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과 민족의 수난


1894년 청일전쟁 이후부터 일본을 견제하는 데 앞장섰던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진행되자 이를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고 계속 견제의 기회를 보고 있었다. 러시아는 1896년 1월 스폐예르(Alexei de Speyer)가 부임한 후 친러파 이범진(李範晉)과 밀의하여 국왕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오는 한편, 친일정권을 타도하고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왕비의 피살 이후 일본을 경계하고 신변의 불안을 느낀 국왕은 1896년 2월 11일 새벽, 친러파의 권유에 따라 왕세자와 궁중을 탈출하여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것이 이른바“아관파천”(俄館播遷) 사건이다. 이사벨라 비숍이 말한 대로 고종은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러시아 공사의 보호를 받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일본의 독점을 우려했던 각국의 공사관도 이에 호응해 러시아 공사관을 호위하는 데 병력을 지원하였다. 러시아 공사관 내에서 김병태를 수반으로 한 친러정권이 태동되었다. 이에 앞서 친일 총리 김홍집과 대신 김병하는 광화문 앞에서 경사에게 체포되어 반일 감정에 격분한 군중과 순검(巡檢)에게 피살되었고, 대신 어윤중 역시 도피 중에 민중에 의해 살해되었다. 고종은 1년이 넘게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는 동안 러시아에 한국군 재건을 요청, 러시아 군대는 한국군을 재조직하고 3,000개의 베르단(Berdan) 총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 러시아는 한국에서 이권을 챙기기 위해 재정장관을 보내 실사를 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와 같은 정세에 힘입어 한국에서의 자신들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일본이 한국에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든지 러시아가 쟁취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러시아가 한국에 자신들의 힘을 강화시키려고 하던 1899년 혹은 1900년에 러시아 정교회 선교회가 한국에 들어왔다. 극동아시아에서의 영토 확장과 정치적인 야심을 불태우던 러시아는 오랫동안 자신들이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해 온 러시아 정교회를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시키기를 원했던 것이다. 라토렛이 지적한 것처럼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선교는 본국에서처럼“러시아의 정치적 야심과 밀접히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이것은 외국 선교회가 한국에 대한 정치적인 야욕과 결탁하여 한국선교를 시작했던 첫 사례가 되었다.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는 처음부터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헐버트가 기술한 한국역사 제 2권에 보면 1901년경에 이르러 러시아의 정치적인 통치를 받으며 러시아교회의 지부라고 소문난 한국인들이 남부지방을 여행하면서 대중들을 협박해 돈을 갈취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과 보조를 같이하여 러시아는 한국에서 러시아 정교회 선교회를 그 확장의 도구로 이용하는 한편, 한국 국경 근처 러시아 영토에 이주한 한국인들 가운데서도 러시아 선교회를 설립해 선교 영역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확장이라는 목적뿐만 아니라 그곳 이주민들을 러시아화하려는 목적으로 실시된 것이다. 러시아의 한국 통치와 한국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힘입어“1904년까지 러시아 정교회는 국내에 약 8천 내지 9천의 교인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당시 미국 일각에서는 조선에서의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로 장차 미국, 호주, 캐나다 파송 선교사들이 사역하는 한국교회와 러시아와의 갈등이 야기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러시아의 개입으로 조선에서의 기득권을 상실한 일본은“러시아의 세력에 위압당하여 러시아 공사와 러시아 군대의 호위 아래 있는 조선의 친러정권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일본이 오랫동안 확보한 경제적 영향력은 청일전쟁 이전에 청국이 차지했던 것보다도 훨씬 압도적이었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개설된 일본은행의 조선지점은 20여 개에 달했고, 조선에 있는 일본제일은행 지점은 조선의 해관세의 위탁취급, 지금은(地金銀)의 매입, 조선 정부에의 차관, 조선의 국고관리, 은행권의 발행 등 사실상 조선 정부의 중앙은행의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 상인들은 일본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조선의 상권을 점점 더 확대해 나갔고, 개항장에서 일본의 상점은 외국의 어느 나라의 숫자보다도 압도적이었다. 1896년의 한 통계에 의하면 청국의 상점 수가 인천 16개, 부산 14개, 원산 12개 합 42개인 반면 일본인들의 상점 수는 인천에 26개, 부산에 132개, 원산에 52개 합 210개나 되었다. 이사벨라 비숍이 지적한 것처럼, 남산 언덕에 하얀 목조 건물로 된 일본 공사관이 위치하고 그 아래 고급주택들과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찻집, 극장, 그리고 기타 편의시설들이 갖춰진 약 5,000명이 거주하는 일본인 군락이 형성되어 서울의 중심부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원산의 경우 중국인이 39명, 미국인이 8명, 독일과 영국인이 각각 3명, 2명인 반면 일본인은 1,299명이나 되었다. 그만큼 일본인의 세력은 전국 주요 도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미 획득한 상권을 비롯해 이와 같은 기득권을 러시아에 이양한다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매년 예산의 40~50%나 군비증강에 투자하면서 조선을 독점하고 장차 러시아에 대항할 준비를 착수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용의주도한 일본은 한편으로는 이미 얻은 조선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군비를 증강시켜 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1902년 2월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했다. 영일동맹은 일본은 한국에서, 영국은 청국에서 정치적 상업상 특수한 이해관계가 있음을 상호인정하고 침해를 받을 경우 이를 옹호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조선과 청국에서 각각 기득권을 챙기려는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 뒤 계속 증강한 군사력에 힘입어 10년이 채 되지 않아 20만의 육군과 26만 톤의 함대를 갖춘 군사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은 1903년 8월 러시아 군대가 만주에서 철수할 것과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위를 승인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헐버트가 예측한대로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할 때부터 이미 러ㆍ일간의 대립은 예고된 것이었다.


러시아가 만주에서의 철병을 거부하고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우월권을 인정하지 않자 일본은 1904년 2월, 10년 전에 청국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선전포고도 없이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해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데이빗(F. D. David)은 한 가톨릭 학자는“실제로는 러일전쟁의 전투가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잘못 진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1904년 2월 제물포에서 벌어진 두 나라의 전투로 한반도는 전쟁터로 돌변했고, 강대국의 이용물이 되고 말았다. 그리피스의 말대로 평양은 1592년, 1894년에 이어 또다시 일본군에 의해 짓밟히고 말았다. 러일전쟁 발발 직전 1903년 말 조정에 보고한 알렌의 예측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알렌은 1903년 여름 미국으로 향하는 도상에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귀한(歸韓)하는 중 일본에서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급박한 상황을 보고하면서“한 차례의 대립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했었다.

 

도히 아키오가 지적한 것처럼 1904년 2월부터 1905년 7월까지 진행된“러일전쟁은 한국과 만주 지배를 목적으로 한 일본과 러시아의 침략전쟁이었다. 더욱이 일본이 영국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전쟁은 19세기 말 이래 나타난 제국주의 전쟁의 아시아판이었다.”동경대학의 7명의 박사가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일본의 독립을 위협하고 일본의 국익을 손상시킨다며 주전론(主戰論)을 제기하자 일제는 이를 이용해 개전의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우찌무라, 고토쿠, 사카이를 비롯한 비전론(非戰論)을 주창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일본의 대부분의 교회는 청일전쟁 때와 마찬가지로“동양의 평화를 위해,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 국익을 위해”러일전쟁을 옹호했다.


강단에서 전쟁의 당위성을 설교하고, 복음동맹회는 육해군과 종군 유가족을 위한 특별기도회를 개최하고, 1904년 5월에는“일본종교인대회”를 개최하여 러일전쟁은“종교나 인종간의 싸움이 아니고 평화와 문명을 위한 전쟁이라고 선언했다.”이리하여“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은 단지 천황제 국가에 대한 기독교의 충성을 입증했던 호교적 태도로 전쟁에 임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전쟁의 의의를 인정하고 제창했다.”대부분의 일본교회는“하나님의 섭리는 전쟁을 통해 국가 발전을 촉진”시킨다며 일본의 패권주의 정책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들이 볼 때 러일전쟁은 일종의 성전(聖戰)이었다.


이리하여 조선을 두고 치열하게 벌어진 기득권 싸움으로 이미 1884년과 1894년 두 차례에 걸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조선은 이로 인해 또다시 국토와 민중이 유린당하고 말았다. 청일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바 있는 조선은 러일전쟁의 조짐이 보이자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강대국의 이권 앞에서는 그것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일본은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켜 여순항을 기습한 2일 뒤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예정대로 추진해 나갔다. 오랫동안 용의주도하게 준비해 온 일본의 막강한 전력 앞에 러시아 군대마저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1905년 1월 여순항을 공격한 일본은 3월에 봉천회전에서 승리하고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대마도 해협에서 대파함으로써 러일전쟁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점했다.


1904년 2월 26일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강요에 의해 일본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편의를 도모하고, 이를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시 수용할 수 있으며, 일본의 승인 없이는 한국 정부가 제 3국과 자유로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내용의“한일협정서”를 체결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한국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아예 자신들의 속국으로 편입시키겠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의도는 8월에 또다시 한국에 새로운 협정을 강요하면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들이 새롭게 요구한 이른바 한일협정서(제 1차 한일협약)는 고문이라는 제도를 통해 한국의 재정권, 외교권을 박탈하려는 계획 하에 강요된 것이었다.


이 협정서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일본인 재정고문 1명과 일본인이 추천하는 외교고문 1명을 초빙하여 이들 고문의 의견에 따라 재정과 외무에 관한 업무를 시행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재정과 외무에 대한 전권을 장악해 조선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재정과 정치와 외교의 실권을 상실하고 이제 그 전권이 다시 일본의 손으로 넘어간 셈이 되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6 15:30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