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10월 21일/캐나다 선교회의 신사참배

 

일제의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지금까지 협력하며 한국 선교를 주도했던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두 개의 감리교 선교회는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뚜렷히 대별되었다. 선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면서라도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계속 추진해야 하느냐 아니면 지금까지 지켜왔던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선교사업의 포기를 각오하고서라도 신사참배를 반대해야 하느냐라는 귀로에 서 있었다.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등 세 개의 장로교 선교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반면 두 개의 감리교 선교회와 카나다 선교회는 신사참배를 찬성하였다. 1938년 10월 21일, 양자 선택의 귀로에서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는 신앙의 순결 보다는 선교사업의 지속을 택했다. 본국에서 장로교라는 칼빈주의 입장을 포기하면서 회중교회나 감리교와 연합한 마당에 신학적 순수성 유지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카나다 선교회의 입장은 오히려 타 장로교 선교회와 한국장로교회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평양신학교 교장 라부열을 비롯 방위량, 소열도, 허대전, 노해리 등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미션스쿨과 평양신학교를 폐교하면서까지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는 일보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런 선교회의 입장은 자연히 한국 교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영변출신 박관준 장로는 안이숙 선생과 일본으로 건너가 종교법안을 심의하는 일본제국회의 석상에서 신사참배강요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고, 김선두 목사는 박형룡 박사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정계 지도자들을 만나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역설하였다. 이기선 목사는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아 신사참배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지 말 것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일으킬 것을 결의하여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끝내 순교하고 말았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0.0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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