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 10월 10일/찰스 피니 회심


예일대학의 역사신학 교수 시드니 알스트롬이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미국 역사상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라고 진술했던 찰스 피니가 1821년 10월 10일 극적인 회심을 체험했다. 피니의 영적 회심은 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애덤스에 있는 벤자민 라이트 판사의 법률사무소의 사제로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면서 한때 애담스 지방 치안법원에서 소송사건을 다루기도 했던 촉망되는 29살의 변호사 후보생 피니는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후 유망한 변호사의 꿈을 배설물 같이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맡겨진 소송을 변호"하는 일에 자신의 일생을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2년 후 1823년 6월 25일 피니는 세인트 로렌스 노회의 배려로 프린스톤 출신 애덤스의 조지 게일과 함께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6개월후 12월 30일 설교할 자격을 얻었으며, 이듬해 7월 1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피니에 따르면 "인간이 죄를 지으며 살기로 작정할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작정할 수 있다." 각성 운동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주권적인 역사"라는 미국 1차 각성운동의 주역 에드워즈의 견해와는 달리 피니는 "내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구하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결과 피니는 부흥사, 오벌린 제 1회중교회 담임목사, 그리고 오벌린 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전통적인 칼빈주의를 알미니안주의로 수정시켜 "알미니안 풍 칼빈주의"라는 독특한 신학을 개척하였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0.0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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