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침략 야욕과 명성황후 시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도면밀하게 청일전쟁의 추이를 지켜보던 유럽 강대국들은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청국을 밀어내고 한반도의 종주국이 된 일본은“계획했던 흉계대로 조선의 주권을 완전히 유린하고 친청 정권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는 청일전쟁 직후인 1894년 7월부터 정치, 경제, 재정, 군사, 경찰 등에 이르는 개혁안을 조선 정부에 제시하고 전면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일제는 화폐개혁을 단행해 일본화폐를 혼용할 수 있도록 법제화시키는 한편, 봉건적인 신분제, 가족제도, 관료의 사회적 특권, 그리고 복제(服制) 등에 대한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종래의 조혼제도를 폐지시키고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가 되어야 결혼할 수 있도록 규제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했다. 일본의 이와 같은 개혁은 조선의 전통과 관습을 무시한 처사로 실제로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조선의 사회체제를 일본의 그것과 같이 변개시킴으로써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침투를 신속, 유효하게 하려는 야망”때문이었다.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서 매켄지가 말한 대로 1895년 봄 한국에서는“대단한 흥분과 동요”가 나타났다. 1895년 5월 7일 중국과 맺은 천진조약을 통해 중국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시켜 중국 세력을 조선에서 제거하는 데 성공한 일본은 조선 정부로부터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모든 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제임스 게일의 말대로 1895년 10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조선의 왕은 한 명의 죄수로 지내야 했다. 1894년 말에서 1895년 초에 걸쳐 의정부, 내무, 군무, 경무청 등 행정, 재정, 군사, 경찰 전반에 일본인 고문이 초빙되어 일본 공사의 관여 하에 일본인 고문의 심의로 일련의 제도의 개편이 추진되었다. 이리하여 1895년 10월 개편된 김홍집 내각은 일본 공사와 일본인 고문관이 요구하는 대로 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일본 정부의 사주 아래 김홍집 내각이 1895년 11월 망건(網巾) 착용을 폐지시키고 외국 복제의 착용도 무방하다고 국민에게 고시하자 일본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한층 고조되었다.

 

이런 가운데 청일전쟁 후, 권력의 핵심에서 물러난 민비 일파는 1895년 7월 6일 서울주재 러시아 공사 웨버와 결탁하고 친일 세력인 박영효, 김가진, 서광식을 추방하고 대신 친러파 세력인 이완용, 이범진을 내각에 합류시키고 일본인이 훈련한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에 분개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우(三浦梧樓)가 1895년 10월 7일“이른 새벽”일본 수비대장 구스노세 사찌꼬(楠瀨幸子)와 공모하여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 떠돌이 칼잡이들을 시켜 명성황후를 암살한 것이다. 일본의 수비대의 호위를 받고 입성한 일본인 부랑배들은 황후의 침실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침실에서 끌어내 보물을 모두 약탈하고 칼로 찌른 후 벌거벗기고는 사건을 은폐시키기 위해 시체 위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러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도록“잔인하게”태워 버렸다. 이것이 소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고종은 갑작스런 이 불행한 사건 앞에 분개하고 떨었지만 제임스 게일이 말한 대로“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때 누구하나 그를 도와준 사람이 없었다.”

 

일부 외국인의 시각 속에서는 이 사건을 대원군과 명성황후간의 갈등 구조 속에서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가 친청(親淸)의 입장을 취하는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대원군의 세력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일본은 이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일제는 처음부터 용의주도하게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것이다.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이 한국과 그 이웃(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일본 공사 미우라(三浦)의 책임 하에 이루어진 한국 왕비의 살해”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본 공사의 단독범이라고 볼 수 없으며, 처음부터 일본 정부의 깊숙한 개입 하에 용의주도하게 진행된 범행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일본 정부의 지원 아래 추진된 범행이라는 심증을 버릴 수 없었다.


미국 공사 알렌은 워싱톤에 보낸 수많은 전보와 서신을 통해“사건의 지휘자는 일본인이고 암살자들도 민간인 옷을 입은 일본인이며, [일본] 공사관과 관계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미우라(三浦)가 관여했다고 하는 증거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것”이라고 밝혔다. 황후가 일제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지자“일본인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한층 더 격화되었다.


국민의 정서나 진실 규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는 잔인한 방법으로 국모를 살해한 일, 실제의 주동자들을 일본으로 빼돌리고는 박선(朴銑), 이하회, 윤석우 등 하수인들만을 처형한 일, 게다가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자들을 형식상의 재판만 거친 후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을 기각시켜 버림으로써 국민들 사이에 일본에 대한 배일감정은 극에 달했다. 이것은 1896년 8월 19일 조선 주재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라 타카시(原敬)가 외무대신 후작 사이콘지 키이모치(西園寺 公望)에게 보낸 “한국의 현황”이라는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의 현황을 대충 말씀드린다면, 한국의 관민은 물론 한국에 머물러 있는 외국인에 이르기까지 배일의 풍조가 매우 왕성하여 우리가 하는 일에는 그 일이 어떤 일이거나 모두 반대하려고 드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일본의 최근의 내정간섭에 대한 반발과 작년 10월 8일의 왕비 살해사건에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명성황후 시해와 내정간섭으로 한국인들의 배일감정은 극에 달했다. 더구나 조선인의 오랜 전통과 미풍으로 여겨 온 머리를 자르라는 단발령(斷髮令)마저 반포되자 민중 사이에 배일감정(排日感情)은 더욱 고조되어만 갔다. 일찍이 대원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최익현은“나의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나의 두발은 자를 수 없다”며 일제의 단발령에 항거했다.


1896년 1월부터 4월까지 일제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내정간섭이 극에 달하자 전국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본과 친일정권에 무력으로 저항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이른바 충청도 보은의 문석봉, 충청도 제천의 유인석, 강원도 춘천의 이소응, 그리고 경기도 이천 여주의 박준영을 비롯한 위정척사론(爲政斥邪論)을 표방한 유학자들로 구성된 의병의 봉기였다. 그러나 재정적인 지원이나 무기의 지원 없이 의병들이 현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일본 군대에 대항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6 11:12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