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영국령이던 호주의 빅토리아 성(城)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외국선교위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한 것은 1889년이다. 그 해 10월, 언더우드가 “대단히 재능이 많고, 거룩하고 열정적이며, 이제까지 한국에 왔던 가장 훌륭한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예찬했던 조셉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s, 1856-1890)와 그의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Mary T. Davis)가 빅토리아 성 장로교회의 후원을 받아 한국에 입국했다.


빅토리아 성 장로교회는 교인이 약 3만 5천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교단이었으나 외국선교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빅토리아 성 장로교회 외국선교위원회는 1860년에 조직되어 호주 본토인들과 중국 이민자들, 뉴 헤브라이즈(the New Hebrides)에 선교를 해왔다. 호주 장로교회 본부가 선교 사업을 통괄하지만 실제로는 빅토리아성장로교회가 선교를 직접 맡고 선교비도 역시 각 성별로 조성했다.

 

1856년 8월 22일 뉴질랜드 왕가라이에서 9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데이비스는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빅토리아 성 멜보른(Melbourne)으로 이주해 플리머스 형제단에서 신앙 교육을 받았으며, 1876년 20살 때 호주 CMS(Church Missionary Society)의 파송을 받아 그의 누이가 선교하던 인도 텔리구(the Telegus) 벨로레(Vellore)에서 21개월 동안 사역하다 건강 문제로 호주로 다시 돌아왔다. 데이비스는 멜보른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문학석사학위(M.A.)를 받았으며,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대학에 유학해 신학도 공부했다.


그 후 데이비스는 해외선교회가 열리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멜보른시 외곽 콜필드에 초급학교(the Caulfield Grammar School)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고 교육사업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멜보른 콜필드에 위치한 성 메리교회 목사 매카트니(H. B. Macartney)가 편집 발행하는 미셔너리誌(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실린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편지를 읽고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87년 중국 푸죠우(福州)에서 활동하고 있던 CMS선교회가 파송한 영국 성공회 소속 존 울프(Archdeacon John R. Wolfe) 선교사가 알렌의 초청으로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조선의 선교지를 돌아본 후 그 가능성을 확인하고는 본국 선교부에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긴 편지를 보냈는데,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모르지만 이 편지가 당시 영국령이었던 호주의 매카트니 목사가 운영하는 “한 작은 선교지”에 실렸던 것이다. 조셉 데이비스와 그의 동생 메리 데이비스가 이 편지를 읽고 감동 받아 한국선교를 결심했다. 1888년 빅토리아교회 남녀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멜보른시 투락(Toorack)의 데이비스 모교회 장로교 성경연구 신우회(The Presbyterian Fellowship Union for Bible Study)와 기타 경내 지교회 협회가 재정을 담당해 데이비스를 한국에 파송했다.

 

1889년 8월 5일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은 데이비스는 8월 21일 한국을 향했다. 데이비스 일행이 10월 2일 부산을 거쳐 4일에 서울에 도착함으로써 호주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5개월을 서울 언더우드 집에서 머물면서 한국선교를 준비하던 데이비스는 서울과 서북 각도에서 이미 선교가 시작된 것을 확인하고 남부지역을 개척하기로 언더우드와 뜻을 모았다. 언더우드의 아내 릴리아스는 한국의 언더우드에서 데이비스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는 언더우드와 똑같은 열정적인 정신, 똑같은 힘, 똑같은 언어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완전히 마음이 통했으므로 언더우드는 그와 같은 조언자와 조력자로부터 앞으로 큰 축복과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 물론 이 두 사람은 모두 기도에 강한 신앙인들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하고 있는 사업과 그들이 구원하기를 갈망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위해 함께 언더우드의 서재에서 기도하곤 했다.


데이비스는 1890년 3월 14일, 6개월 전인 1889년 10월 2일 첫발을 내디딘 부산을 호주 장로교 선교 거점으로 삼아 경상남도 지역을 무대로 복음을 전하기로 하고, 부산 지역 선교 답사를 위해 누이를 서울에 남겨둔 채 어학 선생과 수행원 한 명을 대동하고 충청, 경상도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장장 300리의 장거리 여행을 떠났다. 환전한 엽전을 가지고 가는 일, 열악한 여인숙에서의 숙박,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한국 음식에의 적응으로 고생했지만 부산으로 내려가는 동안 성경을 팔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경을 구입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로 대단히 격려를 받았다.

 

호주 빅토리아 선교회의 개척자
3월의 한국 날씨는 쌀쌀해 충분한 준비 없이 여행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충분한 수행원을 동행하지 않고 여행을 떠난 데이비스는 많은 어려움을 만났다. 수원, 남원, 하동을 거쳐 부산에 도착했으나 4월 5일 입국한 지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 천연두에 감염된 데다 폐렴마저 겹쳐 갑자기 세상을 떠나 데이비스의 부산선교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동행했던 어학 선생에 따르면 그는 여행 마지막 5일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활동하던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이 “빨리 와 주셔요”라는 급보를 받고 달려가 데이비스를 극진하게 간호했으나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로부터 18년 후, 1908년 제임스 게일은 “까무짭짭한 한국인 한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나는 한국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마친 이 용감하고 진실한 마음의 그리스도인, 데이비스가 남긴 모든 것을 멀리 떨어진 외로운 언덕바지에다 묻었다”고 회고했다. 그를 극진하게 간호했던 게일 선교사는 데이비스의 장례를 치르고 그날 데이비스의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한국, 부산. 1890년 4월 6일, 사랑하는 데이비스 양에게


나의 슬픔을 가눌 길 없지만, 당신이 너무도 사랑하는 이의 질병과 죽음의 세부적인 모든 사실들을 직접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글을 쓰려는 것입니다. 내가 문 밖에서 나를 부르는 것을 접한 것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그저께였습니다. 기다리던 한 한국인이 데이비스 씨가 왔으나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호텔에 지금 있는데 매우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서둘러 아마 일 마일 가량 떨어졌을까 한 일본 호텔로 그와 함께 서둘러 갔습니다. 그는 너무 태양에 그을려 있었기 때문에 환자라고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오래 동안 보기를 원했는데, 이제 병중에서 만나 뵈어 유감이다”라며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 당신이 여기 와 무척 기쁘다”고 답하더군요. 그리고 내 팔을 잡으며 “지금 당장 갑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러나 당신은 아주 멀리 걷지는 못할 것 같군요”라고 말하자 그는 “아니요, 당신에게 의지한다면 걸을 수 있습니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내 방에 들이고 일본인 의사 키타무라(Kitamura; 독일 교수 밑에서 훈련을 받은 숙련된 사람임)의 방진을 요청했습니다. 의사가 오기 전 나는 그에게 차 한 잔과 약간의 토스트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약간 먹은 후 좀 쉬면 괜찮을 것이라고 내게 말하더군요. 나는 그에게 그의 여행에 관해 질문을 했고, 그는 처음 두 주는 좋은 시간을 가졌으나 그 후에는 그렇게 좋은 여행은 아니었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한 도시에서 몇몇 속 좁은 관원들에 의해 무례하게 대접을 받은 것 외에는 그의 모든 여행이 “상당히 축복”된 여행이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열흘 동안 비록 그의 건강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불평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때 의사가 들어와 검진을 했습니다. 그는 곧 “천연두”라고 말하고 환자를 그냥 그대로 놔둘 것인지 아니면 병원으로 옮길 것인지 물었습니다. 당신의 오빠가 병원으로 가고 싶다고 말해 가까운 병원으로 곧 옮겼습니다.

비록 나는 미숙한 간호원이었지만 할 수 있는 한 그를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안정을 찾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졸음이 온다고 하더군요. 그런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약 6시경 내게 전갈이 와 나는 그가 한 시간 후면 나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없는 동안 의사가 다녀갔습니다. 나는 늦은 시간까지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지쳐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께서 건강하든지 아프든지 살든지 죽든지 그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주관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지난 이틀을 회상해 보면 마치 내게는 하나의 꿈같습니다. 만약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사실 지난 이틀은 암흑이었겠으나,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고 따라서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합니다. 나는 나의 가장 신실한 동료 한국어 선생을 보내 남은 밤 동안 병간호를 부탁하고 만약 병이 악화되면 내게 전갈하도록 부탁해 두었습니다. 다시 아침 7시에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지난밤에 잠을 조금 잤는데, 목이 많이 쑤시고 아프다고 말하더군요. 무엇보다도 그는 “당신의 선생이 내게 너무 친절하게 해 주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의사는 데이비스가 피를 조금 뱉었다는 사실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데이비스가 추위에 계속 여행을 강행하다 폐렴에 걸렸으며, 회복은 거의 힘들다고 말하더군요. 나는 일본의사가 정성을 기울여 전혀 생명을 잃지 않고 회복될 수 있기를 간절히 고대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에 대해 헤론에게 편지를 남겼습니다.

나는 9시경 그에게 먹을 것을 좀 구하기 위해 그곳을 떠났습니다. 10시나 11경 사이 돌아와 다시 잠시 몇 분간 그곳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내게 급히 오라는 의사의 전갈이 왔습니다. 내가 그곳에 갔을 때 의사는 “그는 곧 세상을 떠날 것이다”(Er wird bald sterben)고 말했습니다. 의식이 분명한 가운데 그는 죽어가면서도 내게 말을 했습니다. 그는 1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무언가 중얼거리면서 평화로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 영사와 모든 관리들이 오후에 찾아왔고 매우 친절하고 겸손히 거주령에 따라 장례가 준비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만이 내려다보이는 산언덕 작은 외국인 묘지에 그는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까지 조용히 안장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다만 내가 얼마나 깊이 당신의 슬픔에 동참하고 있는지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

그는 내가 보기를 너무도 원했던 나의 형제였습니다.

더 이상 쓸 수가 없군요.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형제된

           제임스 S. 게일


한국교회는 토마스에 이어 “성자와도 같은” 또 한 명의 탁월한 선교사를 잃고 말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데이비스는 선교의 꽃을 채 피우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지만 빅토리아 선교회의 한국선교는 중단되지 않았다. 오빠 데이비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동생 메리는 더 이상 홀로 남아 한국선교를 강행하기가 힘들어 고향 호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이 데이비스가 소속된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에 알려지자 한국선교를 포기할 수 없다는 여론과 함께 교단적인 차원에서 한국선교를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1890년 5월 7일 호주 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해외선교위원회는 한국에 처음 파송된 우리의 선교사 데이비스의 죽음으로 교회가 받은 엄청난 손실을 기록하기를 원한다. 선교사역에 대한 데이비스의 강력한 헌신, 학자로서의 탁월한 능력, 크리스천 삶의 놀라운 일관성,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데이비스의 매력적인 힘은 성공의 희망 그 자체를 가지고 새로운 선교를 추진할 수 있도록 대단한 자극을 주었다. ……우리 주님은 그가 스데반을 일찍 부르셔서 안식과 상급을 베푸셨듯이, 분명히 데이비스를 영화롭게 하셨으며,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현시하시는 그 사건에 의해 고무되어 그 노력을 본받아 우리의 앞서 간 형제에게 주어진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표한다.


결국 데이비스의 죽음이 한국선교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1890년에 조직된 장로교부인회가 신우협회와 협동하여 한국 선교사업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의 죽음이 자극이 되어 결성된 호주 장로교 여선교회 연합회(P.W.M.U)와 빅토리아주장로회 청년연합회가 맥케이(James H. Mackay) 부부와 벨 멘지(Belle Menzies), 진 패리(Jean Parry), 파셋(M. Fawcett) 세 명의 여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들은 1891년 9월 6일 호주를 출발하여 1891년 10월 12일에 부산에 도착해 부산 초량을 거점으로 부산, 진주, 마산 등 경남 지역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의 한국선교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것이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5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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