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아)기독교(浸禮敎)의 한국선교


침례교의 전신 대한(동아)기독교의 한국선교는 두 개의 역사적 기원을 가진다. 하나는 캐나다 출신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이고 다른 하나는 엘라 씽 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이다. 하지만 이 둘은 하나의 뿌리, 즉 영미 복음주의운동의 선구자 고든(Adoniram J. Gordon)이 담임하고 있던 보스톤의 클라렌돈 가(街) 침례교회(The Clarendon Street Baptist Church)에서 유래되었다.

 

근대 복음주의운동과 해외선교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나이아가라 사경회에서 은혜를 받은 펜윅은 철물 도매업을 하면서도 저녁에는“성경을 공부하고 평신도로서 기회가 닿으면 어디든 가서 복음을 전했다.”펜윅은 비록“정규학교 교육이나 신학교 교육의 배경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특별한 종교적 경험”을 통하여 해외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헤론 의사의 아내 헤론(J. W. Heron)이“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투옥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한국에 가서 선교해야겠다는 열정이 더욱 솟아올랐다. 그 후 나이아가라 사경회에서 몇 년 동안 영향력 있는 당시의 지도자들과 말씀을 공부하면서 선교사로의 소명을 확인하였고, 1887년 학생자원운동의 지도자로 북미에서 해외 선교열을 고취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 로버트 와일더(Robert P. Wilder)의 토론토 방문과 그의 강연을 통해 한국선교를 결심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선교사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확인한 펜윅은 1889년 8월 한국을 향해 출발하여 그 해 12월에 입국했다. 윌리엄 스캇(William Scott)이 지적한 것처럼 그는 토론토대학의 YMCA와 깊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의 파송을 받지 않고 대신 몇몇 YMCA 회원 기독교 사업가들에 의해 1888년 10월에 조직된 한국 연합 선교회(Corean Union Mission)의 지원을 받는 독립 선교사로 내한했다.


펜윅은 10개월 간 서울에 머물면서 언어를 배운 후 1891년 봄부터 소래로 널리 알려진 황해도 송천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펜윅은 서경조(徐景祚), 안제경(安制卿)의 협력을 받으며 선교를 하다“본국에 녀온다 고”소래를 떠났다가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기고 선교를 위해 땅과 농토도 구입했다. 펜윅이 원산으로 옮기면서 서경조도 원산으로 옮겨 잠시 펜윅의 성경 번역을 도와주다 펜윅이 성경 번역을“서투른 죠선말 대로 고집”하는 바람에 의견이 맞지 않아“론만 됨으로  수 업서 작별고 상경엿다가 도로 숑천으로 려”왔다.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과 신명균
펜윅이 원산을 택한 이유는 장감이 선교를 시작하지 않아 새로운 선교지로 전망이 밝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펜윅은 후에 매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 문화, 예절, 전통, 풍습 전반을 대단히 존중했다. 심지어“아주 냉정하게 생각할 경우 중국과 한국문화는 서양문화보다 인류의 평화와 행복에 훨씬 더 많이 기여해 온 게 사실이다”, “내 견해로는 동양이 서양문화를 갖는다는 건 아주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가“선교사는 언어, 관습, 사람에 관한 실제적인 지식을 터득한 뒤에야 비로소 전도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펜윅은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도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선교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의“자서전 겸 선교 경험”을 정리한 대한기독교(The Church of Christ in Corea)에서“외국인에 대한 복음전수는 선발된 본국인 신자들이 가장 잘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에게는 당시 서양 사람들에게 전형적으로 찾을 수 있는 제국주의적인 색채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펜윅이 침례교와 유대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1893년 안식년차 귀국해 캐나다에 머물고 있는 동안 고든(Adoniram Judson Gordon)이 목회하고 있는 보스톤의 클라렌돈 가(街) 침례교회(The Clarendon Street Baptist Church)를 방문하면서부터이다. 펜윅은 1889년 고든이 설립한 보스톤 선교사 훈련원(The Boston Missionary Training School)에서 교육도 받았다. 이것은 펜윅이 침례교단과 연계성을 맺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다년간 이 교회를 담임했던 고든의 영향을 받아 보스톤의 클라렌돈 가(街) 침례교회는 선교정신이 충만했다. 펜윅은 보스톤 선교사 훈련원에서 고든으로부터 지도를 받은 것으로 보이며, 1894년에는 한국순회선교회(The Corean Itinerant Mission)를 조직하고 한국 연합 선교회와 결별했다. 펜윅이 저명인사와의 교류, 선교사 훈련, 영적인 재충전을 통해“영적으로 큰 복”을 받은 것은 이즈음이었다. 윌리엄 스캇에 따르면 펜윅은 1894년 복음주의 지도자 고든과 피어선(Arthur T. Pierson)으로부터 안수를 받았다.


장로교 배경을 갖고 있는 펜윅이 침례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것은 물론 고든의 영향이 컸지만 장로교 출신이면서 후에 침례를 받은 피어선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목사안수 후 펜윅은 본국“친구들의 협조를 얻어 중국내지선교회의 강령과 비슷한 원칙하에 한국순회선교회(The Corean Itinerant Mission)을 조직”하고 1896년에 그 선교단체의 책임자로 한국에 돌아와 원산을 거점으로 선교 활동을 재개했다. 펜윅과 별도로 클라렌돈 가(街) 침례교회에는 한국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교회 집사이자“성공한 사업가”였던 씽(S. D. Thing)이 자기의 외동딸 엘라 씽(Ella Thing)을 기념하여 엘라 씽 선교회를 설립하고 1895년에 “침례교 신앙”을 가진 폴링(E. C. Pauling) 목사 부부, 아만다 가들린(Amanda Gardeline) 양을 파송하고 이어 스테드맨(F. W. Steadman) 목사 부부, 사디 액클(Sadie Ackles), 아마 엘머(Arma Ellmer) 양을 추가로 파송했다.


당시 한 교회, 그것도 한 개인이 만든 선교단체에서 7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들은 처음에 부산을 거점으로 선교를 착수했으나 이미 다른 선교회가 착수한 터였기 때문에 충청도 공주로 선교지를 옮겼다. 당시 충청도는 남장로교 선교구에 소속되었지만“아직도 선교사업의 소외지”였다. 공주에 정착한 이들은“도(都)마다 시마다 다니며,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선교사업에 재미를 많이 보았다.”


하지만“온순하고 인내심이 있고 친절”한 충청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침례교 선교는“재정난으로 존속이 어렵게 되었다.”폴링 부부가 먼저 미국으로 돌아갔고, 스테드맨과 그 가족들도 그동안에 이루어진“23반의 침례교인들”과 선교사역을 한 한인 관리에게 맡기고 1900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으로 돌아간 스테드맨은 미국 침례교선교연맹에 한국으로 재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고, 침례교선교연맹 위원회는 이 사건을 검토한 후 그를 한국 대신 일본 침례교 선교부에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1902년 일본에 파송 받은 스테드맨은 1902년 봄, 1903년 11월, 그리고 1905년 세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남아 있는 자들을 독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하던 1905년 스테드맨은 한 선교지(The Baptist Missionary Magazine)에서 남아 있는 공주, 강경, 칠산 사역을 원산의 펜윅이 인수했으나“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이 일터는 불가불 등한시되며 쇠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글에는 한국에 다시 와서 사역을 계승하지 못하는 아쉬움, 남아 있는 교우들에 대한 미안함이 그대로 농도 깊게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펜윅의 지도를 받는 한 한인 교역자가 200명의 신도와 1개의 자립교회를 맡고 있는 것을, 또한 한국에 약 300명의 침례교인들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침례교의 전신 대한기독교는 이렇게 해서 한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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