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틱함대 대마도해협에서 대파됨

일본은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켜 여순항을 기습한 2일 뒤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예정대로 추진해 나갔다. 오랫동안 용의주도하게 준비해 온 일본의 막강한 전력 앞에 러시아 군대마저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1905년 1월 여순항을 공격한 일본은 3월에 봉천회전에서 승리하고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대마도 해협에서 대파함으로써 러일전쟁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점했다.


1904년 2월 26일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강요에 의해 일본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편의를 도모하고, 이를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시 수용할 수 있으며, 일본의 승인 없이는 한국 정부가 제 3국과 자유로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내용의“한일협정서”를 체결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한국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아예 자신들의 속국으로 편입시키겠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의도는 8월에 또다시 한국에 새로운 협정을 강요하면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들이 새롭게 요구한 이른바 한일협정서(제 1차 한일협약)는 고문이라는 제도를 통해 한국의 재정권, 외교권을 박탈하려는 계획 하에 강요된 것이었다.


이 협정서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일본인 재정고문 1명과 일본인이 추천하는 외교고문 1명을 초빙하여 이들 고문의 의견에 따라 재정과 외무에 관한 업무를 시행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재정과 외무에 대한 전권을 장악해 조선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재정과 정치와 외교의 실권을 상실하고 이제 그 전권이 다시 일본의 손으로 넘어간 셈이 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한일협정서를 통해 한국에서의 전권을 장악한 일본은 한국 내에서의 일본의 이권을 더욱 강화시키는 한편 미국과 “가츠라-테프트”(Katsura-Taft)밀약을 체결했다. 1905년 7월 27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 육군성 장군 테프트(W. H. Taft)와 일본 수상 가츠라(桂太郞) 사이에 맺어진 소위 가츠라-테프트밀약, 즉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가로 미국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협정서에 서명했다. 그 달 일본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중재로 러일간 포츠머스(Portsmouth, New Hampshire)조약을 맺어 러시아로부터도 한국에서의 정치, 군사, 경제상의 특권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루즈벨트는 일본과 대립적 관계를 갖기보다 청나라와 러시아를 차례로 정복한 강대국 일본과 동반자 관계를 통해 이미 확보한 기득권을 유지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루즈벨트가 이에 앞서 1905년 3월 29일 한국의 입장에 서서 일본의 침략에 대해 미국이 간섭하여 막아야 한다며 일본에 편향적 시각을 갖고 있던 주한 미국 전권공사 알렌(Horace Allen)의 직위를 갑자기 해임시켰던 것도 미국의 국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국제 정세에 힘입어 일본은 이어 8월에 영국과 제 2차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보호의 권리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인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영국으로서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하고 대신 인도에서의 지배권을 인정받으려는 계산이 이면에 있었던 것이다. 강대국 미국과 영국,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조선 지배를 인정받은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러시아로부터 변동반도, 장춘, 여순 간의 철도를 양도받아 만주 침략의 기반을 닦는 한편, 러시아로부터 사할린 남반부를 할양받아 동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는 확고한 발판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일본의 대한 침략과 민족의 수난에서 발체 -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11.0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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