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지역의 교회 성장과 영적 각성


청일전쟁 후 서북지역은 이전과 완연히 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의 교회들을 찾아들었고, 기독교 신앙이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1897년 스피어(Robert E. Speer)가 말한 것처럼 한국 북부지역에는 세계 그 어떤 곳도 능가할 만큼 복음이 놀랍게 확산되고 있으며“교회가 차고 넘치고 있고, 기회가 무궁했다.”그로부터 10년 후 저명한 영국의 저널리스트 매켄지(F. A. McKenzie)가 지적한 것처럼,“한국 북부지방의 선교는 세계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놀라운 성공을 거둔 사례 가운데 하나였으며”그 중에서도 서북지역은 북한 지역의 영적 각성을 주도하는 구심점 역할을 감당했다. 이미 1901년과 1902년에 접어들면서 평양, 선천, 의주를 비롯한 서북지역은 기독교 혁명시대를 맞고 있었다. 각성운동이 서북지역에 저변 확대되면서 평양은 한국교회를 이끄는 중심세력으로 발돋움했다.


서북지역의 교세가 이처럼 놀랍게 성장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남과 북에 상주하면서 양쪽 사람들을 정확히 파악한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에 따르면“북부 사람들은 남부 사람들보다 더 인간미”가 넘쳤고,“자립적 중산층”이 주를 이루었고, 또한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agner)의 말대로“북쪽 사람은 거의 모두가 한문을 배웠고 또 배우는 방법도 알고 있었으나 남쪽 사람들은 한문을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읽기 쉬운 한글도 겨우 읽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관서지방의 경우 상인이 농민보다 많고 사람들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실제로 초기 교회 지도자 이응찬이 한약재 인삼상인, 서상륜이 홍삼상인, 이수정이 인삼상인, 한석진이 인삼과 녹용 무역상인, 길선주가 한약재 상인, 이승훈이 유기 생산지로 유명한 정주 상인, 조만식도 평양 종로의 포목상 출신이었다. 이와 같은 요소들은 서북 지방의 복음화에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 일찍부터 복음이 전해졌고, 또한 초기 순회전도 역시 이 지역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언더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서북 전역에서는 만주로부터 일찍이 복음의 씨가 널리 뿌려진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권서인들이 처음 반포한 결과였던 것이다. 전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다른 곳보다 이 지역에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므로 본토인들을 사용하여 다른 지방에서 책을 퍼뜨리고 팔기도 하는 한편, 선교사들의 전면적 노력은 서북 지방에 투입하고 순회전도는 전적으로 이 방면에 집중하여야 되겠다. 아주 유망한 사업이 멀리 의주에서도 전개되고 있다. 한 때 의주에서는 그 부근 동리와 주변 시골에서 와서 모인 사람이 거의 백 명이었는데 다들 세례 받은 교인으로 받아 주기를 원했다.


이와 같이 자연적 조건과 종교적 조건이 하나로 연결된 데다 청일전쟁의 발발로 이 지역 사람들의 심성이 가난해질 대로 가난해지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가장 적합한 토양으로 다듬어진 것이다. 이와 함께 매켄지가 지적한 것처럼 그곳에는 전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는 한국인들이 있었다.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한 선교사역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북부지역 복음 전파의 토양을 제공한 것이다.


관서지방에 놀랍게 복음이 확산됨에 따라, 평양 지역 선교를 주도하던 이길함, 마포삼열, 위대모는“소관지방 분계”(所管地方分界)의 필요성을 확인하고“이길함(李吉咸)은 황해도(黃海道) 각 군(各郡)을 마포삼열(馬布三悅)은 평안북도(平安南道) 각 군(各郡)을 위대모(魏大模)는 평안남도(平安南道) 각 군(各郡)을 순회전도(巡行傳道)의 구역(區域)으로 정(定)”했다. 선교사들이 순회전도를 통해 복음 전파를 몸소 실천에 옮겼지만 그 원칙은 자전과 자립이었다. 이 같은 이상은 자연히 한국인들에게 그대로 심겨졌다.


1898년 봄에 평양 장대현교회 전신 판동교회(板洞敎會)에서 여자 신도 이신행(李信行), 신반석(申磐石), 박관선(朴寬善), 김성신(金聖信) 등의 발기(發起)로“부인전도회”(婦人傳道會)가 창설되었고, 1900년 봄 선천읍(宣川邑)교회당에서 열린 평북 사경회 때 김원유(金元瑜), 김경현(金景鉉), 안준(安濬), 양전백(梁甸伯), 정기정(鄭基定) 등 여러 명의 발기로 평북전도회를 조직함으로써 첫 남전도회가 발족되었다. 교회가 자전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면서 놀랍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1897년 연례 모임에서 그레이험 리는 주일 오후에 판동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오전에는 다섯 번의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898년에는 장대현교회 건물이 들어선 교회 터를 구입했고, 63명으로 여선교회가 조직되었으며, 순남에 전도사 한 명을 파송했다. 1900년 6월 25일 장대현교회 새 건물 기공식이 있었고, 그 해 7월 15일 장대현교회 첫 장로 김종섭이 장립식을 가졌고, 이듬해 1901년 6월 장대현교회는 1,400명이 모인 가운데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1901년 이때 이미 장대현교회는 주변에 18개의 예배 처소를 관리하고 있었고, 1902년에는 이들 18개 예배 처소 가운데 한 예배 처소의 교인 40명이 주일 오후 비가 내리는 가운데 걸어서 장대현교회까지 와서 성례식에 참석했다. 여기에 참석한 40명 가운데는 73세의 노파도 포함되었다. 1903년까지 이 장대현교회는 수요예배 참석자가 평균 1,000명에서 1,200명이나 될 만큼 성장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 해 길선주가 김종섭에 이어 두 번째로 장대현교회 조사로 임명을 받았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7.0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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