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머스 형제단, 안식교, 구세군의 한국선교


장로교, 감리교, 동양선교회, 대한기독교 외에도 플리머스 형제단, 러시아 정교회, 안식교,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1896년 12월 플리머스 형제단 노리마츠(乘松雅休, 1863-1921)가 입국해 수원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해 기독동신회를 조직 플리머스 형제단을 한국에 전파했다. 그는 일본의 신민화 정책의 시녀역할을 했던 조합교회 와다세와는 달리 정치적 권력과 무관한 입장에서 순수하게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 이후 정치적 불안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을 피신했던, 이른바 아관파천 후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던 1899 혹은 1900년 한로(韓露) 해빙무드를 타고 러시아 정교회 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1904년, 이단으로 평가받고 있는 안식교가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손흥조(孫興祚)와 유은현이 하와이 이민 길에 일본에 들렸다가 재림교회 전도사 구니야(國各秀)로부터 침례를 받고 이민을 포기하고 6월에 국내에 들어와 선교했다. 귀국 도중 하와이 개발공사 계몽원 임기반(林基盤)에게 전도하고, 8월 10일과 9월 13일에는 구니야와 일본주재 재림교회 선교사 필드(F. E. Field)를 초청하여 한국선교를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러다 1905년 11월 안식교 선교사 스미스(W. R. Smith) 목사가 내한 1906년 선교본부를 평남 순안에 두고 전도, 교육, 의료, 문서를 통해 전국적으로 선교를 확장해 나갔다. 타 개신교단에 비해 안식교는 처음부터 토요 안식일 준수와 재림신앙으로 인해 기성교회, 정부, 일반 사람들 모두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지 못했다.


역시 이단으로 평가받고 있는 일명 여호와의 증인, 만국성경연구회도 1912년 헐리스트 선교사가 내한 서울 계동 147번지에 사무소를 차린 후 하나님의 거문고, 러더보트 저, 박민준(朴旼濬) 역 정부(政府)라는 책자를 발행하면서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뉴욕에 본부를 둔 이들은 한국에 경성우체국 사서함 21호를 개설하여 일본 요코하마 복음인쇄소를 통해 1913년부터 월간 만인보를 발행해 국내에 반포하기 시작했다.


구세군은 1907년 10월 허가트(R. Hoggart)가 내한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본래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전통을 따라 구세군의 한국선교 역시 이 방면에서 진행되어 초기 한국선교가 직접선교와 간접선교의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렇게 해서 1884년 알렌의 입국으로 북장로교 선교회(PCUSA)가 한국선교를 시작한 이래 북감리교 선교회, 빅토리아 선교회, 대한기독교, 남장로교 선교회, 남감리교 선교회,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 플리머스 형제단, 러시아 정교회, 안식교, 동양선교회, 그리고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개시함으로써 한국교회는 다양한 교파의 선교 활동으로 풍요로워졌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한국선교와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다양한 개신교 선교회가 거의 동시에 입국하여 한국선교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한국개신교 선교는 1884년 알렌의 입국을 기점으로 1908년까지 거의 완료되었다. 둘째, 장로교는 네 개의 선교회가, 감리교는 두 개의 선교회가 거의 같은 시기에 입국함으로써 장감 선교회가 한국개신교 선교를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셋째,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은 교파를 막론하고 복음의 열정이 대단한 복음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칼빈주의 전통에 기초한 장로교회 출신 선교사들은 영미의 청교도 전통과 화란의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이들이었지만 무디를 비롯한 당시의 부흥운동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존중하면서도 구령의 열정이 대단했다. 화란 개혁파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언더우드나 구학파의 전통에 있지만 무디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파송된 맥코믹(McCormick Theo. Seminary) 출신 선교사들은 비록 본국의 교단과 출신학교가 달랐지만 성향이 유사한 점이 많았다.


1893년 남북장로교와 호주 장로교 선교부가 연합하여“장로회 정치를 쓰 미슌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한국선교를 추진함으로 한국교회에 복음주의 장로교 신앙을 저변 확대시키는 토대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898년 캐나다 선교부가 조직된 후 이 공의회는 선교사들만 아니라 한국인 총대가 참석하는“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朝鮮耶蘇敎長老會公議會)로 확대 조직되었다. 이 공의회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회와 영어를 사용하는 회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제도적인 영국 국교회와는 달리 중생과 회심의 체험을 강조한 아펜젤러, 존스, 홀, 리드 등 감리교 출신 선교사들은 전형적인 요한 웨슬리의 후예들로 구령의 열정과 복음의 열정이 대단했다. 이처럼 감리교 출신 선교사들은 본국의 신학적 분위기보다는 성경의 객관적 권위와 구원의 주관적 체험을 동시에 강조하는 전통적인 웨슬리안들이었고, 초기 한국장로교 선교사들도 신학적으로는 구학파 전통에 있으면서도 부흥운동에 대해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장감이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의 민족복음화를 위해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감을 초월하여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 특별히 북미 출신의 선교사들은 당시 영미에서 일고 있던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파송된 이들이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열정이 투철했고, 연합활동에 적극적이어서 선교지의 난관들을 극복하고 기대했던 이상의 선교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장감보다는 늦게 한국선교를 개시한 동양선교회나 대한기독교 역시 개인의 중생의 경험과 인격적 신앙고백을 존중한다는 면에서 초기 한국에 파송된 장감 개신교 선교사들과 맥을 같이했다.

 

이처럼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비록 교파와 교단은 달랐지만“복음주의 기독교”를 이상적인 모토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있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복음 전파는 기대 이상의 결실로 이어져 1897년 현재 세례교인이 777명으로 늘어났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6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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