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새벽 말씀 -한철희교수

부족함이 없는 부흥을 위하여 -(15일 새벽 말씀 한철희교수)

야고보서 1장 1-5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1)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2) /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3)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4)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5)


지금부터 3년 전, 2004년 6월 21일. 한국의 한 젊은이가
복면을 한 3명의 무장괴한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두 눈이 가려진 째 울먹이며 살고 싶다고 하소연 하였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바그다드에서 35 km 떨어진 곳에서 그의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35살의 김선일이었습니다.

부산신학교를 졸업하고, 외대에서 아랍어를 공부하였습니다.
그가 이라크로 떠날 때는 조촐하게나마 청년들의 파송예배가 있었습니다.
그가 일하던 가나무역은 선교비전을 실천하던 준 선교기관입니다.
이들은 바그다드 한인연합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이라크 형제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국군 파병이 계기가 되어 치안이 불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긴급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선일은 교회를 지켰습니다.
한 달 동안 현지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 교회를 지키며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외롭게 교회를 지킨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결코 군납업체 직원일 수만은 없습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 알 자르카위 세력에 의하여 희생된 순교자입니다.
전 세계를 경악시킨 죽음을 맞이했던 한국의 전도자입니다.



바로 6개월 전 (2007년) 2월 27일, 오전 10시경,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60킬로 떨어진 미 공군기지 위병소에서 폭탄이 터졌습니다. 이 테러공격으로 다산부대 통역병 윤장호 병장이 전사하였습니다.
사건 직후, 탈레반 대변인 아흐마디는 AP통신과의 전화회견에서
딕 체이니 미국 부통령의 방문을 노리고 자신들이 테러 공격 감행하였음을 밝혔습니다.

윤장호는 강서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에서 홀로 중고교를 졸업하였습니다. 부지런하여 미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고도 합니다.

블루밍턴에 있는 인디아나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저도 방문한 적이 있는 이 대학에는 유명한 한인교회가 있습니다.
윤장호는 이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를 열심히 봉사하였습니다.
고국에서 어려운 소식이 들려 올 때마다 새벽기도에서 열심히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제가 적을 두고 있는 대학에 근래에 오신 한 교수님이 계신데,
바로 윤장호 형제와 함께 열심히 교회를 봉사하던 교수님입니다.
순수하고 쾌활한 장호의 모습이 늘 눈 앞에 선하다고 합니다.

청년 윤장호 국제경영학을 전공한 후,
캔터키주 루이빌에 있는 남침례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150년 전에 세워진 복음주의 명문신학대학원입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육군 통역병으로 군에 입대하였고,
제대를 눈앞에 두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과 며칠 후, 지난 달 30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화물터미널에 한 젊은이의 관이 하나 도착하였습니다.
화면을 통해 친숙해진 소탈한 웃음의 배형규 목사의 관입니다.
7군데 총상을 입은 젊은 설교자의 시신은 그렇게 돌아왔습니다.
공교롭게도 배 목사님이 순교한 날은 바로 자신이 태어난 생일날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분의 마지막 설교를 동영상으로 보았겠습니만,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죽음이란 무었입니까?
보초를 서는 경계근무자가 자신의 임무가 끝나면
내무반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내 임무를 마치고 편히 쉴 때,
다음 교대 근무자가 나와 내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또 자신의 묘비에는 “청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데 인생을 건 사람”이라고 써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분의 많은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 가족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샘물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얼마나 열심히 하였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순수하고, 깨끗하게, 열심히 살다가 가신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42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70대의 아버지 배호중 장로님을 남겨두고, 또 젊은 아내 김희연 사모님을 남겨 두고 떠나셨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어린 딸을 남겨 두고 떠나셨습니다.


왜 한국의 젊은이들이, 왜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갑자기 시련을 당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언론의 도마 위에 올라와야 합니까?

더욱이 힘든 것은 생각이 깊으신 교계 지도자들의 논리적인 꾸중입니다.
슬퍼할 틈도 없이, 사방에서 주체할 수 없는 공격을 견디고 있는데,
하필 이때에 웬 똑똑하신 충고들을, 그리도 많이,
일반 매스컴에 통하여 쏟아 놓고 계신지요.

왜 하나님은 자녀들 삶 가운데 처절한 상황들을 허락하시는 것일까?
이 땅에 나그네와 행인된 우리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오늘 봉독한 본문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 즉 Diaspora 12지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있었고,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자, 초대 교회 신자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모국어인 아람어 대신 헬라어를 사용하면서, 여러 위험 앞에 노출된 상태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야고보는 삶의 현장에 흩어진 모든 영적이 기독교인들에게 이 서신을 발송하였습니다.

본래 Diaspora는 장소의 개념보다는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이라는 조건 자체가 더 강조되었습니다.
실제로 어떤 신학자들은 미주 땅에 흩어져 사는 한국인들과 베트남사람들을
현대적 디아스포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교회들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우리의 땅에서 디아스포라입니까?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기여에도 불구하고 조소와 공격을 받아야 하는가?

여러분이 한국교회사와 한국 근대사를 공부해서 알겠지만,
우리가 한국사회에 기여한 바는 엄청났습니다.
구한말 봉건적 위계적 가족주의 및 유사가족주의적 사회체제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엄청난 힘으로 사회를 변혁하였습니다.
4년전 한신대학교 신학연구소는 현대리서치연구소에 의뢰하여,
성인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습니다.
설문내용은 “한국 개신교가 한국 근현대사의 사회, 문화적 변동에 끼친 영향”이었습니다.

연구 결과 한국 사람들은 개신교가 한국 근현대사의 정치, 사회, 문화 분야에서 가장 크게 영향력을 끼친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개신교(40.2%)가 불교(27.5%), 카톨릭(20.4%)에 비해 두배에 가까운 수치였습니다.

이러한 한국 교회가 언제부터 우리의 땅 대한민국에서 나그네와 행인의 모습으로 살아야 했습니까?

정말 우리 한국 교회는 민족 앞에 사죄해야 할 그 무엇이 있었는가?
우리가 반성하고 회개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시편 137편에 보면,
하나님을 거역하였던 유대 포로들이
바벨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듯이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고
이방인들의 조소와 비난을 들으며
그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를 부르는 치욕적인 경험을 하였습니다.

정말 우리는 조소와 비난과 치욕을 받아야 합니까?



지난 학기 종강 직후인, 6월 말, 한 미국인 교수님하고 일본 나가사끼를 방문하였습니다. 나가사끼는 일본 남단 규슈에 있는 항구도시인데, 과거 스페인 포르투갈, 네델란드, 영국 등 서양 문물이 일본으로 유입되는 대문과 같은 도시입니다.

이곳은 또한 일본 기독교의 성지입니다. 이곳을 여행하고 나서 왜 일본인 한국 기독교를 그처럼 잔인하게 탄압하였는지 감을 잡게 되었습니다. 자기 나라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는데도 잔인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1549년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일본에 들어 왔습니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천하를 통일하려는 야심을 가졌었고,
가장 방해가 되는 불교를 꺾기 위해서 기독교를 적극 후원하였습니다.
초대 기독교 개종자들에는 사무라이들 뿐아니라, 지방 실력자인 다이묘들도 있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기독교신자를 기리시탄이라고 불렀습니다.

역사가 라투렛(Kenneth Scott Latourette, The History of Japan)에 의하면,
일본 선교 절정기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일본인이 60만 명이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신하들이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1587년 외국 선교사들을 본국으로 추방하였습니다.

1597년, 26명의 기독교인들이 교또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선교사 9명과 일본인 신도 17명입니다. 그들은 1월 9일 교또를 출발하여 한 달 동안 걸어서 나가사끼까지 호송되었습니다. 그리고 2월 5일 겨울 아침, 니시자카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4년 아들을 통해 금교령을 내리고, 선교사를 추방하고, 일본인 신자들은 배교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불교로의 개종을 강요하였습니다. 절에 불적으로 등록하게 하였고, 장례식을 불교식으로 치르도록 하였습니다. 기독교 지방영주들인 다이묘들에게는 자결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1619년 10월 교토 마른 강(Kamo River) 바닥에서 남녀노소 기독교인 55명이 산채로 불태워졌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 도쿠가와 막부 초기 까지 불과 100년 사이에 2,126명의 기독교인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들의 처형 방법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날 시마바라 반도에 유명한 운젠 유황 온천이 있습니다. 많은 외국인들이 이곳에서 휴가를 보냅니다. 그러나 400년 전, 온도 97℃의 유황물은 기독교인들을 고문하거나 처형하는데 사용되어습니다. 사람을 벗은 몸에 끓는 물을 한 컵씩 부어 익혀 죽게 하는 고문입니다.

기둥에 높이 묶어놓고 죽창으로 왼쪽 허리를 찔러 올려 오른쪽 어깨로 뚫고 나오게 하는 형이 있습니다.

새장 같은 철장에 넣어 땡볕에 말라죽게 하는 형이 있습니다.

조수간만을 이용하는 처형방법으로 바닷가에 기둥을 세우고 묶어 놓고, 점점 만조가 깊어짐에 따러 서서히 익사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며칠씩 묶여 있기도 합니다.

제일 잔인하고 강력한 고문은 구덩이(pit)를 파고 거꾸로 매달아 놓은 방법입니다. 아나쭈루시(anatsurushi)라고 합니다. 이마에 상처를 내서 혈액이 순환되게 한 뒤 몸을 묶어 구덩이에 매달어 놓습니다. 몸을 밧줄에 묶되 한 쪽 팔을 내 놓게 합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배교할 경우 손을 흔들도록하는 것입니다.

신체조건이 강한 포루투갈 선교사들을 고문할 때 여러 방법을 사용해 보고는, 이 구덩이가 가장 혹독하다는 것을 알고는 즉각 이 방법을 광범위하게 사용합니다.

간사한 방법이 후미에(fumie)라고 부르는 성상 밟기입니다. 기독교인들을 협박하고, 겁을 준후, 간사하게 타이르는 방법입니다. “네 신앙을 버리지 않아도 좋다. 단지 성상만 밟아라. 살짝 귀퉁이에 발만 대도 좋다.” 그러나 이 경우 별로 효과가 없었습니다.

가장 빠르고 고통 없이 죽이는 방법이 목을 베는 참수형이었습니다.
1657년에는, 오오무라(Omura)감옥에서 131명이 참수되었는데, 부활을 겁낸 관리들이 목과 몸을 각각 따로 묻었습니다.

일본 다이묘들의 박해의 목표는 처형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배교였습니다. 영광스러운 순교를 막기 위해 곁에 의사까지 배치하곤 하였습니다. 통상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기만 하면, 배교하면, 즉각 고문과 처형에서 풀려납니다.

그러나 Sophia University 자료에 의하면, 이런 방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켜 순교한 기독교인들이 대략 4만명에 달하였습니다.

최고조에는 60만명, 1614년까지는 30만명이 있었습니다.
통상적으로 평균 20만 명이라고 합니다.

수천명이 순교하고, 많은 사람들이 배교하였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도망가거나 숨었습니다. 주로, 소토메, 히라도, 우라카미 등지로 숨어 들었습니다. 마지막 해변가 마을 소토메에서도 신변이 불안하자 고토라는 섬으로 건너 갔습니다.


Kakure Kirishitans (가쿠레 기리시탄: hidden Christian)

가쿠레 기시시탄은 외지로 숨어들어간 신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 속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기독교 신앙의 상징들을 몸에 지니고, 표현하며 살아가던 기독교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적 실천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양한 패턴들을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성직자들은 처형되고 추방당하여 한사람도 남지 않았습니다. 수십만의 기리시탄들은 결국 신앙을 유지할 방법들을 스스로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잃지 않으려면 날마다의 삶 중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껴야 했습니다.

들키지 않으면서도 신앙의 확신을 나타내는 표식들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수나 그림, 도자기 등에 기독교의 흔적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무사들은 자기들의 칼자루에 미세한 십자가를 그려놓았습니다.
성찬식을 숨기기 위해서 모찌를 만들어 냈습니다.
집안 깊숙한 벽장에 성상을 만들어 보관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앉고 있는 성상을 불상을 본따 만들었습니다.

평신도 지도자들은 별자리를 보고 교회력을 만들었습니다.
정확한 날짜에 8가지 이상의 절기를 지켜 나갔습니다.

기리시탄들의 시마바라 반란(1637~1638)이후에는
쿠즈레(무너짐)라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1650년경 까지는 대체로 박해가 정리가 되는 듯하였습니다.
대부분 처형되었고, 생존자들을 숨어들어 갔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기독교가 완전히 박멸되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메이지 유신이 있기까지 4번 정도 박해가 있었고,
기독교인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서구의 선교 본부도
일본에서의 기독교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렇게 200년이 지났습니다. 200년....

1864년 12월 29일 나가사끼에 오우라 성당이 완공되고 이듬해 1865년 3월 17일 헌당식을 마친 후 12시 30분경, 15명 정도의 일본인 남녀가 조심스럽게 교회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도하고 있는 신부에게 다가왔습니다. 40대 후반정도 되는한 부인이 신부 가까이에 다가와서 속삭였습니다. 손을 자기의 가슴에 대고 말하기를 “여기 있는 우리들 모두는 당신과 같은 마음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박해와 순교가 절정이던 때에 살던 기리시탄들의 자손들이었습니다.
200년을 숨어 살던 기독교인들이 2만명이 나타났습니다.


[1]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2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 시험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πειρασμοs입니다.
이 시험(πειρασμοs)를 성서사전을 찾아보니, ‘시도한다, 누구를 시험한다. 경험을 통해 깨닫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헬라어에서는 의학적 실험에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본문에서는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뜻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은 믿음의 시험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고난은 우리의 신앙을 증명해 준다는 뜻입니다.
이 고난은 우리를 확고부동한 신앙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련에 직면하게 될 때에는 언제나
그 시련을 순전한 기쁨으로 여겨라”
우리는 여러 가지 시련(many kinds of trial)에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시련에 직면하여 왜 기뻐해야 합니까?
구약에서부터 면면히 흐르는 히브리적 전통에 의하면
시련에는 정결케 하는 특성(purifying quality)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 기뻐하라-온전히 기뻐하라. 순전히 기뻐하라.
ICC주석에 보면 'Supreme'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최상의 기쁨, 넘쳐흐르는 기쁨(overflowing joy)
시련의 결과가 큰 유익(benefit)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교회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시련 앞에 부딪혀 왔습니다.
역사의 어둠이 짙어올 때는 늘 새로운 여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 온전히 인내를 이루라

(3-4절)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다른 한글 번역 “인내력을 온전히 발휘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조금도 결함이 없는 성숙하고 원만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3, 4절의 인내 ύπομονή ύπο..아래 μενο...거하다, 놓아두다
“아래에서 견고히 떠 받친다”

(ICC) “단순히 한 번의 어떤 행위로서의 인내나, 어느 구체적 상황에서의 잠시 동안의 인내가 아니라, 확고 부동성, 지속성, 내구성이 강조된(영적, 도덕적 특성)이다. (적극적, steadfastness, constancy, staying power, 역경 속에서의 결연한 의지)

(WBC) “이 단어는 단순한 인내 그 이상으로, 희망과 고대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고, 결연한 의지 가운데 적극적으로 버텨 낸다는 뜻이다.”

그런데 ύπομονή는 인내를 표현하는 다른 헬라어들과는 달리
‘용감한 인내’ ‘적극적인’ ‘남자다운 배경을 가진 고상한 인내’

단순히 위에서 내려지는 무게의 압력을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에에 대한 사랑에서 유발하는 의연한 인내를 말합니다.
Kittle 사전 “뇌물을 단호히 거부하는 행위”를 포함시킴

NY 카네기 홀 - 그랜드 피아노
여러분이 때때로 견디기 힘든 시련이나 긴장 속에 들어 갈 때는 피아노의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카네기 홀의 그랜드 피아노 속에는 수 백 개의 쇠줄이 피아노 틀에 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단단히 매어진 쇠줄이 잡아당기는 힘은 4만 파운드나 됩니다. 피아노는 가만히 있어도 엄청난 스트레스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끊어질 듯한 그 강한 긴장 속에서만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학 교수 Dr. Hershael York 설교(건축자)
신학교에서의 훈련은 건축자가 집을 짓는 것 같이 좋은 건축 자재 공부하는 습관, 생각하는습관, 영적 훈련의 습관들 -미래를 결정, 무엇보다도 시련 견디어 내는 훈련도 하나의 성품이 될 수 있습니다. 너무 우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Listhening Silence. (리차드 포스터)

체육관, fitness room - 패널에 Aristotelts의 말
‘당신이 지금 반복해서 하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
결국 탁월성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의 문제이다


인내에서 오는 3가지 이득(benefit)

① 온전해 진다(τελειο󰐠 - perfect)
“주어진 목표에 도달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어진 목표란 인간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의 goal,
하나님 편에서의 design,
하나님 편에서의 plan이 강조된 의미)

하나님의 목표에 따라서 완성된 성숙에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WBC) “하나님의 표준양식(the divine pattern)에 따라 주조된 성품적 완성”을 뜻한다고 합니다.

(NIV Application) “이 단어가 인격이라는 측면에서 사용되었을 때는, 그 사람의 성품이 형성되는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그 목표를 이루는 주체가 되신다. 신학자 랠프 마틴은 이 단어가 의미하는 온전함이란 그 범위가 오는 세상에서의 영화된 성품에로까지 확장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격의 완성을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인격의 integrity, 즉 온전한 성숙을 이룰 수 있다. 또한 온전함을 획득함으로 말미암아 확고부동한 소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하고 충성할 수 있다. 결국 사역자로서 충분히 성숙되고 안정된 성품을 이룰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온전해진다”(τελειο󰐠)라는 단어가 인격이라는 측면에서 사용될 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의 성품이 형성되는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그 온전의 목표를 이루는 주체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이 신학 수업을 마치고, 사역에 들어서서, 50의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을 가지고 싶으십니까?

학위도 하나 가지고, 교회도 웬만하고, 승용차도 큼직하고, 동기들에게 부러움도 사고, 그러나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인, 일그러진 영웅의 모습을 가지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설정하신 기준에 도달한, 훌륭한 성품의 성직자가 되기 원하십니까?

우리는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원하시는 성숙의 목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자가 되라. - “the imitation of God"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바로 당신의 성품적 특성들을 계발하고 계십니다.
그러길래(딤전6:11) “너 하나님의 사람아 ”(You man of God)
(눅6:35)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라”


② 구비된다 (ὁλὸκληρο󰐠 - complete)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전하다”

ICC 주석에 보니 “complete in all its parts"
“모든 부분에 있어 완전하기에, 어느 한 부분에도 부적절한 구석이 없다”

LXX(70인역) - 하나님께 예물로 바쳐진 동물이 ‘흠이없다’고 할 때에
이 ‘구비된다’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모든 부분에 구비되어야 하는 사역입니다.

목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종합예술)
목회학 교수님, 목사님은 마치 어항에 있는 열대어처럼 성도들에게 일거수 일투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모든 부분에 구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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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기독교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 피납사건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댓글들을 계속 읽다가 유사한 논지들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했고, 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공격력과 에너지를 보면서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안티 기독교를 연구한 어떤 사람의 글을 찾아보았습니다. 사실 그 사람도, 안티기독교를 도구 삼아 보수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여기 저기서 안티 기독교 사이트가 생겨났었는데,
2002년경에 이 우후죽순 처럼 생겨난 안티기독교그룹들이
현재의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반기련)으로 통합되었답니다.
이 반기련이 현재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안티기독교로 돌아선 몇가지 원인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1)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기독교에 빠지게 되어, 종교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2) 교회를 계속 다니다가 어느 날 목사님에게 성경에 모순과 의문이 있어서 질문을 했는데 그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서 목사님에게 찍히고, 교회에서 왕따 당하고, 아예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의 안티기독교들은 직·간접적으로 교회로부터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사랑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인도양의 어떤 새들은 비만하여 지자 날지 못하게 되어
원주민들이 잡아 새의 날개를 끊고, 심장을 끄집어 냈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가 사랑이라는 날개를 사용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사랑을 퇴화될 것입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 ‘성숙한 크리스챤의 10가지 자질’ 4가지가 ‘사랑’

* 온유한 사랑 - 남의 처지에서 보는 시각
* 엄한 사랑 - 친밀한 관계에서 진리를 지켜 나가는 것
* 희생적인 사랑 - 끊임없이 주는 것
* 파격적인 사랑 - 적대감의 연쇄 고리를 끊는 것

James Stwart “하나님의 충만이 강한 힘으로 넘쳐 흐르는 것이 사랑”

크리스챤이란 그리스도를 본받아 끊임없이 사랑을 시도하는 무기들입니다.
St. Paul - '나는 날마다 죽노라‘ - 자기가 죽는 사랑의 모험에서만이 열매가 맺힌다.


③ 부족함이 없게 된다. μηδε λείπὸμενο󰐠
(결함: λείπω. λείπὸμενο󰐠):

‘미완성으로 남겨둔 부분’이 없다, 결함(difficiency)이 없다.
λείπὸμενο󰐠 결함, 하자(瑕疵): 티(하) 흠(자)

“영계의 거성”이라는 말은 상당히 위험한 말입니다만,
훌륭한 사역을 이루신 분들이, 단 한 가지의 결정적인 결함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아킬레스 힘줄이라는 이야기가 어찌나 실감이 나는지 모릅니다.

아킬레스 힘줄은 바로 발 뒷굼치에서 종아리의 근육과 연결되는 힘줄인데,
사람 몸에서 가장 크고 강한 힘줄입니다.
운동선수들이 가장 잘 다치기도 하는 힘줄입니다.
아킬레스 힘줄은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본래, 호머의 일이어드에 나오는 전쟁 영웅이지요.
그의 어머니 테티스가 아들 아킬레스를 불사신으로 만들기 위해,
어린 아기를 죽음의 강인 스틱스 강물에 담갔답니다.
그런데 온 몸에 강물을 적셨지만, 손으로 잡고 있던 발굼치는 물에 젖기 않아 치명적인 약점으로 남아 있었답니다.
그의 비밀을 알고 있던 아폴론이 그의 유일한 약점인 발뒤꿈치에 화살을 명중시켜 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지요.

영적 지도자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면 얼마나 위험합니까?
영적 전투에서 교활한 악령들이 가장 집중 사격을 가할 부분입니다.

불과 10개월 전이지요. 작년 11월에는 미국 복음주의를 뒤흔든 지진과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New Life Church를 목회하는 테드 하가드(Ted Haggard)목사의 스캔들입니다. 1956년 생의 젊은 목사입니다. 자신의 집에서 개척하여 15000명의 초대형 교회를 이룩하였습니다. 미국복음주의 협회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보수주의 원로들인 제리 팔웰, 팻 로벗슨 등과 함께 미국 복음주의 최전선에서 싸우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약물복용과 동성연애로 하루 아침에 사임하자, 교회는 물론 전 미국 사회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교활한 악령들은 영적전투에서 지도자의 취약점을 가장 잘 파악합니다.
그리고 집중적인 공격을 가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귀한 영적 축복입니까? “인내력을 온전히 발휘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조금도 결함이 없는 성숙하고 원만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well-rounded)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영광받으시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서 일을 (공사를) 시작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를 갖추어 놓으시고 맙니다.

[3] (시험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라

(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당시 (유대인) 박해로부터 야기된 심각하고 급박하고 실제적인 문제들 앞에 직면해 있었을 그들에게 시련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따라 정확히 반응할 수 있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였습니다.

(ICC) 이 문맥에서 의미하는 σοφία는 “인간 영혼이 간직한 최고급의 신적인 기능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의를 인식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게 하는 능력” “the supreme & divine quality of the soul"

∴ “이것을 얻기 위해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구하라”
우리는 시험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 시련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용감하게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부흥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부흥(Revival)이라는 말의 뜻은
“잠에서 깨우고 살아나게 하는 것”
“어떤 것을 그것의 본래의 본질이나 목적으로 되돌리는 것”

J. I. 패커는 부흥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부흥이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살아있는 신앙으로 이끄는 사역이다. 태만하고 활기 없는 크리스천들의 내적 생명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사역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에 의해 행해지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의 개념을 철저히 성령의 기름 부음과 연관시켜 생각하였습니다.

“부흥이란 오직 성령의 기름 부어주심에 의하여,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부흥에 있어서 인간은 결코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우리에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 만을 자각할 뿐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로이드 존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다른 어느 것으로도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부흥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결국 부흥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의한 사역입니다.
결국 부흥은 철저한 회개를 동반한 기도운동입니다.

한반도의 부흥도 결국, 원산기도회에서 시작되었고, 한국인 성도 윤승근의 고백과 기도에서 시작되었고, 윤승근의 고백에 감동한 하디 목사의 기도와 고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본래의 목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를 주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옵소서” 외쳤습니다.
이 상황에서 여러분들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모 장관께서는 이번 정상회담을 두고 “통일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 나라, 이 민족이 복음화 되면,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가 복음화 되어 휴전선이 열려야,
북한에 무너졌던 수많은 교회와 제단이 복구될 것입니다.

지금처럼, 마치 한 대 얻어맞은 가축처럼,
통일을 맞이할 때 우리는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기도합시다.

- 한철희 교수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08.2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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