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안중근 의거

 

10.26 사건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10월 26일은 독립운동가 안중근 열사가 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다. 1895년 16살 때 부친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한 안중근은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을 만큼 천주교에 몰두했으며, 한때 천주교를 통해 신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신부에게 불어를 배우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을 가슴 깊이 불태우던 30살의 안중근 열사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상해로 가 유지들과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받으려 했으나 실패한 후 1909년 을사조약이 체결된지 만 4년째 되던 그해 10월 26일 조선의 주권을 박탈하는 데 앞장섰던 초대 조선통감이자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6개월 후인 이듬해 2월 14일 사형언도를 받고 이토를 살해한 지 꼭 7개월째 되던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끓어 오르는 젊음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쳤다. 비록 그 해 한일합방이라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 있었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조국의 독립을 향한 안중근 열사의 꿈은 머지 않아 현실로 이루어졌고, 그의 정신은 민족의 가슴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왔다.

혹자는 그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살인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동원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의 가르침을 다른 차원에서 승화시켜야 했다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살인하지 말라"는 가르침 못지 않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는 가르침도 소중했던 것이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0.0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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