠 교사들을 환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887년에 북중국의 스코트(Scott)주교와 일본의 빅커스테드(Bickersteth)는 한국을 往訪하고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에게 지체 없이 한국에 영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 안건이 복음 전도회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1888년에 와서 북중국 주재 주교에게 2,500파운드를 보내어 선교사업 개시에 사용하게 했다. 다행하게도 선교사업을 개시하려던 본래의 계획은 “본격적인 형태를 갖추어” 출발하였는데 勅令에 의하여 일찍이 영국해군 종군사제로서 고위층의 신임을 받고 있던 코르프(C. J. Corfe) 사제가 1889년 萬聖節日(11월 1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주한 주교로 陞品되었다. 복음 전도회에서는 현재(1889-90) 年額 1,500파운드의 지원을 보장하고 있지만 한국 선교사업은 처음부터 “使徒의 내핍생활 성약 하”에 출발하였으므로 주교와 그 동료들은 봉급을 받지 아니하는 동시에 탁발생활을 할 것도 아니라 소액의 공유금으로 공동생활을 할 수 있게 했다. 코르프 주교는 한국에 赴任하는 도중 선교사업의 대표자격으로 미국 내 9개 도시와 캐나다의 8개 도시, 일본의 3개 도시를 역방하고 도처에서 성의에 찬 동정을 받았다. 뉴 웨스트민스터(New Westminster) 교구에서는 스몰(R. Small)과 피크(Peake) 두 신부의 선교사 지원도 받았다. 주한 선교사로는 와일즈(Julius Wiles)와 랜디스(Landis) 두 의사와 트롤로프(M. N. Trollope), 와너(L. O. Warner) 두 신부와 파우널(J. H. Pownall), 데이비스(M. W. Davies) 두 사람이 있었다. 코르프 주교는 1890년 성 미가엘과 諸聖膽禮日에 인천에 도착하였고 그 익일인 9월 30일에 서울에 입성했다. 와일즈 의사는 이보다 3주일 전에 내한하였으므로 지체 없이 곧 서울과 인천에 거주하는 한인 및 歐洲人을 상대로 의료사업에 착수하는 한편 구주인을 상대로 종교 활동을 개시하고 서울에는 영국해군 군목들이 기증한 인쇄기계를 가설하고 선교용 인쇄소를 설치했다. 서울과 인천에 선교사 거주처소를 매입하고 9명의 선교단원들이 서울에서 동거하게 되었는데 서울에서는 선교사업이 1891년 부활주일날 시작되었으므로 그 처소를 “부활의 집”이라 명했다.


이렇게 해서 오랜 준비 작업을 거쳐 1890년 9월 29일 “한국의 첫 감독 선교사” 찰스 존 코르프(Charles John Corfe), 그와 함께 입국한 젊은 성공회 의사 랜디스(E. B. Landis), 그리고 이어  스몰(Small), 피크(Peake),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 파우널 부제, 데이비스 등이 도착하면서 성공회 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그러나 성공회는 직접선교보다는 의료 선교, 사회복지 사업, 문서 선교에 주력했다. 1890년 10월 제물포에 성누가병원, 1891년 정동에 성베드로병원과 낙동에 성마태병원을 개원했다. 경기도 여주와 충북 진천에도 병원을 설립하여 의료 선교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성공회는 낙동에 인쇄 시설을 갖추고 셩교이증(聖敎理證), 성회송가(聖會頌歌) 등을 발간하여 문서 선교를 시작했다. 이들은 6년 동안 한글,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습득하면서 직접전도를 삼가오다 1896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한 명의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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