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한(對韓) 침략정책과 민족의 수난


한국의 지리적 위치는 불행이었다. 이 나라는 라이벌 제국들 사이에 전략적으로 위치한 반도 국가였다. 수세기 동안 한국의 라이벌들은 중국과 일본이었다. 후에 러시아, 그리고 1914년 후에는 미국이 수평선에 어렴풋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Kenneth S. Latourett

1876년 강제적으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후 1886년까지 한국은 수많은 강대국들에게 문을 열어야 했고, 그와 더불어 1894년 청일전쟁, 1895년의 명성황후의 시해, 1904년 러일전쟁, 1905년의 을사조약, 그리고 1910년의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적 수난을 통과해야 했다. 오랫동안 용의주도하게 준비돼 온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작업은 청일전쟁 후 한층 더 강화되더니 러일전쟁 이후 자신들의 본색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알렌이 그의 한국의 풍물(Things Korean)에서 언급한 것처럼, 1884년 중국군에 의해 한국에서 쫓겨난 일본은 10년 후인 1894년 청일전쟁을 통해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켰고, 다시 10년 후 1904년 러일전쟁을 통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러시아마저 몰아내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완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국제 외교무대에서 미국과 영국의 협력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일본은 아예 한국의 전권을 장악하고는 한국을 내륙 진입의 발판으로, 수탈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식민지 계획은 강화도조약부터 한일합방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용의주도하게 진행되었다. 라토렛(Kenneth S. Latourett)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그로 인한 강대국의 혈투, 그리고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적인 한일합방에 이르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의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이렇게 압축 기술했다:


한국의 지리적 위치는 불행이었다. 이 나라는 라이벌 제국들 사이에 전략적으로 위치한 반도 국가였다. 수세기 동안 한국의 라이벌들은 중국과 일본이었다. 후에 러시아, 그리고 1914년 후에는 미국이 수평선에 어렴풋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에 한국은 중국에 조공을 바쳤고 그 나라 문화는 부분적으로 그 거대한 이웃 나라의 문화 그것이었다. 그 나라는 서양으로부터 격리되어 있기를 원했다. 단지 1876년에야 일본과 조약이 체결되어 외부세계에 나라를 부분적으로 개방하게 되었다. 1880년대에 서양의 압력으로 연이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과 중국은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투쟁을 벌였고 1894-1895년에는 전쟁을 치렀고, 그 전투의 일부가 한국 땅에서 행해졌다. 일본이 승리했고 그 나라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은 정점에 달했다. 1890년대에 러시아는 자신들의 권위를 확대하려고 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충돌했고 1904-1905년에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일본이 여지없이 승자가 되었다. 1910년에 일본은 공식적으로 그 나라를 합병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주변의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열국이 한국을 가운데 두고 벌인 각축전은 정치, 사회분야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었다. 라토렛이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에 있어서 번성과 쇠퇴는 부분적으로 내외적인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다고 말한 것은 결코 빗나간 평가가 아니었다.


일본이 중국을 배제하고 한국을 독점하려고 하자 러시아는 전략적으로 서양의 힘과 결탁해 한국에 영향력을 확대할 길을 모색했다. 라토렛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한국이 주변국들과 서양열국들의 침략의 온상이 되어온 것을 가리켜 “비극의 역사”라고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6 10:57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