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한인교회의 설립과 선교사 초청운동

이수정은 온건개화파 양반학자였는데,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구출한 공으로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선진문물을 시찰하러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일본에 가서 친구 안종수로부터 소개받은 기독교 농학자 츠다센을 만나 한문 신약성경 한권을 받아 기독교와 접하게 되었고, 1883년 초부터 나가다 목사와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하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으며, 노월정교회에서 1883년 4월 29일에 녹스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
그 후 이수정은 김옥균의 인솔로 일본에 와 있던 30여명의 유학생들에게 전도하여 1883년 말에 그들 가운데 7-8명의 수세자가 생겨나,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이것이 동경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교회가 되었다.
이수정은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의 도움을 받아 선교사 초청운동을 벌였다. 이수정은 1883년 12월 13일 미국교회 앞으로 보낸 진정서에서 지난 7-80년간 위험을 무릎 쓰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행한 비밀선교와 순교를 불사한 신도들의 신앙을 지적하면서, 한국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허용하지는 않을지라도 의도적으로 찾아내어 박해하지 않을 것이라 전망한 뒤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다. 미국 장로교 선교잡지 Foreign Missionary는 1884년 9월에 이수정의 수세와 유학생들의 입교사실을 알리면서 “이 주목할 만한 사건에 자극된 우리 선교사 몇 명은 선교본부에 한국선교사를 임명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였고, 우리 선교본부는 목회선교사로 언더우드목사를 임명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수정의 성경 번역과 출판과 반포
이수정이 세례 받은 후에 그에게서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내다본 미국성서공회(ABS) 일본 지부 총무였던 루미스 선교사는 그를 찾아가 성경번역을 제안하였다. 동경 유학생들에게 전도하며 조국에 대한 선교의 길을 모색하던 이수정은 성경을 번역하자는 루미스 선교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1883년 5월부터 한문 성경에 토를 다는 현토성서부터 착수했다. 그는 1864년 상해에서 발행된 신약전서문리를 대본으로 삼아 1883년 6월 21일에 신약전체를 완성하였다. 출판은 『신약전서 마태전』부터 11월에 시작되어 1884년 8월까지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도행전 등 5권의 단편 현토 한한 성경 1천부가 출간되어 나왔다. 이 성경은 유학생과 국내 지식인들에게 반포되어 큰 환영을 받았다. 현토성경은 1887년 미국성서공회가 국내성경 반포사업을 시작한 이후 올리저의 책임 하에 제물포와 서울을 중심으로 반포되어, 1891년에는 1천 5백 권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발송되었다. 1892년에는 1천 권씩 발간된 5종이 거의 배포되었으며, 루미스는 요청이 있으면 더 인쇄할 생각이라는 편지를 미국에 보내고 있다.


이수정은 6월말부터 한글성경번역에 착수하여 마가복음부터 시작하였으나 동경외국어학교 한국어 교사직을 맡아 번역이 지연되어 1884년 4월 10일에 완역되었다. 이 때 이수정은 일본어역 마가전, 만주에서 간행된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1881년에 출판된 한불자전 등을 번역에 참고하였다. 이 성경은 1885년 2월에 요꼬하마에서 6천부가 간행되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이 성경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일부는 동경 유학생들에게 배포되었다. 이 성경은 지식층을 전도대상으로 고려했기 때문에 국한문혼용체였다. 이수정은 그 후 누가복음을 번역하였으나, 출판되지는 못하였다. 그는 매클레이의 요청으로 감리교요리문답서를 번역하여 1천부가 국내로 유입 반포되었고 (천도소원)(天道遡原) 랑자회개(浪子悔改)같은 소책자는 번역되었으나 출판되지는 못하였다.


-안양대학교 문화학과 이은선교수 소논문, “초기 한국교회의 성경 번역과 교회 부흥”중에서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0.2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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