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

1894년 청일전쟁 뒤 계속 증강한 군사력에 힘입어 10년이 채 되지 않아 20만의 육군과 26만 톤의 함대를 갖춘 군사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은 1903년 8월 러시아 군대가 만주에서 철수할 것과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위를 승인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헐버트가 예측한대로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할 때부터 이미 러ㆍ일간의 대립은 예고된 것이었다.



러시아가 만주에서의 철병을 거부하고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우월권을 인정하지 않자 일본은 1904년 2월, 10년 전에 청국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선전포고도 없이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해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데이빗(F. D. David)은 한 가톨릭 학자는“실제로는 러일전쟁의 전투가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잘못 진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1904년 2월 제물포에서 벌어진 두 나라의 전투로 한반도는 전쟁터로 돌변했고, 강대국의 이용물이 되고 말았다. 그리피스의 말대로 평양은 1592년, 1894년에 이어 또다시 일본군에 의해 짓밟히고 말았다. 러일전쟁 발발 직전 1903년 말 조정에 보고한 알렌의 예측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알렌은 1903년 여름 미국으로 향하는 도상에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귀한(歸韓)하는 중 일본에서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급박한 상황을 보고하면서“한 차례의 대립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했었다.



도히 아키오가 지적한 것처럼 1904년 2월부터 1905년 7월까지 진행된“러일전쟁은 한국과 만주 지배를 목적으로 한 일본과 러시아의 침략전쟁이었다. 더욱이 일본이 영국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전쟁은 19세기 말 이래 나타난 제국주의 전쟁의 아시아판이었다.”동경대학의 7명의 박사가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일본의 독립을 위협하고 일본의 국익을 손상시킨다며 주전론(主戰論)을 제기하자 일제는 이를 이용해 개전의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우찌무라, 고토쿠, 사카이를 비롯한 비전론(非戰論)을 주창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일본의 대부분의 교회는 청일전쟁 때와 마찬가지로“동양의 평화를 위해,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 국익을 위해”러일전쟁을 옹호했다.




강단에서 전쟁의 당위성을 설교하고, 복음동맹회는 육해군과 종군 유가족을 위한 특별기도회를 개최하고, 1904년 5월에는“일본종교인대회”를 개최하여 러일전쟁은“종교나 인종간의 싸움이 아니고 평화와 문명을 위한 전쟁이라고 선언했다.”이리하여“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은 단지 천황제 국가에 대한 기독교의 충성을 입증했던 호교적 태도로 전쟁에 임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전쟁의 의의를 인정하고 제창했다.”대부분의 일본교회는“하나님의 섭리는 전쟁을 통해 국가 발전을 촉진”시킨다며 일본의 패권주의 정책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들이 볼 때 러일전쟁은 일종의 성전(聖戰)이었다.




이리하여 조선을 두고 치열하게 벌어진 기득권 싸움으로 이미 1884년과 1894년 두 차례에 걸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조선은 이로 인해 또다시 국토와 민중이 유린당하고 말았다. 청일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바 있는 조선은 러일전쟁의 조짐이 보이자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강대국의 이권 앞에서는 그것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일본의 대한 침략과 민족의 수난에서 발체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1.08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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