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장로교 선교회


캐나다 장로교의 한국선교가 시작된 것은 1898년이지만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한 것은 그보다 10여 년 전인 1889년이었다. 캐나다에서 가장 먼저 한국선교에 관심을 표명한 곳은 당시 영국과 북미 전역에 일고 있던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을 받고 있던 토론토대학이었다. 1887년 5월 토론토 대학보(大學報), 낙스 칼리지 먼쓰리(The Knox College Monthly)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나단 고포드(Jonathan Gorforth)의 말을 인용해,“복음에 문을 연 마지막 나라, 한국이 소리 높여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1,500만의 영혼들이 주님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다”며 한국선교를 촉구했다.

 

그로부터 2년 6개월 후, 1889년 12월 15일 한국어를 한국 사람보다도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선교사로 알려진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奇一)이 명문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그 대학 YMCA와 8년간 연 500달러의 지원을 약속 받고 한국에 입국했다. 이듬해 3월까지 서울에 체류하던 게일은 선교지를 답사한 후 황해도 감영(監營)이었던 해주에 정착하려고 했으나, 시내에서 가옥을 구하기 힘들어 2주간 머문 후 다시 황해도 송천(松川)으로 옮겨 3개월간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선교가 여의치 않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가 부산으로 내려갔다. 1892년 봄까지 부산에서 복음을 전하던 게일은 토론토대학 YMCA와 관계를 끊고 1891년부터 북장로교 선교회로 이적하고 부산에서 원산으로 선교 거점을 옮겨 새롭게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게일은 마펫과 함께 1891년 2월 27일부터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압록강 봉천에 이르는 1,400마일의 역사적 전도여행을 떠났다.

 

제임스 게일(James Gale)과 사무엘 마펫(Sammuel Moffet)
캐나다 출신의 또 한 명의 선교사는 후에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진 로버트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하리영, 1890)이다. 윌리엄 스캇(William Scott)이“토론토대학 캠퍼스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학생자원운동 단체 가운데 하나”라고 평했던 토론토의대 YMCA는 1890년 봄 하디가 의대를 졸업할 때 그를 한국 의료 선교사로 임명했다. 하디는 이미 2년 전 파송 받아 부산에서 활동하던 게일에 이어“최소한(最小限) 8년간의 복무보장”을 받고 1890년 9월 30일 한국에 입국했다. 본래 하디는 게일과 함께 부산을 거점으로 선교 활동을 수행할 예정이어서 1891년 4월 14일 도착하여“의료 사역을 하기에는 너무 좁고 어두운” 한국인 집 하나를 세내 사역을 시작했고, 8월에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합류했다.


1892년 북장로교 선교회와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부산에 선교사역을 착수하자 서울로 올라와 토론토 의과대학 스승이었던 에비슨(O. R. Avison)을 도와 잠시 제중원에서 함께 사역했다. 하디는 게일과 펜윅 두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이 활동하는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겨 그곳을 선교 거점으로 삼았고 YMCA와 맺은 8년간의 복무 약속이 끝난 1898년에 남감리교 선교회로 적을 옮겨 원산에서 계속 사역했다.


하디의 스승 에비슨은 토론토의대 교수로 재직하던 1892년, 언더우드가 제중원에서 사역할 의료 선교 후보생을 물색하기 위해 학교를 방문했을 때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언더우드에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고 감리교에서 장로교로 적을 옮기고 1893년 7월 13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의료 선교사로 내한했다. 가능한 선교후보생 명단을 만들고 그들의 자격유무를 논의하던 중, 에비슨의 말을 빌린다면“나는 갑자기 거룩한 소명에 압도되어 ‘왜 너는 가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이렇게 해서 그는 캐나다 출신 두 번째 의료 선교사가 되었다. 비록 하디가 원산으로 옮겨 제자와의 사역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끈끈한 사제관계는 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내내 변하지 않았다.

 

게일, 하디, 에비슨 외에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탁월한 캐나다 출신 선교사는 독립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했다가 후에 침례교의 전신 동아(대한)기독교를 창설하는 데 크게 공헌한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이다. 게일, 하디, 펜윅은 개인자격이나 학생단체의 후원을 받아 한국선교를 시작한 선교사들로 교단적인 배경을 가지고 교단의 후원을 받으며 한국에 입국한 북장로교나 남장로교, 그리고 호주의 빅토리아 선교회의 선교사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캐나다 장로교회가 교단적 차원에서 한국선교를 시작한 것은 1898년,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부부, 푸트(W. R. Foote), 맥래(D. M. Macrae)가 입국하면서부터였다. 캐나다 장로교가 교단적인 차원에서 한국선교를 개시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한국선교를 가능케 만들고 조용히 무대에서 사라진 한 알의 밀알이 있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1893년 12월 12일 독립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한 스코틀랜드계(系) 캐나다 출신 매켄지(William J. McKenzie, 金世 혹은 梅見施) 선교사였다. 맥컬리(E. A. McCully)가 매켄지의 자서전 한 알의 밀, 한국의 매켄지의 생애(A Corn of Wheat or The Life of Rev. W. J. McKenzie of Korea)에서 “내한한 선교사 중에 가장 우수한 표본”이라고 예찬했던 매켄지는 1861년 7월 15일 캐나다 노바스코샤(Nova Scotia)주 케이프 브레튼 섬(Island of Cape Breton)에서 출생했다. 그는 1888년 달하우지(Dalhausie)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핼리팍스(T. E. Halifax)에 있는 파인 힐이라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해 1891년 4월 22일에 졸업했다. 그는 한국에 입국하기 전, 대학 졸업 후 환경이 열악한 북극의 래브라도어(Labrador)에서 약 2년간 선교에 전념할 정도로 복음에 불타는 젊은이였다.

 

1888년 7월 1일 그곳 벨르(Belle) 섬에 도착한 매켄지는“마치 사도 바울과 같이 성령에 압도되어 그곳 주민들에게 여러 번 설교를 했으며 수 킬로미터를 걸어서 외딴 주민들을 찾아가곤 했다.”맥컬리는 18개월의 매켄지의 선교사역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발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을 다녔다. 그는 해링턴에서부터 케이프 찰스에 이르기까지 그곳에 있는 작은 섬들을 두루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이름을 전파했다. 그것도 한 차례가 아닌 무려 세 차례나 험한 얼음산과 눈을 무릅쓰고 그 지역들을 횡단했다. 눈으로 뒤덮여 있는 북극지역에 살고 있는 이 버림받은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선교의 불이 매켄지의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켄지는 그곳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던 중 한국에 관한 책을 읽고 한국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다.“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에 가서 직업을 가지거나 노동을 해서라도 한국사람 노릇을 하다가 필요하게 되면 교회를 깨우쳐 도움을 청하리라.” 래브라도어에서 사역하는 동안 매켄지는 그곳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모라비안들의 “금욕과 근면성”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이들과의 교제는 후에 매켄지의 한국선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의 일기에는 “오직 예수를 위해 사는 것만이 축복된 삶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선교를 결심한 매켄지는 “스튀워크교회를 사임”했다. 그런 후 핼리팍스시 근교의 작은 교회를 돌보고 의학을 공부하면서 한국선교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한국선교에 바치기로 결심하고”가지고 있던 돈 100달러를 한국선교비로 바치며,“자신의 뜻과 희망을”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캐나다 장로교회는 한국에 선교를 개시할 만한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그를 한국 선교사로 파송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부득이한 경우 미국 장로교 선교부를 통해 파송 받는 방법도 있었지만“캐나다 시민”이라는 자의식이 남달랐던 매켄지로서는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한국행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캐나다 장로교회의 후원이 없어도“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매켄지는 경제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동부지방 여러 교회를 순방하면서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고취하고 후원을 호소했다. 그 결과 “한국으로 갈 수 있는 선교비는 물론 그가 한국에서 1년여 간 생활할 수 있는 비용도 확보되었다.” 이렇게 1893년 10월 매켄지는 어느 선교부에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정든 고국 캐나다를 떠날 수 있었다. 그는 11월 13일 배에 승선하여 쓴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술하였다:


나를 태우고 갈 배의 갑판에 올랐다. 고국 땅을 떠나는 것이 후회스럽다거나 섭섭한 감정은 들지 않는다. 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충만하지 않는가! 내가 고국을 떠나는 것은 결코 희생이 아니다. 오히려 이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희생이다. 이제부터 조선은 내가 선택한 나의 육친의 나라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오래오래 그 일터에서 일하며 살게 해주소서.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심판의 날 공중에서 큰 나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의 뼈가 그곳에 묻혀 있게 해주소서!


매켄지의 오랜 한국선교의 꿈은 이렇게 해서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국 땅에 뼈를 묻고 싶다던 그의 소원은 마치 예언처럼 2년 후 그대로 실현되었다.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 매켄지(W.J. Mckenzie)가 살던 집
1893년 12월 12일 부산항에 도착한 매켄지는 제물포로, 그리고 다시 혹한(酷寒)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 날 무려 45km나 되는 제물포에서 서울까지를 7시간이나 걸어서 도착했다. 장시간“미끄러운 길을 걷느라 기진했으며, 팔다리가 얼어붙어서 거의 녹초가”되었지만, 그날 그가 일기에서 밝힌 것처럼 서울주재 선교사들의 환대는“그날의 고생을 보상해 주고도 남았다.” 매켄지는 서울에 도착해 이들과의 첫 만남에서 언더우드 및 기포드와 “즉시 친구가”되었고 그 우정은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계속해서 돈독히 유지되었다.


매켄지는 이들 외에도 아펜젤러, 에비슨, 존스, 윌리엄 홀 등 개척 선교사들과 교분을 나누며 서울에서 두어 달을 지낸 후 이듬해 2월 3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일명 소래)로 옮겼다. 이곳에서의 그의 삶은 희생과 봉사와 헌신의 삶 그대로였다. 동료 선교사들은 물론 그곳 주민들에게 너무도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건강 악화로 인해 이듬해 1895년 6월 23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국교회는 데이비스(J. Henry Davis), 헤론(Heron), 윌리엄 홀(William Hall)에 이어 또다시 가장 탁월한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캐나다 장로교회가 본격적으로 한국선교를 개시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895년 6월 캐나다 장로교 제 9회 총회의 총대이며 매켄지를 개인적으로 후원하던 핼리팍스의 로버트 머레이(Robert Murray) 목사는 소래에서의 놀라운 선교 결실을 담은 매켄지의 감동 어린 편지를 받고, 제 9회 총회에 한국선교를 헌의하여“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의 제안을 해외선교위원회 동양선교부에 이첩하여 연구 후 다음 총회에 보고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 메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소래교회를 대신하여 서경조가 매켄지에 대한 소래 교인들의 존경과 애정, 그와 같은 목사를 파송해 달라는 내용을 담은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편지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에 도착한 것이다. 윌리엄 스캇의 표현을 빌린다면“서경조의 호소로 말미암아 점화되어 한국에 대한 관심은 교회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던 것이다.” 캐나다 장로교는 어느 정도 한국선교에 대한 반대도 있었지만 더 이상 한국선교를 지체할 수 없었다. 그것은 거룩한 소명이자 시대적 요청이었다. 캐나다 장로교의 한국선교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매켄지의 죽음으로 소래 사람들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캐나다 장로교가 공식적으로 한국선교를 착수하는 전기로 삼으신 것이다. 매켄지의 동향인 맥래(Duncan M. Macrae)는“한국에서 자기의 생명을 바친 매켄지의 영웅적인 삶을 보고 너무도 큰 감동을 받았으므로 그의 뒤를 이어 한국에 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1898년 9월 7일, 맥래,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 부부, 푸트(William Rufus Foote) 부부가 제물포에 입항했다. 이들은 환영 나온 같은 캐나다인 에비슨(O. R. Avison)과 함께 한국인 여관에서 그날 밤을 지낸 후 이른 새벽 3시 서울로 가는 배에 올라 정오에 언더우드의 환영을 받으며 서울에 도착했다. 이들 모두는 함께 정동교회에 출석해 한국에서의 첫 주일 예배를 드렸고, 이날 그리어슨이 설교하고 언더우드가 통역했다. 서울 도착 2주 후 9월 22일, 이들 세 사람은 서울에서 공식적인 회합을 갖고 회장 푸트, 회계 맥래, 그리고 서기 그리어슨으로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를 조직했다.

 

이렇게 해서 1898년까지 한국에는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등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입국해 한국장로교 선교를 가속화시켰던 것이다. 한국에 입국한 각 장로교회 선교회는 1893년에 결성된 장로교공의회의 구성원이 되어 교단별로 한국선교를 추진하기보다 범장로교연합을 통해 선교의 효율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5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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